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내게 사랑이 없으면
본문 : 예레미야 1:4-10, 고린도전서 13:1-13, 시편 71:1-6, 누가복음 4:21-30
【고린도전서 13:1-13】
내가 사람의 모든 말과 천사의 말을 할 수 있을지라도, 내게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징이나 요란한 꽹과리가 될 뿐입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내 모든 소유를 나누어줄지라도, 내가 자랑삼아 내 몸을 넘겨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는 아무런 이로움이 없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으며,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으며, 자기의 이익을 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으며, 원한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으며,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딥니다. 사랑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언도 사라지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사라집니다.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합니다. 그러나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인 것은 사라집니다. 내가 어릴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았습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거울로 영상을 보듯이 희미하게 보지마는,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 볼 것입니다. 지금은 내가 부분밖에 알지 못하지마는, 그 때에는 하나님께서 나를 아신 것과 같이, 내가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가운데서 으뜸은 사랑입니다.
-인사말
주안에서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모두 안녕하세요? 하나님께서 이 시대를 힘겹게 살아가는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여러분, 어떻게 지내십니까? 어떤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마무리 하십니까? 이 시간 속에서 여러분이 한 말과 여러분이 행한 행동 가운데 하나님께 봉헌하여 드릴만한 아름다운 일들로 삶을 채우고 계십니까? 아름다운 삶을 소망하시기 바랍니다.
지난 주간에 몇몇 분들과 대화하던 중에 이런 이야기가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 신앙은 한 사람 개인 뿐 아니라 인류가 겪고 있는 고난을 무시해버리거나 배척하지 않는다는 진리를 새삼 다시 느꼈습니다. 우리가 인정하건 그렇지 않건 간에 사람 사는 일에는 우리가 흔히 고난이라고 말하는 어려움이 끼어들기 마련입니다. 이 고난이 별거 아니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이 고난의 삶을 어떻게 신앙적으로 품으면서 살 수 있을까. 이것을 기도하고 고민하게 됩니다. 이 고난의 한 복판을 지나면서 우리에게 필요한 모습은 믿는 자들의 삶의 모습입니다.
-아, 고린도 교회여!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고린도전서 13장의 말씀은 참으로 아름다운 ‘사랑의 찬미가’입니다. 아름다운 사랑을 노래한 구절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내용이 아름답기도 하지만, 말씀을 구성하는 형식도 마치 사랑을 찬미하는 시인의 언어인 시어처럼 아름답게 들립니다. 그래서 아름다운 운율로 작곡이 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기도 합니다.
그런데 참 이상하지요? 참으로 역설적이지만 고린도전서 편지를 쓴 바울 사도가 당면한 고린도 교회는 그 교회를 구성하는 성도들의 현실이 너무나 사랑이 풍성하고 그 모습이 아름다워서 이런 사랑의 시가 흘러나왔을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별의별 문제가 고린도 교회 안에 도사리고 있었고 문제가 풍선이 터지듯이 연속으로 터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혼란스러우면 사람들의 반응은 대체적으로 어떨까요? 교회 나가기 싫겠죠? 오늘날 교인들이라면 교회를 옮기겠다는 소리를 가장 먼저 할 것만 같은 교회의 모습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어느 시대, 어느 교회보다도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교회였음에 분명합니다. 그런데 이런 교회에 바울 사도는 편지를 씁니다. 막연하게 아름다운 말들을 적은 편지가 아니겠지요?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그야말로 실제적인 내용을 담아 편지를 적었습니다.
우리의 신앙의 선배 바울 사도께서 ‘에베소’라는 도시에서 활발히 전도의 사명을 감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다 건너 ‘고린도 교회’의 소식을 들어보니 여러 가지 좋지 못하고, 옳지 못한 불상사가 교회 안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 자 들어보십시오.
먼저 고린도 교회의 파벌 다툼이 큰 문제였습니다. 교회 안의 교인들이 바울 파, 아볼로 파, 게바 파, 그리스도파로 갈라졌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이 파벌 다툼으로 인해 교회 안에 분쟁이 생겼다는 소식은 바울 입장에서는 참으로 가슴이 아픈 소식입니다. 교회 안에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지금까지 신앙생활 해오면서 한번쯤은 경험해 보았던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만큼 흔한 일이기도 합니다. 고린도 교회는 교회 안에 유력한 ‘누구를 따르는가’의 문제 때문에 발생한 문제입니다. 어떻게 보면 신앙의 열정이 과하여 생긴 문제처럼 보입니다.
두 번째로는 고린도교회에 이런 문제가 있었습니다. 앞서 파벌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고린도 교회가 항구도시에 위치한 교회라 선원들을 대상으로 한 유흥가가 많았습니다. 당연 음행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성도들 간에 법적인 소송의 문제도 있었습니다. 결혼, 이혼, 재혼, 독신의 문제에 대해 바울에게 질문하였습니다. 우상에게 바친 제사음식을 먹어도 되는지, 그리고 성령의 갖가지 은사 문제, 부활에 관한 질문과 교회 안에 돈을 모으는 문제들에 대해 바울에게 질문을 해왔습니다.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이 고린도전서입니다. 참으로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문제이지요. 바울 사도는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 고린도에 편지로 신앙의 답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성령의 은사
오늘 우리가 마주대하는 말씀의 단락은 교인들이 받는 성령의 은사 단락에 해당이 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사랑의 찬가’가 교인들이 받게 된 여러 가지 은사 가운데 하나라고 바울은 지적합니다.
이 시대 2000년 전 교인들은 세례를 받으면서 특별한 은혜 체험을 많이 했습니다. 세례를 받기 위해 준비하는 기간도 3년이나 되었구요, 또한 교육의 시간과 함께 오랜 준비의 시간으로 기도 체험을 많이 했습니다. 세례를 받기 위해 이렇게 준비했다는 사실이 참 감격스럽습니다. 세례는 그야말로 “내가 그리스도인이 되겠다”는 공적인 선언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하는 선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확립하기 위해 기도로 준비하는 모습이 참 귀하게 여겨집니다. 세례의식이 단순히 행사가 아닌 것이지요.
이렇게 기도로 오랜 시간 준비하는 동안 세례 예정자는 신앙에 많은 변화와 경험들을 하게 되었습니다. 특별한 은사 체험을 하게 되었는데, 은사 중에 순수하고 단순하지만 가난한 이들을 돕고 싶은 평범한 은사도 있었고, 어떤 이는 아픈 사람을 낫게 만드는 치유의 은사까지 평범하지 않은 은사도 있었습니다. 그중에서 특히나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기도하는 ‘방언의 은사’도 있었는데, 유난히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방언의 은사를 무척이나 탐닉했습니다.
오늘날은 방언의 은사에 대해 의견이 두 가지로 갈리는 것 같아 안타깝게 여겨집니다. 극단적으로 선호하는 사람들, 반대로 극단적으로 반대하는 사람들, 이렇게 두 가지 태도만 있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중요한 것은 방언의 은사는 성령의 선물입니다. 성령의 선물이기에 조심스럽게 다뤄야 하는 것도 맞습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의 말씀은 이렇습니다. 바울 사도는 방언의 은사를 인정하지만, 하지만 은사 가운데 최하급 은사로 여겼습니다. 그리고 나서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사랑의 은사를 최고의 은사로 높이 칭송합니다. 고린도 교인들과는 반대의 태도를 보였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읽은 13장의 앞 장인 12장을 개인적으로 꼭 읽어보십시오. 바울 사도는 아주 길게 성도들이 받게 되는 은사들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합니다. 그리고 12장 마지막 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더 큰 은사를 열심히 구하십시오. 이제 내가 가장 좋은 길을 여러분에게 보여드리겠습니다.”(12:31)
가장 좋은 은사, 가장 귀한 은사를 이제 본격적으로 바울 사도는 말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오늘 읽은 본문 13장 ‘사랑의 찬가’입니다.
-있을지라도
오늘 말씀을 기억해서 떠올려 보십시오. 오늘 말씀의 앞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바울의 독특한 말버릇이 있습니다. ‘있을지라도’라고 바울은 반복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사람의 모든 말과 천사의 말을 할 수 있을지라도’,
‘내가 예언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내가 내 모든 소유를 나누어줄지라도’, ‘내가 자랑삼아 내 몸을 넘겨줄지라도’,
잘 들으셨습니까? 이 모든 아름다운 말들, 이 모든 아름다운 실천의 행동들은 성령으로부터 받은 은사들입니다. <천사와 같은 말을 하는 것, 예언 하는 것, 모든 비밀의 지식을 갖는 것, 큰 믿음을 갖는 것, 소유를 나누어 주는 것, 자신을 내어주는 것> 이 모든 것은 은사 중의 은사이고, 어쩌면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이미 골고루 받아서 지니고 있는 은사인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많은, 또 이렇게 다양한 은사를 가지고 있는데, 바울 사도는 지적합니다. 한 마디 말을 덧붙입니다. “내게 사랑이 없다면!” “내게 사랑이 없다면” 아무 것도 아니고, 아무런 이로움도 없고, 그저 시끄럽게 울리는 꽹과리 같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이 선언의 말씀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은연중에, 아니 어쩌면 대놓고 자신들이 받은 은사들을 자랑했을 것입니다. 이들의 은사 자랑이 자랑으로 끝났겠습니까? 자랑은 자랑으로 끝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못한 사람에게 차별의 시선을 던지는 것으로 변질됩니다. 타인에 대한 모욕으로 끝납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이 성령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선물임에도 자신이 본래부터 지니고 있었던 특질로 여깁니다. 그러니 자신은 특별한 사람으로 보이고, 남들은 별 볼일 없는 사람으로 보이는 것이지요. 은사를 모독하는 일로 끝나게 되는 어리석은 신앙의 모습입니다.
바울은 정확하고 분명하게 보았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사 중에 가장 좋은 은사는 ‘사랑의 은사’입니다. 사랑은 마치 바다 같습니다. 세상의 모든 물이 바다로 흘러가기에 그렇습니다. 바다는 더러운 하수도 받아들입니다. 공장의 폐수도 받아들입니다. 그렇지만 모든 더럽고 추한 것들을 정화시키는 자정능력을 갖고 있는 것이 바다입니다. 사랑도 이와 같습니다. 특별하지는 않지만 가장 흔하지만 가장 중한 것입니다.
-사랑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교인들 가운데 영적인 능력이 커서 천사의 말과 같은 영적인 언어로 말할 수 있는 분도 계시겠지만 극히 소수입니다. 교인들, 우리들 가운데 예언하는 능력을 가지지 못한 사람이 거의 전부입니다. 우리 모두가 예언의 은사를 받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들 가운데 세상의 모든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늘 우리의 작고 초라한 믿음 때문에 부끄러워합니다. 곧 큰 믿음의 은사를 가진 이도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 교우들 가운데 가진 재산이 아주 많은 분도 없습니다. 자신의 몸을 내던져 봉사활동을 하고 계신 분도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하나씩 갖고 자랑하던 그 수많은 은사를 우리는 별로 갖지 못했네요.
하지만 우리 모두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가 공평하게 나누어 받은, 그것도 풍성하고 넘치게 받은 은사가 하나 있습니다. 단 한명도 예외 없이 우리들 모두가 받은 은사는 ‘사랑의 은사’입니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받았다고 어떻게 알까요?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요? 우리 중 어느 누구도 사랑을 모르는 분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랑을 이론적으로 규정하고 정의내리지 못하더라도 우리는 모두 사랑이 무엇인지 압니다. 그것도 잘 압니다. 사랑은 은사입니다. 성령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선물입니다. 사랑은 화수분 같습니다. 여러분 화수분 아시죠? 문학시간에 배우셨던 전영택 작가의 소설 <화수분>이라는 소설 들어보셨을 겁니다. 화수분이란 재물이 계속 나오는 보물단지를 말합니다. 이 단지 안에 물건을 넣어두면 계속해서 꺼내 쓸 수가 있습니다. 저는 사랑의 은사는 화수분이라고 믿습니다. 마음껏 퍼내어도 말라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쓰면 쓸수록 더욱 풍성해지는 것이 사랑이라는 은사입니다. 이것을 진짜라고 믿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 교인들에게만 주신 것은 당연히 아닙니다. 온 인류에게 똑같이 주신 것이지요.
여러분, 톨스토이라는 작가이자 사상가의 이름을 들어보셨지요? 톨스토이는 러시아의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젊은 시절 부모로부터 받은 재산을 마음껏 뿌리듯이 사용하며 살았습니다. 못되고 못난 짓, 그리고 타락한 인간의 전형적인 행동들이 그의 삶에 있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자신의 삶을 돌아보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서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참회록을 기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인류에게 마치 마지막 말을 던지듯이 이렇게 물었습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입니다.
이제 사랑의 찬가 4절부터 7절까지의 말씀을 다시 천천히 읽어보십시오. 제가 다른 번역본으로 다시 읽어드리겠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자랑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사욕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성을 내지 않습니다. 사랑은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를 보고 기뻐하지 아니하고 진리를 보고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주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냅니다.”
-사랑은 사람의 존재 방식
주안에서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 여러 가지 말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너무나 많은 말들이 있어서 오히려 헷갈리고 혼동스러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려우신 분이 아닙니다. 그저 우리 모두가 갖고 있는 사랑의 은사의 근원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사람의 뿌리는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태어났고, 우리의 삶의 원천은 사랑이며, 사람의 일생은 이 사랑을 배워나가는 과정입니다. 그저 아무런 조건 없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우리역시 그저 사랑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 명료한 사실을 감격으로 받아들이며 살 수 있다면 우리는 참으로 성공한 인생일 것입니다. 그리고 행복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