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3월 13일 사순절 제2주 (2022년-11호)

제목: 거룩한 두려움

본문 : 창세기 15:1-12, 17-18, 빌립보서 3:17-4:1, 시편 27편, 누가복음 13:31-35

【창세기 15:1-12, 17-18】

이런 일들이 일어난 뒤에, 주님께서 환상 가운데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는 너의 방패다. 네가 받을 보상이 매우 크다. » 아브람이 여쭈었다. « 주 나의 하나님, 주님께서는 저에게 무엇을 주시렵니까? 저에게는 자식이 아직 없습니다. 저의 재산을 상속받을 자식이라고는 다마스쿠스 녀석 엘리에셀뿐입니다. 주님께서 저에게 자식을 주지 않으셨으니, 이제, 저의 집에 있는 이 종이 저의 상속자가 될 것입니다. » 아브람이 이렇게 말씀드리니,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 그 아이는 너의 상속자가 아니다. 너의 몸에서 태어날 아들이 너의 상속자가 될 것이다. » 주님께서 아브람을 데리고 바깥으로 나가서 말씀하셨다. « 하늘을 쳐다보아라. 네가 셀 수 있거든, 저 별들을 세어 보아라. » 그리고는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 너의 자손이 저 별처럼 많아질 것이다. » 아브람이 주님을 믿으니, 주님께서는 아브람의 그런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 나는 주다. 너에게 이 땅을 주어서 너의 소유가 되게 하려고, 너를 바빌로니아의 우르에서 이끌어 내었다. » 아브람이 여쭈었다. « 주 나의 하나님, 우리가 그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을 제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 나에게 삼 년 된 암송아지 한 마리와 삼 년 된 암염소 한 마리와 삼 년 된 숫양 한 마리와 산비둘기 한 마리와 집비둘기 한 마리씩을 가지고 오너라. » 아브람이 이 모든 희생제물을 주님께 가지고 가서, 몸통 가운데를 쪼개어, 서로 마주 보게 차려 놓았다. 그러나 비둘기는 반으로 쪼개지 않았다. 솔개들이 희생제물의 위에 내려왔으나, 아브람이 쫓아 버렸다.

해가 질 무렵에, 아브람이 깊이 잠든 가운데, 깊은 어둠과 공포가 그를 짓눌렀다. 해가 지고, 어둠이 짙게 깔리니, 연기 나는 화덕과 타오르는 횃불이 갑자기 나타나서, 쪼개 놓은 희생제물 사이로 지나갔다. 바로 그 날, 주님께서 아브람과 언약을 세우시고 말씀하셨다. « 내가 이 땅을, 이집트 강에서 큰 강 유프라테스에 이르기까지를 너의 자손에게 준다.

-인사

주안에서 사랑하는 파리중앙교회 성도 여러분,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거룩한 주님의 날을 맞아 함께 반갑고, 기쁜 인사를 나누시기를 바랍니다.

지난 한 주간에도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많은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한국에서는 대통령 선거가 있었습니다. 선거로 인해 분열과 갈등으로 치달았던 국민의 마음이 하루 속히 치유되기를 바랍니다. 정치인들도 더 이상 갈등을 일으켜서 표를 얻으려는 일을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또한 우크라이나는 여전히 전쟁의 소용돌이 한 가운데 있습니다. 전쟁으로 인한 피해가 더 이상 발생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고향을 떠난 이들의 슬픔과 고통을 위로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가만히 보면 세상에는 증오와 혐오로 상대를 겁주고서는 이득을 얻는 무리들이 있습니다. 분명히요. 악마란 뿔 달리고 삼지창을 들고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얼마든지 우리 곁에서 갈등을 조장하고 혐오를 부추기는 존재가 악마입니다. 다만 우리 주변에 그런 일들이 있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그것들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이 있는가가 문제겠지요. 이것은 신앙의 눈이 필요한 일입니다. 신앙은 우리의 생활과 별개의 문제가 아닌 것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갈등과 분열, 차별과 혐오가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한 우리는 악마의 손아귀에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사순절 기도의 절기이니만큼 기도로 이런 사실을 깨닫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람 아브람

구약성경 신명기 26:5에 보면, 모세가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너희가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게 되면, 하나님께서 땅을 주실 것이다. 하나님 주신 그 땅에서 너희가 농사를 지을 텐데, 그 농사의 첫 열매를 놓고 하나님께 드려라. 그런데 그 때, 하나님께 드릴 때, 너희들은 이렇게 말하라고 합니다. “우리 조상은 떠돌아다니면서 사는 아람사람으로서…”
잘 들으셨나요? 이스라엘 민족의 자기 고백입니다. 그런데 멋지고 훌륭한 자기 고백이라기보다는 솔직하고 진솔한 자기 고백이 있습니다. 자신들의 조상은 “떠돌이 신세”였다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말하고 있는 이 떠돌이 신세의 조상은 누구인가요?

오늘 말씀 속 아브람이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그들은 아브람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말합니다. 아브람은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란에 정착했다가, ‘떠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그곳을 떠나 가나안 지역으로 이주한 사람이었습니다.

세계사 수업시간에 배운 건데, 고대문명이 시작한 4대 문명 발상지가 있다고 하지요. 인더스 문명, 황하 문명, 이집트 문명, 그리고 메소포타미아 문명입니다.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 유역에서 시작한 문명이 바로 메소포타미아 문명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5000년도 더 넘은 문명입니다. 인류 최초의 문명 발생지입니다. 지금의 이라크 지역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이 지역에서 가장 크게 번성한 도시가 ‘우르’입니다. 오랜 세월에 걸쳐서 토사가 쌓이고 쌓여, 덮혀 버려서 잊혀졌던 ‘우르’가 실제로 어디인지는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1930년대 영국 고고학 팀이 이 도시를 발굴했다고 합니다. 성경에는 ‘갈대아 우르’, 즉 아브람의 고향 땅인 셈입니다. 아브람이라는 이 사람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고향 땅을 떠나서 하란으로 옮기고 또 하란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내려왔다고 전합니다.

-아브람에게 벌어진 일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아브람은 낯선 땅으로 떠나게 되었을까요? 결단하기 힘든 일이었을 텐데, 도대체 아브람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인류사학적인 측면에서 보면, 이집트 문명과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만나는 지점이 가나안 땅이기에 아마도 문명과 문명의 교류가 활발하게 진행되면서이지 않을까 그렇게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분명한 이유가 하나 있습니다. 아브람이 고향땅을 떠나게 된 이유를 분명하게 성경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창 12장 1절입니다. “너는, 네가 살고 있는 땅과, 네가 난 곳과,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내가 보여 주는 땅으로 가거라.”
“내가 보여주는 땅으로 가거라.” 이 말씀 하나 듣고 떠났다고 하니, 이것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하나님이 떠나라 하시면 떠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게 하나님이 한 말씀이라고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요? 믿음 없는 우리의 고민이겠지만 한편으로 우리에게도 그런 결단이 있어왔습니다. 삶의 터전을 잡기 위해서, 하나님의 인도하셨다는 믿음으로 이곳에까지 우리가 이르렀다고 우리는 고백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떠나라고만 하신 것이 아닙니다. 덧붙여서 아브람에게 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12장에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그리고 하나 더 있습니다. “사람들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

-복의 근원이자 매개자 아브람

아브람이 하나님께 약속 받은 말씀 두 가지가 있네요. 첫째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이 약속의 말씀 하나만으로도 벅찹니다. “복을 주신다. 복을 풍성하게 주신다. 복을 넘치도록 주신다” 정도가 아닙니다. 복의 원천이 되게 하신다니 얼마나 벅찬 소리입니까?
그리고 두 번째 말씀은 “복의 매개자”가 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복의 매개자가 뭔가요? 타인에게 복을 전달하는 사람이지요.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혼자 다 갖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복을 전하는 통로 같은 존재가 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가슴이 뛰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 아브람은 자신의 고향 땅을 떠났습니다.

그렇다면 복의 근원이자 복의 매개자로 살아갈 아브람의 지금부터의 삶의 모습을 한번 볼까요? 하나님이 인도하신 가나안 땅에 아브람은 살았습니다. 그런데 복의 근원이자 복의 매개자인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살다가 기근을 만났습니다. 농사지어서 얻은 곡식이 없다는 말입니다. 심하게 말하면 굶어 죽게 생겼습니다. 복의 근원이자 매개자인데요?

그래서 아브람은 이집트로 이주할 마음을 먹고 이집트로 삶의 터전을 옮겼습니다. 이집트 그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요? 이집트의 왕 바로에게 아내 사라를 빼앗길 뻔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보기에 부끄럽고 민망한 일이 끼어있습니다. 아내 사라의 미모 때문에 아브람은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워 질까봐 아내를 아내라고 부르지도 못하는 사건도 있었습니다. 이런 말을 해도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요즘 세상에서 말하는 ‘찌질한’ 남자의 전형적인 모습이지요? 복의 근원, 복의 매개자 아브람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어찌어찌하여 재산이 늘어났습니다. 그런데 늘어난 재산으로 인해서 조카 롯과 함께 지내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롯의 하인들과 아브람의 하인들이 가축들이 먹일 우물물을 가지고 큰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이 때 집안 어른으로서 귀감이 되는 결정을 하지 못하고 아브람은 롯에게 헤어지자고 제안했습니다. 복의 근원이자 복의 매개자로서 모습으로 보기가 참 어렵습니다.
그렇게 조카와 헤어졌는데, 동방의 다섯 왕이 쳐들어와 자기가 머물던 지경을 유린하고 조카 롯까지 잡아가자 아브람은 집에서 기른 사병 318명을 데리고 단까지 올라가 롯을 구해내고 그들이 약탈해갔던 모든 것을 되찾기도 합니다.

이렇게 낯선 땅에서 나그네, 떠돌이 신세로 살아간다는 것은 힘들고 고통스런 일입니다. 사람은 그렇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위기가 오면 자신의 본 모습이 드러난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브람의 삶이 아무런 위기도 없이 지내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여기에 치이고, 저기에 치이는 그런 현실입니다. 우리가 상상했던 복의 근원의 모습은 아브람에게 볼 수 없습니다. 복의 매개자도 아닌 것 같습니다.

-다시 현실로

아브람은 복의 매개자로 살아가기 위해 애썼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브람의 마음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인생에 생채기가 났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창세기 15장을 제대로 읽으려면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아브람의 인생 전반에 걸친 내용들을 전제로 해야 합니다. 이해가 되시지요?

이런 인생의 처참한 현실을 맛본 아브람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지금 아브람에게 있는 것을 정리하면 이렇지 않을까요? <인생살이의 고단함, 세상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잊혀진 하나님 약속>일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오셔서 다짜고짜 말씀하십니다. 이것입니다.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는 너의 방패다. 네가 받을 보상이 매우 크다.”(15:1) 하나님은 아브람의 속마음을 아셨던 것으로 말씀이 읽혀집니다.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을지는 몰라도 아브람은 늘 두려움에 떨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런 아브람에게 하나님은 “내가 너의 방패”라고 하십니다.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처지에 빠졌던 사람이 아니라면 그 말이 주는 든든함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이 말씀에 이르기까지 그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고독과 절망과 두려움 속에서 보냈을까요? 그런데 돌이켜 보니 그 어려운 생의 고비마다 하나님께서 든든한 방패처럼, 산성처럼 자기를 지켜주셨다는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도 우리의 든든한 방패가 되어주신 하나님 덕분이 아닌가요? 하나님은 잊혀진 분, 약속을 저버리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 약속을 기억하고 계시고, 실행하고 계십니다. 아브람에게 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와의 약속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 각자에게 주시는 큰 복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물어야 하지요?

-무엇을

오늘 말씀에서도 아브람은 묻습니다. “내게 무엇을 주시겠습니까?” 이 질문은 한계가 많은 질문입니다. 인간적인 한계, 자신의 욕망이 섞여있는 질문입니다. 인간적인 한계란 이런 것입니다. 무엇을 주시겠습니까? 물은 뒤에 자식이 없다고 토로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는 자식과는 다른 이해입니다. 아브람 역시 한 인간인지라 시대라는 한계 속에서 사고합니다.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알아챌 수 있습니다. 아브람을 사로잡고 있는 고통과 두려움의 실체는 이것입니다. 자기가 후손 없이 세상을 떠날 수도 있다는 사실임을 알 수 있습니다. 고대인들에게 자식이 없는 삶은 온전한 삶이 아닙니다. 그리고 복 받은 삶도 아니었습니다. 아브람은 자기의 재산을 상속받을 사람은 다마스쿠스 사람 엘리에셀 뿐이라고 탄식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엘리에셀이 아니라 그의 몸에서 난 자가 상속자가 될 것이라고 확언하신 후에 아브람을 장막 밖으로 이끌어내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을 쳐다보아라. 네가 셀 수 있거든, 저 별들을 세어 보아라”(15:5). 무지근한 불안과 두려움에 눌려 있던 아브람에게 필요한 것은 자기 절망을 곱씹는 것이 아니라, 더 큰 세계 앞에서 자기 삶을 돌아보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래서 저 가없는 별 세계를 바라보라 이르신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 식으로 바꾸면 정신의 환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말로 하면 우리의 기도입니다. 아브람의 상태가 우리의 상태와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와 다른 하나는 하나님 앞에 말씀드리는 사람이었다는데 있습니다. 깊게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영혼이 빈곤해지지 않습니다. 현실은 여전히 막막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절망에만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조금 떨어져서 바라보면 현실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의 별을 보라고 하신 이유는 하나님과의 약속을 기억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과의 여러분의 약속은 어디 있습니까? 아브람의 신앙은 이렇습니다. “아브람이 주를 믿으니 주께서는 아브람의 그런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우리가 아브람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가 큰 부자가 돼서도, 그가 큰 가족을 거느려서도 아닙니다. 그가 평탄한 인생만을 누려서도 아닙니다. 아브람은 누구 못지않게 못났고, 어리석고, 모자란 사람이었습니다. 다만 하나님과 자신과의 약속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상기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두려움과 공포 속으로

이제 아브람은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제사드릴 준비를 합니다. 여기 필요한 제물은 3년 된 암소와 암염소와 숫양, 그리고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입니다. 짐승은 가운데를 잘라서 마주보게 했고, 새는 죽이기만 했지 쪼개지는 않았습니다. 해 질 때에 아브라함은 깊은 잠이 들었습니다. 피곤했겠지요. 하지만 육체만 피곤에 떨어진 것은 아닙니다.

이 상황을 12절은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해가 질 무렵에, 아브람이 깊이 잠든 가운데, 깊은 어둠과 공포가 그를 짓눌렀다.”
여러분은 이 상황이 이해가 되시나요? 제가 이 상황이 너무 낯설고 궁금해서 다른 언어 성경을 보았습니다. 공동번역은 ‘심한 두려움’이라고 번역했습니다. 루터는 ‘충격과 큰 암흑’이라고 번역했고, 영어 성경 NIV는 짙고 두려운 어둠, ‘a thick and dreadful darkness’라고 번역했으며, KJV은 거대한 어둠의 공포 ‘an horror of great darkness’라고 번역했습니다. 프랑스어 성경에 보면 공포와 거대한 어둠이 덮쳐왔다.

다 비슷한 어감이 느껴집니다. 지금 아브람이 악몽을 꾼 것일까요? 아브람이 잠에서 경험한 큰 흑암과 두려움은 악몽이 아닙니다. 하나님 경험입니다. 그는 지금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제사를 준비하는 중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하신 겁니다. 그것을 흑암과 두려움으로 표현했습니다. 인간의 하나님 경험을 표현할 수 있는 적절한 단어가 없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경험을 한계 많은 인간의 언어로 표현하는 것은 불완전하니까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인생을 휘몰아치는 강렬한 하나님 경험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경험의 한계를 뛰어넘는 경험입니다. 거룩함을 대면하는 일입니다. 우리네 삶은 너무나 많은 것이 덕지덕지 붙어있습니다. 먼지나 묵은 때 같습니다. 이를 벗게 내고 본래의 나를 만나는 일을 하나님 경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 안에 숨겨진 거룩함입니다.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이런 경험입니다.

<여러분, 미켈란젤로 아시죠? 미켈란젤로가 ‘다비드 상’을 조각할 때 했던 말과 비슷합니다. 미켈란젤로가 다비드 상을 조각할 때 사람들은 그 유명한 라파엘도, 그리고 다빈치도 불가능하다고 말했습니다. 그 때 미켈란젤로가 이렇게 말했답니다. ‘다비드상은 이미 그 대리석 덩어리 안에 완성돼 있다. 내가 할 일은 필요 없는 것을 쪼아내는 일이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쓸데없는 것을 덜어내면 내 안의 신성이 절로 드러납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한다기 보다 무엇을 안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것도 쓸데 없는 것을 덜어내는 일, 기도가 우리에게 절실한 시절입니다.

-인생은 알 수가 없다지만

하나님의 뜻은 알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마도 성서 기자는 ‘암흑, 어둠’ 이런 단어를 사용한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나를 향한 뜻은 단박에 이루어지는 꿈이라기보다는 멀고 먼 인생의 길에 지니고, 품고, 닦고, 꺼내보는 일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쉽사리 보이지 않아도 때론 막막해 보여도 그 약속을 품고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이 말씀으로 맺겠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인사말은 히브리어로 ‘샬롬’입니다. 이 단어는 오래된 셈족어 어근 ‘샬람’(shalam)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고고문헌학자들이 기원전 23세기 신전의 경제 문서의 쐐기 문자에서 이 단어를 찾았는데, 그 진짜 뜻은 이런 것이라고 합니다.
‘돈을 다 갚은 상태’, 이 말을 풀어보면 태어나면서 진 빚을 다 갚은 상태, 삶에서 자기가 해야 할 임무를 다한 상태입니다. 하나님이 마지막 날에 각 사람에게 물으신다는 겁니다. ‘맡겨진 임무에 최선을 다했느냐?’ “네게 주어진 너의 사람됨을 다 이루었느냐”예요.
인생은 결국 하나님이 맡겨주신 나의 나다움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이 기도의 절기에 나다움의 한 조각, 기도로 발견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