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너는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본문 : 열왕기상 19:1-15a, 갈라디아서 3:23-29, 시편 42편, 누가복음 8:26-39
【열왕기상 19:1-9a】
아합은, 엘리야가 한 모든 일과, 그가 칼로 모든 예언자들을 죽인 일을, 낱낱이 이세벨에게 알려 주었다. 그러자 이세벨은 엘리야에게 심부름꾼을 보내어 말하였다. « 네가 예언자들을 죽였으니, 나도 너를 죽이겠다. 내가 내일 이맘때까지 너를 죽이지 못하면, 신들에게서 천벌을 달게 받겠다. 아니, 그보다 더한 재앙이라도 그대로 받겠다. » 엘리야는 두려워서 급히 일어나, 목숨을 살리려고 도망하여, 유다의 브엘세바로 갔다. 그 곳에 자기 시종을 남겨 두고, 자신은 홀로 광야로 들어가서, 하룻길을 더 걸어 어떤 로뎀 나무 아래로 가서, 거기에 앉아서, 죽기를 간청하며 기도하였다. « 주님, 이제는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나의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 나는 내 조상보다 조금도 나을 것이 없습니다. » 그런 다음에, 그는 로뎀 나무 아래에 누워서 잠이 들었는데, 그 때에 한 천사가, 일어나서 먹으라고 하면서, 그를 깨웠다.
엘리야가 깨어 보니, 그의 머리맡에는 뜨겁게 달군 돌에다가 구워 낸 과자와 물 한 병이 놓여 있었다. 그는 먹고 마신 뒤에, 다시 잠이 들었다. 주님의 천사가 두 번째 와서, 그를 깨우면서 말하였다. « 일어나서 먹어라. 갈 길이 아직도 많이 남았다. » 엘리야는 일어나서, 먹고 마셨다. 그 음식을 먹고, 힘을 얻어서, 밤낮 사십 일 동안을 걸어, 하나님의 산인 호렙 산에 도착하였다. 엘리야는 거기에 있는 동굴에 이르러, 거기에서 밤을 지냈다.
-인사
주안에서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 모두에게 하나님이 크신 은혜로 함께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더운 날씨에 어떻게 한 주간 보내셨습니까? 각자 한 주간동안 수고하셨습니다. 지난 한 주간 하나님이 여러분의 삶에 함께 하셔서 힘주시고 위로해 주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예배는 성령강림 후 제2주일 예배입니다. 성령강림절기는 우리 삶에 내주하시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이자 우리 자신을 특별히 하나님의 빛에 비추어서 살피는 시간입니다.
늘 그렇지만 삶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외부적인 환경에 의해서 그렇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우리 마음 내부에서 벌어지는 일들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런 일로 냉혹해지고, 냉소적이게 변해버리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강림절기는 성령 하나님으로 인도된 사람들이 자신들의 구체적인 삶의 모습을 돌아보고 살피는 절기이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MBTI?
자기 자신을 보게 된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요즘 ‘MBTI’ 라는 것이 유행이라고 하죠? “마이어스-브릭스 유형 지표”라는 성격검사 종류인데, 캐서린 쿡 브릭스(Katharine C. Briggs)와 그녀의 딸 이자벨 브릭스 마이어스(Isabel Briggs Myers)가 제작하였으며, 정신분석가 ‘칼 융’의 성격 유형 이론을 근거로 하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사실인지 모르겠지만 회사 지원 서류에도 자신의 유형을 기입하는데도 있다고 하는데, 사실인지 모르겠습니다. 하도 유행이라 여러분도 한 번쯤은 자신이 어떤 유형의 사람인지 알고 싶어서 테스트 해보셨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제가 들어보니까 실제로 상담 전문가들은 사용하지 않는, 그러니까 사람의 성격 유형을 과학적으로 판단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테스트라고 알고 있습니다만 TV에서 연예인들이 언급하고 나니까 그 후에 많은 사람들이 유행처럼 테스트 해보는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는 사람을 16개 유형으로만 나눈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을 유형화 할 수는 있겠지만 이것으로 사람을 규정한다는 것은 사람의 성격을 너무나 단순하게 바라보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자신을 알고 싶다
이런 것이 유행하는 것을 보니 분명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무척이나 알고 싶어 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왜 자신이 궁금할까요? 여기에 계신 분들의 나이를 보면, 20대에서 50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우리 교회 성도들인데, 20년 이상, 50년 이상 다른 사람으로 살아온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 살아왔는데도 여전히 나 자신이 누구인지 잘 모르겠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나란 사람으로 살아오면서 다른 것은 좀 알 것 같기도 한데, 도대체 ‘나’는 모르겠다. 그리고 살아가면서 부딪히면서 내가 만들어 놓은 사람들과의 관계를 볼 때마다 내가 왜 이렇게 반응하는지 관계가 어그러질 때마다 자신 스스로에게 묻게 됩니다.
정답은 아니겠지만 이런 방법을 통해서라도 자신 스스로에게 관심을 갖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일입니다. 신앙이란 기본적으로 자신을 살피는 일이기에 그렇습니다. 신앙은 참되신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그 결과가 자신의 깊은 곳을 용기 있게 들여다보는 일입니다. 이래야 자신 안에서 변화가 일어나겠지요.
한편으로는 자신뿐만 아니라 누군가를 알고 싶은 마음이 든다는 것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나와 관계가 원만하건 그렇지 못하건 사람은 기본적으로 관계적인 존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주변의 사람들에 대해 알고 싶어 합니다. 더 좋은 관계를 위해서입니다. 더 좋은 교회를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엘리야의 신앙과 용기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발생합니다. 내가 아는 내가 있습니다. 한편에는 내가 몰랐던 내가 나타납니다. 인생의 어떤 순간에 말입니다. 그리고 이 두개가 충돌하는 경우입니다. 이런 일에 맞닥뜨리면 사람은 충격 속으로 빠져듭니다. 모든 것이 혼란스럽게 여겨집니다.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중요한 사람, 너무나도 유명한 예언자 엘리야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엘리야라는 사람은 아마도 이런 경험의 사람이 아닐까 싶습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 말씀 속에서 만나는 엘리야는 여러분이 보시기에 어떤 사람으로 보입니까? 저에게는 이렇게 보이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신앙적인 믿음과 신앙으로 인한 신념에 강직할 정도로 충실한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이 그에게 임하셨을 때, 주저함 없이 당당하고 용감한 외적인 사람임에 분명해 보입니다.
오늘 열왕기상 19장의 말씀 이전의 말씀을 보면 엘리야라는 사람이 보이는 신앙과 그 행동은 용감하고 당당합니다. 자기가 믿는 바를 실천하는데 주저함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만 예를 들어 볼께요. 18장에서 만나는 엘리야가 이런 사람입니다. 당시 권력의 최고 정점은 이스라엘의 왕 ‘아합’입니다. 아합왕은 불의한 권력자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하나님 대신 바알 신앙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바알 신앙이 왜 나쁩니까? 바알 신앙은 물질주의에 바탕을 둔 신앙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물질주의는 나쁜겁니까? 아니요. 하나님을 물질로 대체할 수 있다고 가르치기에 옳지 않은 겁니다. 이것을 성경은 물질의 우상, ‘맘몬’이라고 부릅니다.
엘리야는 용감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 불의한 권력자 앞에 가서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에서 한 구절 읽어볼께요. (왕상 18:18)“임금님과 임금님의 가문이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자입니다(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자여!). 임금님께서는 주님의 계명을 내버리고, 바알을 섬기십니다.” 그리고 백성들에게는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언제까지 양쪽에 다리를 걸치고 머뭇거리고 있을 것입니까? 주님이 하나님이면 주님을 따르고, 바알이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십시오.”(왕상 18:21).
용감하고 당당합니다. 부럽고 본받고 싶은 엘리야 선지자의 모습입니다.
우리같이 평범하고 나약한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하고 나면 나한테 어떤 것이 돌아올지를 먼저 염려합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마음속으로 계산한 뒤에 말합니다. 이 말을 아합왕에게 대놓고 직언하게 되면, 당연히 자신에게는 곧장 죽음의 칼날이 날아들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이라도 여러 가지를 늘 눈치 보면서 살아가기 일쑨데, 엘리야의 인생사전에는 이런 것이 아예 없습니다. 당당하고 용감합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 엘리야는 자신이 “알고 있고 믿는 바가 이것이다”라고 말하는 분명하고 곧은 사람이고, 말한 대로 용감히 실천하며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 외에 것들은 자신의 인생에 없다고 여길 정도의 사람으로 보입니다. 여러분에게도 그렇게 보이시나요?
-엘리야 그러나
그런데, 이 사람, 엘리야의 인생에 다른 국면이 찾아들었습니다. 엘리야의 마음속에 찾아든 것이 있었습니다. 이전까지 엘리야의 성향 상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감정입니다. 이것은 불안감이기도 하고, 허탈하고 허무하기도 하고, 패배 의식 같은 묘한 감정입니다.
엘리야에게 찾아든 감정은 이런 것입니다. 엘리야는 바알 신앙 선지자 450명, 아세라 신앙선지자 400명과 당당하게 맞붙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상대가 되지 않을 것 같은 대결도 승리한 사람이 바로 엘리야입니다. 이 대결의 승리로 얻을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당연히 자신이 믿는 하나님 신앙이 승리한 것이라고 믿을 만한 결과였습니다. 그런데 엘리야의 생각과는 다른 방향으로 상황이 돌아갑니다.
이 일의 결과에 대해 ‘아합왕과 왕비 이세벨’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습니다. 첫째, 마음을 돌이켜서 자신의 바알 신앙을 포기하지도 않았고, 둘째, 엘리야가 보여준 야훼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에도 꿈쩍하지 않았습니다. 셋째, 오히려 이세벨은 더욱 기세등등해졌습니다. 나아가 심부름꾼을 보내서 엘리야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가 예언자들을 죽였으니, 나도 너를 죽이겠다. 내가 내일 이맘때까지 너를 죽이지 못하면, 신들에게서 천벌을 달게 받겠다. 아니, 그보다 더한 재앙이라도 그대로 받겠다.”(19:2) 자신의 지상 최고의 목표를 엘리야를 죽이는 일로 설정했습니다.
솔직히 엘리야는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갈멜산에서 하나님의 일으키신 기적을 저들이 보게 된다면 ‘아합왕도 왕비 이세벨도 마음을 돌이킬 것’이다. 하지만 엘리야가 상대를 잘 몰랐습니다. 아합왕과 이세벨은 평범한 우리네 보통 사람 정도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예언자의 생각의 범위를 훨씬 넘어서는, 악으로 차고 넘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마음 속 악한 생각과 함께 이것을 성취하려는 나쁜 계획들이 차곡차곡 들어서 있는 듯한 사람들. 여러분도 이런 사람을 경험해 보신 적이 아마도 있을 것입니다. 슬프지만 나이를 먹고, 세상의 경험이 쌓일 때마다 이런 사람을 자주 보게되는 것만 같습니다. 정말 악한 사람,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는 뭐든지 남이 어떻게 되든지 하고 마는 그런 사람!
-죽기를 원하다
자, 이제 엘리야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자신의 인생에서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상황에 맞닥뜨렸습니다. 그토록 당당하고 용감한 신앙의 사람, 엘리야가 도망자 신세가 되어버렸습니다. 엘리야가 맞닥뜨린 일은 우리도 종종 경험하는 ‘자존심이 상하는 일’ 정도가 아닙니다. 급한 마음에 도망을 가면서도 도망치는 자신을 바라볼 수가 없었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너무 자신에게 실망하면 거울 속 내 자신을 보기도 힘들지 않나요? 우선 목숨이 위태로워서 도망을 가고 있지만 스스로 용서가 되지 않는 상황일 것입니다.
가장 처참한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 신앙이 저 하찮은 바알 신앙에게 패배한 것 같은 생각”입니다. 그리고 이 패배의 한 가운데 자기 자신이 있습니다. 이런 마음을 표현하는 엘리야의 마음속에 찾아든 생각 한 조각을 우리는 읽을 수 있습니다. “주님, 이제는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나의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 나는 내 조상보다 조금도 나을 것이 없습니다.”(19:4) 이 말 속에서 엘리야의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제 엘리야는 죽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어떻게 이런 마음을 품을 수 있냐”고 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렇다고 그가 죽기를 원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가 처한 마음을 우리가 동감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우리 역시 엘리야만큼이나 자괴감과 허탈함, 인생의 허망함, 의미없음 속에 종종 빠져들기에 그렇습니다. 그 순간에 누군들 모르겠습니까? 그런 생각이 옳지 않다는 것을.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위로가 필요한 낭떠러지에 매달린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위로
이 한없는 무력감에 빠진 엘리야의 인생의 순간, 그 때 하나님이 엘리야를 찾아오십니다. 잠에 빠진 엘리야를 천사를 통해서 깨우십니다. 엘리야가 깨어 보니, 머리맡에는 뜨겁게 달군 돌에다가 구워 낸 과자와 물 한 병이 놓여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그 음식을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리고 또 다시 잠이 들었습니다. 그가 잠든 동안 주님은 아담의 코에 생기를 불어넣듯 그의 마음에 생기를 불어넣고 계셨을 겁니다. 주님의 천사가 다시 그를 깨우면서 “일어나서 먹어라. 갈 길이 아직도 많이 남았다” 이릅니다. 엘리야는 일어나서, 먹고 마셨습니다. 그리고 힘을 얻어서, 밤낮 사십 일 동안을 걸어 하나님의 산에 이르렀습니다. 감동스런 한 장면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바알신앙 숭배자들과의 싸움에서 성과를 못냈다고 엘리야를 훈계하시거나 야단치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같은 경우는 아니겠습니다만 저는 이 말씀을 볼 때마다 어떤 목사님의 말씀이 기억이 납니다. 이 목사님이 중학생 시절 얘기인데, 어느 날 마음속에 불이 붙어서 ‘시인’이 되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아버지의 지갑에서 돈을 훔쳐서 무작정 부산으로 가는 기차를 탔고, 거기서 시인이 살만한 곳, 푸른 초원이 있는 제주도행 배를 탔습니다.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절 이야기이니 얼마나 가난하고 형편이 좋지 않았겠습니까? 제주도를 헤매다가 경찰에게 붙들려 다시 부산으로 가는 배를 타게 되었고, 그 이후 무작정 걸어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왔답니다. 그런데 막상 집 앞에 도착해 보니 집으로 들어갈 수가 없는 겁니다. 부모님의 지갑에 손을 대었고, 가출한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대문 밖에서 우물쭈물 하고 있는데, 어머니가 갑자기 이름을 불렀습니다. “ㅇㅇ이니?” 쏟아지는 눈물과 함께 깊은 잠에 빠졌답니다. 잠에서 깨어보니 깨끗하게 마련된 옷과 함께 잘 차려진 밥상이 머리맡에 놓여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들을 깨워서 훈계하고, 자초지종을 캐묻지도 않았지만 이 어린 학생의 마음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당연히 아버지와 어머니입니다.
지친 엘리야를 가장 잘 아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겠지요. 그의 인생에 찾아온 절망과 두려움까지도 모조리 품어 안으시는 하나님, 하나님이 이런 분이시라는데 마음에 큰 위로를 얻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를 위해 말없이 밥상을 차리셨습니다.
사실 현실은 변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엘리야를 추격하는 병사들이 물러난 것도 아니고, 사람들이 바알 신앙에서 돌아온 것도 아닙니다. 그를 절망으로 이끌던 현실은 변하지 않았지만, 하지만 변한 것은 없지만, 그는 새로운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는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일은 자기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공급하시는 힘으로 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절감했을 겁니다. 여러분의 삶의 어느 지점에 힘겹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이 말씀을 떠올렸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제 맘속에 듭니다.
여러분은 어떤 마음으로 이 세상을 살고 계십니까? 불같은 신앙의 힘으로 살아가십니까? 아니면 못내 사니까 산다는 심정입니까? 어떤 삶의 모습이든 내면에 기운이 가득 찬 사람이라 해도 기력이 빠질 때가 있습니다. 사람의 이 앞면에는 아무리 기운차고 의지가 넘치는 사람이라도 뒤편의 그림자는 어둡기도 하고, 좌절과 낙담으로 채워져 있기도 합니다. 이게 어쩔 수 없는 인간의 한계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말씀을 통해 스스로에게 신앙의 질문을 가져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너는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너라는 지칭은 당연히 엘리야를 포함하여 ‘우리 각 사람 자신’입니다. 그리고 ‘여기’는 지금 여러분의 생생한 삶의 현장일 것입니다. 가끔 세상 사람들보다도 못하게 탐욕스럽기도 하고, 세상의 아파하는 이들을 가벼이 보아 넘기기도 하는 우리의 삶의 현장입니다. 그리고 ‘무엇’을 하고 있느냐? 하나님의 질문은 바로 지금 우리 마음속에 떠오르는 일들일 것입니다. 여러분의 시간과 돈과 정성을 들여서, 시간과 마음도 투자하고 애쓰는 일입니다. 저는 여러분의 그 일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드는 일”이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 묵상의 결과는 “어찌 보면 기운이 빠지는 것은 복이겠구나!” 라는 신앙의 교훈을 얻게 됩니다. 기운이 빠질 때라야 자기 외부의 세계가 아닌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어둔 밤을 체험한 적이 없는 사람은 인생의 깊이를 모른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내 속에 있는 어둠에 소스라쳐 놀라지 않는다면 어찌 하나님의 빛을 은총으로 체험하겠습니까? 엘리야의 이 강렬했던 하나님 경험이 오늘 우리의 하나님 경험이 되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