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새로운 계명
본문 : 사도행전 11:1-18, 요한계시록 21:1-6, 시편 148편, 요한복음 13:31-35
【요한계시록 21:1-6】
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이전의 하늘과 이전의 땅이 사라지고, 바다도 없어졌습니다. 나는 또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이,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신부와 같이 차리고,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때에 나는 보좌에서 큰 음성이 울려 나오는 것을 들었습니다. « 보아라, 하나님의 집이 사람들 가운데 있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실 것이요,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나님이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니, 다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다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 그 때에 보좌에 앉으신 분이 말씀하셨습니다. « 보아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한다. » 또 말씀하셨습니다. « 기록하여라.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다. » 또 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 다 이루었다. 나는 알파며 오메가, 곧 처음이며 마지막이다. 목마른 사람에게는 내가 생명수 샘물을 거저 마시게 하겠다.
【요한복음 13:31-35】
유다가 나간 뒤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 이제는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께서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다. [하나님께서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으면,] 하나님께서도 몸소 인자를 영광되게 하실 것이다. 이제 곧 그렇게 하실 것이다. 어린 자녀들아, 아직 잠시 동안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겠다. 그러나 너희가 나를 찾을 것이다. 내가 일찍이 유대 사람들에게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 하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나는 너희에게도 말하여 둔다. 이제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으로써 너희가 내 제자인 줄을 알게 될 것이다. »
-인사
주안에서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평화를 여러분에게 전합니다. 서로에게 인사를 전합시다. 여러분 모두 반갑습니다.
날씨가 따뜻하고 또 조금씩 더워지고 있습니다. 여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하나님 만드신 세상 속에 온 우리는 보냄을 받은 존재입니다. 그렇기에 지구라는 생명체가 우리에게 제공하는 아름다움을 맘껏 누려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세상에 온 여러 가지 이유 중의 하나임에 분명합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우리는 세상의 아름다움을 맛보면서 살기 보다는 맞서고 갈등하고 대립하고 맙니다.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전쟁을 보십시오. “우리는 안전하다, 평화롭다” 말하지만 우리 사는 세상은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훼손하는데 열중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물리적인 전쟁이 없는 우리 안에서도 ‘하나님 아닌 것’에 목매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줄도 모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의 생을 영원하지 않은 것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하십시오. 영원한 분은 오직 하나님 한분이십니다. 하나님께 집중하고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묵시문학
오늘 우리는 요한계시록이라는 묵직한 책 앞에 있습니다. 우리가 나누려는 말씀을 위해서 지난 주 나누었던 말씀을 먼저 상기해 보아야 합니다. 지난주일 우리는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 몇 가지 사항들을 나눈 바가 있습니다.
첫째로는 요한계시록은 “묵시문학”이라는 장르를 가지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묵시문학은 쉽게 한 마디로 말해서, 해야 할 간절한 말들이 있는데, 전해야 할 간절한 말씀이 있는데 현실의 조건은 그것을 말해서는 안 되는 현실, 말할 수 없는 현실에서의 글이 묵시문학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기억나시죠? 현실의 조건은 사람들을, 특히나 믿는 사람들을 옥죄고 있는 엄혹한 정치적인 문제이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절실한 신앙의 현실입니다. 그렇기에 하고 싶은 말을 직접적으로 말할 수 없기에 상징과 비유가 가득한 단어와 문자들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는 묵시문학이 아무리 상징과 비유로 가득한 글이라고 해도 우리의 발을 땅에서 떼서는 절대로 안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무슨 말인가 하면 요한계시록의 상징이 가득하기 때문에 현실과 먼 딴 세상 이야기, 판타지와 같은 허무맹랑한 이야기들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 그것도 구체적으로 박해당하는 그리스도인들의 현실을 담고 있다는 사실을 ‘반드시’ 전제로 해야 합니다. 현실을 떠난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닙니다. 요한계시록의 현실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박해 당하는 구체적인 현실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와 마찬가지라는 말입니다.
-요한문서들
요한계시록의 저자로 알려진 ‘요한’사도 이 분은 적어도 성경 안에 자신의 이름으로 많은 책을 남겼습니다. 그렇지요? 요한으로 시작하는 성경말씀을 떠올려 보십시오. 먼저, 요한복음이 있구요. 요한1, 2, 3서와 함께 요한계시록이라는 책을 남겼습니다. 신약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요한이란 이름으로 기록된 많은 책들이 모두가 동일한 저자는 아닐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이해하고 넘어가 버리면 우리가 중요한 것을 놓치고 맙니다. 적어도 이 책들에 저변에 흐르는 공통의 주제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먼저 요한계시록의 말씀입니다.
-창조에서 창조로
오늘 우리가 봉독한 요한계시록 21장은 성경의 맨 마지막 책의 마지막 단락에 해당이 됩니다. 그러니까 성경 전체의 마지막 단락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대하면서 아주 흥미로운 사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성경의 맨 마지막에 이르러 ‘창조’에 대한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1절)
반대로 성경의 첫 번째 책인 창세기의 첫 단락을 상기해 보십시오. 단락의 주제가 무엇인지를 상기해 보시기 바랍니다. 바로 “창조”입니다. 성경의 맨 처음인 창세기 1장과 2장은 하나님의 세상 창조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오늘 읽은 성경의 맨 마지막 단락도 창조입니다. 창조이긴 창조인데, 그냥 창조가 아니라 ‘새로운 창조’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여러분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제게는 무척이나 흥미롭게 여겨지는 성경의 구조입니다. 성경 전체가 하나님의 세상과 우리를 만드심에서 시작해서 세상과 우리를 새롭게 만드심으로 끝맺고 있습니다. 그러면 가운데는 무엇이 있을까요? 인간이 하나님을 벗어나고, 떠난 이야기들이 있겠지요. 그러니까 성경의 한 가운데 이야기들은 이런 현실에 놓인 인간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구원의 대하드라마’인 셈입니다.
-요한 사도의 현실과 대응
이 글을 기록한 요한 사도의 상황으로 가보십시오. 그가 처한 현실이란 게 어떤 상황인지를 보시기 바랍니다. 현실은 아시다시피 엄혹합니다. 로마 황제는 이제 아예 작정하고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기 시작합니다. 로마 황제 자기가 하나님인데, 초라하고 볼품없는 저 그리스도인들이 섬기는 하나님을 용인할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용감하게 목숨을 내던지면서까지 하나님 섬기는 그들을 두고 볼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기만 해도 죽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으로 금방이라도 잡혀가서 사자밥이 되는 현실이 눈앞에서 펼쳐집니다. 요한 사도 역시 이런 죽음의 위협 앞에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조차도 ‘밧모섬’이라는 낯선 곳에 숨어서 피해있습니다. 현실이 비참하고 참혹하다는 말입니다.
요한 사도의 눈에 비친 세상의 모습은 비참함과 참혹함입니다. 가장 큰 고통은 미래를 희망할 수 없다는 데에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은 자포자기하고 맙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망가집니다. 세상 탓, 사람 탓하며 염세적으로 변하기도 하고, 극단적인 쾌락주의로 빠져들기도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떠나고 맙니다.
-우리의 현실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요? 이런 경험들이 있으신가요? 누군가는 현실이란 무료한 일상의 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은 어제와 똑같고, 내일 역시도 오늘과 같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달라질 것이 하나도 없는 삶을 누군가는 살아갑니다. 이런 것을 ‘소극적인 염세주의’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어떤 누군가는 자신의 현실이 비참하고 고통스런 현실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세상살이에 시달리다 못해 ‘요한 사도’ 만큼이나 자신의 현실은 아프고 고통스럽다고 여기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삶입니다.
오늘 말씀 속에는 참혹한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죽음, 슬픔, 울부짖음, 고통”입니다. 혹시 우리의 삶도 이렇게 표현되고 있습니까? 물론 구체적인 모습은 다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사자밥이 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권력 있는 사람이 박해를 가하거나 사회적으로 차별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의 모습은 초기 그리스도인들보다도 더 무력합니다. 객관적인 현실은 훨씬 나은 삶의 여건을 가지고 있지만, 우리는 넘어지면 일어서려고 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을 탓하기 바쁘고, 현실의 여건이 자신에게 유리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려는 마음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의 모습입니다.
요한 사도 시절 사람들도 그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불필요하다고 여길 때,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 하나님이 세상과 사람을 포기했다고 여길 때, 그러나 요한 사도는 세상을 창조한 하나님이 세상과 사람을 포기하신 것이라고 믿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세상을 완전히 새롭게 창조할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창조의 하나님은 선한 존재이기에 지금과 같은 잔인한 세상을 그대로 두고 보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처음 것들은 다 지나갔다고 노래할 수 있었습니다. 이전의 질서는 끝났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처음과 끝, “알파와 오메가”이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오늘 말씀에서 요한 사도가 본 환상입니다.
-요한 사도의 확신
요한 사도는 무엇을 가지고 이런 확신을 했을까? 오늘 우리의 신앙의 디딤돌과 같은 확신입니다. 기독교 전설에 따르면, 밧모섬에서 요한 사도는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후에 배를 타고 이동합니다. 밧모섬은 오늘날 터키와 그리스 사이에 있는 섬입니다. 이곳에서 그가 닿은 곳은 오늘날 터키의 유명한 관광지인 ‘에베소’입니다. 에베소에서 90이 넘도록 장수하다가 일생을 마쳤다고 전합니다. 그런데 요한 사도가 에베소에서 놀고먹은 것이 아닙니다. 신앙의 제자들을 양육했습니다. 하나는 ‘이그나티우스’ 안디옥의 주교입니다. 이분은 원형 경기장에서 ‘사자밥’이 되어 순교한 분입니다. 전설에 따르면 이그나티우스 이분이 누군가 하면 예수님께서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고 하실 때 예수님이 무릎에 앉혔던 그 아이가 이그나티우스 주교라는 전설이 있습니다. 이분은 요한 사도를 따라 제자가 되었던 사람입니다.
또 하나가 ‘폴리캅’이라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 폴리캅은 168년에 화형을 당하게 되어 순교했는데, 그가 했다는 마지막 말은 이 말입니다. 그리스도를 욕하고 배반하면 살려주겠다는 말에 “나는 여든 여섯 해 동안 나는 그분을 섬겼습니다. 그분은 나에게 나쁘게 하신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나를 구원하신 나의 왕을 내가 욕하고 저주할 수 있겠습니까?”였다고 합니다.
-영원하고 완전한 계명
이들의 영혼을 붙들고 있었던 것은 물론 주님 예수님이시지만 그들 곁에서 신앙의 모범이 되어 주신 분은 스승인 요한 사도였습니다. 그들이 요한 사도로부터 배운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오늘 복음서의 말씀이기도 하고 ‘요한’이라는 이름이 들어간 성경의 모든 책들의 공통된 주제 바로 이것입니다.
“이제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13:34)
오늘 복음서 말씀의 시작을 눈여겨보시기 바랍니다. “유다가 나간 후에”라고 쓰여진 문구를 보셨습니까? 유다는 예수의 곁을 떠났습니다. 그렇기에 유다는 그 새로운 계명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왜일까요? 유다의 사랑의 방법은 달랐습니다. 유다가 생각하고 확신한 세상을 구원하는 방법은 권력을 쟁취하고 영향력을 갖는 것이 구원의 방법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방법, 그리고 요한 사도에게 전해진 그 사랑의 방법으로 세상을 구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이, 어떤 방법이 여러분을 구원할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 구원의 실체가 무엇입니까?
-맺음말
세상은 새로운 시대가 왔다고 말합니다. 이제 사람들이 사는 세상은 이전과 전혀 다른 세상일 것이라고 예견합니다. 그리고 교회도 많이 바뀔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합니다. 이런 현실 앞에서 뭔가 두렵고 막연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믿습니다. 영원한 것이 있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합니다. 새로운 계명은 무엇이지요?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요청이기도 하고, 명령이기도 합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으로 우리는 구원받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으로 우리는 주님의 제자입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을 받드는 공동체가 바로 이 시대의 교회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 시대 우리는 길을 잃고 있습니까? 갈 길을 모르겠습니까? 살아갈 방법을 모르겠습니까? 주님의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을 받드십시오. 구원의 길이 우리 앞에 보일 것입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