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이 일의 증인(부활주일)
본문 : 이사야 65:17-25, 사도행전 10:34-43, 시편 118:14-24, 누가복음 24:1-12
【사도행전 10:34-43】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였다. « 나는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외모로 가리지 아니하시는 분이시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가 어느 민족에 속하여 있든지, 다 받아 주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씀을 보내셨는데,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평화를 전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만민의 주님이십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이 일은 요한의 세례 사역이 끝난 뒤에, 갈릴리에서 시작하여서, 온 유대 지방에서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부어 주셨습니다. 이 예수는 두루 다니시면서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억눌린 사람들을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에서 행하신 모든 일의 증인입니다. 사람들이 그를 나무에 달아 죽였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사흗날에 살리시고, 나타나 보이게 해주셨습니다. 그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미리 택하여 주신 증인인 우리에게 나타나게 하셨습니다. 그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뒤에, 우리는 그와 함께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였습니다. 이 예수께서 우리에게 명하시기를, 하나님께서 자기를 살아 있는 사람들과 죽은 사람들의 심판자로 정하신 것을 사람들에게 선포하고 증언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예수를 두고 모든 예언자가 증언하기를,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
【누가복음 24:1-12】
이레의 첫날 이른 새벽에, 여자들은 준비한 향료를 가지고 무덤으로 갔다. 그들은 무덤 어귀를 막은 돌이 무덤에서 굴려져 나간 것을 보았다. 그들이 안으로 들어가 보니, 주 예수의 시신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이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서 당황하고 있는데, 눈부신 옷을 입은 두 남자가 갑자기 그들 앞에 나섰다. 여자들은 두려워서 얼굴을 아래로 숙이고 있는데, 그 남자들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 어찌하여 너희들은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찾고 있느냐? 그분은 여기에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다.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들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해 보아라. ‘인자는 반드시 죄인의 손에 넘어가서, 십자가에 처형되고, 사흘째 되는 날에 살아나야 한다’고 하셨다. » 여자들은 예수의 말씀을 회상하였다.
그들은 무덤에서 돌아와서, 열한 제자와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이 모든 일을 알렸다. 이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어머니인 마리아이다. 이 여자들과 함께 있던 다른 여자들도, 이 일을 사도들에게 말하였다. 그러나 사도들에게는 이 말이 어처구니없는 말로 들렸으므로, 그들은 여자들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베드로는 일어나서 무덤으로 달려가, 몸을 굽혀서 들여다보았다. 거기에는 시신을 감았던 삼베만 놓여 있었다. 그는 일어난 일을 이상히 여기면서 집으로 돌아갔다.
-인사
우리의 주인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주님의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여러분, 부활의 아침이 밝았습니다. 기독교 초기 문서들을 보면 기독교인들은 부활의 아침이 되면 이렇게 서로에게 인사를 전했습니다. 마치 새해 첫 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인사를 전하는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습니다.”라고 인사했습니다. 오늘날도 여전히 같은 인사말로 부활절 아침을 맞이하였습니다. 여러분도 이렇게 인사 나누시기를 바랍니다. 인사하십시오. 부활의 기쁨을 전하십시오.
하지만 부활의 아침이지만 우리 주변에는 여전히 울고 있는 이들, 슬픔에 가득 차 있는 이들, 고통 가운데 신음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위로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교회가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고 축하하는 날입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오늘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있을까요? 우리가 교회를 다니고 있을까요? 단연코 없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교양을 쌓기 위해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저 “하나의 종교나 하나의 믿음 체계”를 선택한 게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고 죽음을 이기신 예수, 우리 주님의 삶에 감복하여 주님을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즉 부활의 삶을 경험하고 부활의 삶을 살고자 결심하는 것이지요. 그런 사람들이 진정으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이 말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하지만 표현이 다소 이상합니다만 이 부활사건 하나만 가지고는 부족합니다. 하나 더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것입니다. “부활 사건을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삶은 소중하다
예화) 1849년 제정러시아 시대입니다.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1세는 들려오는 소문을 듣고 너무나 화가 났습니다. 왜냐하면 나라의 젊은 지식인들이라는 사람들이 독서 모임을 한다는 명분으로 모여서 황제의 권위를 조롱하고 혁명을 도모하는 일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들에게 본때를 보여 주려고 20명 정도 되는 사람들을 체포하여서 8개월 동안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런데도 황제는 분이 풀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들을 확실히 겁주기 위해서 이들에게 총살형을 언도했습니다. 1849년 2월 22일 영하 20도의 모진 추위 속에서 이 사람들은 사형장으로 끌려 나갔습니다. 이 사람들을 묶을 말뚝이 이미 사형장에 세워져 있고 총을 든 병사들도 일렬로 정렬해 있었습니다. 사형 집행관이 사형 선고문을 읽었습니다. 병사들이 총을 겨누는 순간 갑자기 사형 중지 명령 떨어졌습니다. 사실은 실제로 사형을 집행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겁을 주어서 다시는 그런 모임을 못하도록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이 때 사형 당할 뻔 했던 사람 가운데 하나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죄와 벌”, “악령”, “백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러시아의 작가 ‘도스토예프스키’였습니다.
훗날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날을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사형 집행인들이 눈을 가리려는 순간 멀지 않은 곳에 교회가 있었는데 금빛 교회 지붕이 햇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고 있더랍니다. 교회 지붕에 반사된 햇빛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답니다. “만일 내가 죽지 않는다면 어떨까. 만일 생명을 되찾게 된다면 어떨까. 그 생명은 얼마나 찬란하고 무한한 것이 될까. 이 무한한 시간이 내 것이 된다면 나는 1분 1초를 100년으로 연장시켜 어느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다. 1분 1초를 정확하게 한 순간도 낭비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사형틀에 묶여서 생각했다고 합니다.
생명이란 이런 것입니다. 아무리 다른 어떤 것이 중요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생명 보다 중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어떤 댓가를 치루더라도 생명을 이어가고 싶은 것이 바로 인간의 본성입니다. 생명은 살고자 함이고, 더 나아가서 잘 살고자 함입니다. 벼랑 끝에 서서 살아가는 인생일지라도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고 싶은 것이 인간입니다.
-누가가 전하는 부활 사건
인간이란 이런 존재입니다. 성경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 역시 우리와 똑같은 이런 사람들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함께 읽은 복음서 말씀인 누가복음 24장의 첫 단락을 읽다 보니까 문득 지난주일 말씀인 23장의 등장인물 몇몇이 생각에 떠올랐습니다. ‘구레네 사람 시몬’과 ‘여인들’입니다. 예수님 대신 십자가를 지게 된 구레네 사람 시몬을 보십시오. 예수님 대신 십자가를 지게 되었지만 무기력한 인간의 전형적인 모습처럼 보입니다. 또 끌려가시는 예수님의 뒤를 울면서, 통곡하면서 따라가던 여인들 역시 무기력한 인간의 나약함을 보여줍니다.
오늘 말씀에 예수님 무덤으로 갔던 여인들 역시 이와 같은 여인들일 것입니다. 죽은 이의 장례 절차를 치르는 여인들의 고단함이 보입니다. 그리고 비겁한 제자들도 떠오릅니다. 자신들은 예수님의 처참한 사형의 장면을 보았습니다. 자신들은 당연히 그렇게 죽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모두 도망쳐버렸습니다.
그런데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예수께서 죽으신 지 3일 째 되는 날 아침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우리가 이름을 알고 있는 제자들은 한 명도 없고 여자들 몇몇이 예수님의 무덤으로 모였습니다. 이것은 특별한 일이 아닙니다. 사람의 죽음 이후에 당연히 행해지던 장례 절차 중 하나입니다. 향료를 시신에 바르는 일입니다. 우리 장례문화에는 없지만 이들에게는 당연한 일 중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여인들이 본 것은 무덤을 막고 있던 큰 돌이 치워져 있었습니다. 우리 문화에서 장례란 기본적으로 밑으로 땅을 파서 사람을 관에 넣어 묻는 것입니다. 이들 문화에서는 돌산을 파서 굴을 만들고 그곳에다가 시신을 헝겊으로 싸서 놓아두는 절차가 있습니다. 이것은 자연 조건에 따른 문화입니다. 이곳 토양의 특징이 ‘사암’의 형태이기 때문입니다. 손으로 만지면 딱딱한 모래가 뭉쳐져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숟가락 같은 도구로도 파낼 수 있는 토양입니다.
무덤으로 들어가 보니 당연히 있어야 할 시신이 없습니다. 당혹스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남자 둘이 눈부신 옷을 입고 서있습니다. 그들은 천사들입니다. 그들이 말하기를, “살아계신 분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찾고 있습니까?”하고 되묻습니다.
이 일을 겪은 후 급히 돌아와 제자들에게 알렸지만 아무도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만 그 사실을 직접 확인하러 무덤에 가보았습니다. 그러나 여인들의 말대로 예수의 시신은 없었습니다. 베드로는 이상하게 여기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가짜 죽음이 아니다
이렇게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 사건 앞에 서있습니다. 당연한 말입니다만 부활은 죽음을 전제로 합니다. 죽음 없이 부활은 없습니다. 하지만 교회 역사 속에서 등장한 많은 이단들 가운데 이런 주장을 하는 이단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진짜로 죽는다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가짜로 죽은 것, 죽은 척 한 것이라고 말하는 이단들도 있었습니다. 언뜻 그럴 듯 해 보이기도 합니다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셨고 우리 인간과 똑같이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죽음이 두렵습니다. 그래서 이 죽음 앞에서 예수님을 따라 나섰던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두 도망쳤습니다. 그리고 두려움에 떨면서 문을 걸어 잠근 채 숨어있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사건
그런데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다. 어떤 사건이 벌어졌는지 모르지만 이런 한없이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보였던 제자들이 어느 날 돌변했습니다. 예수께서 죽은 지 사흘 만에 ‘주님은 부활하셨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전보다 훨씬 더한 폭력과 협박이 가해졌지만 오히려 더 확고하게 주님의 부활을 선포했습니다.
자,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일까요? 도망치기 바빴던 제자들이 돌아와 닫아걸었던 문을 열어 제치고 목숨을 걸고 증언하는 그들에게 어떤 체험이 있었던 것일까요?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부활의 확신을 갖게 했을까?
살아생전 예수님을 만난 적도 없었던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이라는 사람 역시 제자들과 똑같은 체험을 하였습니다. “그리스도가 부활하지 않았다면 우리의 신앙이 헛된 것”이라고 확신하는 증언도 합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요?
-부활의 의미
우리는 신앙적으로 아주 중요한 문제에 도달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부활”, ‘이 사건이 지금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인지, 우리 인생에 무슨 의미를 주는 것인지’ 라는 문제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희망의 빛 하나를 찾을 수 있습니다. 지금 여인들의 상태를 보십시오. 여인들을 둘러싸고 있는 것은 자신도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일 것입니다. 그리고 시신이 사라졌다는 당혹감입니다. 그 때, 두려움에 사로잡힌 여인들이 고개를 깊게 숙이자 천사들이 말했습니다.
“어찌하여 너희들은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찾고 있느냐? 그분은 여기에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다.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들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해 보아라. ‘인자는 반드시 죄인의 손에 넘어가서, 십자가에 처형되고, 사흘째 되는 날에 살아나야 한다’고 하셨다”(24:5-6)
그 말을 듣는 순간 여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였습니다. 기억이 무엇입니까? 좀 멋스럽게 표현하면, 기억은 과거의 사건을 이 자리로 가져오는 행위입니다. 기억하는 순간 그 말 혹은 그 일은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칩니다. 서서히 여인들의 눈에 드리웠던 비늘이 벗겨지고 있었습니다. 마음 속 어둠은 사라지고 미명의 빛이 서서히 여인들의 마음에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돌문만 굴려진 게 아니라, 여인들의 마음을 온통 사로잡고 있던 슬픔과 절망의 돌문도 굴려졌습니다. 부활절 아침 여인들이 본 것은 치워진 돌이었습니다. 지금 우리도 그것을 보고 있는지요? 신앙은 복잡한 이론이 아닐 것입니다. 신앙은 이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서 피어나려는 것들을 가로막고 있는 것들, 스스로 그 속에 갇힌 채 밖으로 나올 엄두를 내지 못하도록 하는 것들이 많습니다. 두려움, 슬픔, 자기 연민, 좌절감, 원망, 미움, 자학 등이 그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이런 삶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십니다.
여인들이 기억을 통해 되찾은 것은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벌어진 사건이라는 것, 이것입니다. 그토록 무기력하던 여인들, 초라하고 불쌍한 여인들은 깨닫게 되었습니다. 합리적으로 완벽하게 설명할 도리는 없지만 그 사건은 제자들의 마음을 강하게 뒤흔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을, 그리고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삶의 토대를 사정없이 흔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삶이 바뀌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이 부활로의 초대를 무시하고 저버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부활을 경험한 사람들
말씀을 준비하다가 갑자기 예전에 읽었던 소설이 생각났습니다. 폴란드의 시엔키에비치, <쿠오바디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이 소설은 초기 기독교가 로마 네로 황제 시대의 박해 시절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소설에 베드로가 등장합니다. 로마에서 복음을 전하던 베드로는 네로 황제의 박해를 피해서 로마를 떠나게 됩니다. 도망가던 길 한 가운데서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을 만난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질문을 하는데, 그 질문이 “쿠오바디스 도미네, 즉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입니다. 이 때 예수님의 대답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네가 죽을 까봐 도망치는 그곳으로 내가 대신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 위해 가고 있다” 이 말씀을 듣고 베드로는 발길을 돌이켜 로마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게 됩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인물이 있습니다. 주인공이 로마의 장교 ‘비니키우스’인데 온갖 나쁜 짓을 하고 다니는 사람입니다. 박해의 대명사인 로마 황제 네로와 죽이 맞아서 기독교인들에게 온갖 박해와 협박, 고문과 살인을 자행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자신에게 원한을 품기에 충분한 기독교인들에게 붙잡히게 됩니다. 그들에게 했던 짓을 ‘고스란히 복수 당하게 될거라’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자신이 했던 것처럼 불에 달궈진 쇠꼬챙이로 눈을 파이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기독교인들의 우두머리격의 사람은 자신의 결박을 풀어주고, 안아서 위로해 주며 풀어주었습니다. 처음에는 자신을 놀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그에게 최악의 적이 되어야 마땅한 사람이 진정으로 그를 용서한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엄청난 위험을 감수하고서 그를 용서해 준 것입니다.
여기서가 중요합니다. 이 때 로마인 장교인 마음 깊은 곳에서 무엇인가가 허물어집니다. 그는 이 박해당하는 불쌍한 사람들이 자신보다도 훨씬 더 강하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이들 기독교인들은 네로 황제보다도 강하고, 그 무엇보다도 강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제 그가 되어야 할 것은 단 하나입니다. 그들의 일원이 되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 주인공은 깨달았습니다. 인간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는 힘과 권력, 그리고 그 폭력보다도 더 강한 것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맺음말
오늘 우리는 기독교인으로 이 자리에 있습니다. 기독교인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 무엇을 얻습니까?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났다니 신기한 일이네, 내게 없는 죽었다가 살아나는 능력이 예수님께 있다니 그저 대단한 일이네.” 이것은 우리가 부활을 기뻐하는 이유가 아닙니다. 부활은 생명을 진정으로 살리시기 원하는 하나님의 놀라우심 앞에 내가 그 일에 동참하는 일입니다. 힘과 권력, 돈과 재력, 폭력과 죽음, 그 어떤 것도 나의 생명을 앗아갈 수 없습니다. 이것이 부활입니다. 이것이 부활을 믿는 신앙입니다. 이 감격 앞에 내 자신을 드려서 부활에 참여하는 여러분들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이 부활을 여러분의 귀중한 삶을 통해서 증언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