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6월 5일 성령강림절 (2022년-23호)

제목 : 새 술에 취한 사람들

본문 : 사도행전 2:1-13, 로마서 8:14-17, 시편 104:24-34, 35b 요한복음 14:8-17

【사도행전 2:1-13】

오순절이 되어서, 그들은 모두 한 곳에 모여 있었다. 그 때에 갑자기 하늘에서 세찬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그들이 앉아 있는 온 집안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불길이 솟아오를 때 혓바닥처럼 갈라지는 것 같은 혀들이 그들에게 나타나더니, 각 사람 위에 내려앉았다.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어서, 성령이 시키시는 대로, 각각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예루살렘에는 경건한 유대 사람이 세계 각국에서 와서 살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말소리가 나니, 많은 사람이 모여와서, 각각 자기네 지방 말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서, 어리둥절하였다. 그들은 놀라, 신기하게 여기면서 말하였다. « 보시오, 말하고 있는 이 사람들은 모두 갈릴리 사람이 아니오? 그런데 우리 모두가 저마다 태어난 지방의 말로 듣고 있으니, 어찌 된 일이오? 우리는 바대 사람과 메대 사람과 엘람 사람이고, 메소포타미아와 유대와 갑바도기아와 본도와 아시아와 브루기아와 밤빌리아와 이집트와 구레네 근처 리비아의 여러 지역에 사는 사람이고, 또 나그네로 머물고 있는 로마 사람과 유대 사람과 유대교에 개종한 사람과 크레타 사람과 아라비아 사람인데, 우리는 저들이 하나님의 큰 일들을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듣고 있소. » 사람들은 모두 놀라 어쩔 줄 몰라서 « 이게 도대체 어찌 된 일이오? » 하면서 서로 말하였다. 그런데 더러는 조롱하면서 «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 » 하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로마서 8:14-17】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누구나 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여러분은 또다시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살이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자녀로 삼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영으로 하나님을 « 아빠, 아버지 »라고 부릅니다. 바로 그 때에 그 성령이 우리의 영과 함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언하십니다. 자녀이면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으려고 그와 함께 고난을 받으면, 우리는 하나님이 정하신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 상속자입니다.

【요한복음 14:8-17】

빌립이 예수께 말하였다. « 주님,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 그러면 좋겠습니다. »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보았다. 그런데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 하고 말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네가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면서 자기의 일을 하신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내가 하는 그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그보다 더 큰 일도 할 것이다. 그것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기 때문이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는 것은, 내가 무엇이든지 다 이루어 주겠다. 이것은 아들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내 이름으로 구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 «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다. 그리하면 아버지께서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내셔서, 영원히 너희와 함께 계시게 하실 것이다. 그는 진리의 영이시다. 세상은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므로, 그를 맞아들일 수가 없다.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안다. 그것은, 그가 너희와 함께 계시고, 또 너희 안에 계실 것이기 때문이다.

-인사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서로에게 반갑고 따뜻한 인사를 전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모두 서로 반가우시죠? 하나님이 우리 교회 공동체와 함께 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오늘 우리가 맞은 주일은 성령강림절입니다. 사람이 태어난 날을 생일이라고 부릅니다. 교회에 생일이 있다면 아마도 성령강림절이 교회의 생일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요? 그날 교회 건물이 세워졌나요? 그 날 교회라는 조직이 만들어졌나요? 아니면 그 날 교회 신자들이 처음 생겼나요? 아니요. 성령강림이란 하나님을 바로 지금 만날 수 있게 된 사건입니다. 이처럼 성령강림은 하나의 사건입니다. 그렇지만 과거의 사건만은 아닙니다. 오늘도 계속되고 있는 사건입니다.
성령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신다면 우리가 믿는 신앙은 과거의 사건을 추억하는 일이 되고 맙니다. 성령이 계시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도 세상의 선전이나 광고에 그치고 맙니다. 성령이 아니 계시면 우리가 모여 이룬 이 교회도 세상 조직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성령이 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면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압니다. 복음은 찬란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 사람의 일들이 하나님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예루살렘에 남은 자들

오늘 우리가 봉독한 사도행전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오늘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오늘 말씀의 때는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에 벌어진 일입니다. 예수를 따르던 제자들은 다 한 곳에 모여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이 장소는 마가의 다락방이라고 알려진 곳입니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이 120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이 처형당하실 때 이 많은 제자들이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을 따라갔다고 말하지 않고 다만 몇몇 여인들만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곁에 제자들은 아무도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동안 예수님을 따라 다니던 이들에게 예루살렘은 이제 두려운 곳, 상처만 잔뜩 받은 곳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렇기에 모두가 예루살렘을 떠나 자신들의 고향으로 돌아갔을 법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비슷합니다. 자신에게 큰 상처를 주고, 자신에게 어려움이 있는 곳을 떠나려고 하는 성향이 있는 것은 당연합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의 제자 일행이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꿈을 꾸었습니다. 그것도 3년 동안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에서 처참한 죽음을 당하는 스승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어떻습니까? 더 이상 예루살렘에 머물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예루살렘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한 곳에 모여서 기도했습니다. 왜일까요? 대체 어떤 힘이 이들을 한 군데에 모았을까요? 충격이 가라앉은 후 제자들은 무엇을 했을까요? 예수님과 보내면서 나누었던 말씀을 기억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 느꼈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과 용기가 자연스레 떠올랐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 기억을 안고 하나 둘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들기 시작했을 겁니다. 조금씩 모이는 사람들의 수가 많아지면서 그들은 용기를 내고 서로 격려하게 되었겠지요?

-마가의 다락방에서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앉은 그 시간은 유대인들의 명절인 오순절이었습니다. 이들은 힘을 다하여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성령 하나님의 충만함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충만하다’는 말을 떠올려 보십시오. 잘 느껴지십니까? 여러분, 우리가 사는 세상은 충만함을 맛보고 기뻐하기 보다는 결핍감을 자극하는 세상인 것은 분명합니다. ‘이것들을 구입해야 충만해질 거야, 이 정도는 가져야 행복할거야, 이런 조건들을 갖춰야 우리는 행복한거야!’ 충만함을 느끼기에는 너무나 먼 요즘 세상의 삶입니다만 오늘 말씀에서 보이는 하나님을 충만하게 품은 사람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이 모습을 성경은 세찬 바람과 불길로 묘사했습니다. 갑자기 세찬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하늘에서 나더니, 그들이 앉아 있는 온 집안을 가득 채웠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불길이 솟아오르는 것과 같은 혀들이 갈래갈래 갈라지면서 나타나 각 사람 위에 내려앉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런 경험은 일상적인 경험은 결코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마술같은 장면으로 이해하면 안됩니다. 우리 인간의 언어로 하나님의 임재의 현장을 묘사할 방법이 없습니다. 쉽지 않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서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예루살렘에는 세계 각국으로부터 온 경건한 유대 사람들이 살고 있었는데, 그들은 떠들썩한 소리에 놀라 몰려들었다가 제자들이 하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들은 각각 자기들이 살던 지역의 말로 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자기들이 태어난 세상 곳곳의 말들로 듣고 있는 것입니다.

-서로 알아듣기 시작하다

이 대목이 놀랍지 않습니까? 놀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요? 하지만 이상한 현상에만 우리의 눈이 가있으면 안됩니다. 신기하고 놀라워만 해서는 안됩니다. 성령강림을 체험한 사람들에게 벌어진 첫 결과가 무엇인지 찾아보십시오. 이런 놀라운 일들을 통해서 그들 사이에 벌어진 일이 무엇이냐는 말입니다. 성령 강림 때문에 벌어진 일은 “서로 알아듣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풍성하게 받은 사람들 사이에는 언어가 서로 다른 것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여기에 언어 외에 다른 단어들을 추가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국적, 성별, 인종, 지위, 부자와 가난한 자, 나이 등 수없이 많은 단어를 추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으로 충만하게 된 사람에게 우리 사람들의 삶에서 서로간의 제약하고 벽을 쌓고 갈등의 원인이 되는 것들이 하나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언어입니다.

-바벨탑 사건의 연장

저는 ‘성령강림의 사건’을 대할 때마다 구약 말씀 한 단락이 우리에게 떠올랐으면 하는 설교자로서의 바램이 있습니다. 마치 쌍둥이처럼 짝을 이루는 말씀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은 창세기 11장의 ‘바벨탑 사건’입니다. 바벨탑 사건 당시 무슨 일이 있었나요? 하나님은 사람들의 말을 뒤섞었습니다. 그 이유는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왜요? 하나님이 사람들을 못살게 구는 심술궂은 분이라서가 아닙니다. 바벨탑 사건의 이유가 뭔지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탑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하자.” 고대 세계에서 하늘은 하나님의 자리입니다.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인간의 ‘죄된 속성, 죄의 성향’을 지적하는 말씀입니다. 창세기는 인간의 영원한 죄, 끊임없이 이어지는 죄의 모습을 일관되게 지적하는 것 같습니다. 인간의 하나님을 대체하려는 속성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뱀이 사람을 선악과로 유혹할 때 했던 말도 똑같은 모습을 보여줍니다. “너희가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 세상의 모든 선과 악을 판단하는 기준이 너의 것이 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는 것이지요. 뱀의 유혹 사건이나 바벨탑 사건은 같은 사건인 셈입니다.

바벨탑 사건으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된 인류에게 닥친 일은 ‘소통의 불가이자 혼돈’입니다. 자! 이제 성령강림 사건을 보십시오. 이들의 체험은 기이한 현상에 중심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곳곳의 사람들이 성령체험을 통해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말로 듣게 되었다고 사도행전은 증언합니다. 바벨탑 사건은 인류가 돌이킬 수 없는 혼돈 가운데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현실에 빠져 버리는 죄악의 결과입니다. 하지만 성령강림은 이 모든 인류를 되돌리십니다. 언어는 각기 다르지만 이제 사람은 서로를 깊이 이해하고 수용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인류가 죄악에 빠져있다는 말은 구체적으로 서로를 알아듣지 못하는 데에 그 이유가 있습니다. 서로의 말을, 그 말속에 담긴 서로의 심정을 알아들을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이 상태에서 이제 하나님은 인간을 완전히 되돌리십니다. 이것이 성령강림 사건입니다.

-인간, 언어를 되찾다

성령강림 사건은 우리의 병듦을 확인시켜 줍니다. 우리가 얼마나 심각한 상태에 있는지 보여줍니다. 깨닫게 해줍니다. 바벨탑 사건 이후 사람들은 서로 통할 수 없는 언어를 사용했습니다. 한국어, 영어, 프랑스어 같은 외국어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말이 서로의 가슴에까지 전달이 되지 않았던 거예요. ‘나는 슬퍼요’ 하고 말해도 사람들은 내 슬픔을 공감하지 않습니다. ‘나는 기쁘다’ 해도 곁에서 나와 함께 기뻐하지 않습니다. 옛말에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되고,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제가 들은 말은 이 말을 이렇게 말합니다. “기쁨은 나누면 사람들의 질투의 대상이 되고, 슬픔은 나누면 내 약점이 된다.” 우스게 소리 같지만 요즘 세상 사람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같은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우리는 서로 통하지 않는 시대를 삽니다. 그런데 성령이 우리 가운데 오시면 우리는 입의 언어에서 그치지 않고, 마음의 언어에 반응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이의 담이 허물어지다

성령은 그렇게 우리 사이에 막혀 있는 담을 헐어 버립니다. 세찬 바람이 담벼락을 무너뜨리는 것처럼, 거센 불길이 담을 넘는 것처럼 성령이 임하시면 우리는 모든 차이를 넘어 상호 소통할 수 있게 됩니다. 먼저 성령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소외를 극복하게 합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거리가 너무 멀어서 소통이 안됐었는데, 성령이 오셔서 이 사이를 메워주신다는 말입니다. 이 말이 무슨 말일까요? 하나님과 나 사이의 간격을 메운대는게 무슨 의미일까요?

그 중 하나가 성령이 오시면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믿게 됩니다. 예를 들면, 세상에는 자기의 죄에 대한 아픈 흔적, 이 흔적은 상처로 남아있는데, 이것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기억하고 싶지 않은 부끄럽고, 두렵고, 아픈 기억을 한 두 개쯤은 가지고 있지요. 이게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 기억들은 세월이 가도 우리를 사로잡아 놓아주지를 않습니다. 그게 해결이 되지 않으면 살아도 사는 것 같지 않습니다. 돌이킬 수 없다면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은 진심으로 자기 죄를 아파하고 참회하는 이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거든요. 예수님이 전하신 복음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성령이 우리 마음속에 오시면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마음으로 믿게 되는 거예요. 용서받은 사람은 어떻게 살게 됩니까? 해방되었으니 내 맘대로 살자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는 ‘빚을 탕감 받은 이의 기쁨’을 가지고 살게 됩니다. 남들에 대해서는 부드러워 집니다.

-사람 사이의 담이 허물어지다

성령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는 벽도 넘어서게 만듭니다. 세상의 가장 높고 단단한 벽은 사람과 사람사이의 벽입니다. 사람이 어린아이에서 성인으로 성장하면 머리 속에서 생기는 생각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이 간단치 않다, 풀기가 녹록치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요. 복잡한 세상의 이치입니다.
하지만 이런 사실도 깨닫게 됩니다. 세상의 모든 문제는 사람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과 싸워서 고통스럽습니까? 하나님과 갈등이 생겨서 죽을 만큼 고통스럽습니까? 그런 사람 별로 없습니다.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사람 누구 때문에 고통스러운 일들은 비일비재합니다. 널려있습니다. 세상의 온갖 악한 일들은 사람이 사람을 향해서 벌어지는 일입니다. 또한 사람 집단이 사람 집단을 향해서 벌이는 일들이라는 사실이 너무나 분명합니다.
성령 하나님이 오셔서 우리 사람들의 마음을 녹여 주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무엇보다도 특히나 지금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의 마음을 녹여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이런 사람이 되십시오. 성령을 충만히 받은 사람이 되십시오. 이게 세상 속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까요? 성령을 충만히 받았으니 기도를 유창하게 하는 모습으로 나타날까요? 아니면 하나님 말씀을 줄줄이 외우고 하나도 빠짐없이 지키는 모습으로 드러날까요?
성령을 충만히 받은 사람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다른 거룩하고 신령한 모습도 있겠지만 저는 하나님을 내 안에 풍성히 담은 사람은 이런 모습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다른 사람의 일이 남의 일 같지 않은 사람일거라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의 아픔이 남의 아픔이 아니라고 받아들이는 사람의 모습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쉽고 간단합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하셨습니다. 다른 사람의 아픔을 대충 보아 넘기지 않으셨습니다. 그 사람 속의 아픔과 고통, 그 속에 배어있는 슬픔을 보셨습니다. 그것이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기에 십자가를 지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이 모습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이제 성령이 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요즘 같은 시대, 전쟁의 참화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이 있는 세상에 성령 하나님은 평화의 영이십니다. 화해의 영이십니다. 하나님은 혼자서 하시지 않으십니다. 사람에게 같이 하자고 요청하십니다. 성령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오셨을 때, 거절로, 방관으로 내버리지 마시고 하나님의 요청을 받아들이는 여러분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