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본문 : 스바냐 3:14-20, 빌립보서 4:4-7, 이사야 12:2-6, 누가복음 3:7-18
【스바냐 3:14-20】
도성 시온아, 노래하여라. 이스라엘아, 즐거이 외쳐라. 도성 예루살렘아, 마음껏 기뻐하며 즐거워하여라. 주님께서 징벌을 그치셨다. 너의 원수를 쫓아내셨다. 이스라엘의 왕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니, 네가 다시는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 날이 오면, 사람들이 예루살렘에게 말할 것이다. « 시온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힘없이 팔을 늘어뜨리고 있지 말아라. 주 너의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신다. 구원을 베푸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너를 보고서 기뻐하고 반기시고, 너를 사랑으로 새롭게 해주시고 너를 보고서 노래하며 기뻐하실 것이다. 축제 때에 즐거워하듯 하실 것이다. » « 내가 너에게서 두려움과 슬픔을 없애고, 네가 다시는 모욕을 받지 않게 하겠다. 때가 되면, 너를 억누르는 자들을 내가 모두 벌하겠다. 없어진 이들을 찾아오고, 흩어진 이들을 불러 모으겠다. 흩어져서 사는 그 모든 땅에서, 부끄러움을 겪던 나의 백성이 칭송과 영예를 받게 하겠다. 그 때가 되면, 내가 너희를 모으겠다. 그 때에 내가 너희를 고향으로 인도하겠다. 사로잡혀 갔던 이들을 너희가 보는 앞에서 데려오고, 이 땅의 모든 민족 가운데서, 너희가 영예와 칭송을 받게 하겠다. 나 주가 말한다. »
【빌립보서 4:4-7】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십시오. 다시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의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리십시오.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습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을 오직 기도와 간구로 하고, 여러분이 바라는 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아뢰십시오. 그리하면 사람의 헤아림을 뛰어 넘는 하나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
【누가복음 3:7-18】
요한은 자기에게 세례를 받으러 나오는 무리에게 말하였다. «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닥쳐올 진노를 피하라고 일러주더냐? 회개에 알맞는 열매를 맺어라. 너희는 속으로 ‘아브라함은 우리의 조상이다’ 하고 말하지 말아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실 수 있다. 도끼를 이미 나무뿌리에 갖다 놓으셨다. 그러므로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다 찍어서 불 속에 던지신다. » 무리가 요한에게 물었다. «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 속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없는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 » 세리들도 세례를 받으러 와서, 그에게 물었다. « 선생님,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 요한은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 너희에게 정해 준 것보다 더 받지 말아라. » 또 군인들도 그에게 물었다. « 그러면 우리들은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 아무에게도 협박하여 억지로 빼앗거나, 거짓 고소를 하여 빼앗거나, 속여서 빼앗지 말고, 너희의 봉급으로 만족하게 여겨라. » 백성이 그리스도를 고대하고 있던 터에, 모두들 마음속으로 요한에 대하여 생각하기를, 그가 그리스도가 아닐까 하였다. 그래서 요한은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였다. « 나는 여러분에게 물로 세례를 주지만, 나보다 더 능력 있는 분이 오실 터인데,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소. 그는 여러분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오. 그는 자기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하려고, 손에 키를 들었으니,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이오. » 요한은 그 밖에도, 많은 일을 권면하면서, 백성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였다.
-인사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주님의 평화를 전합니다. 서로 인사 나누시기 바랍니다. 반갑습니다. 지난주일에 당회를 마쳤습니다. 한 해 동안 지켜주시고 인도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여러분 모두에게 감사하다는 말씀 또한 드리고 싶습니다.
오늘은 또한 올해의 50번째 주일이기도 합니다. 한 해가 훌쩍 지났습니다. 지난 연초와 비교해 보면 난 얼마나 달라졌는가? 신앙적으로 말하면 난 얼마나 주님과 가까워졌는가? 하지만 세상 속에 살다보니 여전히 세상살이에 매몰되고 말 때가 많습니다. 고달픈 만큼 날카로워지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주님이 오셔서 얼어붙은 우리의 마음을 녹여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기다립니까?
강림절 제3주일입니다. 성경에 읽다보면 주님이 오시기를 기다렸던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런 이야기들을 책 속의 이야기만으로 둘 수는 없습니다. 이 즈음에 우리는 심각하게 우리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기다리고 있는가요? 기다린다면 왜 기다릴까요? 그리고 우리는 왜 주님을 기다려야 한다고 말하나요? 교회에서 그렇다고 하니 그런가 보다 하고 여기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나의 문제이고 우리 모두의 문제입니다.
주님을 기다린다는 것은 “주님이 내게 필요한가?”의 질문으로 바꾸어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주님이 정말로 필요한 사람만이 주님을 기다린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축제가 벌어지고 노엘 파티가 열린다고 해서 주님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비록 소설 속 이야기지만 종교 행사가 열리고 많은 사람들이 모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주님 예수님이 그 한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뒤쪽 음습한 곳에 가서는 주님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이 땅에 올 필요가 없소… 앞으로 다시는 나타나지 마시오.” 그곳을 떠나는 쓸쓸한 예수님의 뒷모습이 보이는 듯합니다. 오늘 이 시간을 통해 우리는 정말 주님을 기다리는지, 그리고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삶은 어떤 것인지 새겨볼 수 있다면 참으로 좋겠습니다.
-스바냐의 시대
구약성경 스바냐서의 말씀을 우리가 읽었습니다만 조금은 낯선 선지자입니다. 자주 읽지 않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혀 모르는 사람 취급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역시 우리와 같이 특정한 한 시대를 살아간 한 사람이기에 그렇습니다. 스바냐에게서 드러나는 가장 큰 특징은 불안과 전쟁의 공포 시대를 살아가는 백성에게 전하는 말씀입니다. 스바냐는 기원전 630년경에 유대에서 활동한 선지자입니다. 당시는 형제 나라인 북이스라엘이 앗시리아에 의해서 망한지 백년이 지난 때이고, 자신의 나라인 남 유다 역시 30년 정도만 지나면 바벨론에 의해서 망하게 될 때입니다. 이 때 스바냐는 ‘주님의 날’이 가까이 왔다고 선포했습니다.
좀 이상하지요? 실제 세상은 주님의 날은커녕 그야말로 혼돈과 불안의 시대가 펼쳐지고 있습니다. 전쟁의 불안, 폭력의 공포는 계속됩니다. 이런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특징이 무엇일까요? 이쯤되면 만성적인 신경증, 불안증에 시달릴 법한 상황입니다.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가 멸망당한 시대의 차이가 130년 정도 됩니다. 그 사이 시대에 엄습해 오는 사회적인 불안과 폭력의 정도가 엄청나게 큽니다.
-우리의 불안과 공포
먼 과거 이야기려니 해서 실감이 안나시겠지만 구체적으로 우리의 경우를 한번 들어 보자면, 실제로 전쟁을 경험하거나 전쟁에 준하는 사회적인 혼란을 경험한 우리 부모님 세대의 불안과 폭력성이 고스란히 자녀에게 전해진다는 연구 보고가 꽤나 많습니다. 자녀에게 고스란히 전쟁 세대의 불안과 폭력이 대물림 되는 것입니다. 어떤 방식으로 대물림 될까요? 양육방식으로 전달됩니다. 그중에 으뜸은 물리적인 폭력이 단연 으뜸입니다. 몽둥이나 주먹으로 자식을 때리는 행위, 겨울밤 발가벗겨서 내쫓는 경우, 제가 책에서 본 경우 중에 흥미로운 것은 ‘돈을 감추어두고 자녀에게 학비를 대주지 않는 인색한 아버지’의 경우였습니다.
그 아버지들은 내면의 불안과 접촉하지도, 인식하지도 않은 채 그것을 모두 자식에게 쏟아낸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자식들에게 무엇을 전하는지도 모르는 것이지요. 자신도 받은 게 없기 때문에 자녀를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모르고, 자녀들에게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도 모르게 살아왔습니다. 그들이 지금의 40, 50대 세대의 부모 세대라는 말입니다. 지금 여기 앉아계신 분들의 대부분의 부모 세대의 경험이기도 합니다.
스바냐의 시대가 바로 이런 불안과 공포의 시대입니다. 그런데 누구나 그렇듯이 이런 불안의 최고의 안식처는 당연히 의지할 곳, 의지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스바냐는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말합니다. 의지할 분을 말합니다. “주님께서 너희와 함께 하신다”는 말입니다. 너희의 죄가 많지만 벌을 면제해 주겠다거나 너희들의 적들을 그리고 원수를 쫓아내 주신다는 일은 나중의 일입니다. 그저 주님이 곁에 계시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여러분, 그런 사진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총알이 날아다니는 전쟁터 한 가운데서 엄마 품에 안겨서 고이 잠든 아이 사진입니다. 아이는 전쟁 중이라도 엄마 품에서 편히 잠들 수 있는 법입니다. 나를 완전히 지키는 엄마가 있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예언자 스바냐는 지금 이런 혼란의 세상, 불안증이 가중되는 세상, 전쟁의 소문과 두려움으로 가득 찬 세상 한 가운데서 주님이 ‘너의 가운데에 계시다.’는 사실을 반복하고 또 반복합니다.
-주님이 필요한 우리
우리에게 주님이 필요하다는 말을 새겨 보십시오. 그리고 나 자신을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대부분의 사람은 불안해합니다. 이유는 다양합니다. 각양각색의 원인을 진단해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근원적인 뿌리를 찾아보는 일은 해보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큰 결핍은 주님의 결핍입니다. 요한복음 4장의 수가성 우물가 여인도 결핍감의 대명사격인 여인입니다. 남편을 5명이나 둘만큼 살면서 채워지지 않는 결핍감, 마셔도 목마르고,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영혼의 갈증을 지닌 여인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이와 같은 결핍감이 없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에게 주님이 필요합니다. 이 수가성 여인의 결핍감이 나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마음속에 차오르신다면, 이제 우리는 주님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신약성경을 보십시오. 오늘 빌립보서의 짧은 구절을 우리가 읽었습니다만 이 유명한 문구가 기록된 빌립보서는 당연히 저자인 바울이 자신이 세운 교회인 빌립보 교인들을 향해 쓴 편지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기억하고 계시는지 모르겠지만 모르고 계셨다면 꼭 기억하십시오. 빌립보서는 감옥에 갇혀서 죽음을 직감하고 있는 바울의 절절한 심정을 전하는 편지입니다. 말하자면 옥중서신이라는 말입니다. 바울의 상황은 죽음을 예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사랑하는 빌립보 교회 교인들에게 “항상 기뻐하라”고 반복해서 말합니다. 바울은 죽음의 공포 때문에 정신이 나간 것인가요? 아니겠지요.
죽음의 두려움마저도 바울의 빌립보 교우들을 향한 사랑과 친절을 무너뜨릴 수 없었던 것입니다. 신앙의 힘이란 이렇게 위대합니다.
때로는 나이를 먹는다는 것이 우리 인간사의 잡다한 일들로 얼룩이 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게 그런거지. 뭐.’ 어느덧 삶의 감사와 감흥이 사라지는 것만 같을 때, 우리의 영혼에 불을 지피는 바울 사도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기쁨과 감사라는 단순하고 소박하고 순수한 신앙의 행위입니다.
-요한에게 길을 묻다
세례자 요한에게 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 세례받기를 희망하는 사람들이 찾아온 것이니 반가울만도 할텐데 이들에게 세례자 요한은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꾸짖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이들은 특권을 가지고 삽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자부심으로 가득찬 사람들로 세례자 요한은 보았습니다. 들판에 흔한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들 수 있다는 말은 이들의 특권 의식을 맹렬하게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영역을 자신들의 권리로 삼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오늘날도 사람들은 여전합니다. 각종 특권을 누리려고 합니다. 교회라고 해서 다를까요? 백인들만 들어가는 교회, 부자들만 다니는 이너 써클, 이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특권을 주장하는 집단일 뿐이지요.
이 사람들은 다행히 돌아서서 가버리지 않고, 세례자 요한에게 묻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세례자 요한의 처방은 의외로 간단하고 명료합니다.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옷과 먹을 것을 나누는 것입니다. 세상살이에 필요한 것들을 독점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독점의 세상에서 독점하지 말라는 말이 소용이 있을까요? 하지만 세례자 요한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독점하고 독식하는 세상에서 누구는 그러지 않아야 한다고 외쳐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리스도인들이어야 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세리들에게 말합니다. 세금으로 정해준 것만 받으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역설적이게도 이런 말입니다. 지금까지 세리들이란 사람들은 정해준 것 보다 더 많이 받으면서 살아왔다는 말이기도 하지요. 더 많이 챙긴 것은 제 주머니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었고 가난한 백성들을 수탈하는 주된 원인이었습니다.
군인들에게 말합니다. 협박, 고소, 고발 등 폭력을 사용하여 남의 것을 강탈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자신이 받는 것으로 만족하라는 것입니다.
의외로 간단합니다. 소박합니다. 하지만 삶은 그렇지 못합니다. 남의 것으로 배를 불리려고 머리를 쓰고 꾀를 짜내는 일을 칭찬하고 권장합니다. 우리 자신도 그러지 못해서 안달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세상이 그러니까…’라고 퉁치면서 말입니다.
마지막 절을 보십시오. 누가복음 3:18입니다. “요한은 그 밖에도, 많은 일을 권면하면서, 백성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였다.” 사람들과 세리들과 군인들에게 한 말들이 기쁜 소식입니까? 세상을 모르는 헛소리라고 여기십니까? 이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하는 요한의 말이라면 이 말씀 앞에서 우리는 기쁩니까? 기쁨이 됩니까? 여러분에게 꼭 묻고 싶었습니다.
- 주님께 가까이
강림절 3주일입니다. 강림절을 색으로 표현하면 어떤 색입니까? 앞에 보시는 ‘강단보’와 같이 보라색입니다. 강림절은 이런 것입니다. 강림절 4주간을 보내는 동안 이 보라색이 다 똑같은 보라색이 아닙니다. 한 주, 한 주 지날수록 점점 더 색이 옅어지는 것이라고 합니다. 진한 보라색이 있고 연한 보라색이 있지요? 그런데 강림절 한 주가 지날 때마다 점점 옅은 보라색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모든 색은 점점 옅어지면 옅어질수록 흰색에 가까워집니다. 그리고 흰색은 빛을 의미합니다. 교회에서 빛은 주님이십니다. 주님을 상징합니다. 이 강림절의 절기가 다 지나면 우리는 빛이신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어린 시절 학교 미술시간에 물감을 섞어서 색을 그려보신 적이 있으실 겁니다. 그런데 여러 가지 색을 몽땅 합쳐버리면 어떤 색이 되던가요? 검은색에 가까워집니다. 마치 세상사의 모든 일들을 마구잡이로 뒤섞어버리면 엉망진창으로 흑색과 같이 변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반면에 여러 색깔의 빛이 합쳐지면 어떤 색이 될까요? 검은색이 아니라 흰색이 됩니다. 우리 안에 각자가 빛을 품으면 각자 자신의 삶에서 고유한 빛깔을 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색이 점점 옅어지고, 그것이 합쳐져 빛이신 주님, 빛의 색과 가까워지기를 바랍니다. 주님 가까이 머물고, 주님처럼 생각하고 주님처럼 마음을 품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여야 합니까?” 이 질문에 우리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님은 빛이십니다. 빛으로 우리의 짙은 어둠을 거둬내는 한 주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