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십자가 (사순절 제6주, 종려주일)
본문 : 이사야 50:4-9a, 빌립보서 2:5-10, 시편 31:9-16, 누가복음 23:1-49
【누가복음 23:1-49】
○ 빌라도에게 심문을 받으시다 (1-5절)
그들 온 무리가 일어나서, 예수를 빌라도 앞으로 끌고 갔다. 그들이 예수를 고발하여 말하기를 «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우리 민족을 오도하고, 황제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반대하고, 자칭 그리스도 곧 왕이라고 하였습니다. » 그래서 빌라도가 예수께 물었다. « 당신이 유대인의 왕이오? » 예수께서 빌라도에게 대답하셨다. « 당신이 그렇게 말하고 있소. »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무리들에게 말하였다. «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는 아무 죄도 없소. » 그러나 그들은 이렇게 주장하였다. « 그 사람은 갈릴리에서 시작해서 여기에 이르기까지, 온 유대를 누비면서 가르치며 백성을 선동하고 있습니다. »
○ 헤롯 앞에 서시다 (6-12절)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서 물었다. « 이 사람이 갈릴리 사람이오? » 그는 예수가 헤롯의 관할에 속한 것을 알고서, 예수를 헤롯에게 보냈는데, 마침 그 때에 헤롯이 예루살렘에 있었다. 헤롯은 예수를 보고 매우 기뻐하였다. 그는 예수의 소문을 들었으므로, 오래 전부터 예수를 보고자 하였고, 또 그는 예수가 어떤 기적을 일으키는 것을 보고 싶어하였다. 그래서 그는 예수께 여러 말로 물어 보았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에게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그런데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이 곁에 서 있다가, 예수를 맹렬하게 고발하였다. 헤롯은 자기 호위병들과 함께 예수를 모욕하고 조롱하였다. 그런 다음에, 예수에게 화려한 옷을 입혀서 빌라도에게 도로 보냈다.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서로 원수였으나, 바로 그 날에 서로 친구가 되었다.
○ 사형 선고를 받으시다 (23-25절)
그러나 그들은 마구 우기면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큰 소리로 요구하였다. 그래서 그들의 소리가 이겼다. 마침내 빌라도는 그들의 요구대로 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래서 그는 폭동과 살인 때문에 감옥에 갇힌 자는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놓아주고, 예수는 그들의 뜻대로 하게 넘겨주었다.
-인사말
그리스도 예수님이 주시는 참 평화가 우리에게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교우 여러분 모두 안녕하십니까? 서로에게 인사를 나누겠습니다. 오늘 예배에 함께 하지 못한 분들에게도 하나님이 함께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오늘 주일은 사순절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이 말은 다음 주일은 곧 부활주일이라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부활의 아침은 우리에게 그냥 거저오지 않습니다. 부활의 아침을 맞이하기 위해서 우리가 지나야 할 곳이 있습니다. 그곳은 십자가를 지러 가시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러니까 십자가를 통하지 않고서는 부활은 없습니다.
오늘은 종려주일이라고도 부릅니다. 오늘 말씀에는 입성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담고 있지는 않습니다만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나귀를 타고 들어가실 때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서 흔들며 환영한 사건을 기리는 주일입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사람들에게 환영받고 환대받는 모습이었는지 모르겠으나 이 길은 수난과 죽음의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았습니다. 능욕을 받았습니다. 십자가는 고독의 끝자락이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도 버림받은 것만 같은 생각이 들 정도의 절망의 자리였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가 바로 하나님이 가까이 계신 자리입니다. 아니 하나님 당신이 십자가에 달리신 자리였습니다. 거기서 인류 구원이 시작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가 나누는 말씀을 통해서 사람이란 존재에 대해서 잘 들여다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사람이란 성경말씀 속에 등장하는 예수님 주변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의 예수님에 대한 반응을 잘 관찰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사람들이 바로 나 자신을 가리키고 있음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빌라도에게 심문을 받으시다
예수님의 수난의 장면을 우리가 단락을 나누어 읽었습니다. 실은 누가복음 23장 전체를 살펴야 합니다. 빌라도에게 심문 받으시는 예수님, 헤롯 앞에 끌려간 예수님, 사형 선고를 받으시는 예수님,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히러 끌려가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예수님. 이렇게 다섯 단락이 오늘 복음서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잡혀서 끌려오셨습니다. 이미 매질을 수차례 당하고 욕설로 모욕을 당한 상태입니다. 그리고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이 모여 있는 공회 한 가운데 섰습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을 어떻게든 죽이려고 마음을 이미 품은 지 오래입니다. 우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갈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사람을 죽이기로 마음먹은 사람들의 마음이 어떨지 우리가 알 수 있을까요? 이 사람들은 이런 끔찍한 일이 자신의 마음속에서 일어나고 있는데 아무렇지도 않은 것일까요?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심한 이유는 너무나도 간단합니다.
“첫째, 민족을 잘못된 길로 인도했다. 둘째 황제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반대했다. 셋째 자칭 그리스도 왕이라고 하였다.” 이유가 대단합니다. 민족을 이유 삼습니다. 로마 제국에 대한 배려와 존중을 들이댑니다. 지금 현재 왕의 지위를 존중하려 합니다. 대단한 이유를 들이댔습니다. 하지만 속내는 이렇게 거창하지 않습니다. 거슬리는 존재를 제거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지위, 자신의 재산, 자신의 신분. 그것이 무엇이든 자신의 것이라고 여겨지는 것을 침범하는 이들에 대한 분노의 표현이고, 이 분노는 사람을 죽이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이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은 게다가 교활하기 까지 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입으로 예수를 고발하지 않습니다. 누군가를 부추깁니다. 예수님을 고발한 사람들은 많은 무리, 백성들입니다. 이 백성들은 누구입니까?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구경하던 사람들이지 않을까요?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환영하던 사람들도 있지 않을까요?
사람이란 존재에 대해 다시 곰곰이 생각하게 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만 삽니다. 자신의 이것이 침범당할 때는 사람을 죽여서까지 지키려고 합니다. 그리고 죽일 거창한 이유를 찾느라 골몰합니다. 민족, 국가, 이념 등입니다. 그리고 남을 이용합니다. 선동하고 부추깁니다. 이것에 솔깃한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이용당하는 사람은 자신이 속는 줄도 모르고 하루아침에 태도를 바꿉니다. 예수님 앞에 서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빌라도’라는 이가 있습니다. 로마 제국의 총독의 위치에 있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의 모습을 보시기 바랍니다. 벌어진 일들을 놓고 판단할 능력이 없어 보입니다. 그저 귀찮은 일들이 눈앞에서 사라지기만을 바라는 사람입니다. 옳고 그름을 판단해서 공정하게 일을 처리해야 하는 자리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라고 있는 자리가 로마의 총독이라는 위치입니다. 그러나 왠지 모르게 제 눈에 보이는 빌라도는 이 자리를 피하고 싶습니다. 시끄럽고 번거로운 일을 귀찮은 일들은 피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헤롯 왕에게 예수를 보내버립니다.
-헤롯 앞에 서시다
이제 6절부터 말씀입니다. 이 단락에 이르면 빌라도가 보낸 예수님은 헤롯 왕 앞에 와 있습니다. 우리는 헤롯이라는 또 다른 태도를 가진 사람 하나를 만나게 됩니다. 8절에 보면, “헤롯은 예수를 보고 매우 기뻐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마음, 예수님의 말씀에 감복한 마음을 가져서 그럴까요? 아닙니다. 전혀 아닙니다. 헤롯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문장은 이것입니다. “예수가 일으키는 일에서 어떤 표적을 보고 싶어 하였다.”
여러분! 잘 이해하셨습니까? 헤롯도 소문을 들었나 봅니다. 예수라는 이가 온 나라를 돌아다니며 하나님 나라를 전하고 이적을 행한다는 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라는 이가 전하는 말에는 관심이 없는 것이 헤롯입니다. 그가 행한다는 이적들이 보고 싶을 뿐입니다.
헤롯이란 사람을 보십시오. 인간 예수가 삶으로 보이는 모습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가 전한다는 하나님 나라는 눈꼽만큼도 들을 생각이 없습니다. 그저 눈앞에 벌어진다는 신기한 일, 기이한 이적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헤롯은 자신의 ‘눈요기 거리’가 궁금할 뿐입니다.
우리도 어쩌면 사람을 이렇게 대하며 사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에게 신앙이란 이런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에 주의를 기울여 마음을 쓰는 일은 관심이 없고, 신기한 일, 기이한 일, 나의 무료한 일상을 달래는 일에 관심이 더 큰지도 모릅니다. 눈앞에서 신기한 기적이 벌어지면 얼마나 신나고 재미있겠습니까? 인간에게 오신 하나님이신 예수님 역시도 마술사나 서커스 정도로 이해하는 인간의 죄악의 한 단면입니다.
-사형선고를 받으시다
그들의 요구대로 되지 않자 예수님에게 십자가 사형이 선고됩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으로 향하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알다시피 십자가형은 잔혹하기로 유명한 사형 방식입니다. 손과 발에 못을 박아서 매달면 사람의 몸무게 때문에 몸이 늘어집니다. 뼈마디가 부서져 내리고, 상처에서는 피가 계속해서 흘러나옵니다. 그렇다고 해서 단번에 숨이 끊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얼마나 잔혹한 존재인지 보이는 장면이 십자가 형틀입니다. 십자가에 매달린 사람은 서서히, 아주 서서히 죽어갑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맛보는 ‘죽음의 맛’을 한껏 느끼게 하는 무서운 형이 십자가 사형입니다. 끔찍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해할 수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십자가 형벌’을 견뎌내셨기에 대단하신 것이 아닙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이 십자가 형틀에서 인간이 당할 수 있는 최고의 고통을 참는 인내력을 테스트에서 승리하신 것이 아닙니다. 가끔 어떤 글이나 말을 들어보면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이 차력 테스트에서 잘 참아내시는 것처럼 묘사하는 글을 보게 되는데 성경이 전하는 말씀은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성경은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자신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악으로 인해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세상의 모든 인간 군상 속에 등장하는 다양한 죄의 모습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저 대제사장과 율법학자들, 군중들, 빌라도, 헤롯, 이렇게 네 부류의 인간의 모습을 보아도 얼마든지 인간의 죄악의 유형들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인간의 죄의 모습들을 구분하고 분류하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됩니다. 이들에 모습 속에 담긴 나를 보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모습이 얼마나 이들과 닮아있는지를 이들의 모습 속에서 찾아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신앙의 눈입니다.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이들의 모습을 다시 보십시오. 자신의 물질이나 권력, 지위를 위해서 다른 사람을 해하거나 죽이려는 마음을 아무렇지 않게 품습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타인의 손을 이용합니다. 자신의 손에는 피를 묻히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무리들을 선동했습니다. 무리들의 어리석은 이 변덕스러움과 무지를 보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빌라도의 인간에 대한 무책임성을 보았습니다. 자신의 말과 행동 하나에 사람이 살고 죽을 수도 있는데, 자신은 책임을 피하는데 급급하게 행동합니다. 그리고 헤롯을 보십시오. 삶에 대한 무료함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만 타인에 대해 호기심을 갖습니다. 건강한 호기심이 아닙니다. 탐욕스런 호기심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선포되고 하나님의 손길로 기적이 일어나는 일도 헤롯에게는 흥미진진한 재미거리에 불과합니다.
이들의 모습 속에 비친 나 자신은 우리 각자의 십자가에 함께 매달아야 할 우리의 죄악과 허물일 것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다
십자가가 달리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에게서 참 사람이자 참 하나님을 봅니다. 화해자로 오신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과 이 세상 사이에 서 계십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불행과 고통을 함께 겪으면서, 자비와 긍휼로 우리를 감싸 안으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인간의 잔학성과 거룩함이 만나는 교차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죄된 인간의 모든 모습들, 죄의 속성들을 죄다 끌어안으신 것이지요. 이곳에 인간의 거룩함이 있습니다. 참 사람의 모습이 있습니다. 이 삶으로 사람을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라고 하시는 말씀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의미입니다.
그렇기에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우리 각자의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우리 각자 모두가 다른 모양의 십자가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가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은 각자의 몫입니다.
‘안셀름 그륀’이란 분의 글을 보니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께 소개하고 싶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은 매일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에 “네”라고 응답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잘 들으십시오. 내 맘에 쏙 들고, 내게 즐거움을 가져다주는 것에 대해서가 아닙니다. 하루하루의 일상이 내 계획과 전혀 다르게 흘러가거나 계획이 무너지더라도 화를 내는 것으로 그 일을 대하지 말라고 합니다. 오히려 나의 계획을 망치는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개입하시고 하나님의 일이 내 안에서 이루어지도록 해야 합니다. 인생에서 겪는 어려움 등을 모두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로 받아들이라는 신앙의 권고입니다.
저는 여러분께 이렇게 권고하고 싶습니다. 오늘 복음서 말씀에서 만난 사람들이 바로 나 자신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음을 받아들이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빌라도, 헤롯, 그리고 군중들은 나를 꼭 빼닮은 나임을 발견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 십자가에 달리실 때, 그 십자가상에 나의 죄와 허물을 같이 못 박아 버리고 부활의 아침에 내가 다시 새로운 생명임을 깨닫는 시간이 오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