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4월 24일 부활절 제2주 (2022년-17호)

제목 : 그 날의 증인들

본문 : 사도행전 5:27-32, 요한계시록 1:4-8, 시편 150편, 요한복음 20:19-31

【사도행전 5:27-32】

그들이 사도들을 데려다가 공의회 앞에 세우니, 대제사장이 신문하였다. « 우리가 그대들에게 그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고 엄중히 명령하였소. 그런데도 그대들은 그대들의 가르침을 온 예루살렘에 퍼뜨렸소. 그대들은 그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을 우리에게 씌우려 하고 있소. »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였다. « 사람에게 복종하는 것보다,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은 여러분이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살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분을 높이시어 자기 오른쪽에 앉히시고, 영도자와 구주로 삼으셔서, 이스라엘이 회개를 하고 죄 사함을 받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며,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복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십니다. »

【요한복음 20:19-23】

그 날, 곧 주간의 첫 날 저녁에, 제자들은 유대 사람들이 무서워서, 문을 모두 닫아걸고 있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와서, 그들 가운데로 들어서셔서, «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 하고 인사말을 하셨다. 이 말씀을 하시고 나서,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보고 기뻐하였다. [예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 » 이렇게 말씀하신 다음에,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고 말씀하셨다. «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 죄가 용서될 것이요, 용서해 주지 않으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

-인사

부활절 제2주일 오늘 예배를 맞아 이 곳에 모인 여러분 모두에게 하나님께서 크신 은총으로 함께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서로에게 평화의 인사를 전합시다. 여러분, 모두에게 주님이 주시는 평화가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서로에게 인사를 전하십시오. 오늘 예배에 함께하지 못하신 분들에게도 반가운 인사를 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성도 여러분 모두 반갑습니다. 한 주간 평안하셨는지요?

오늘은 부활절 제2주일입니다. 주일을 규정하는 이름으로 알 수 있듯이 우리가 드리는 오늘 예배 역시 주님 예수님의 부활을 다루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부활절 설교 2부 격의 말씀입니다.

이 시간 여러분들은 일상의 시간을 멈추고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기 위해 모였습니다. 제가 ‘일상을 멈춘다.’라고 표현했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평범한 일상이란 하나님과 긴밀한 연결되어 보내는 시간이라기보다는 생계와 학업 그리고 번잡한 세상일들로 몸과 맘이 분주한 시간을 말합니다. 마치 하나님을 잠시 옆으로 이렇게 치워두고 사는 시간을 말하는 것만 같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우리의 일상의 일이 아니라 일상과 멀리 떨어진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예배가 우리 삶 한가운데 있는 일이라는 것을 놓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평범한 생활 속에서 신앙생활 하는 평범한 신앙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기 예배와 예배를 통해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편에는 말씀드린 바쁜 세상살이가 있습니다. 제게 이 둘 사이가 너무나 거리가 멀게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이 둘 사이의 간격을 메우는 일입니다. 오늘 이 시간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 머무는 자리”라는 것은 바꿀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 시간을 풍요롭게 가꾸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의 배경

오늘 복음서 말씀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날, 곧 주간의 첫날 저녁에” 이렇습니다. 지난주일 말씀의 시작은 “주간의 첫날 이른 새벽에” 이렇게 표현되고 있는 것을 보면 지난주일 말씀과 오늘 말씀이 같은 하루 안에 벌어진 사건을 다루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부활 사건의 시작은 하루의 새벽에 무덤을 찾아갔던 여인 혹은 여인들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새벽이 지나갔다고 해도 아직 예수님이 부활하신 사건은 아직 끝난 게 아닙니다. 그날 저녁이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모두 모여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 가운데 분위기가 평화롭고 편안한 분위기는 아닙니다.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무서워서 문을 모두 닫아걸어 잠궜습니다. 이 상황이 부활의 날 저녁의 모습입니다. 뭔가 안타깝고, 답답하고, 부끄러운 마음도 드는 그런 장면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현장감을 살려서, 우리의 모든 경험과 감정을 동원해서 그 시간으로 가볼 필요가 있습니다. 타임머신을 타고 그 시간으로 가보십시오. 그 시간을 온 세상이 십자가 사건 이후에, 이 벌어진 일로 인해서 고요해졌습니다. 며칠 전, 예루살렘 전체가 소란스러웠습니다. 예수라는 갈릴리 청년에 대한 소문이 예루살렘에 가득했습니다. 그가 유대인의 왕이라든가, 그가 메시아라는 소문이 가득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따랐습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머리 속으로 급하게 계산을 했겠지요. 예수라는 이 때문에 내게 이득될 것과 손해날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예수를 죽이는게 낫다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백성들을 선동하고, 죽일 죄목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빌라도에게 사형을 언도하도록 유도했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대로 당시 가장 센 형벌인 십자가형을 받아냈습니다. 그리고 이 예수라는 이를 십자가에 매달아서 죽였습니다. 이것을 보는 사람들은 다시는 이런 생각들을 꿈꾸지 못하도록 본보기를 보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라는 이를 따르던 많은 사람들이 조용해졌습니다. 사라진 것 같았습니다. 이렇습니다.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따르던 이들이 모두 뿔뿔이 흩어진 줄로만 알았는데 어느 곳에 모여 있었습니다. 겁에 질린 채로 남았습니다. 이제 곧 있으면 원래 이들이 하던 일, 원래 살던 삶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의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들에게 예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이들에게 평화의 인사를 건네셨습니다. 평화를 빌어 주신 후에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20:21)고 말씀하십니다. 이 파송의 말씀이 조금 민망합니다. 제자들이 지금까지 보인 모습은 실망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3년씩이나 주님과 동행했지만 그들은 주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주님과 더불어 열리는 뭔가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듯 기뻐했지만 그들은 여전히 옛날 삶의 습성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누가 주님의 좌우편에 앉을 것인가를 놓고 갈등했고, 위험이 다가오자 다 달아나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전혀 그런 내색을 하지 않으시고, 자격이 없는 데도 받아들여진다는 것, 바로 여기에 은총의 신비가 있습니다.

그런 후에 주님은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을 받아라.” 요한복음에서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그 영은 살리는 영입니다. 주님과 만난 사람은 다 살아났습니다. 나사로만 살아난 것이 아닙니다. 갈릴리의 어부들도, 세리도, 병자들도, 귀신 들린 자들도, 행실이 나쁘다고 소문이 났던 여인도 다 참 사람으로 살아났습니다.

-예수님은 왜?

이 모습이 말씀 속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 분명하게 떠오르는 모습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머리속에 예수님의 모습을 떠올려 보십시오. 예수님은 늘 사람들 곁에, 그것도 사회적 신분이 낮은 사람들 곁에 계셨습니다. ‘매국노’라고 손가락질 당하던 세리, 불결하다 여겨지던 여인들,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사람들, 병자들, 상처받고 신음하는 사람들 속에 계셨습니다. 이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하나님 나라를 들려주시고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뜬 구름 잡는 이야기였다면 아마도 사람들은 예수님 곁에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자신들의 삶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려진 삶이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자신도 충분히 하나님의 은총 안에 있는 귀한 존재임을 발견했습니다. 또 세상의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 당하는 것이 정당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런 점이 예수님의 공생애가 실제 생활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 우리의 삶에 생기를 불어넣어주는 일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일들이 이 시대 우리 삶에도 여전한 일인지요? 예수님으로부터 새로운 생명을 얻었던 사람들처럼 오늘 우리도 새 생명의 기운을 여러분 안에서 감지하고 계신가요? 주님은 오늘 우리를 이 자리로 초대하고 계신다고 믿습니다. 예수님의 이 초대는 그렇게 깨닫지 못하고 계신 분들 역시도 모두 포함합니다. 그 어떤 누구도 하나님의 사랑의 초대에서 배제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 사랑의 정점은 “십자가와 부활 사건”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그저 좋은 이야기, 달콤하고 귀한 얘기 들려주시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저 아픈 사람들 고쳐주고, 마음이 병든 사람들 위로하시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신 것은 하나님 사랑의 정점을 보여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이 “십자가 사건이고 부활 사건”입니다.

-십자가와 부활 사건

부활사건을 어떻게 하면 잘 이해하고 깨달을 수 있을까요? 이미 죽어서 썩어가던 시체가 살아났으니, 하나님이 이런 기적을 일으키셨으니,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을 더 잘 믿을 수 있을까요? 이렇게만 이해하면 부활 신앙을 아직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현실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기적이 일어났던 사건으로 이해하면 복음을 아직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구약의 말씀을 읽다보면 기적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홍해바다가 갈라지기도 하구요, 갈멜산에서는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번제물을 다 태웠다고 합니다. 이것이 과학적으로 사실이냐 아니냐를 가지고 논해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 시대 그 사건을 증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성경말씀 속 기적이야기들을 듣고 어떻게 반응하나요? “실제로 일어난 일이다. 그러니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어떤 분은 “실제로 우리 현실에서는 벌어질 수 없는 일이라서 솔직하게 믿을 수는 없지만 교회에서 하는 이야기니 믿는 척한다, 아니면 그러려니 한다.” 이 두 가지 반응은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유대인들은 온갖 기적들을 보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런 기적이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이 자신을 보여주시는 능력, 표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단순하게 말하면 눈앞에서 벌어진 기적들을 보았기에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사람들이 예수님을 향해서 메시아라는 증거를 보이라고, 기적과 표적을 보이라고 요구했습니다. 오늘날에도 그런 분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눈앞에서 눈깜짝할만한 기적을 보면 믿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과연 기적을 보게 되면 믿게 될까요? 믿음이 생겨날까요? 구약성경 말씀들로 돌아가 보십시오. 유대인들은 이미 하나님이 일으키신 기적을 많이 보았습니다. 출애굽 사건입니다. 바다가 갈라지는 기적을 본 사람들은 믿음이 날로 커지던가요? 구약성경이 보여주는 모습은 그런 기적과 표적이 많이 일어났다고 해서 유대인들의 믿음이 좋아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욱 강렬한 기적을 달라 표적에 탐닉하는 모습을 더 많이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기적과 표적을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요나의 표적밖에는 말할 게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놀라운 기적과 표적을 보았다고 해서 그것으로 믿음이 생기는 게 아닙니다. 기적과 표적은 일시적인 겁니다. 더 나아가 기적과 표적은 사람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의 결과이지 기적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믿습니다. 내 눈앞에서 나를 놀라게 할 일이 벌어지면 믿는다고 합니다.

-복음서의 부활 사건

부활 사건으로 가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무서워서 문을 닫아걸고 있었던 제자들 가운데 오셨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 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증명할 수도 없습니다. 아무리 과학적인 잣대로 증명하려해도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섣부르게 과학의 잣대를 들이대는 일도 복음을 오해하게 하는 일입니다. 과학적인 증명으로 부활 사건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도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저녁 무렵 음식을 함께 나누어 먹을 때 비로소 눈이 밝아져 예수이신 줄 알게 되었다고 복음은 전합니다. 또한 누가복음에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 가운데 오셨을 때, 제자들은 유령인가 하여 무서워하였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을 어떻게 이해하시겠습니까? 문이 닫혀있는데도 문을 따로 열지도 않고 들어오셨으니 기적 중의 기적과 같은 놀라운 사건이니 제자들이 믿게 되었습니까? 예수님이 변신술이라도 보이셨다는 말입니까? 이런 일들이 벌어졌기에 제자들이 부활 신앙을 갖게 되었다는 말입니까? 그래서 두려움에 떨던 제자들이 밖으로 뛰쳐나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전파하게 되었다는 말입니까? 복음이 전하는 바가 이런 유령에 홀려서 제자들이 그 증인이 된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부활을 전한 사도들

사도행전 5장의 말씀입니다. 대제사장과 사두개파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예수라는 이를 십자가에 매다는 것으로 끝난 줄로만 알았던 사건이 점점 더 커졌습니다. 겁에 잔뜩 질려서 도망가던 이 제자들이 돌아와 복음을 전합니다. 이들을 감옥에 가둬도 이들의 목소리는 점점 더 커졌습니다. 이들에게 예수가 전한 바를 가르치지 말라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제자들이 전한 말씀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입니다. 십자가에 대한 말씀입니다. 제자들은 “너희가 무법자들의 손을 빌어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에 대한 객관적인 사실을 가리킵니다. 제사장, 사두개파, 서기관 등,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하나님 나라에 근거해서 강하게 그들을 비판한 나사렛 예수를 신성모독과 사회소요 죄로 로마 정권에 고발했습니다. 결국 유대 종교와 로마 정치의 야합으로 예수님은 당시 가장 저주스러운 형벌인 십자가에 처형당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베드로는 하나님이 예수님을 살리셨다고 전합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살리셨다는 말을 너무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은 다시 살지 못합니다. 그리고 무작정 무한히 오래 살지도 못합니다. 인류 역사에서 지금까지 다시 산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다시 살았다는 소문은 많습니다. 죽어서 천당을 보고 돌아왔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도 다시 죽는 것은 당연한 자연의 이치입니다.
복음서에도 다시 살았다는 이야기가 나오긴 합니다. 나인이라는 마을에 살고 있던 과부의 외아들이 죽어서 상여에 실려 가다가 예수님의 의해서 다시 살아났다고 합니다. 마리아와 마르다의 오라비인 나사로도 죽었다가 다시 살았다고 합니다. 복음서의 이런 기록들은 실제로 죽었다가 예수님처럼 부활한 사람에 관한 이야기와는 다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의 부활은 그런 소생의 체험과는 질적으로 다릅니다. 다시 살아났다가 또 다시 죽는, 그리고 다시 또 살아나는 윤회도 아니고, 환생도 아니고, 영원한 회귀도 아닙니다. 아담 이후로 죄와 죽음에 묶인 인류의 운명을 끝장내고 전적으로 새로운 생명의 세계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구원 사건입니다.
‘구원 사건’이라는 말을 기억하십시오. 부활은 지금 여기서의 이런 생명 형식이 영원하게 계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 무궁히 잘 살고 잘 먹는 세상살이의 반복이 아닙니다. 사람은 본성적으로 늘 그런 삶을 꿈꿉니다. 그런 꿈이 이집트 파라오들에게는 피라미드의 지하세계 건설로 나타났습니다. 중국의 황제들 중에서도 그런 지하세계를 건설한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꿈은 아무리 야무지게 보여도 허황된 것입니다. 지금은 모두 관광지가 되었을 뿐입니다. 파라오의 미라나 간혹 매스컴에 보도되는 평범한 이들의 무덤에서 발견되는 미라나 다를 게 하나도 없습니다. 이런 삶은 아무리 야심차게 계획해도 결국 허무하게 끝나버리고 맙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결국 죽음과 허무로 끝나는 삶으로의 복귀가 아니라 하나님이 새롭게 시작케 하시는 생명으로의 질적인 변화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하면 잘 설명할 수 있을까요?
1930-40년대 우리나라에 왔던 선교사들에 관한 글을 우연히 읽게 되었습니다. 그 가운데 ‘십자가와 부활신앙’을 너무나도 잘 표현한 이야기가 있어서 소개합니다.
북쪽 공산주의자들에게 붙들린 선교사들은 평안도 어느 골짜기로 끌려갔습니다. 그곳에서 수용소를 짓는 강제노동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하루 300g 정도 배급되는 기름기라고는 전혀 없는 형편없는 식량, 살을 에는 추위, 신발도 없이 질퍽한 곳에서 일을 할 때 얼어버린 발이 전하는 찌르는 듯한 고통, 그리고 동상, 욕설과 이어지는 폭력.” “영양실조로 퉁퉁 부은 발이 아파 쓰러지거나 견디지 못해 쓰러지는 것을 즐기는 이들” 앞에 놓인 것이 이들의 현실이었습니다. 그중에 ‘요한’이라 불린 신부가 있었습니다. 발이 부어서 걷지도 못했고, 차오르는 복수 때문에 늑골 아래가 심하게 부풀어 올라 숨도 쉬지 못하는 형편이었습니다. 결국에는 걸을 수 없게 되자 이에게 맡겨진 일은 똥거름더미 위에 앉아서 거름이 잘 발효될 수 있도록 손으로 두드리는 일이 그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맡은 일이었습니다. 이 거름더미 위에서 생명을 다한 요한 신부가 마지막으로 한 말입니다. “우리가 이 시련을 다 이긴다 해도, 우리가 심지어 여기서 하나님을 위해 순교한다 해도, 아니 우리가 여기서 탈출한다 해도 우리가 이 시련을 사랑이 아니라 악으로 참아내는 거라면 우린 아무 것도 아닌게 되는 거라네. 어제 저녁 기도 시간에 나는 이 시련을 수락했네. 하나님께 예, 하고 말씀드렸어. 나는 알았네. 저들이 우리에게 빼앗을 수 없는 단 한 가지는 그들이 “억지로” 우리에게 준 이 고통을 우리가 “기꺼이” 받아 사랑으로 하나님께 봉헌한다는 것이네.”

-이 일의 증인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이런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특별한 능력이 있어서 십자가 고통을 잘 참아냈고, 견디기 힘든 최고의 극한의 고통을 견디셨기에 십자가가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차력사가 아닙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 인류를 향해 끝없이 내미시는 손길이기에 그렇습니다. 부활 경험은 십자가 사랑이 승리했다는 선언입니다. 세상의 불의가 아무리 판을 치고 승리한 듯 보여도, 그리고 십자가와 같은 처참한 죽음으로 굴복시킨다 하여도 하나님의 사랑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죽음으로 죽음을 이기신 사건입니다. 이것을 믿음으로 알게 된 이들이 전한 이야기가 바로 복음이자 우리가 믿는 기독교입니다.

“우리는 모두 이 일의 증인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의 삶이 어려움과 고통 가운데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어떤 말로도 쉽사리 위로가 되지 않음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와 부활의 신앙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가 죽음이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새 생명으로 살아나리라고 믿습니다. 하나님 사랑의 승리한다는 사실의 증언자, 곧 우리의 삶이리라 믿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십시오. 그 사랑이 삶으로 배어나오도록 하십시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