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5월 29일 주의 승천주일 (2022년-22호)

제목 : 아멘, 오십시오. 주 예수님!

본문 : 사도행전 16:16-34, 요한계시록 22:12-14,16-17,20-21, 요한복음 17:20-26

【사도행전 16:16-34】

어느 날 우리가 기도하는 곳으로 가다가, 귀신 들려 점을 치는 여종 한 사람을 만났는데, 그는 점을 쳐서, 주인들에게 큰 돈벌이를 해주는 여자였다. 이 여자가 바울과 우리를 따라오면서, 큰 소리로 «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들인데, 여러분에게 구원의 길을 전하고 있다 » 하고 외쳤다. 그 여자가 여러 날을 두고 이렇게 하므로, 바울이 귀찮게 여기고 돌아서서, 그 귀신에게 «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네게 명하니, 이 여자에게서 나오라 » 하고 말하니, 바로 그 순간에 귀신이 나왔다.
그 여자의 주인들은, 자기들의 돈벌이 희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붙잡아서, 광장으로 관원들에게로 끌고 갔다. 그리고 그들을 치안관들 앞에 세워 놓고서 « 이 사람들은 유대 사람들인데, 우리 도시를 소란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로마 시민인 우리로서는, 받아들일 수도 없고 실천할 수도 없는, 부당한 풍속을 선전하고 있습니다 » 하고 말하였다. 무리가 그들을 공격하는 데에 합세하였다. 그러자 치안관들은 바울과 실라의 옷을 찢어 벗기고, 그들을 매로 치라고 명령하였다. 그래서 이 명령을 받은 부하들이 그들에게 매질을 많이 한 뒤에, 감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그들을 단단히 지키라고 명령하였다. 간수는 이런 명령을 받고, 그들을 깊은 감방에 가두고서, 그들의 발에 차꼬를 단단히 채웠다. 한밤쯤 되어서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고 있는데, 죄수들이 듣고 있었다.
그 때에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나서, 감옥의 터전이 흔들렸다. 그리고 곧 문이 모두 열리고, 모든 죄수의 수갑이며 차꼬가 풀렸다. 간수가 잠에서 깨어서,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는, 죄수들이 달아난 줄로 알고, 검을 빼어서 자결하려고 하였다. 그 때에 바울이 큰소리로 « 그대는 스스로 몸을 해치지 마시오. 우리가 모두 그대로 있소 » 하고 외쳤다. 간수는 등불을 달라고 해서, 들고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면서,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렸다. 그리고 그들을 바깥으로 데리고 나가서 물었다. « 두 분 사도님, 내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 » 그들이 대답하였다. « 주 예수를 믿으시오. 그리하면 그대와 그대의 집안이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간수와 그의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들려주었다. 그 밤 그 시각에, 간수는 그들을 데려다가, 상처를 씻어 주었다. 그리고 그와 온 가족이 그 자리에서 세례를 받았다. 간수는 그들을 자기 집으로 데려다가 음식을 대접하였다. 그는 하나님을 믿게 된 것을 온 가족과 함께 기뻐하였다.

【요한계시록 22:12-14, 16-17, 20-21】

« 보아라, 내가 곧 가겠다. 나는 각 사람에게 그 행위대로 갚아 주려고 상을 가지고 간다. 나는 알파며 오메가, 곧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시작이며 끝이다. 생명 나무에 이르는 권리를 차지하려고, 그리고 성문으로 해서 도성에 들어가려고, 자기 겉옷을 깨끗이 빠는 사람은 복이 있다.
나 예수는 나의 천사를 너희에게 보내어, 교회들에 주는 이 모든 증언을 전하게 하였다. 나는 다윗의 뿌리요, 그의 자손이요, 빛나는 샛별이다. » 성령과 신부가 « 오십시오! »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을 듣는 사람도 또한 « 오십시오! » 하고 외치십시오. 목이 마른 사람도 오십시오. 생명의 물을 원하는 사람은 거저 받으십시오.
이 모든 계시를 증언하시는 분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그렇다. 내가 곧 가겠다. » 아멘. 오십시오, 주 예수님!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있기를 빕니다. 아멘.

-인사

교우 여러분, 안녕하세요?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서로 인사 나눕시다. 한 주간 평안하셨습니까? 날씨가 참 좋습니다. 그다지 덥지도 않고, 춥지도 않고, 햇볕은 따뜻하고, 바람은 시원합니다. 생명의 기운이 온 세상을 사로잡는 것만 같습니다.

이렇게 좋은 시절, 이 아름다운 세상에서 하나님의 피조물인 우리 사람들이 함께 어우러지고, 주님 주신 생명 맘껏 누리며 살면 좋을 텐데, 뉴스를 통해 들려오는 비극적인 소식에 마음이 아프고 불편한 생각이 듭니다. 미국 텍사스 주의 ‘유밸디’라는 도시에서 18살짜리 소년이 한 초등학교에 들어가 총기를 난사하여 2학년에서 4학년 학생 19명과 교사 2명을 죽였다는 뉴스를 듣게 되었습니다. 도대체 그 세상은 어떤 세상이길래 18살짜리 소년이 합법적으로 총을 구매할 수 있는지 저는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이해가 되시는지요? 당연히 민간인이 총을 살 수 있다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지만 이렇게 어리고 미성숙한 소년이 총을 가질 수 있다니요? 그 내막을 들어보니 총기를 규제하는 법이 필요한데, 하지만 총을 팔기 위해서 총기단체가 막대한 돈을 들여서 총을 사고파는 것을 규제하는 법을 만들지 못하게 한다고 합니다. 총을 만드는 회사가 총을 팔아야 하기에, 국회에서 규제하는 법을 만들지 못하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돈의 논리가 생명 원리보다 중요하게 여겨지는 세상의 인간의 비참한 모습입니다.

-빌립보에서

오늘 우리가 읽은 사도행전의 한 장면을 보면 이런 돈의 논리가 이미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을 휘어잡고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아! 주님께서 이런 세상에서 병들어 가는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세상의 모습은 오늘날만의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지난 주 사도행전의 말씀을 우리가 읽은 바가 있습니다. 그 말씀에 보면 바울 사도가 아시아지역에서 유럽으로 복음 전파의 방향을 바꾸고 이제 ‘빌립보 교회’라는 유럽 지역에 처음으로 설립된 교회를 세운 이야기와 함께 새로 믿게 된 자색 옷감 장수 ‘루디아’ 여인의 이야기까지 나눈 바가 있습니다. 뭔가 희망에 들뜨는 듯한 분위기를 엿볼 수 있는 것이 이 사건이었습니다.
아마도 루디아 여인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가정 교회’로 복음 전파가 시작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데 이제 든든한 터전이 마련되어 가는 중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곤란한 일이 생깁니다. 바울 일행은 길을 가다가 어떤 여자를 만납니다. 그 여자의 직업은 점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점치는 무당입니다. 그런데 이 여자는 점만 치고 돈은 주인이 차지했습니다. 자영업이 아니라 고용된 사람일 뿐입니다. 이 여자가 바울 일행을 따라오면서 다음과 같이 고함을 질렀습니다.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들인데, 여러분에게 구원의 길을 전하고 있다”(17절). 이 말만 들으면 이 점치는 여자는 바울 일행을 높이 평가하는 게 분명해 보입니다. 좋은 말도 한두 번이지 이 여자가 매일 반복해서 이런 말을 해대니까 바울 일행이 짜증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에 따르면 바울이 심히 괴로워했다고 합니다. 바울은 이 여자가 귀신 들렸다고 보고 이 여자를 향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네게 명하니, 이 여자에게서 나오라” 그러자 귀신이 즉시 나왔습니다. 돈벌이 수단을 잃은 점쟁이 여자의 주인이 가만히 있지 않았겠지요? 관헌 당국에 고발을 합니다. 이 일로 바울 일행은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됩니다.

우리 신앙인의 입장에서 보면 유럽에 처음 교회가 설립되고 복음 전파가 순조롭게 거리낌 없이 착착 잘 진행되면 보기도 좋고 우리 마음도 편할 텐데, 하나님이 그렇게 이끌어주시면 좋을 텐데 우리는 그렇게 희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이라고 해서 깔끔하고 아무런 잡음도, 불편한 일도 없이 진행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일을 하는 우리가 완전하지 않은 사람이기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일에 끼어든 우리 인간의 모습을 고려해서 말씀을 대해야 할 것입니다. 특히나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도 순간순간 끼어드는 인간적 욕심이 있습니다. 이 일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드러내려는 자기 자랑의 마음이 끼어듭니다. 또 자신이 대단한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다는 자기기만의 모습도 하나님의 일에 끼어든 사람의 생각일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런 인간의 모습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일을 이루어나가십니다. 이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그렇게 믿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지럽고, 하나님의 뜻이 진정으로 드러나고 있나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제대로 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인지 의문이 생깁니다. 그러나 이 혼탁한 세상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이루어가고 계심을 보는 것, 그리고 종국에는 하나님이 역사를 완성하신다는 믿음, 이것을 기독교적 종말 신앙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가진 성경의 맨 마지막 책 요한계시록이 전하는 말씀의 최종 완성입니다.

-불편한 재림신앙?

우리가 책이나 영화, 드라마를 보게 되면, 그 끝이 궁금합니다. 그래서 재미가 좀 덜하더라도 끝까지 보게 되는 경우가 많지요. 우리가 여가생활로 대하는 소설이나 영화를 봐도 그런데 하물며 성경의 맨 마지막은 무슨 결론으로 끝맺음을 하고 있을까? 우리의 깊은 관심이 요구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 결말을 다루는 영역을 ‘종말론’ 또는 ‘종말 사상’이라고 합니다. 종말론은 세상 끝, 세상 마지막에 대한 생각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때를 살아가는 신앙을 가리켜서 ‘재림신앙’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모든 내용의 결론이 마지막 구절인 22:20절을 보겠습니다.

“이 모든 계시를 증언하시는 분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그렇다. 내가 곧 가겠다. » 아멘. 오십시오, 주 예수님!”

이런 구절을 읽으면 대개 ‘이게 뭐지?’ 하는 당황스런 느낌을 받을 겁니다. 대충이라도 이해하고 싶으면, 성경이 말하는 걸 따라가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고 말씀하셨고, 그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어서 오시라.’고 반기는 말을 합니다. 재림 신앙을 가리킵니다.
재림신앙, 이건 기독교의 아주 오래된 신앙입니다. 행 1:6-11절에는 예수님의 승천 장면이 나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당분간 지상에 머물러 있다가 구름을 타고 하늘에 올라가셨습니다. 그 순간에 하늘에서 천사가 나타나서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오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고전 16:22절에서 바울은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서 찬송가 후렴처럼 불리던 아람어 한 구절을 말했습니다. ‘마라나타’, 번역하면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입니다. 또 우리가 예배시간마다 반복하는 신앙고백이 있습니다. 사도신경입니다. 거기에도 예수의 재림은 정확하게 나옵니다.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하지만 말씀과 우리의 고백 안에 이미 이렇게 자리 잡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재림 신앙은 현대 기독교인들에게 곤혹스러운 주제입니다. 뭔가 우리가 사는 현대인의 과학이나 사고방식에 맞지 않는 듯이 보이는 재림 신앙을 무조건 문자적으로 받아들이기는 힘들고,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인으로서 재림 신앙을 거부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가능한 그런 주제는 멀리하면서 신앙생활을 합니다.
이런 태도가 이해가 되긴 합니다. 기독교인들도 세상기준에 따라서 세상살이하기에 바쁩니다. 돈 벌고, 자식 키우는 일만 해도 정신이 하나도 없습니다. 지금 여기서 해결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서 재림 문제를 그냥 그러려니 하면서 지나치기 마련입니다. 재림 문제만이 아니라 기독교 신앙의 대부분이 다 이런 식으로 다뤄지는 것이 아닐까 안타까운 생각이 듭니다.

-우리의 어려움

한편, 재림 신앙에 관심을 갖고 있는 신자들도 실제로 재림신앙의 세계로 들어가는데 어려움이 있습니다. 두 가지 점에서 그렇습니다.
하나는 재림의 내용입니다. 성경은 그것에 대해서 자세하게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사도행전에서 구름을 타고 오신다고 말하지만, 그것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초림 때처럼 여자의 몸을 통해서 태어나는 방식으로 재림하는 것일까요? 많은 사이비 교주들이 그런 방식으로 말합니다. 자기가 바로 재림의 예수라고 하는 겁니다.

다른 하나는 재림의 시기입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이 살아있는 동안에 예수님이 재림할지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2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 재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언제 재림이 일어날지도 알 수 없습니다. 내용에서도 그렇고 시기에서도 마찬가지도 아무리 재림 신앙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신자라 하더라도 실제로 그런 세계로 들어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런 잘못된 이해가 가득한데 꼭 종말 신앙을 알아야 할까요? 다루어야 할까요? 말씀을 통해 우리의 신앙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곧 갈 것이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내가 곧 갈 것이다”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이 말은 강력합니다.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시던 주님이 오신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이 말을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주님 예수께서 역사에 개입하셔서 무너진 질서를 회복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날은 심판의 날이라고 말합니다. 심판의 날은 준비하고 기다리던 이들에게는 복된 날이고, 회피하던 이들에게는 두려움의 날입니다. 게다가 그 날이 멀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이제는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러운 채로 있어라. 의로운 사람은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사람은 그대로 거룩한 채로 있어라.”(22:11) 본문 직전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이제는 추수 때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주님이 오시면 모든 것이 드러날 것입니다. 빛은 빛으로, 어둠은 어둠으로, 불의는 불의로, 의로움은 의로움으로 말입니다. 사람들에게 숨겨졌던 우리의 본 모습이 드러날 것입니다. 주님은 행위대로 갚아주기 위해 오고 계십니다. 신앙은 행위로 검증되는 법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교회에서의 모습만이 아니라 우리의 생활 속에 담겨있다는 말입니다. 주님의 날을 기대하고 있었던 사람과 기대조차 하지 않은 사람이 밝히 드러나는 날이 심판의 날입니다.

-알파와 오메가

오시는 주님은 자신을 « 나는 알파와 오메가, 곧 처음과 마지막이며, 시작이며 끝 »이라고 소개하십니다. 우리에게 이미 익숙한 말이지만 이 말씀은 심오합니다. 주님은 당신을 역사의 기원과 목표라고 말씀하십니다. 역사는 하나님에게서 나와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과정입니다. 우리는 함정에 빠지기도 하고, 장애물을 만나 넘어지기도 하고, 지쳐 쓰러지기도 하지만, 하나님은 기어코 우리를 완성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우리는 패배할 수 있어도 하나님은 패배하지 않으십니다. 희망의 뿌리는 우리의 지성이나 감정이나 의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절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재림 신앙과 오늘의 삶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고 싶은 분들이 있을 겁니다. 예수님의 재림으로 완성될 미래의 생명에만 희망을 둔다면 현재의 삶은 아무래도 좋다는 뜻이냐, 하고 말입니다. 확실하지 않은 미래보다는 손이 닿는 지금의 삶이 더 중요하다는 주장입니다. 일리가 있는 주장입니다. 기독교 신앙이 자칫 내세주의에 빠져서 현실의 삶을 무시하거나 부정할 수 있습니다. 이단들에게서 이런 극단적인 형태가 종종 나타납니다. 사회생활을 등한히 하게하고 자신들 집단에만 신경 쓰게 합니다. 천국에 가서 황금 면류관을 쓸 테니까 모든 삶을 희생하는 방식으로 자신들 집단에 헌신하라고 강요합니다. 철저하게 내세적이고, 현실 도피적인 태도입니다. 이단들처럼 극단적이지는 않지만 정통교회도 부분적으로 이런 경향을 보입니다. 교회는 하늘나라에만 희망을 두니까 정치나 사회 문제에 관심을 두지 말라고, 그냥 기도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식입니다. 결국 현재의 삶은 의미가 축소되고 내세만이 지배적으로 나타납니다. 내세주의는 재림신앙의 왜곡입니다. 재림신앙은 오늘 여기서의 삶을 도피하게 하는 게 아니라 훨씬 더 역동적이게 합니다. 삶을 가장 의미 충만하게 만들어줍니다. 이것을 여러분은 경험하셨나요?

예수님이 오신다는 믿음과 희망은 예수님이 오셨을 때 일어날 사건이 지금 우리의 삶에 비밀한 방식으로 현실(reality)이 되었다는 사실을 전제합니다. 이 사실을 실제로 느끼지 못하면 이런 기독교 가르침은 선한 거짓말에 떨어집니다. 값싼 위로에 떨어진다는 뜻입니다. 재림 때에 일어날 사건은 생명 완성입니다.

-맞아들이기

교회는 이 세상을 향해 초대합니다. 먼저는 오실 주님을 향해 속히 오십사고 부르짖는 것이고, 다음은 지금 세상에서 목마른 사람들을 영생의 물이 있는 곳으로 초대하는 것입니다. 부르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열기 위해 고투해야 합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뜻을 가로막는 현실에 대한 저항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하나님 나라를 선취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그는 ‘오시는 하나님’에 대해 망각하지 않아야 절망을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고난과 실망, 그리고 고통과 염려 속에서 기독교적 희망은 그 위로하고 저항하게 하는 힘을 보여줍니다. 이것이 끝이 아니라 저기 무언가가 오고 있다는, 그래서 고통과 걱정 속에서도 위로가 됩니다. 그것은 변할 수 없는 것 앞에서도 항복하지 않고 저항을 계속할 수 있는 용기를 줍니다. 희망의 힘을 우리는 단념하지 않으며, 불의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세계에 침묵하지 않고, 불만족합니다. 악한 것과 화해하지 않습니다! 고통스러운 상황들 속에서 자포자기하게 되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시험입니다.

주님이 오고 계십니다. 그 사실을 믿기에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자유와 평등의 세상이 멀어지는 것처럼 보여도 그것이 일시적일 것임을 믿습니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습니다. 잠시 동안은 어둠이 이기는 것처럼 보여도 어둠은 빛 앞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등불을 밝혀드는 이들이 적다는 것입니다. 아직 어둡습니다. 하지만 눈을 뜨고자 하면 보입니다. 샛별로 떠오르신 주님 말입니다. 오시는 주님을 진심으로 기다리는 사람은 불의에 저항하고, 하나님 나라를 미리 맛보기 위해 노력합니다. 지금 주님은 우리의 몸을 빌어 이 세상에 오고 싶어 하십니다. 이제 결단은 우리의 몫입니다. 이 절기에 우리 마음속에 샛별이신 주님이 오롯이 떠오르기를 기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