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6월 12일 성령강림 후 제1주 (2022년-24호)

제목 : 사람이 무엇이기에

본문 : 잠언 8:1-4, 22-31, 로마서 5:1-5, 시편 8편, 요한복음 16:12-15

【잠언 8:1-4, 22-31】

지혜가 부르고 있지 않느냐? 명철이 소리를 높이고 있지 않느냐? 지혜가 길가의 높은 곳과, 네거리에 자리를 잡고 서 있다. 마을 어귀 성문 곁에서, 여러 출입문에서 외친다. « 사람들아, 내가 너희를 부른다. 내가 모두에게 소리를 높인다.
주님께서 일을 시작하시던 그 태초에, 주님께서 모든 것을 지으시기 전에, 이미 주님께서는 나를 데리고 계셨다. 영원 전, 아득한 그 옛날, 땅도 생기기 전에, 나는 이미 세움을 받았다. 아직 깊은 바다가 생기기도 전에, 물이 가득한 샘이 생기기도 전에, 나는 이미 태어났다. 아직 산의 기초가 생기기 전에, 언덕이 생기기 전에, 나는 이미 태어났다. 주님께서 아직 땅도 들도 만들지 않으시고, 세상의 첫 흙덩이도 만들지 않으신 때이다. 주님께서 하늘을 제자리에 두시며, 깊은 바다 둘레에 경계선을 그으실 때에도, 내가 거기에 있었다. 주님께서 구름 떠도는 창공을 저 위 높이 달아매시고, 깊은 샘물을 솟구치게 하셨을 때에, 바다의 경계를 정하시고, 물이 그분의 명을 거스르지 못하게 하시고, 땅의 기초를 세우셨을 때에, 나는 그분 곁에서 창조의 명공이 되어, 날마다 그분을 즐겁게 하여 드리고, 나 또한 그분 앞에서 늘 기뻐하였다. 그분이 지으신 땅을 즐거워하며, 그분이 지으신 사람들을 내 기쁨으로 삼았다.

【요한복음 16:12-15】

아직도,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많으나, 너희가 지금은 감당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다. 그는 자기 마음대로 말씀하지 않으시고, 듣는 것만 일러주실 것이요,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 또 그는 나를 영광되게 하실 것이다. 그가 나의 것을 받아서,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가지신 것은 다 나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성령이 나의 것을 받아서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

-인사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여러분 반갑습니다. 서로에게 인사를 나누시기를 바랍니다. 요즘 ‘선한 영향력’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던데, 여러분의 마음의 가장 좋은 부분을 나누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화창한 초여름의 날씨입니다. 이렇게 좋은 날씨, 좋은 계절에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의 예배가 그런 예배가 되기를 바랍니다. 기쁨이 우리 마음에 있고, 하나님을 향한 들뜬 마음도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을 다해 경청할 수 있는 우리의 이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버드의 에머슨 홀

오늘 이런 이야기로 말씀을 시작해 볼까 합니다. 우리 모두가 다 아는 미국의 하버드 대학교 안에 철학부와 종교학부가 있는 건물을 당시 총장의 이름을 따서 붙인 ‘에머슨 홀’이라는 건물이 있습니다. 이 건물이 처음 세워질 때 이 건물의 인방보(건물 벽을 받치기 위해 가로로 걸쳐진 돌) 어떤 문구를 넣을 지를 놓고 철학과 교수들이 모여서 회의를 했습니다. 그리고는 한 문구를 정했는데, 고대 그리스 철학자인 프로타고라스의 “인간은 만물의 척도다.”라는 문구로 결정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건물이 최종적으로 완성되고 나서 보니, 그 인방보에 새겨진 문구는 이런 문구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당신은 그 존재를 기억하십니까?” 당시 총장이 마지막에 결정을 바꾸어 이 말씀, “사람이 무엇이기에 당신은 그 존재를 기억하십니까?” 문구를 인방보에 새겼습니다. 지금 이 말씀 기억하십니까? 이 문구는 방금 전 우리가 시편교송으로 읊었던 시편 8편 4절의 말씀입니다. 세계적인 한 대학의 공부하는 인재들이 매일 오가면서 바라보고 마음에 새기게 되는 문구가 오늘 시편인 시편 8편의 말씀입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 말씀을 매일 바라보고 신앙의 사색하게 되는 일은 하버드 대학 학생들만이 아닐 것입니다. 오늘 여기에 있는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의 어느 순간

세상에 존재하는 누구나 한명도 빠짐없이 그의 인생에 찾아오는 순간이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 순간은 이런 질문을 자기 스스로에게 하게 되는 순간입니다. “나는 누구지?”라는 질문입니다. 나는 왜 없지 않고 있는 것이지? 또는 나는 어디서 온 거지?,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 거지? 그리고 이렇게 사는 것이 맞는 건가? 이런 종류의 질문입니다. 먹고 살기 바쁜데 이런 질문을 할 틈이 어디 있나? 라고 항변하시는 분들도 부지불식간에 불가항력적으로 이런 질문이 인생의 어느 순간을 파고듭니다.
수 천년 전 사람들도 이런 의문이 마음속에서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하나님, “제가 무엇이기에” 이렇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까? 혹은 “제가 어떤 존재이기에” 이렇습니까? 이 모양입니까? 이런 상태입니까?

-사람이란 존재는

지난 주 성령강림주일 말씀을 나누면서 우리는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 묵상해 보았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망가지는 것을 모두 합쳐서 우리는 ‘죄’라고 부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무시하는 것, 하나님의 뜻을 가벼이 여기는 것, 하나님을 멀리 두고 생각하지 않으려는 것,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것, 아담의 아들 가인처럼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여 숨는 것. 이 모든 표현이 가능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나누게 되는 모든 이야기도 사실은 ‘하나님과의 관계 맺는 사람들’의 좋은 이야기도 있지만 ‘하나님과 관계를 거절한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들도 무수히 담겨있기도 합니다.
지금 우리 손안에 있는 하나님 말씀인 성경은 하나님만 등장하고 하나님 말씀만 가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어떤 중요한 접점이 있는 우리 사람들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것도 그냥 사람 이야기가 아니라 어떤 식으로든 좋은 모습이든, 그렇지 않든 하나님과 관계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이 속에는 바로 “사람이 무엇이기에”라는 질문이 담겨 있기도 하고, 사람을 대하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관심, 사람, 그러나

그렇다면 하나님은 뭐라 대답하셨을까? 성경에서 일반적으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답은 많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도 살아오시면서 한 두 개쯤 답을 얻으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분명하고 명료하게 얻을 수 있는 답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최고 관심사는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쉽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관심사는 여기 있는 사람, ‘저와 여러분’ 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이전에 살았던 사람들, 그리고 지금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 모든 인류가 하나님의 최고의 관심사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최고의 관심을 받고 있는 존재입니다. 어떻습니까? 감사합니까? 부담스럽습니까?

하나님의 사랑과 관심을 받는 이런 존재가 사람일진대, 하지만 어떤가요? 하지만 우리가 사는 온 세상은 사람 때문에 문제입니다. 사람 때문에 걱정입니다. 사람이 문제입니다. 세상의 문제들의 원인도 사람이고, 실제 문제를 일으키는 것도 사람입니다.
여러분, 세상의 모든 갈등을 한번 가만히 들여다보십시오. 하나님의 손길이 닿은 곳마다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는데, 실제로 사람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문제가 발생합니다. 세상의 작고 사소한 다툼의 문제로부터 크고 심각한 환경 파괴의 문제까지 모두 마찬가지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사람은 무엇일까요? 바울 사도 역시도 이런 마음을 겪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내가 바라는 바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하는 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바울 사도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아담과 에노쉬

우리 동양적 정서로 사람을 이해한다면 아마도 한자로 사람을 뜻하는 ‘인’자를 떠올려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사람은 막대기 두 개가 서로 기대고 있는 존재로 묘사합니다. 사람은 홀로 선 존재라기보다는 서로 의지하고 있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사람을 관계로 이해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구약성경은 사람을 어떻게 이해할까? 구약성경이 이해하는 사람을 보면 그 의미가 자못 깊습니다.

두 가지가 있습니다. 먼저 최초의 인간인 ‘아담’이라는 단어입니다. 아담이란 이름은 사실은 한 사람의 고유 명사가 아니라 사람 전체를 뜻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아담’은 토기장이가 토기를 만들 때 사용하던 붉은 흙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마도 토기장이이신 하나님이 빚으신 존재가 사람이라는 뜻을 표현하려고 하는 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두 번째로 사람은 아담의 손자의 이름과 관련 있습니다. 성경 지식을 동원해 봅시다. 아담의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가인과 아벨입니다. 아벨은 불행하게도 가인에 의해서 살해당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이 새로운 아들을 주셨는데, 그의 이름이 ‘셋’입니다. 바로 이 ‘셋’의 아들이 ‘에노스’인데, 오늘 시편 8편에 ‘사람이 무엇이길래’ 할 때 이 ‘사람’을 뜻하는 단어가 ‘에노쉬’입니다. 그런데 ‘아담’은 붉은 흙이라는 뜻인데 반해, ‘에노쉬’는 조금 심오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죽음을 인식하는 존재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갑자기 이야기가 심각해집니다. ‘에노쉬’라는 단어 속에 담긴 뜻은 인간은 유한한 존재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영원히 사는 존재가 아니라 언젠가는 사라질 존재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니고 있으면서 그 운명을 선명하게 인식하는 존재가 바로 구약성경이 말하는 사람이라는 존재입니다. 그러니까 시편 8장의 저자가 이해한 사람이란 무한하신 하나님에 비해 자신이 “유한한 존재”라는 사실을 말합니다. 그리고 생명의 그 끝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존재가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에머슨 홀에 새겨진 문장을 다시 해석해 보면 “도대체 찰나를 살고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당신께서 그를 기억하십니까?”입니다.

그렇기에 사람은 이런 질문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사는게 좋은가?”라는 질문입니다. 어떤 삶을 선택하는 게 좋은 삶인가? 입니다. 다 아시겠지만 성경이 말하는 바는 “어떤 직업을 선택할 것인가”가 아닙니다. 점쟁이들처럼 어떤 직업을 가져야 좋다고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어떤 삶의 여정을 겪든지 그 삶이 어떤 삶이어야 하는가? 하고 묻는 것입니다.

-잠언의 지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잠언의 말씀을 통해서 찾아보고자 합니다.
‘저 사람은 지혜롭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지혜롭다는 지식이 많고, 지적인 능력이 뛰어나다는 의미가 아님을 우리가 다 잘 압니다. 그렇지요? 이 세상에는 머리 좋고 똑똑한 사람이 참 많습니다. 그런 이들이 대접받습니다. 그런 사회 현상이 없다고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문제는 지식이 풍부하고 똑똑한 사람이라고 해서 꼭 지혜롭지는 않다는 사실입니다. 거꾸로 지식이 많아 보이지 않는데도 지혜로운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잠언서의 말씀이 지적하고 있는 바도 이것입니다. 고대 유대인들은 지혜가 인간 삶에서 가장 수준 높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높은 정도가 아니라 지혜는 하나님의 차원에 속한다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먼저 생긴 것을 지혜라고 했습니다. 잠 8장은 지혜를 의인화해서 묘사했습니다. 잠 8:22-23절을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주님께서 일을 시작하시던 그 태초에, 주님께서 모든 것을 지으시기 전에, 이미 주님께서는 나를 데리고 계셨다. 영원 전, 아득한 그 옛날, 땅도 생기기 전에, 나는 이미 세움을 받았다.>

여기서 ‘나’는 사람이 아니라 지혜를 가리킵니다. 땅과 바다와 강물이 생기기 전에 존재한 것이 지혜라고 말합니다. 창세기 1장에 따르면 하나님은 빛을 가장 먼저 만드셨다고 되어 있는데, 만물 이전에 지혜가 존재했다고 표현합니다. 30절 말씀에서 “나는 그분 곁에서 창조의 명공이 되어, 날마다 그분을 즐겁게 하여 드리고, 나 또한 그분 앞에서 늘 기뻐하였다” 지혜라는 것이 마치 인격체처럼 존재합니다. 잠언의 말씀에서 지혜는 단순히 지성적이거나 똑똑하게 살게 하는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능력 그 자체입니다.

-잠언의 지적

이해하기가 어렵나요? 잠언을 비롯한 성경은 표현만 관념적이지 실제로는 구체적인 삶에 관해서 말합니다. 잠언 말씀에 대한 우리의 편견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잠언서 말씀을 고리타분한 옛 말씀으로 오해를 하지만 잠언의 말씀은 사실은 무척이나 실용적이고 실생활에 적합한 말을 합니다. 한마디로 잠언을 기록한 사람은 인생살이에 애쓰는 사람입니다.

잠언에 녹아있는 모습을 보면 저자는 그가 본 세상의 모든 사람은 살려고 애를 쓰지만, 하지만 모든 인생살이가 행복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요즘 우리가 사는 모습과 다를 게 없습니다. 좋은 나가 되기 위해 애를 씁니다. 그리고 좋은 공동체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애씁니다. 그러나 애쓰는 과정에서 수많은 시행착오가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시행착오로 인해서 모든 노력의 결과는 물거품이 됩니다.

여기에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이 세상에서의 메커니즘입니다. 이 세상살이 특징은 한 사람이 행복하면 다른 사람은 불행합니다. 세상살이의 모든 것이 경쟁입니다. 승리 아니면 죽음으로 세상살이를 이해합니다. 잠언의 저자가 지적하는 지혜 없는 자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지 않은 삶의 태도입니다. 지혜롭지 못한 자의 모습입니다.

다른 하나가 더 있습니다. 사람이라는 존재가 이 세상에서 주어지는 것으로는 만족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우리가 사는 모습을 보십시오. 사실 우리는 경제적으로 이토록 풍요로웠던 적이 없습니다. 인류가 생긴 이래로 우리는 최고로 많이 먹을 수 있고, 최고로 안전하고, 최고의 위생상태를 누리고 있는 것이 우리가 얻은 행운입니다. 인류가 생겨난 이래로 최고로 좋은 조건과 환경을 부여받은 행운의 사람이 여러분과 저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성경이 쓰여지던 그 시대 사람들 보다 행복한가요? 그리고 그들 보다 지혜로운가요?

지금 우리나 잠언이 기록되던 당시 사람들이나 모두 잘살아보려고 발버둥 치지만 사람들의 영혼이 공허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이런 인생살이에서 최선은 지혜롭게 사는 것이라고 잠언은 말합니다. 지혜롭지 않으면 삶이 점점 더 훼손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대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모든 고대 문명권에 살던 사람들, 그리고 오늘도 알 만한 사람들은 이 사실을 압니다.

-지혜롭게 살기

지혜로운 사람들은 지혜에 따라서 살기에 그 시대의 요구에 무조건 순응하지 않습니다. 무엇이 사람에게 중요한지를, 그리고 어떻게 사는 게 행복한지를 깊이 있게 살필 줄 압니다. 지혜로운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한 가지 특징은 공연한 경쟁과 싸움을 피한다는 사실입니다. 지혜롭지 못한 사람은 싸움을 즐깁니다. 생의 현장을 싸움터로 여긴다는 말입니다. 자신의 지식도, 자신의 몸도 무기로 만들어서 상대방을 완벽하게 압도하는 것으로 행복의 기준으로 삼습니다. 우리의 일상 역시 이런 격투기처럼 작동될 때가 많습니다. 승리를 궁극의 목표로 잡고 삽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승리가 자신의 행복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압니다. 싸움에서 이기면 쾌감은 있을지언정 행복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경험적으로 다 압니다. 그런데도 지혜롭게 살지 못합니다. 지혜롭지 않기에 행복하지도 않습니다.

오늘 말씀에 따르면 지혜는 사람이 훈련하거나 개발할 수 있는 지적인 능력이라기보다는 태초로부터 하나님과 함께 한 능력입니다. 말씀에 따르면 잠언이 말하는 지혜는 하나님의 영입니다. 하나님의 영은 성령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성령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성령, 즉 하나님의 영이 아니면 지혜롭게 살지 못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이 많지 않은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이 하나님의 영을, 즉 진리의 영, 생명의 영을 모르면서 어떻게 지혜롭게 살겠습니까? 똑똑하게 살 수는 있습니다. 착하게 살 수는 있습니다. 고상하고 교양 있게 살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지혜롭게는 살지 못합니다. 착하고 고상하고 교양 있는 삶을 최선으로 아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세상은 그렇게 가르치겠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지혜로운 삶만이 사람을 참된 행복으로 이끌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은 곳곳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바로 지혜의 근본이라고 말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한다는 말은 여호와의 행위에 집중한다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여호와가 하신 일이 묘사되었습니다. 창조가 바로 그것입니다. 하늘과 땅과 바다와 거기에 모여 사는 모든 생명체를 보십시오.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하나님 창조의 세계를 보십시오. 저녁놀을 보십시오. 비가 오면 빗소리에 귀를 기울여보십시오. 하나님의 창조 사건에 집중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는 말이 실감 날 겁니다. 우리의 짧은 인생살이에서 중요한 게 무엇인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게 지혜입니다.

앞에서 지혜로운 사람에게 나타나는 특징의 하나가 공연한 싸움을 피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에게, 즉 하나님의 창조 행위 앞에서 놀라워하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특징입니다.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하늘과 땅과 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살아가는 모든 생명체를 영혼의 깊이에서 느끼는 사람은 다른 사람과 다툴 생각을 아예 하지 않습니다. 그의 영혼에 생명의 환희가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만물이 자신의 모습을 가장 아름답게 뽐내는 이 절기에 우리의 영혼의 어둠을 걷어내고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신 모습을 맘껏 드러낼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