제목 :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구원을 보게 될 것이다
본문 : 말라기 3:1-4, 빌립보서 1:3-11, 누가복음 1:68-79, 누가복음 3:1-6
【말라기 3:1-4】
« 내가 나의 특사를 보내겠다. 그가 나의 갈 길을 닦을 것이다. 너희가 오랫동안 기다린 주가, 문득 자기의 궁궐에 이를 것이다. 너희가 오랫동안 기다린, 그 언약의 특사가 이를 것이다.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그러나 그가 이르는 날에, 누가 견디어 내며, 그가 나타나는 때에, 누가 살아 남겠느냐? 그는 금과 은을 연단하는 불과 같을 것이며, 표백하는 잿물과 같을 것이다. 그는, 은을 정련하여 깨끗하게 하는 정련공처럼, 자리를 잡고 앉아서 레위 자손을 깨끗하게 할 것이다. 금속 정련공이 은과 금을 정련하듯이, 그가 그들을 깨끗하게 하면, 그 레위 자손이 나 주에게 올바른 제물을 드리게 될 것이다. 유다와 예루살렘의 제물이 옛날처럼, 지난날처럼, 나 주를 기쁘게 할 것이다.
【누가복음 3:1-6】
디베료 황제가 왕위에 오른 지 열다섯째 해에, 곧 본디오 빌라도가 총독으로 유대를 통치하고, 헤롯이 분봉왕으로 갈릴리를 다스리고, 그의 동생 빌립이 분봉왕으로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을 다스리고, 루사니아가 분봉왕으로 아빌레네를 다스리고,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광야에 있는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내렸다. 요한은 요단 강 주변 온 지역을 찾아가서,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 그것은 이사야의 예언서에 적혀 있는 대로였다. «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예비하고, 그 길을 곧게 하여라. 모든 골짜기는 메우고, 모든 산과 언덕은 평평하게 하고, 굽은 것은 곧게 하고, 험한 길은 평탄하게 해야 할 것이니,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구원을 보게 될 것이다. »
-인사말
12월 첫 주일이자 강림절 2주일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반갑습니다. 서로에게 인사 나누시기를 바랍니다. 잘 오셨습니다. 이 시간 주일 예배에 참석하지 못하신 분들에게도 하나님의 크신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당회로 일년을 결산하고자 합니다. 돌아보면 살아온 삶의 자취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다른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와 교회의 자취에 묻어있습니다.
한편으로 올 한 해를 돌아보니 마스크와 함께 살아가는 시간이 꽤나 오래되었습니다. 최근에는 오미크론이란 변이 바이러스로 인해서 더욱 긴장하게 되고, 한편으로 우리 인간의 한계를 더욱 절감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세상의 혼돈
엊그제 어머니랑 통화를 하는데, 대화의 주제가 당연히 3차 접종에 대한 얘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2차 접종까지 별 이상반응이 없었으니까 얼른 3차 접종 하시라고 당부했는데, 어머니 입으로 나오는 이야기를 들어보니 주변 사람들이 말하는 바, 이상한 세균을 주사기에 넣어서 사람들이 많이 죽는다는 황당하면서도 어이없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가 전달되는 통로가 어르신들이나 교회의 카톡방이라는 점입니다.
이 혼돈과 불안의 시대에 신앙인들에게 꼭 필요한 것이 있다면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일 것입니다. 고린도전서의 바울의 말씀에 보면 분별하는 것도 은사입니다. 저마다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는 세상이기 때문에 더욱 분별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역사를 보면, 이런 시대에 더욱 득세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쁜 종교, 거짓 신앙입니다.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종교인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다른 이들의 삶을 거친 말로 비난하고, 이웃을 소외시키고, 영생을 보증하는 미혹하는 말로 위험에 빠뜨립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동원하고, 신자들의 열심을 이용합니다. 그렇게 발휘된 사람들의 에너지로 자기 권력을 강화하고 그 가운데서 이익을 얻어냅니다. 신자들이 그들이 주장하는 신앙의 내용으로 무엇을 얻을까요? 그들은 끊임없이 사람들의 자아, 즉 ‘에고’를 부풀게 만듭니다. 사람들 사이는 서로 혐오하게 만들고 사람들 사이의 틈을 더 벌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우리들에게 주님이 필요합니다. 교회력이 기다림의 시간으로 시작되는 이유는 지금까지 살아온 우리 생각과 삶의 관성에서 벗어나 겸손히 하나님께 길을 여쭈어 보라는 뜻일 겁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그럴 의지가 남아 있을까? 이 세상에 휩쓸려 떠내려가는 것은 아닐까? 주님을 진정으로 고대해야 합니다.
-아버지 사가랴의 시대
강림절에 우리가 반드시 우리 신앙의 모범으로 기억해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한 분이 세례자 요한입니다. 우리는 이따금 세례자 요한에 대해서는 들어왔습니다만 ‘세례자 요한’이라고 불린 사람의 탄생 이전에 배경에 대해서는 소홀합니다.
먼저 이 요한의 아버지가 누구인가요? 오늘 우리가 성시로 노래한 누가복음의 시가 바로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입니다.
사가랴, 그는 제사장 중의 한명입니다. 이 때는 ‘로마’가 지중해 연안의 모든 나라들을 거의 대부분 지배하던 시기입니다. 오늘날 스페인부터 지중해를 빙글 돌아 아프리카 모로코까지입니다. 정말로 대제국이지요. 지중해 동편에 땅인 이스라엘 유다 땅에는 이미 로마의 지배 체제가 이미 곤고해졌습니다.
유다인도 아닌데 로마에 빌붙어서 유다의 왕 역할을 보장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헤롯 대왕’입니다. 그렇지만 로마 사람이었던 총독이 직접 유다 땅에 와서 관리 감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빌라도가 대표적인 로마의 총독입니다.
이 때가 바로 세례자 요한과 또한 예수님의 시대입니다. 정치적으로 참 암울하지요?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는 ‘아비야 조’에 배속된 제사장의 일원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성전 체제는 제사장들을 24조로 나누고, 각 조가 1년에 두 차례씩 제사장의 임무를 수행하도록 했습니다. 사가랴의 아내 엘리사벳은 아론 가문의 후예로 알려져 있습니다. 역시 제사장 집안 출신입니다.
예수님의 탄생 전후의 성전 체제는 타락할 대로 타락했던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어쩔 수 없어서 혹은 습관처럼 성전 제사에 참여하기는 했지만, 성전 제사를 통해 신앙이 성장하거나 자라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게다가 제사장들을 신뢰하거나 존중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행동은 제사장이지만 마음은 온통 자신의 이익에 집중하는 제사장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부모
그러나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달랐습니다. 누가는 그 두 사람이 의로운 사람이었고, 주님의 모든 계명과 규율을 흠잡을 데 없이 잘 지켰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 경건한 가정에도 걱정이 있었습니다. 어느 누구에게나 걱정되고 염려스러운 부분이 있게 마련입니다. 늙도록 자식을 얻지 못했던 것입니다. 내외는 하나님께 자식을 허락해달라고 끊임없이 기도를 올렸습니다. 오늘날은 자식을 낳지 않고 사는 부부도 많지만 시간은 2000년 전입니다. 자식이 없는 부부는 하나님의 복을 받지 못한 대표적인 존재라고 여겨졌습니다. 신실하지만 한편으로는 쓸쓸한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준비하신 때가 되었습니다. 아비야 조가 제사장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때가 되었고, 제비뽑기를 통해 사가랴는 분향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경외심을 품고 분향하던 사가랴 앞에 천사가 나타납니다. 왜 나타났을까요? 천사는 하나님께서 이 부부의 간구를 들어주셨다는 것을 알리려고 나타났습니다. 요한을 낳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거룩한 현존 앞에 설 때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은 놀람과 두려움입니다. 우리가 구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두려움에는 두 종류의 두려움이 있습니다.
하나는 공포심입니다. 공포 영화를 보고 느끼는 감정. 무섭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을 것 같기도 합니다. 누구나 살면서 두려움에 사로잡힐 때가 있습니다. 두려움이 엄습하는 순간, 우리 마음과 감각이 마비됩니다. 모든 움직임이 일시에 정지하는 것 같은 느낌입니다. 두려움은 사람들을 움츠러들게 만들고, 무기력하게 만듭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람들일수록 방어적인 태도를 보입니다.
다른 하나는 두려움은 두려움인데, 거룩한 체험의 한 종류인 두려움입니다.
이사야도 환시 가운데 하늘 보좌를 보고는 화들짝 놀랐습니다. “재앙이 나에게 닥치겠구나! 이제 나는 죽게 되었구나!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구나.”(사6:5).
그러나 하나님 체험에서 비롯된 두려움과 놀람은 우리를 마비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전에는 보지 못하던 삶의 다른 차원을 보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현존 앞에 설 때 사람은 비로소 자기라는 한계를 깨닫고 이에 묻혀버리지 않고 벗어날 용기를 얻습니다. 신앙이란 이런 것입니다. 세상은 비정하고 냉정하고 살벌한 전쟁터가 아니라, 하나님의 신비가 온 피조 세계에 깃들어 있는 곳임을 깨닫게 됩니다. 특히나 사람이요.
사가랴는 신실한 사람이었지만 하지만 그 놀라운 메시지를 현실감 있게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있을 법하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천사는 ‘사가랴’의 반응에 상관없이 전해야 할 메시지를 담담히 전합니다. 태어날 아기는 주님께서 보시기에 큰 인물이 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누가 1:15) ‘주님께서 보시기에’라는 말과 ‘큰 인물’이라는 말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어쩌면 세상은 그를 크게 여기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평가가 어떠하든 그는 소중한 임무를 부여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사가랴와 엘리사벳 부부는 아들을 얻었습니다. 아들 요한을 얻고 사가랴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오늘 우리의 성시입니다.
-길을 닦는 사람
여러분, 분명히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주께서 보시기에 큰 사람’이라는 말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 보시기에 큰 사람이란 어떤 사람인가요? 자기 몫의 생을 한껏 살아내는 사람을 일컫는 말일 겁니다.
유대인에게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이라는 분의 글에서 읽은 내용으로 기억합니다만, 나중에 사람이 죽어서 하나님 앞에 설 때에 하나님으로부터 듣는 말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하시는 첫 번째 말씀이 무엇인가 하면, “왜 너는 너답게 살지 못했니?” 랍니다. 여러분, 이 말이 어떻게 들리십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날 때부터 부어주신 사람다움을 마음껏 발휘하지 못했니? 저는 이렇게 들립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에 따르면 주님의 오심을 맘에 품고 메시야 주님 오실 길을 닦는 사람입니다. 길을 곧게 만들고, 험한 길을 평탄하게 하는 사람입니다. 이게 그의 일입니다. 그는 메시야가 아닙니다.
우리가 복음서를 통해 보는 세례자 요한의 이미지를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모습이 있습니까? 낙타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고, 들꿀과 메뚜기를 먹으면서 긴 수염과 함께 꽂꽂한 자세, 강한 눈빛. 하지만 이런 외양 보다도 그는 1:80절에 보면 “그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 나타나는 날까지 광야에서 살았다”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는 광야의 사람입니다. 그의 일은 들판에서 주님이 오실 길을 준비하기 위하여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누가 시킨다고 될 일이 아니지요. 이 말은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과도 같은 일을 소명으로 안고 있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한편으로는 철저히 자기 한계와 소명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는 길을 닦는 사람이고, 밭을 갈아 파종을 준비하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를 가리켜 보이는 표지판입니다.
여러분, 산길을 걸어 보셨습니까? 이곳 주변에는 자그마한 산이 없어서 가끔은 아쉽습니다만 이런 산에 가보면, 산길, 나무와 숲 사이로 난 폭이 좁은 길을 걷게 됩니다. 이 길은 이미 누군가의 발길로 인해 단단해진 그런 길입니다. 그런데 가만 보면 누군가가 그곳에 길을 일부러 내려고 해서 만들어진 길이 아닙니다. 그 언덕을 오른 사람, 수많은 들짐승들 누군가가 수천, 수 만 번 지나가서 만들어진 길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의 별명이 ‘그 길을 걷는 자들’이었다는 사실이 떠오릅니다. 주님의 길을 따라 걷는 아름다운 사람들.
우리 역시 길을 걷는 사람들이고, 특히나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곳에 모이는 이유가 없습니다. 주님 오심을 기다리는 우리도 비록 어설프고 부족할지는 몰라도 이런 역할을 해야 합니다. 이런 지향을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다운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사람들 사이에 통로 같은 사람이 되십시오. 꽉 막힌 세상에 우리를 통해서 사람들이 서로 깊이 이해하게 되는 그런 통로입니다. 세상이 점점 무정하고 사나워 집니다. 가끔은 날카로운 칼 옆을 지나는 것처럼 조심스러운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실은 세상이 그런 것이 아니라 세상을 사는 사람들이 그런 것이겠지요. 하지만 길을 잃은 사람들에게 앞서 걷는 우직한 사람이 되십시오. 세상을 따뜻한 곳으로 바꾸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온 세상을 다 바꿀 수는 없다고 자책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 일을 그저 해나가는 겁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입니다. 그 어떤 것도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각자의 소명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영혼의 깊은 곳에는 그리스도와의 만남의 흔적들이 있습니다. 지금도 생생한 것입니다. 지금도 주님과의 관계는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감격으로 생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침묵>, <깊은 강>의 작가인 독실한 신자였던 작가 ‘엔도 슈사쿠’의 <사해의 호반>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 보면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심문을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흥미롭지요? 작가의 상상력이 발휘됩니다.
빌라도가 묻고 예수님이 대답합니다. “그러면 너는 저 의원들의 말대로 민중을 선동했는가?” “나는 다만, 한 사람 한 사람의 슬픈 인생을 가로질러…그들을 사랑하려고 했을 뿐이오.”
빌라도가 말합니다. “황제는 오래 지속하지 못한다고 말했는가?” “황제보다도, 예루살렘보다도, 로마보다도 오래 오래 계속되는 것이 있다고 말한 것이오.”
빌라도가 다시 묻습니다. “무엇이 로마보다 오래오래 지속되느냐?” “그 사람들의 인생에 내가 가 닿은 흔적이오. 내가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생을 가로질러 남겨놓은 흔적, 그것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말한 것이오.”
-맺음말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강림절은 주님을 기다리는 시간입니다. 손님을 맞기 위해 청소도 하고, 정리도 하는 사람들처럼 우리도 우리를 점검할 시간입니다. 주님을 맞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는가? 내 삶의 속도, 내 마음의 속도를 좀 늦출 필요가 있습니다.
욕망의 벌판 같은 세상에서 허덕이며 사는 우리들도 가끔은 광야에 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를 보기 위해서도 아니고,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나른한 정신을 후려치는 말씀과 만나기 위해서 말입니다. 우리의 못난 자아가 깨져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따뜻하게 감싸 안으시는 주님의 사랑과 더 깊이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제야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구원을 볼 것입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