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하나님의 말씀이 낭독될 때
본문 : 느헤미야 8:1-3, 5-6, 8-10, 고린도전서 12:12-31a, 시편 19편, 누가복음 4:14-21
【느헤미야 8:1-3, 5-6, 8-10】
모든 백성이 한꺼번에 수문 앞 광장에 모였다. 그들은 학자 에스라에게, 주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명하신 모세의 율법책을 가지고 오라고 청하였다. 일곱째 달 초하루에 에스라 제사장은 율법책을 가지고 회중 앞에 나왔다. 거기에는, 남자든 여자든, 알아들을 만한 사람은 모두 나와 있었다. 그는 수문 앞 광장에서, 남자든 여자든,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에게 새벽부터 정오까지, 큰소리로 율법책을 읽어 주었다. 백성은 모두 율법책 읽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학자 에스라는 높은 단 위에 서 있었으므로, 백성들은 모두, 그가 책 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에스라가 책을 펴면, 백성들은 모두 일어섰다. 에스라가 위대하신 주 하나님을 찬양하면, 백성들은 모두 손을 들고 « 아멘! 아멘! » 하고 응답하고,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주님께 경배하였다.
하나님의 율법책이 낭독될 때에, 그들이 통역을 하고 뜻을 밝혀 설명하여 주었으므로, 백성은 내용을 잘 알아들을 수 있었다. 백성은 율법의 말씀을 들으면서, 모두 울었다. 그래서 총독 느헤미야와, 학자 에스라 제사장과, 백성을 가르치는 레위 사람들이, 이 날은 주 하나님의 거룩한 날이니, 슬퍼하지도 말고 울지도 말라고 모든 백성을 타일렀다. 느헤미야는 그들에게 말하였다. « 돌아들 가십시오. 살진 짐승들을 잡아 푸짐하게 차려서, 먹고 마시도록 하십시오. 아무것도 차리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먹을 몫을 보내 주십시오. 오늘은 우리 주님의 거룩한 날입니다. 주님 앞에서 기뻐하면 힘이 생기는 법이니, 슬퍼하지들 마십시오. »
-인사말
주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두 안녕하세요? 주님의 이름으로 여러분 모두에게 평화의 인사를 전합니다. 비대면 예배로 다시 2주간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얼굴을 맞대고 보면서 예배를 드리지는 못하지만 서로 인사를 나누는 방법으로 성도들의 얼굴들을 한 명씩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서로 축복하고 주님의 은혜를 간구하는 인사를 나누어 주시기를 부탁합니다.
서로에게 평화를 빌어주는 인사는 그 의미가 참 오래되었습니다. 히브리말로 “샬롬”이라는 단어라고 표현합니다. 우리 한국 사람에게 인사의 의미로 “식사 하셨냐”는 인사는 그만큼 허기를 면하기 어려운 시기, 음식을 풍성히 먹기 힘든 시대를 우리가 건너왔다는 반증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마찬가지로 평화의 의미를 갖는 유대민족의 “샬롬”이라는 인사는 그만큼 그들의 삶에서 평화를 맘껏 누리기 힘든 시대를 지내왔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인사는 “코로나 안전” 또는 “비대면 상황”의 의미를 담은 인사말을 나누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렇게 사람의 말과 언어, 사람의 문화와 습성은 꼭 그 시대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 앞에 놓인 말씀은 ‘느헤미야서’라는 구약성경의 말씀입니다. 저는 말씀을 대할 때마다 늘 느끼는 것은 그 시대, 그 상황 속의 사람들의 삶을 보다 구체적으로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구체적인 삶의 현장으로 들어가 보면, 그 시대에 하나님으로부터 받게 된 말씀의 의미를 더욱 깊이 알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우리도 우리 시대를 갖고 있지만 오늘 말씀 속 인물인 느헤미야 역시 한 시대를 살아간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로서는 알기가 쉽지 않은 막연하고 낯선 어떤 특정한 시대의 사람입니다.
-느헤미야의 시대
예전에 예레미야라는 인물에 대해 말씀 나눌 때, 제가 우리 역사 일제시대 ‘윤동주 시인’이 떠오른다고 말씀드린 것이 기억이 납니다. 윤동주 시인이나 예레미야 선지지나 똑 닮은 모습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시대의 아픔을 고스란히 자신의 삶으로 가져와 고통스러워하고, 아파하고, 고뇌하고, 하나님 앞에서 토로하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거역하지 않고 고스란히 살아낸 사람 같이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아시다시피 예레미야는 자신의 나라 ‘유다’가 멸망당하기 직전에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백성들 앞에서 두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부끄럽고 비참한 나라의 모습, 위정자들의 모습, 그리고 왕 주변에서 어슬렁거리면서 왕에게 아부나 일삼던 소위 예언자들의 모습을 보고 분노하고 분노했습니다. 그리고 슬퍼하고 슬퍼했습니다.
자기 자신에게 돌아올 피해나 사람들의 손가락질, 따돌림, 폭력이 끊임없이 이어졌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맡겨주신 말씀을 전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예레미야’였습니다. 오늘날과 같이 모두가 자신의 이득을 위해 사는 시대에서는 예레미야의 모습은 바보같아 보입니다. 자기의 이득을 챙기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처럼 보이겠지요.
예레미야가 자신의 시대의 아픔을 하나님의 시선으로 아파하고 고스란히 자신의 삶에 드러낸 것처럼 오늘 말씀 속 ‘느헤미야’라는 인물 역시 민족의 역사 한 가운데서 자신에게 주어진 시대의 소명을 받아 안은 사람이었습니다.
‘느헤미야’의 시대는 어떤 시대였을까? 느헤미야는 어떤 시대의 사람이었을까요? 마치 우리가 코로나가 창궐하는 2022년의 프랑스 파리 땅에서 한 교회를 이루고 고군분투하며 살아가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 시대와 이 시대의 교회를 후대 사람들은 아마도 ‘코로나 이후 시대의 교회’라고 기억할 것입니다.
이처럼 느헤미야라는 인물이 태어난 때는 이렇습니다. 앞서 예레미야가 나라가 망하기 직전의 사람이었다면 오늘 말씀 느헤미야는 나라가 망하고 바빌론의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 그들의 후손 중 하나가 느헤미야입니다. 그렇게 예루살렘 성전을 무너뜨린 그토록 강성하던 나라 바빌론도 영원한 나라는 아니었습니다. 50년이 채 지나지 않아 새로운 강한 나라가 북동쪽에서 밀려왔습니다. 바로 ‘페르시아’라는 나라입니다. 여러분 역시 역사책에서 들어본 이름일 것입니다. 페르시아는 그토록 강폭하고 주변 나라들을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던 바빌론이라는 거대 제국을 세계사의 지도에서 지워버렸습니다.
이 시절 이스라엘 유다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었을까요? 대부분이 페르시아에 동화되어 살아가고 있었습니다만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소명을 잊지 않고 살아가던 일말의 유다인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잊지 않았습니다. 이 말은 여호와 하나님 신앙을 잃어버리거나 잊어버리지 않은 사람들이 남아 있었다는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신앙을 잊어버리고 그저 페르시아 사람처럼 살아가고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 신앙을 품고 사는 사람들이 남아있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오늘 말씀 속 느헤미야입니다.
-느헤미야의 결단
느헤미야는 페르시아에 잘 정착하여 살아남은 사람의 후손이었습니다. 느헤미야는 페르시아의 관료 일을 맡은 사람이었는데, 왕의 술을 관리하는 직책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느헤미야는 그 일로 만족하고 살던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의 마음은 예루살렘 땅에 가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남아있는 자신의 동포들이 어떤 삶을 살아가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다행히 페르시아의 정책은 유다 사람들에게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도록 허락했기 때문에 예루살렘의 동포들과 소식을 전해들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느헤미야 1장에 보면 예루살렘에서 돌아온 ‘나의 형제 하나니’라는 이에게 예루살렘 소식을 묻는 장면이 보입니다. 이 모습은 고향 소식이 궁금해서 예루살렘의 상황을 듣고 싶은 느헤미야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닙니다. 고향 땅에서 이루어야 할 일이 있다고 느헤미야는 믿었습니다. 느헤미야가 마음에 품고 있었던 것이 무엇일까요? 한 마디로 신앙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신앙’입니다.
느헤미야의 모습을 보며 우리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타국에서 살면서 나름 정착하여 살고 있는 것이 우리의 모습일 것입니다. 이곳 삶의 현장에서, 코로나라는 비정상적인 상황 하에서 고군분투하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우리가 느헤미야처럼 시선을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 신앙을 마음에 품고 있어야 합니다. 어떤 땅에 살든지, 어떤 일을 하면서 살든지, 어떤 생활 조건에 놓이던지 우리가 마음에 깊이 품고 있어야 할 것은 신앙입니다.
-신앙이 말라버린 사람들
오랫동안 마음에 품고 있었던 느헤미야의 생각이 있었습니다. 계획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신앙의 꿈이자 희망이었습니다. 이것은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저대로 놓아두지 않으리라’ 여러분, 우리가 이미 알고 있다시피, 예루살렘 성전은 바빌론에게 폐허가 되었습니다. 그 뒤 성전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냥 방치였습니다. 내버려졌다는 말입니다. 바빌론이 침략했을 때, 예루살렘 성전의 기물들을 빼내고 불을 질렀습니다. 거의 대부분이 무너져 버리고 남은 것들도 불에 그을린 채 방치되어 놓여있었습니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소식을 이렇게 들었습니다. 느헤미야 1:3-4입니다.
“사로잡혀 오지 않고 그 지방에 남은 사람들은, 거기에서 고생이 아주 심합니다. 업신여김을 받습니다. 예루살렘 성벽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다 불에 탔습니다. 이 말을 듣고서, 나는 주저앉아서 울었다.”
느헤미야는 물론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조상들로부터 전해 배운 신앙의 터전인 예루살렘이 이런 사정이라는 사실에 정말 말 그대로 슬피 울었습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결단을 내렸습니다. 느헤미야는 페르시아의 왕에게 자신의 사정을 말합니다. “임금님께서 좋으시면, 임금님께서 소신을 좋게 여기시면, 소신의 조상이 묻혀 있는 유다의 그 성읍으로 저를 보내 주셔서, 그 성읍을 다시 세우게 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2:5)
어쩌면 목숨을 걸고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왕의 심기를 건드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떤 것도 느헤미야를 가로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왕의 허락을 얻어 이제 페르시아의 총독의 지위를 얻어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또 다른 장애물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무엇인가 하면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성전을 복원하자는 느헤미야의 계획에 사람들은 시큰둥한 반응을 보입니다. 바빌론 시대-페르시아 시대를 거치면서 이미 많은 유다 사람들은 페르시아 사회에 동화되어버렸습니다. 자신들의 조상들의 땅으로 굳이 돌아갈 이유를 찾지 못했습니다. 예루살렘이 있는 그 땅은 아주 나이가 많은 노인들이나 기억하는 머나먼 땅일 뿐이었습니다.
이해가 가십니까? 단지 거리상의 문제만이 아니었습니다. 이 후손들은 이미 모국어인 히브리어를 다 잊어버렸습니다. 이 땅 프랑스에 사는 우리가 아주 절절하게 느끼는 점이기도 합니다만 우리 자녀 세대 아이들은 이미 프랑스어로 말하는 것이 훨씬 편합니다. 한 두 세대만 지나가도 이런 상황이 생기는데, 느헤미야 시대에는 어땠을까요.
오늘 우리가 읽은 8장 8절의 말씀에 보면, 에스라 제사장이 유다 사람들을 모아놓고 율법책을 읽어줍니다. 그런데 율법책은 히브리어로 되어 있어서 그 당시 사람들이 사용하던 페르시아 말인 아람어로 통역해주고 있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자신들의 조상들의 언어를 잊었습니다. 이미 50년이 넘는 세월이 지났습니다. 문화도 언어도 신앙도 세월 속에 다 묻혀졌습니다. 하지만 느헤미야는 조상들의 땅으로 사람들을 이끌고 돌아갑니다. 이것은 신앙의 행동이지요.
-성벽을 재건하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위의 사건들, 느헤미야가 조상들의 땅으로 돌아온 후로부터 시간이 꽤나 흘렀습니다. 그야말로 숱한 고생이 고향 땅에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폐허가 된 땅을 다시 고쳐나갔습니다. 무엇보다 느헤미야서는 예루살렘 성벽을 수리한 장면이 등장합니다. 그들 앞에 놓여 있었던 어려움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오늘 우리의 모습에 비춰보면 이민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의 고통과 아픔을 아무리 한국에 있는 사람들에게 얘기한다해도 모두 다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랑 너무나 흡사하지요.
-말씀 앞에 서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을 기억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였습니다. 이제 무엇을 해야 할까요? 이 사람들은 무슨 일을 했을까요? 에스라 제사장이 등장합니다. 에스라는 느헤미야와 함께 이 시대 이 민족에게 너무나 중요한 사람입니다. 돌아온 사람들을 위해 신앙의 책임을 맡은 이 시대의 제사장이었기 때문입니다.
제사장 에스라가 사람들을 모았습니다. 제일 큰 광장 앞으로 사람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습니다. 들을 수 있는 사람들을 모두 모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율법책을 낭독합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성경을 펼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한 두 구절 읽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새벽부터 정오까지 오랜 시간을 이어가며 율법책을 낭독하였습니다. 율법책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모두 일어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했습니다. 사람들은 아멘! 아멘! 응답하면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열의를 다해 경청했습니다. 말씀을 듣는 것에는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책은 히브리어로 되어 있는데, 듣는 사람들은 히브리말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통역이 중간에서 말을 전달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언어적인 어려움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장애물이 될 수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의 가장 중요한 지점에 우리는 도착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율법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성경은 간명하게 이렇게 말합니다. 모두가 울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모두가 울었습니다. 여러분도 울어보셨겠지만 울음은 여러 가지를 담고 있지 않습니까? 울음은 슬픔만 담고 있는 것이 아니지요? 감격스러움이 가득 담긴 울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너무나 기뻐서 우는 사람도 있습니다. 오늘 말씀 앞에서 울음을 터뜨린 사람들의 마음속으로 우리가 함께 공감하며 들어가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사람들이 한 고생은 말로 다할 수 없겠지요. 이 사람들이 멀고 먼 길을 돌아왔을 때, 이미 팔레스틴 땅을 차지하고 있었던 이민족들이 있었습니다. 땅이 버려져 있었기에 이 땅을 차지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 사람들이 가만히 있었겠습니까? 돌아온 사람들은 박해와 위협을 당해야 했습니다. 페르시아 땅에 남아있었다면 ‘등따숩고 배부르게’ 걱정 덜하고 살 수 있었겠지만 이들에게 ‘신앙이 뭐라고, 하나님이 뭐라고’ 이렇게 고생을 자처했을까요?
하나님의 일을 위해 낯설고 물설은 조상들의 땅으로 돌아온다는 것은 자신들의 이득을 중심으로 놓고 살아가는 오늘 이 시대 사람들에게는 낯선 장면임에 분명합니다. 하지만 신앙은 이렇게 위대합니다. 신앙은 자신의 이익 체계를 넘어서 있는 무엇인가를 보게 합니다. 그리고 이런 신앙은 사람들을 감격시키고 눈물을 쏟아내게 만듭니다.
이 말씀 앞에 서서 하나님의 말씀이 낭독되는 동안 하나님에 대한 감격과 자신들의 설움을 위로해 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꼈을 것입니다.
말씀을 들으며 눈물 콧물 범벅이 된 사람들에게 맘껏 푸짐하게 차려 먹으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먹을 몫이 없는 사람들도 챙기라고 권고의 말씀을 남깁니다. 그리고 나서 마지막 말을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은 우리 주님의 거룩한 날입니다. 주님 앞에서 기뻐하면 힘이 생기는 법이니, 슬퍼하지들 마십시오.”(8:10)
주님 앞에서 기뻐하면 힘이 생기는 법이라고 말합니다.
-낯선 땅 위에서
교우 여러분! 말씀을 잘 들으셨는지요? 제게는 고향땅에 돌아온 유다사람들의 모습이 프랑스 땅에 오늘날 살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처럼 보였습니다. 마치 두 모습이 시대를 건너뛰어서 ‘오버랩’이 되어 겹쳐 보이는 듯합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고향 땅은 어디였을까요? 익숙하고 안락하고, 이미 삶의 터전을 마련한 페르시아 땅이었을까요? 아니면 폐허가 되어 방치된 예루살렘 성전이었을까요?
오늘 우리에게 고향 땅은 어디일까요? 부모님들이 계신 한국 땅일까요? 아니면 이미 터를 잡고 살고 있는 프랑스 땅일까요?
뭐라고 정의내리고 규정할 수는 없겠지만 분명한 것은 이것 하나입니다. 이들은 신앙을 위해서, 하나님을 예배하려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예상되는 많은 어려움과 고난이 도사리고 있었지만, 이점을 분명히 알고 있었지만 그들은 거절하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동안 그들이 삶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신앙이었습니다. 그리고 신앙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이 이렇게 간절한 일이었습니다. 오늘 우리 역시 여전히 낯선 이 땅 위에 살지만 우리의 간절함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우리는 돌아보고 살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 신앙이 우리를 지탱하고 있는지, 내 자신을 내맡기고 의지하는 일에 신앙이 있는 것인지 자신의 모습을 점검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성도들과 함께 하나님과 함께 울고, 함께 기뻐하는 눈물의 장이 부럽습니다. 우리에게 간절합니다.
성도 여러분, 이 땅 위에서 살아가는 여러분들 모두에게, 어려움의 한 시대의 강을 건너는 여러분들이 신앙의 힘을 회복하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로써 삶의 기쁨을 되찾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