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2월 27일 주현 후 마지막 주 (2022년-09호)

제목 : 빛 한 가운데서

본문 : 출애굽기 34:29-35, 고린도후서 3:12-4:2, 시편 99편, 누가복음 9:28-36, (37-43)

출애굽기 34:29-35】

모세가 두 증거판을 손에 들고 시내 산에서 내려왔다. 그가 산에서 내려올 때에, 그의 얼굴에서는 빛이 났다. 주님과 함께 말씀을 나누었으므로 얼굴에서 그렇게 빛이 났으나, 모세 자신은 전혀 알지 못하였다. 아론과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이 모세를 보니, 모세 얼굴의 살결이 빛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에게로 가까이 가기를 두려워하였으나, 모세가 그들을 부르자, 아론과 회중의 지도자들이 모두 그에게로 가까이 갔다. 모세가 먼저 그들에게 말을 거니, 그 때에야 모든 이스라엘 자손이 그에게로 가까이 갔다. 모세는, 주님께서 시내 산에서 자기에게 말씀하신 모든 것을 그들에게 명하였다.
모세는, 그들에게 하던 말을 다 마치자, 자기의 얼굴을 수건으로 가렸다. 그러나 모세는, 주님 앞으로 들어가서 주님과 함께 말할 때에는 수건을 벗고, 나올 때까지는 쓰지 않았다. 나와서 주님께서 명하신 것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의 얼굴에서 빛이 나는 것을 보게 되므로, 모세는 주님과 함께 이야기하러 들어갈 때까지는 다시 자기의 얼굴을 수건으로 가렸다.

【누가복음 9:28-36】

이 말씀을 하신 뒤에, 여드레쯤 되어서, 예수께서는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러 산에 올라가셨다. 예수께서 기도하고 계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변하고, 그 옷이 눈부시게 희어지고 빛이 났다. 그런데 갑자기 두 사람이 나타나 예수와 더불어 말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모세와 엘리야였다. 그들은 영광에 싸여 나타나서,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그의 떠나가심에 대하여 말하고 있었다. 베드로와 그 일행은 잠을 이기지 못해서 졸다가, 깨어나서 예수의 영광을 보고, 또 그와 함께 서 있는 그 두 사람을 보았다. 그 두 사람이 예수에게서 막 떠나가려고 할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말하였다. « 선생님, 우리가 여기서 지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우리가 초막 셋을 지어서, 하나에는 선생님을, 하나에는 모세를, 하나에는 엘리야를 모시겠습니다. » 베드로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그렇게 말하였다. 그가 이렇게 말하고 있는데, 구름이 일어나서 그 세 사람을 휩쌌다. 그들이 구름 속으로 들어가니, 제자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났다. « 이는 내 아들이요, 내가 택한 자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 그 소리가 끝났을 때에, 예수만이 거기에 계셨다. 제자들은 입을 다물고, 그들이 본 것을 얼마 동안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인사

주 안에서 사랑하는 파리중앙교회 성도 여러분, 거룩한 주일입니다. 모두 안녕하십니까?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주님 앞에 나온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면 하나님을 진정으로 예배하는 일일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가 하나님 예배하기를 소홀히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먼저 인사 나눕시다. 서로에게 친절하고 따뜻한 인사를 건네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도 들으셨겠습니다만 좋지 않은 소식이 우리가 사는 유럽 땅 동쪽에서 들려옵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습니다. 말 그대로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전쟁을 시작한 이유가 아무리 분명하다고 해도 그리스도인들은 전쟁을 반대합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고귀한 생명을 잃었습니다. 사람을 목숨을 해하는 일에 대해 경각심을 가져야 합니다. 옳지 않습니다. 어떤 고귀한 가치를 들이대더라도, 설령 하나님의 이름을 들이대더라도 전쟁은 옳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평화를 원합니다. 평화를 지향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평화이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기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 더, 우리나라 대통령을 뽑는 재외국민투표가 내일까지라고 합니다. 꼭 투표하셔서 나라의 일꾼을 잘 뽑으시고 국민주권을 실현하시기를 바랍니다. 아직 후보를 결정 못하신 분이 계시다면 하나님 뜻을 실현할 가장 가까운 사람이 누군가를 보시면 될 것입니다.

-결핍감 또 결핍감

한 주간 여러분의 삶은 어떠했습니까? 평안하셨습니까? 생업과 학업에 몰두하느라 주님 생각할 틈이 없으셨습니까? 아니면 그 반대입니까?

오늘 우리가 맞이한 주일은 주현절 마지막 주일이라고 부릅니다. 이번 주 수요일부터는 재의 수요일로 시작하는 ‘사순절 기간’입니다. 이 기간은 예수님의 40일 광야 생활에서 비롯됩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40일 동안 광야에서 금식과 기도로 하나님의 일을 준비했습니다. 예수님처럼 우리에게도 기도의 시간입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를 묵상하는 시간입니다.

우리는 모두, 단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누군가 나를 위로해 주고, 내 곁에 계실 분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자기 자신이 굳이 그럴 필요를 못 느낀다고 말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최소한 내가 이렇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돈을 벌어도, 학업에 성취가 있어도, 인간관계를 튼튼히 하고, 뭔가 행복한 일을 하더라도, 이 세상에서 그 무엇을 이루어도, “아! 뭔가 2프로가 부족한 듯한 느낌”이 듭니다. 뭔가 헛헛한 거 같기도 하고, 뭔가 공허하고, 뭔가 부족하고, 뭔가 빠져있는 듯합니다. 저는 이것을 “하나님 결핍감”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빠져 있는 삶을 우리가 살 수는 없습니다.

-산과 광야로

사람이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일은 성경의 주된 사건들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구약의 말씀에서 모세도 그렇고, 예수님과 제자들 일행도 산으로 갑니다. 성경에서 산이나 광야는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로 여겨졌습니다. 물론 회막이나 성전에서도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기도 하지만 인생의 큰 결정을 내려야 하는 이들은 산이나 광야를 찾곤 했습니다. 하나님이 산이나 광야라는 지형을 좋아하셔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산에만 계시기 때문이 아니라,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온전히 하나님 앞에 서기 위해서였습니다. 모세, 엘리야, 세례자 요한, 예수님은 모두 광야를 체험한 분들입니다.

우리는 한국 사람이기 때문에 ‘동양적 정서?’ 라고 할까요? 그런 것이 우리에게 알게 모르게 배어져 있습니다. 부정 할래야 할 수가 없지요. 동양적 정서를 가진 우리 동양 사람들에게는 ‘자연’이란 어떤 것인가 하면 원래부터 있는 것이고 변화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은 변화무쌍한데, 자연은 반대입니다. ‘자연은 영원히 그 자리에 있다’라는 생각과 정서가 동양인에게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나오는 유대 사람들 정서에서 자연은 정반대입니다. 변화가 빠르고 늘 급변할 가능성이 있는 곳입니다. 추위와 더위가 갑작스럽게 변화하고, 날씨가 맑았는데 갑자기 폭풍이 몰아치는 곳, 광야라는 자연을 바라보는 유대 사람들의 정서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하나님을 만나기를 열망하는 사람들은 이 급변하고, 변화무쌍한 광야나 산으로 갔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왜 더 척박한 곳으로 나아갔을까요? 그곳은 하나님 이외에는 의지할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곳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 말고는 다른 의지할 곳이 없는 곳.

이것은 오늘 우리가 하고 있는 신앙생활과는 너무나 큰 차이가 있습니다. 저는 부끄러운 마음이 듭니다. 무엇인가를 의지할 것을 찾느라고 애를 쓰는 것이 저와 여러분의 삶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곁에 계신데도 하나님은 맨 나중으로 미뤄놓습니다.
지난주에 유럽 지방에 어떤 목사님이 글을 보내주셨는데, 이런 이야기입니다. 차를 타고 몇 십 분을 가서 병원에 가셨다고 합니다. 병원에 들어 갈려고 보니까 사람들이 전부 마스크를 쓰고 있는 겁니다. 아차, 마스크!? 하면서 마스크가 없으니 마스크를 가지러 집으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집에 도착해서 보니 그 때 알았습니다. 자신이 이미 마스크를 쓰고 있다는 사실을요. 코로나 시대 우리의 자화상 같은 모습을 담은 에피소드겠지만 마스크를 쓰고 마스크를 찾는 것은 안타까운 우리의 신앙의 모습을 담고 있는 것 같이 느껴졌습니다. 하나님을 두고서 하나님 대용물을 찾으려고 애를 쓰는 모습입니다. 우리의 모습이지요.

성경에 사람들이 광야로 나갔다는 것은 하나님만을 의지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광야나 산으로 철야기도를 다니고, 40일 금식 기도를 안하거나 못해서 문제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하나님을 결핍하고 있구나!” 하고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에게 있어서 참 불행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결핍되어 있는데, 결핍된 지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마치 자신이 아파서 병이 깊어져 가고 있는데, 자신이 아프다는 사실을 모르는 일과 같습니다. 신앙생활 가운데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은 내가 아프다는 사실을 하나님께 고백하는 일로부터 시작합니다.

-빛이 나다

오늘 말씀 출애굽기를 보니까 모세의 얼굴에서 빛이 나고 있다고 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법인 ‘증거판’을 받으러 산에 올라가 있었습니다. 산에서 모세의 얼굴에 빛이 나타난 까닭을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 말씀을 나누었으므로 얼굴에서 그렇게 빛이 났으나, 모세 자신은 전혀 알지 못하였다.”(29절)
그러니까 모세에게 나타난 그 빛은 결국 하나님과의 만남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빛’은 어떤 것일까요? 창조의 첫날 세상을 창조하신 그 빛일까요?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춘 참 빛’이었을까요? 무엇을 의미하든 빛은 하나님과 연관됩니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에게 빛이 났다는 말을 허투루 들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다보면 어떤 빛이 섬광처럼 우리 삶 전체를 관통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이 빛을 받으면, 이 빛을 맞으면, 육체적 욕구와 사회적 관습에 따라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하나님을 등지고 살던 삶을 부끄러워하게 만드는 빛 입니다. 평생토록 한 번도 그 빛을 보지 못하고 어둠 속에서 방황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결핍의 근원을 일생 찾지 못한 채 사는 것이지요. 다른 것이 불행한 것이 아닙니다. 무엇이 왜 결핍한 지 모른 채 사는 것이지요.

-변화산 사건의 전말

복음서 말씀입니다. 어느 날 예수님은 높은 산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높은 산으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보는 앞에서 모습이 변화되셨습니다. 그의 얼굴은 해같이 빛나고, 옷은 빛과 같이 희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그 놀라운 광경에 압도당했을 겁니다. 그런데 홀연히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더니 예수님과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엉겹결에 베드로는 말합니다.
“주님,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이 좋겠습니다. 원하시면, 내가 여기에다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에는 주님을, 하나에는 모세를, 하나에는 엘리야를 모시겠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채 말을 마치기도 전에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뒤덮었습니다. 그리고 구름 속에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 이는 나의 아들, 곧 내가 택한 자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 제자들은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습니다. 예수 밖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것이 누가가 전해주는 변화산 사건의 전말입니다.

-해같이 빛나는 얼굴

다시 말씀으로 돌아가 봅니다. 예수님은 가장 가까운 제자들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가셔서 변화된 모습으로 제자들 앞에 서셨습니다. 얼굴은 해같이 빛나고, 옷은 빛과 같이 희었다고 합니다. 그런 광경을 본 제자들은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입니까? 그런데 주님의 모습이 변화되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제자들이 최면에 걸린 걸까요? 아니면 예수님이 빛의 굴절을 적절히 이용해서 당신의 이미지를 바꾸신 것일까요? 그것도 아니라면 화장이 잘 받아서일까요? 그렇진 않을 겁니다.
그러면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솔직히 말하자면 저도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이 일은 그런 일입니다. 설명할 수 없는 것은 설명하지 않고 놔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굳이 말하라면 이런 것입니다. 사람의 안에 있는 것이 밖으로 나온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가장 깊은 곳에 있던 것이 밖으로 드러난 것이라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보면, 우리 마음속에 기쁨이 있으면 그 기쁨을 감출 수가 없어서 우리 얼굴에는 기쁨의 빛이 나타납니다. 우리가 근심걱정에 사로잡혀 있으면 아무리 아니라고 부정하려고 해도 사람들이 눈치 채게 마련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보고 있었지만, 외형만 본 것이 아닐 것입니다. 내면에서 흘러나오는 빛을 본 것이 아닐까요?

그 거룩한 산에서 제자들이 빛나는 예수님의 얼굴만 본 것이 아닙니다. 두 사람을 보았습니다. 이 두 사람은 모세와 엘리야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모세와 엘리야와 대화를 나누고 계셨다고 전합니다. 대화의 내용은? 대화의 주제는 무엇인가요?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그의 죽으심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고 전합니다.

-영광의 길, 수난의 길

율법을 대표하는 모세와 예언자를 대표하는 엘리야와 예수님이 나누신 대화는 이상하고 신비하고 우리 같이 평범한 사람들은 못 알아듣는, 알아듣지 못하는 대화가 아닙니다. 그런 대화가 아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히려 이 대화의 내용은 십자가의 길, 수난의 길에 닿아 있습니다. 화려하고 빛나는 영광의 순간의 십자가의 수난과 맞닿아 있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영광의 길은 수난의 길 끝에 있습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부활의 단 열매는 좋아하지만 십자가 지기는 싫어합니다. 어떤 결과를 얻기 위해 그에 상응하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서, 좋은 성적 얻기를 원하는 학생과 다를 바 없습니다. 이를 악물고 눈물을 삼키고, 비지땀을 흘리면서 연습하지 않고 승리의 영광만을 구하는 운동선수와 다를 바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의 길로 가십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영광에 이르는 현관이 수난임을 알지 못합니다.

-맺음말

그런 예수님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를 보는 사람은 눈을 뜬 사람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길과 진리와 생명이라 고백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걸었던 그 사랑과 희생의 길을 걷기로 작정한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이런 결심은 세상사에 부딪힐 때마다 조금씩 마모되고 우리 영혼에는 어둠이 깃들곤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두려워할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새로운 삶을 갈망하면 어김없이 우리를 빛으로 인도해 주시는 주님의 사랑이 있으니 말입니다. 이 근원적인 신뢰야말로 우리 생의 뿌리입니다. 후회할 것 없는 인생을 진정으로 원한다면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활짝 여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소망을 놓지 마십시오. 그러면 우리 삶은 늘 빛 가운데 사는 삶일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인도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