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2월 13일 주현 후 제6주 (2022년-07호)

제목 : 복 있는 사람

본문 : 예레미야 17:5-10, 고린도전서 15:12-20, 시편 1편, 누가복음 6:17-26

【예레미야 17:5-10】

« 나 주가 말한다. 나 주에게서 마음을 멀리하고, 오히려 사람을 의지하며, 사람이 힘이 되어 주려니 하고 믿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 그는 황야에서 자라는 가시덤불 같아서, 좋은 일이 오는 것을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소금기가 많아서 사람이 살 수도 없는 땅, 메마른 사막에서 살게 될 것이다. » 그러나 주님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다. 그는 물가에 심은 나무와 같아서 뿌리를 개울가로 뻗으니, 잎이 언제나 푸르므로, 무더위가 닥쳐와도 걱정이 없고, 가뭄이 심해도, 걱정이 없다. 그 나무는 언제나 열매를 맺는다. « 만물보다 더 거짓되고 아주 썩은 것은 사람의 마음이니, 누가 그 속을 알 수 있습니까? » « 각 사람의 마음을 살피고, 심장을 감찰하며, 각 사람의 행실과 행동에 따라 보상하는 이는 바로 나 주다. »

【시편 1편】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며,
오로지 주님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밤낮으로 율법을 묵상하는 사람이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함 같으니, 하는 일마다 잘 될 것이다.
그러나 악인은 그렇지 않으니, 한낱 바람에 흩날리는 쭉정이와 같다.
그러므로 악인은 심판받을 때에 몸을 가누지 못하며, 죄인은 의인의 모임에 참여하지 못한다.
그렇다. 의인의 길은 주님께서 인정하시지만, 악인의 길은 망할 것이다.

-인사말

주안에서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모두 반갑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함께 하여 주시기를, 동행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교회 공동체도 이 어려운 시기를 지나면서 교회를 유지하는 것을 넘어서 하나님의 뜻을 간절히 소망하고 이루어 나가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서로에게 인사를 전하십시오. 반갑고 따뜻한 인사를 전하십시오.

-시를 잃어버린 세상

오늘 우리는 2번이나 반복해서 시편 1편을 읽었습니다. 시편을 펼쳐 놓고 생각해 보니 시편을 가지고 설교 말씀을 나눈 적이 거의 없는 것만 같이 생소하게 느껴집니다. 뭔가 이상하기도 하고, 뭔가 한편으로는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미안한 마음이 든다는 것은 목사로서 다양한 성서의 세계를 성도들에게 제공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입니다. 한편으로 뭔가 이상하다는 말은 시편의 시란 하나님을 향한 우리 인간의 다양한 감정을 드러내는 찬양, 감탄, 후회, 탄식 등 최고의 아름다운 표현들의 집합일 터인데 많이 다루지 못했다는 아쉬움의 표현입니다.

시편 앞에 오늘 우리가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문득 이런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 시를 지어본 적이 있으신지요? 어린 시절, 학창 시절에는 억지로라도 학교에서 선생님이 숙제를 내주어서 시를 지어본 적이 있으실 겁니다. 혹시 아무도 모르게 시를 쓰고 있는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축하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는 시를 써본 경험이 있습니다. 시를 지어본 경험상, 시를 쓰기가 쉬우시던가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시를 짓기가 가장 어려운 이유는 감성이 메말라서도 아니고, 시를 지어보지 않아서도 아닙니다. 아마도 시는 여러 생각들, 여러 감정들을 응축시키는 시어로 표현되어야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우리 마음속에는 무엇인가를 표현하고 싶은 여러 감정들이 떠오르기도 하고, 교차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적절한 단어를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시를 짓기 위해서는 마음속에 떠오르는 여러 가지 복합적인 감정들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어려운 것이지요. 내 맘 속에서 감정이 일어나는데,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은 나한테 잘해 주거나 이로우면 그저 ‘기분 좋다, 아니면 반대로 기분이 별로다, 불쾌하다’ 정도로 이해하고 살아가고 맙니다.

시는 인간의 감정과 감성, 감흥을 담고 있습니다. 요즘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감정만 있고, 감흥(감탄, 찬양)이 없는 시대를 살아갑니다. 감흥이 없다는 말을 이해하실 것입니다. 감흥이 없기에 감탄도 없고, 찬양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을 찬양하기가 참 힘겨운 일, 고된 노동처럼 여겨집니다.

-성경 속 시편

성경 안에는 인간의 여러 가지 문학 장르가 있습니다. 그렇지요? 성경에는 법의 용어로 된 율법 책도 있고, 역사를 기록한 역사책도 있고, 이야기를 중심으로 다룬 글도 있고, 오늘처럼 시라는 장르에 담겨져 있기도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인간의 언어로 되어 있기에 인간이 사용하는 문학적인 표현 양식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중에서 우리는 시편 1편을 읽었습니다. 시편 1편은 당연히 시입니다. 그런데 시편에만 150편의 시가 있는데, 그 중 오늘 시편 1편은 어떤 시일까요? 시편을 연구하는 어떤 구약 학자는 시편 1편은 시편 150편의 서시라고 말합니다. 모든 책의 맨 앞에는 서문이 담겨 있습니다. 이 책 전체 내용이 어떤 내용인지 서문을 읽어보면 대충 알 수 있습니다. 시편 1편은 150편이나 되는 모든 시편을 대표하는 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시편의 내용을 총합하여 담고 있는 시라는 뜻입니다. 시편에 있는 모든 시의 대표격인 오늘 1편이 노래하는 바는 “복 있는 사람”이란? 곧 인간이 추구하는 최고의 가치가 인간의 복(행복)입니다. 복되고 행복한 마음은 인간의 감정, 인간의 감성 중의 최고로 높은 감정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기억하면서 시편 1편을 통해서 복된 사람의 모습을 발견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누구나 복을 원한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생이 복되기를 바랍니다. 불행과 불운이 계속되고, 불행한 마음이 계속 찾아오고, 행복하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단연코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누구나 복된 인생을 살고 싶습니다. 저는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행복하게 살라는 행복 회로를 주셨다고 믿습니다. 사람의 일생 전부가 행복 회로를 찾아서 길을 떠나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하지만 행복 회로의 설정이 어긋나고 빗나갑니다. 모두가 행복을 원하지만 모두가 행복을 향해 나아가지는 않습니다. 모두가 행복하고 싶습니다만 모두가 행복하게 살지는 않습니다. 모순되게 보입니다.

자, 여러분, ‘복’이라는 단어를 떠올려 보십시오. 오늘 이 안에 계신 분들 숫자만큼이나 다양한 복 이해가 있을 것입니다. 모두가 똑같이 ‘복’이라는 단어를 생각하지만 모두가 자기 중심적으로 복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자, 여러분, ‘복’이라는 말을 놓고 보면 무엇이 복인가요? 건강? 장수? 일의 성취? 자아실현? 이런 것들을 떠올릴 수 있지만 요즘 사람들에게는 ‘복은 곧 돈’이라는 생각이 먼저 듭니다. 복을 경제적인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돈을 곧 복이라고 바꿀 수는 없습니다. 물질적인 넉넉함 때문에 벌어지는 세상일들을 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넉넉한 물질이 어떤 사람에게는 큰 도움이자 복이기도 하지만 큰 재앙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사람을 복 받은 사람이라고 말할까요? 분명한 것은 이것입니다. ‘복되게 살기로 마음먹은 사람이 복된 사람’입니다. 내가 복된 사람인지 아닌지 아직 알 수 없습니다. 복되게 사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조금 더 살펴보고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지만 분명합니다. 하나님을 중심에 놓고 사는 삶이 복된 삶입니다. 우리는 아직 이 이해까지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오늘 시편이 노래하는 바의 ‘복’이기도 합니다.

-복 있는 사람 vs 다른 사람

히브리어 성경에 시편 1편의 첫 단어는 ‘아쉬레’라고 합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행복하여라”입니다. 반대로 맨 마지막 단락의 단어는 ‘토베트’, 무슨 뜻일까요? “망할 것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복 있는 사람과 악인, 죄인, 오만한 자들을 대비시키고 행복과 망함을 대비시켜서 오늘 시편은 구성되어 있습니다.
오늘 시편 1편에 복 있는 사람은 이런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않습니다.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않습니다.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함께 앉지 않습니다.> 뭔가 거창하게 “복 있는 사람은 이런 사람이다”라고 말해 놓았는데 어쩌면 “복 있는 사람”은 너무나 평범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베풀어 주신 복의 길은 너무나도 평범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한 사람들이 벌이는 꾀를 따르지 않습니다. 제가 평범하다고 말씀드렸는데, 그렇다고 해서 쉽다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악한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규정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꾀를 부리는 사람임에는 분명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다양한 방법이 있지만 오늘 말씀 속에서 꾀를 부리는 사람은 한 마디로 말하면 ‘자신의 이익만 보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앞에서 말씀 드렸습니다. 평범하지만 쉽지가 않습니다. 여러분의 이익이 눈앞에 있습니다. 잠깐 눈만 감으면 은근슬쩍 넘어가면 내게 막대한 이익이 쏟아집니다. 물론 내가 감은 눈 때문에 어떤 사람은 막대한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것은 이상적이고 추상적인 일들이 아닙니다. 우리의 현실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런 꾀를 부려서 남의 피해를 보고서라도 자신의 이익을 따라 사는 사람들을 악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는 것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않습니다. 우리 인생은 길과도 같습니다. 그래서 그 길에 올라타면 방향을 바꾸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떤 길에 올라탈 것인지, 다르게 말하면 어떤 인생을 선택할 것인지 결정해야 합니다. 아니 지금까지 결정에 결정을 거듭하며 살아왔습니다. 복된 사람이 되고 싶은 우리는 우리가 선택해 온 길을 점검할 때가 왔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함께 앉지 않습니다. 제가 다른 책들을 살펴보니까 여기서 오만한 자들은 이런 사람이라고 합니다. ‘칫칫 거리는 사람’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칫칫’ 거리는게 뭐죠? 냉소적인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의 의견이나 견해에 대해서 따뜻하고 포용적이지 않은 사람을 냉소적인 사람이라고 합니다.

자,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오늘 시편에서 말하는 악인이나 죄인이나 오만한 자는 어떤 사람인가요? 도덕적으로 아니면 흉악한 범죄에 연루된 사람인가요? 아니요. 그런 것에 해당하는 사람이 아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이런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의도적으로 피하는 사람”
이해가 가십니까? 하나님의 뜻을 아예 모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처음 들어본 사람도 아닙니다. 들어서 알지만 모르는 것이 아니지만 피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의도적으로 피합니다.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 다음 벌어진 가인의 태도가 떠오릅니다.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입니다. 피한다고 하지만 하나님을 피하여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가 다 압니다. 하지만 안다고 그렇게 살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모습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의 말을 들어보겠습니다. 예레미야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힘이 되어 주려니 믿는 사람이 악인입니다. 하나님은 안중에도 없이 눈 앞에 보이는 사람을 따라서 의지하면서 저것이 내 길이다 하고 믿는 자가 오늘 시편의 악인이자 죄인입니다. 예레미야가 말하는 이런 사람도 안타깝지만 우리 주변에서 흔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들입니다.

-복 있는 사람

복 있는 사람은 주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율법이라고 말하면 우리 기독교인들은 약간의 거부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로 대표되는 뭔가 형식적이고 것치레하는 사람들로 느껴집니다. 하지만 율법이 나쁜 것인가요? 아닙니다. 율법이 나쁜 것이 아니라 ‘율법주의’가 나쁜 것이지요. 예수께서도 “내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라 왔다” 하셨습니다.
우리는 율법이라는 말 대신에 말씀이라는 말로 바꾸어서 들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율법이 율법으로 있을 때, 율법은 곧 말씀은 삶의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무엇인가가 내 삶의 기준을 잡아주는 일은 참 소중한 일입니다. 그리고 필요한 일입니다. 기준이 없이 흔들리면서 바람에 흩날리는 겨와 같이 사는 인생은 우리 주변에 참 많습니다.
하지만 율법이 율법으로 있지 않고 율법주의로 작용할 때 내 삶을 죄어옵니다. 사람을 틀 안에 가두어 놓고 바라보는 일은 옳지 않습니다. 틀 안에 사람을 가두는 일은 혐오나 차별로 바뀌기 직전의 상태입니다. 차별과 혐오는 하나님의 뜻이 전혀 아닙니다.

-의인의 길 VS 악인의 길

시편의 말씀을 읽다 보면 오늘 우리는 갈림길 앞에 서 있는 듯한 인상이 듭니다.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는 말씀은 알고 있고 붙들고 있지만 우리는 선택의 갈림길 앞에 있습니다.
어찌 보면 인생은 늘 선택의 순간이기도 합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사르트르는 인생은 ‘B와 D사이의 C다’라는 말을 했다는데, 이는 Birth와 Death 사이의 Choice 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십시오. 묵상은 차분히 촛불 켜고 하는 형식적인 일이 아닙니다. 육식동물에게는 뼈다귀 같은 것이고, 초식동물에게는 되새김질 같은 뜻입니다.

-맺는 말

오늘 우리가 선택해 온 삶이 ‘복 있는 삶’인지 살펴보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우리 인생이 복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살아왔습니다. 한 사람도 예외가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 수많은 선택의 결과가 지금 우리의 현재입니다. 자, 여러분 행복하십니까? 아니면 불행하십니까? 이도 저도 아닙니까?
주님은 여러분이 주님을 향한 길 위에 서시기를 바라십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복된 사람이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하나의 분명한 길을 가르쳐 주십니다. 주님의 말씀을 의지하는 사람. 주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살아가기를 바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