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향유를 부어야 할 시간
본문 : 이사야 43:16-21, 빌립보서 3:4b-14, 시편 126편, 요한복음 12:1-8
【빌립보서 3:4b-14】
다른 어떤 사람이 육신에 신뢰를 둘 만한 것이 있다고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합니다. 나는 난 지 여드레만에 할례를 받았고,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서도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 사람 가운데서도 히브리 사람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파 사람이요, 열성으로는 교회를 박해한 사람이요, 율법의 의로는 흠 잡힐 데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내게 이로웠던 것은 무엇이든지 그리스도 때문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귀하므로, 나는 그 밖의 모든 것을 해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고, 그 모든 것을 오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으려고 합니다. 나는 율법에서 생기는 나 스스로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오는 의 곧 믿음에 근거하여, 하나님에게서 오는 의를 얻으려고 합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르고 싶습니다. 나는 이것을 이미 얻은 것도 아니며, 이미 목표점에 다다른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사로잡으셨으므로,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좇아가고 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아직 그것을 붙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하는 일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몸을 내밀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부르신 그 부르심의 상을 받으려고, 목표점을 바라보고 달려가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2:1-8】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가셨다. 그 곳은 예수께서 죽은 사람 가운데에 살리신 나사로가 사는 곳이다.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는데, 마르다는 시중을 들고 있었고, 나사로는 식탁에서 예수와 함께 음식을 먹고 있는 사람 가운데 끼여 있었다. 그 때에 마리아가 매우 값진 순 나드 향유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 발을 닦았다. 온 집 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 찼다. 예수의 제자 가운데 하나이며 장차 예수를 넘겨줄 가룟 유다가 말하였다. «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지 않고, 왜 이렇게 낭비하는가?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가난한 사람을 생각해서가 아니다. 그는 도둑이어서 돈자루를 맡아 가지고 있으면서, 거기에 든 것을 훔쳐내곤 하였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 그대로 두어라. 그는 나의 장사 날에 쓰려고 간직한 것을 쓴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지만, 나는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니다. »
-인사
사순절 5주일
주안에서 사랑하는 파리중앙교회 교우 여러분 모두 안녕하십니까?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봄이 온 줄 알았는데 갑자기 다시 날씨가 추워졌습니다. 계절이 돌아오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당연하게만 여겼지만 봄이 오는 것은 그저 쉬운 일만은 아닌가봅니다. 그래도 봄은 옵니다. 우리 인간들이 사는 세상에도 따뜻한 봄기운이 만연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얼어붙은 마음이 녹아내리고 봄의 새순을 틔우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오늘 사순절 5주일을 맞이하였습니다. 사순절은 주님의 부활을 기다리는 시간입니다. 부활주일이 봄인 것이 참 다행스럽습니다. 봄의 기운이 만연해지면 주님이 부활하신 절기가 됩니다. 봄이 오면 죽은 것만 같은 나뭇가지에서 새순이 돋아납니다.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부활을 기다리는 이 절기에 주님과 함께 우리 영혼이 새로운 부활의 절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 시간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사순절기가 깊은 기도의 시간이 되어야 함은 분명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 주신 생명의 기쁨을 맛보는 기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경희대 물리학과 김상욱 교수가 표현한 생명을 사랑해야 하는 우주적인 이유라고 이렇게 말합니다.
《우주는 텅 비어 있다. 지구가 모래 알갱이만 하다고 가정해보자. 태양은 오렌지 크기가 되고 지구는 태양에서 6m 거리에 위치한다. (…) 태양에서 가장 가까운 첫 번째 별인 알파 센타우리에 도착하려면 부산역에서 일본 홋카이도 북쪽 끝까지 가야 한다. 부산역을 중심으로 반경 1600㎞ 이내에 오렌지 한 개랑 모래 알갱이 몇 개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셈이다.”
“따라서 주변에 물질이라 부를 만한 것을 발견한다면 그 자체로 기뻐해야 한다. 생명체는 지구에서만 발견되는 아주 특별한 물질이다. 내 주위에 생명체가 있다면 이것은 놀라워해야 할 일이다. 더구나 그 수많은 생명체 가운데 나와 같은 종(種)을 만나는 것은 기적에 가깝다. 다른 인간을 사랑해야만 하는 우주적 이유다.” -<김상욱의 과학공부>, 13쪽》
오늘 우리가 봉독한 말씀은 교회에서 전통적으로 예수님의 수난을 준비하는 시간에 주로 나누는 이야기들입니다. 특히 요한복음 12:1-8절에 보면, 마리아가 나드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머리털로 닦은 이야기는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하는 모습으로 표상되기도 합니다. 어떻게 보면 가장 아름답고 거룩하고, 어떻게 보면 가장 세속적인 이야기처럼 보이기도 하고, 또는 기쁨과 슬픔이 교차하는 한편의 삽화처럼 보이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빌립보서의 말씀과 요한복음의 말씀을 잘 기억하면서 오늘 말씀의 시간을 나누겠습니다.
-유월절 엿새 전 베다니로
요한복음을 기록한 이 사람은 오늘 12장의 말씀을 시작하면서 이 일이 “유월절 엿새 전에” 일어났다는 사실을 먼저 짚습니다. 이런 말씀은 그냥 있는 것이 아니겠지요?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이 임박했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그 때에 예수님은 어디로 가셨는가요?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과도 같은 십자가 죽음이 눈앞에 있는데 여러분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예수님은 “베다니”로 가셨습니다.
여러분 기억을 떠올려 보십시오. 베다니가 무슨 뜻이지요? “긍휼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베다니는 그런 곳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이렇게 서있으면 동편으로는 올리브 산이 있습니다. 이 산은 예수님이 마지막 기도를 하셨던 곳입니다. 이 올리브 언덕을 내려오면 작은 마을이 있는데, 이 곳이 ‘베다니’입니다. 오늘날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베다니’ 이 마을을 ‘엘아자리아(El-Azariya)’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나사로라는 이름에서 유래한 명칭입니다. St. Lazare 라는 파리의 지하철역 이름이 바로 그렇습니다. 그만큼 예수님과 나사로 마리아 마르다 남매는 아주 밀접한 관계였던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마다 ‘베다니’ 마을을 자주 들르셨습니다. 마음의 안식처 같은 곳이었으리라 생각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죽었던 나사로를 살리시기도 하셨으니 얼마나 가깝고 편한 곳이었을까 싶습니다.
-前 이해
오늘 본문을 잘 보려면 앞선 요한복음 11장에 있었던 일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11장에 보면 대제사장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의회를 소집합니다. 이유는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살린 사건으로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이런 행동, 이런 표적 때문에 예수를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유대 최고 법정인 산헤드린 공회가 예수를 제거하기로 모의하고 예수의 거처를 수소문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이 현상수배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이런 살벌한 분위기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 인근의 베다니로 다시 가셨습니다.
나사로의 집에 몇몇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나사로의 아래 누이인 마르다는 식사 준비를 하고, 거기 모인 사람들은 담소를 나누는 중이었습니다. 이 장면이 머리에 그려질 겁니다. 마음 따뜻한 사람들이 함께 모였습니다. 고맙고 존경해마지 않는 선생님에게 밥 한 끼 대접할 수 있는 기회가 왔으니, 나사로 세 남매들의 마음이 어땠을지 상상이 갑니다.
-마리아의 돌발행동
그 순간에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세 남매의 막내인 마리아가 등장합니다. 마리아는 앞서 오빠가 위중한 병에 걸렸을 때 예수님이 속히 와서 고쳐줄 것을 기대하고 고대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너무 늦게 오는 바람에 오빠가 숨을 거두자 섭섭한 마음인지 아니면 안타까운 마음인지 예수님 발 앞에 엎드리어 “주님, 주님이 여기에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요 11:32)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께 대해 마리아의 섭섭한 마음, 마리아의 원망스런 마음이 오늘 말씀의 전제가 되는 사건입니다.
마리아는 자기 말을 두고두고 후회했을 겁니다. 왜냐하면 지금 버젓이 예수님이 다시 살려 주신 오빠 나사로가 그들과 함께 있으니 예수님께 너무 세게 말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다시 만난 마리아가 어떤 마음이었는지에 대해서 본문은 아무 설명도 없습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담백한 필치로 그녀의 행동만 묘사합니다. 3절입니다.
그 때에 마리아가 매우 값진 순 나드 향유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 발을 닦았다. 온 집 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 찼다.
우리는 이 본문을 이미 알기 때문에 무덤덤하게 받아들이겠지만 하지만 이 상황을 실제 눈앞에서 보게 된 사람들은 무척이나 놀라고 당황스러웠을 것입니다. 어마어마한 값어치가 나가는 향유입니다. 요즘 돈으로 환산하면 평균 노동자 연봉 정도라고 말합니다. 월급이 아니라 연봉입니다. 큰 금액입니다. 그렇게 부자도 아닌 사람들이 어떻게 그런 비싼 향유를 가지고 있었을까 의문스럽기도 합니다만 성경학자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당시 젊은 여인이 결혼을 하기 위해서 지참금이 필요한데, 그 지참금을 통장에다가 모으는 것이 아니라 값나가는 향유로 모으기도 한다는 말입니다. 아마도 마리아의 혼수품이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마리아는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발을 닦았습니다. 그러자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했습니다. 이런 행동은 일반적인 게 아닙니다. 향유는 쏟아 붓는 게 아니라 몇 방울씩 뿌리는 겁니다. 그런 정도만 뿌려도 향유 냄새는 집안 가득히 퍼집니다. 마리아는 머리를 풀어서 자기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았습니다. 이것도 예사롭지 않는 행위입니다. 먼 길을 오신 귀한 손님이 손과 발을 씻을 수 있도록 물을 준비하면 충분합니다. 아주 특별한 경우에 발을 씻어줄 수 있겠지요. 발을 씻긴 뒤에 마른 수건으로 물을 닦아주면 됩니다. 마리아는 지금 아주 특별한 행동을 펼친 겁니다. 그녀가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를 우리는 추정할 수 있을 뿐이지 확실하게는 모릅니다. 그녀가 뭔가 한 마디라도 했으면 좋았을 텐데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에 그녀는 끝까지 침묵을 지킵니다.
-우리들의 시선
자, 여러분은 마리아의 행동을 어떻게 받아들이십니까? 각자 생각이 다르겠지요. 뭔가 특별한 의미가 있을 거라거나, 또는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마리아의 입장이라면 어떻게 했을 거로 예상됩니까? 예수님은 오빠 나사로에게 생명을 주신 분이십니다. 뭔가 보답하고 싶긴 하지만 3천만 원짜리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머리카락으로 씻긴다는 건 상상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마리아였다는 것을 우리가 인정하더라도 저런 행동에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거기 모였던 예수님의 제자들도 속으로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우리는 어땠을까요? 이 장면이 우리 눈앞에서 벌어졌다면 우리는 이 모습을 보고 어떤 마음이 들고, 옆 사람에게 뭐라고 말할까요? 이 장면이 당황스러웠을 것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말문이 막혔을 수도 있구요. 곧이어 이 당황스럽고 황당한 장면에서 벗어나 정신을 차려서 서로 이러쿵저러쿵 말들을 주고받을 것입니다. ‘마리아의 마음은 알겠지만 너무 지나친 행동 아닌가?’ ‘정신이 나갔나?’ 등등 마리아를 비난하거나 험담하는 말들로 가득 찼을 것 같습니다.
거기 모였던 예수님의 제자들도 속으로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제자 중 가룟 유다가 나서서 말합니다.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지 않고, 왜 이렇게 낭비하는가?” 유다의 발언을 반박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 속 솔직하게 떠오르는 생각들입니다. 그리고 꼭 무조건 마리아의 편을 들어서 가룟 유다를 반박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도 대다수는 지금 비슷하게 생각할 겁니다. 마리아의 행동은 광신자의 그것과 다를 게 없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존경하고 믿는 것까지는 좋지만 꼭 이런 방식으로 자신의 믿음을 표현하는 건 지나쳐 보입니다. 믿음이 좋을수록 평소 예수님의 뜻에 맞도록 비싼 향유를 바르게 사용했어야합니다. 영생의 길을 알려달라는 부자 청년에게 예수님은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자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마 19:21). 이 청년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긴 했습니다만, 가난한 사람들을 물질적으로 돕는 일은 예수님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철부지같이 행동한 마리아를 따끔하게 책망할 것으로 예상했겠지만 예상은 빗나갔습니다. 마리아를 책망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두둔하는 듯한 발언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발언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마리아의 행동 자체에 대한 것(7절)이고, 다른 하나는 가룟 유다의 주장에 대한 것(8절)입니다.
-장례를 준비하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행동이 예수 당신의 장례를 준비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7절을 다시 정확하게 읽으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대로 두어라. 그는 나의 장례 날에 쓰려고 간직한 것을 쓴 것이다.” 이 장면을 마태복음은 좀 더 명확하게 말합니다. 이 여자가 예수님을 위해서 좋은 일을 한 것이라고 하면서 이 여자의 행동은 예수님의 장례를 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를 종합적으로 보면 마리아의 향유 사건은 예수님의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낭비처럼 보이겠으나 마리아는 인류 역사에서 가장 고귀한 일을 한 겁니다.
오늘 빌립보서에 나오는 바울 사도야말로 이를 깨달은 사람입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나에게 이로웠던 것은 무엇이든지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바울 자신은 인간들이 평가하는 기준으로는 완벽에 가까웠던 사람입니다. 유대 혈통으로 보나, 가문으로 보나, 자신의 학식으로 보나, 개인의 열정으로 보나,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께 붙들린 후로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합리적인 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사람들은 마리아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마리아가 예수 죽음의 영적인 의미를 다 알지는 못했겠으나 예수님을 생명의 근원으로 경험한 것만은 분명합니다. 이 장면을 놓고 어떤 분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마리아의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온 천지에 진동하도다!”
예수님에 의해서 생명이 무엇인지를 깨달은 그녀에게 예수님 외의 것들은 의미가 없었습니다. 생명의 근원을 알게 되면 다른 것에 대한 관심이 줄어듭니다. 급기야 자신에 대한 관심도 축소됩니다. 사람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향유는 생명을 얻기 위한 수단입니다. 재산도 그렇고, 건강도 그렇고, 다 생명을 풍성하게 하려는 수단입니다. 만약 다른 것을 통해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면 이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습니다.
-우리의 순간
우리는 언젠가는 우리가 소중하게 여기는 향유를 어딘가에 쏟아 부어야할 순간을 맞습니다. 우리 인생 자체가 향유이기도 합니다. 죽음 앞에서 우리는 모든 향유를 버려야합니다. 삶과 죽음 문제를 미리 당겨서 생각했던 마리아에게 향유를 쏟는 일은 가벼운 것이었습니다. 생명을 얻은 것에 대한 최소한의 행동이었기 때문입니다. 저를 포함해서 우리는 머리로 손익을 계산하느라 마리아의 영성을 따라가지 못할 뿐입니다. 인류 역사는 마리아와 같은 사람들에 의해서 진보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삶을 향유처럼 쏟아 부은 사람입니다. 예수의 거룩한 향기가 온 세계에 가득 퍼졌습니다. 이런 점에서 마리아와 예수는 같은 길을 간 게 아니겠습니까. 아니 마리아는 예수의 운명을 선취한 여자였습니다.
초기 기독교는 사람들의 분노를 일으킨 마리아의 행위가 예수의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라고 받아들였습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 신앙의 토대가 이것입니다. 마리아, 이 여인의 행위는 곧 예배의 한 구성 요소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기억하고 거기서 발생한 하나님의 구원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순전히 종교의식으로만 이해하면 안됩니다. 실제 삶의 내용이고 그 깊이이고 그 현실입니다.
-십자가를 소망하다
바울 역시 이것을 보았습니다. 발견했다는 말입니다. 그의 인생은 성공한 인생입니다. 돈을 많이 벌어서도 아니고 교회를 많이 세워서도 아닙니다. 바울은 본 사람입니다. 찾은 사람입니다. 빌립보서 3:12에 보면,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사로잡으셨으므로,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좇아가고 있습니다.” 바울 입장에서 보면 사로잡힌 것이지만 입장을 바꾸어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울을 차지하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 사로잡힌 사람이기에 그는 성공한 인생입니다.
이 인생을 통해 바울은 하나님을 완전히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에 의해 가장 깊은 곳까지 사로잡히게 되는 삶.
우리 모두가 실은 이런 삶을 소망합니다. 하지만 이게 어떤 경험인지 잘 모릅니다. 알고 싶어하지 않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게 도대체 어떤 경험일까요? 신앙의 체험입니다. 이 신앙적인 체험을 통해서 무엇을 보았고, 무엇을 느끼고, 깨달았을까요? 황홀경을 경험했을까요? 천국이라도 보고 온 것일까요? 바울이 하나님께 압도당하는 경험은 한 마디로 말하면 이것입니다. “십자가의 신비” 하나님 사랑의 신비입니다.
십자가는 무엇인가요? 장식품인가요? 교회를 상징하는 표시인가요? 아니요. 그전에 예수님 시대에는 무서운 사형틀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 무시무시한 십자가 형틀이 인류를 구원하는 사랑의 표현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에 감복하여 삶으로 동의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순절의 시기가 우리의 사랑이 깊어지는 시간이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