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6월 26일 성령강림 후 제3주 (2022년-26호)

제목 : 사람, 부르심 앞에 서다

본문 : 열왕기상 19:15-16, 19-21, 갈라디아서 5:1, 13-25, 시편 16편, 누가복음 9:51-62

【누가복음 9:51-62】

예수께서 하늘에 올라가실 날이 다 되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 가시기로 마음을 굳히시고 심부름꾼들을 앞서 보내셨다. 그들이 길을 떠나서 예수를 모실 준비를 하려고 사마리아 사람의 한 마을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 마을 사람들은 예수가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도중이므로, 예수를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래서 제자인 야고보와 요한이 이것을 보고 말하였다. “주님,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들을 태워 버리라고 우리가 명령하면 어떻겠습니까?” 예수께서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셨다.

그리고 그들은 다른 마을로 갔다. 그들이 길을 가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예수께 말하였다. « 나는 선생님이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겠습니다. »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을 나는 새도 보금자리가 있으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 또 예수께서 다른 사람에게 « 나를 따라오너라 »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 사람이 말하였다. « [주님,] 내가 먼저 가서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도록 허락하여 주십시오. »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셨다. « 죽은 사람들을 장사하는 일은 죽은 사람들에게 맡겨두고, 너는 가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여라. »
또 다른 사람이 말하였다. « 주님, 내가 주님을 따라가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집안 식구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해주십시오. » 예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셨다. « 누구든지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다보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

-인사

안녕하세요? 교우 여러분, 서로 인사합시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지난 한 주간 평안하셨습니까? 주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주일은 6월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2022년 한 해의 딱 절반에 이르렀습니다. 시간이 무척 빠릅니다. 세월이 무상합니다. 세월이 이렇게 흘러가면 어떤 마음이 드세요? 저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이 듭니다. 왜 그런가 생각해 보니, 나를 다 살지 못할까봐 염려스럽습니다. ‘나’라는 존재가 여기 있는데, 나를 온전히 충분히 살고 싶은데, 그렇지 못할까봐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섰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깊이 경청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난 22일 아프가니스탄 동부에서는 지진으로 1000명 이상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여러분도 들으셨는지요?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사람의 죽음을 세상이 어떻게 다루는지 보여줍니다. 다음 날 보니, 이 뉴스는 언론에서 다 사라졌습니다. 다른 뉴스들에 의해서 밀려난 것이지요. 하루는 엄청난 뉴스마냥 보도하다가 다음 날은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사라집니다. 사람의 죽음이 뉴스로 소비되고 마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그리고 여전히 우크라이나 전쟁이 계속되고 있음을 잊지 않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이 전쟁으로 인해 누구는 무기를 팔아 어마어마한 돈을 벌었다는 천박한 소식, 어떤 누구는 전쟁이 더 지속되기를 바랄 것이라는 소리들이 들려옵니다. 전쟁으로 죽어가는 사람이 이렇게나 많은데도, 생명에 관심이 가지 않고, 얼마의 이득과 손해로 사람의 목숨을 헤아리는 것은 우리가 그만큼이나 영혼에 병이 들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한 생명이 온 천하보다 귀하다”는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생명을 살리는 일은 하나님이 가장 귀하게 여기시는 일이자 바라시는 일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일은 전쟁터에서만 필요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 일상의 삶 가운데서도 세상에 휩쓸려가지 않도록 살피는 일도 생명을 살리는 일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도구가 우리는 복음이라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우리가 받아든 복음은 나의 생명을 살리는 귀한 도구입니다.

-예루살렘으로

오늘 누가가 우리에게 전해주는 복음의 한 단락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하늘에 올라가실 날이 다 되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 가시기로 마음을 굳히시고 심부름꾼들을 앞서 보내셨다.” 이 말씀이 어떻게 들리십니까? 즐거운 여행길을 떠나는 사람들의 분주한 이야기로 들리십니까? 하지만 ‘하늘에 올라가실 날’이란 예수께서 지실 십자가, 곧 죽음을 뜻합니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이동하십니다. 예루살렘을 떠올려 보십시오. 무엇이 떠오릅니까? 예루살렘이란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거룩한 곳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당시 많은 사람들이 각종 제사법에 따라서, 각종 절기에 맞춰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그곳이 거룩한 곳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곳에서 예배를 드리면 하나님이 받으신다는 굳은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루살렘의 화려함이 겉으로는 드러날지 모르겠지만 예루살렘에도 그림자가 있습니다. 제사장들, 율법학자들, 한 마디로 말하면 종교의 권위를 통해서 부와 명예를 누리는 집단이 있습니다. 사람 사이에 일들이란 늘 그렇습니다만 권력은 한정되어 있고, 거기서 얻는 이득을 놓고 사람들은 암투를 벌이고 탐욕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자신의 탐욕을 드러내면 드러낼수록 그 속에 깃들어 있는 위선은 더 크게 도드라지는 법입니다. 예수님이 나아가고 계신 곳, 예루살렘은 이런 곳이었습니다.

그러니 이들 종교를 통해 온갖 것을 누리는 사람들 눈에 예수님이 어떻게 보였겠습니까? “죽어 마땅한 존재” 아니겠습니까? 세상에 죽어 마땅한 생명이란 없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갖고 있는 것을 빼앗길 상황에 놓인 인간의 마음은 이렇게 흘러갑니다. 예수님이 처한 상황이 이렇게 전개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모순의 정점인 예루살렘으로 가고 계십니다.

누가는 조금 특별하게 이 장면을 소개합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기로 마음을 ‘굳히셨다.’ 예수님이 결심을 하시기까지 깊은 인간적인 고심이 있었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단을 하셨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고심과 결단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이 정말 인간적인 그런 고민을 하셨을까? 생각하실 분도 계실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니까 그냥 척척 진행되는 것 아닌가? 아니요. 한 사람으로서 예수님을 보지 않고서는 인간 안에 스며든 하나님을 알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고 하십니다. 죽음의 길이라 해도 피할 수 없습니다.

-사마리아를 지나시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행로 중에, 그러니까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려면 사마리아를 거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먼 길을 돌아가야 합니다. 이제 주님은 제자들과 함께 사마리아의 한 마을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런데 난처하고 불편한 상황이 생겼습니다. 사마리아 한 마을에서 예수님의 일행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통보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마을 사람들은 예수가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도중이므로, 예수를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니까 예수님 일행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가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뭔가 배경이 있는 듯합니다.

이 일은 길고 긴 역사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수백 년 전 바빌론에 포로로 끌려갔던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땅으로 돌아오는 일이 생겼습니다. 포로기가 끝나는 시점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고향땅에다가 성전을 새롭게 지으려는 유대사람들에게 호의를 베풀어서 돕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유대 사람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의 호의를 거절했습니다. 신앙적인 혼탁함에 빠진 사람들이 사마리아 사람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후로 유대인은 예루살렘에서 예배드리고,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리심 산에서 예배를 따로 드리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요한복음 4장의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 때 한 시골 마을의 평범하고 초라하기 이를 데 없는 이 여인 조차도 이런 신앙의 문제에 민감했던 것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우리 조상은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선생님네 사람들은 예배드려야 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합니다.” 이 말은 예루살렘과 사마리아 사이의 종교적 갈등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다는 것을 그리심 산에서 드리는 자신들의 예배에 대한 부정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쉽게 말하면 예를 들어 오늘날 한 장로교회가 우리 교회에 대고 당신들이 드리는 예배는 ‘정당하지 않다’고 말한다면, 그 때 우리 마음에서 일어나는 마음하고 비슷합니다. 불쾌하기도 하고, 상대하고 싶지도 않은 그런 마음이겠지요.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은 같은 하나님을 예배하면서도 예루살렘과 그리심 산 예배는 원수가 되어 드리는 예배, 이 예배를 드리며 살아갑니다. 신앙의 근본은 다 놓쳐버리고, 지엽말단의 사소한 문제에 집착하는 어리석음의 소치입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일은 부지기수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의 근본은 잃어버린 채, 교리적인 차이로 상대를 폄하하는 모습이 많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잘 믿고 있는 지 궁금하시다면 알 수 있는 분명한 방법이 있습니다. 내 마음 속에 “품이 더욱 커지면” 잘 믿고 있는 겁니다. 품이 더 커지는 일은 사람을 품위 있게 대하는 일이고, 사랑과 친절로 대하는 일입니다.

-냉대 받는 현장이지만

제자들은 사마리아 마을의 냉대에 당황했습니다. 이 당황스러움은 어떤 감정으로 이어질까요? 그들은 분노의 감정에 사로잡혔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의 거부가 그들의 마음에 상처를 입혔습니다. 내가 누군가를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그도 또한 나를 받아들일 때 인간적인 정이 싹틉니다.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보다 더 큰 힘이 되는 일은 없습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거절당할 때 우리 가슴에는 깊은 상처가 남습니다. 그 상처는 분노로 바뀌고, 분노는 적대감정으로 바뀝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마음에 무언가가 일었나 봅니다. 화, 분노, 당황스러움이겠습니다. 그래서 말합니다. “주님,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그들을 태워 버리라고 우리가 명령하면 어떻겠습니까?” 그들의 상처 입은 마음을 모르지 않지만, 제자들의 이런 태도는 과합니다. 안타깝습니다. 그들은 예수님 곁에 머물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그렇지요? 주님의 일인지를 뻔히 알면서도 시기나 질투도 종종 일어나고, 때로는 주님 일을 자기를 드러내는 일로 삼기도 하고,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감정을 폭발시키기도 합니다. 우리 가운데서 벌어지는 일입니다.

우리 속에는 다른 것이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것은 성령의 빛으로 인해 밝히 드러난 우리입니다. 우리가 성령을 따라 행할 때에만 사람들은 우리 속에 있는 빛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누군가 우리를 모욕하고, 피해를 주고, 배척한다 해도 분노의 불꽃이 우리를 사르지 못하게 하십시오. 번쩍하고 알아차리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분노에 사로잡힌 야고보와 요한을 꾸짖으셨습니다. 누가는 예수님이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셨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정색을 하고 야단을 치셨다는 말입니다. 주님은 그들을 다독이지 않았습니다. ‘너희들의 심정을 안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길로 삼은 이들은 불의에 대해서는 저항해야 합니다. 하지만 폭력은 피해야 합니다. 폭력은 아무 것도 해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문제를 우리마음 가는대로의 방식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마음을 먼저 내려놓아야 합니다.

-다른 마을로

예수님의 일행은 이제 다른 마을을 지나십니다. 이 곳에서 만나는 세 유형의 사람들을 우리는 만납니다. 우리 자신을 비추는 모습이기도 하니, 잘 보시기 바랍니다.

1) 첫 번째 사람입니다. 이 때, 한 사람이 주님께 나아와 말합니다. “나는 선생님이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겠습니다.” 이런 사람이 귀합니다. 어쩌면 그는 예수님에게서 참 사람의 길을 찾은 것 같습니다. 그는 진지합니다. 하지만 주님의 반응은 그의 의지에 찬물을 끼얹는 듯한 말씀을 하십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을 나는 새도 보금자리가 있으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58)

이 말 뒤에 있는 속말은 “그래도 따르겠느냐?”일 겁니다. 누가는 그가 어떤 결정을 했는지를 들려주지 않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것은 ‘그’의 결단이 아니라, 이야기를 듣고 있는 ‘우리’의 결단이기 때문입니다.
머리 둘 곳도 없으신 주님을 생각하면 오늘 우리 삶이 너무 편안하고 넉넉한 것이 죄송스럽습니다. 주님의 거룩한 고통과 수난을 마음 깊이 느끼는 이들이 많았으면 좋겠는데, 어떻습니까?

2) 두 번째 사람

예수님은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라오너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사람의 외양을 보지 않으십니다. 그 마음의 중심을 보십니다. 그렇기에 시몬에게서 반석 ‘베드로’를 꺼내신 거 아니겠습니까? 주님의 부름을 받은 이 사람은 참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의 속에 있는 진정성을 주님이 인정하셨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그는 주님의 부름에 선뜻 응하지를 못합니다.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랐던 첫 번째 제자들,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세관을 버려두고 즉각 예수를 따른 레위(눅5:27)와는 많이 비교가 됩니다.

그는 주님께 청합니다. “주님, 내가 먼저 가서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도록 허락하여 주십시오.” 그의 요청은 정당합니다. 장례를 잘 치르는 것은 가족은 물론 한 마을 공동체의 의무이기도 했습니다. 이게 자식으로서의 의무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말씀은 너무 단호합니다.

“죽은 사람들을 장사하는 일은 죽은 사람들에게 맡겨두고, 너는 가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여라.”(60b)

3) 세 번째 사람
이제 본문은 또 다른 사람 하나를 등장시키고 있습니다. 그도 첫 번째 사람처럼 자발적으로 주님을 따르겠다면서, 집안 식구들에게 작별 인사를 할 말미를 달라고 부탁합니다. 사실 어려울 것도 없는 부탁입니다. 그냥 허락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말씀은 단호합니다. 주님은 그 사람의 마음에 있는 틈을 보셨습니다. 따르겠다고는 했지만, 여전히 그는 망설임 속에 있습니다. 그런 그에게 주어진 말이 절묘합니다.

“누구든지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다보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62)

뒤를 돌아본다 함은 그가 한 가지 일에 집중하지 못함을 나타냅니다. 그는 세상 염려와 근심이 많은 사람입니다. 모든 것을 두고 떠나기에는 미련이 많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밭을 갈도록 부름 받고도, 자꾸만 뒤를 돌아봅니다.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하는 일이 헛수고가 아닐까 하는 불안감 때문입니다.

예수의 제자가 되지 못한 이 세 사람의 공통점은 이들이 하나님 나라에 적합한 인물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머리 둘 곳이 없는 운명을 이해하지 못한 첫째 사람, 아버지 장례를 말한 둘째 사람, 가족과의 작별 인사를 핑계로 댄 셋째 사람은 다 하나님 나라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은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어떤 생각이 듭니까?

나서기 좋아하는 이가 주님을 따르겠다고 말할 때 주님은 그에게 자신을 깊이 돌아볼 것을 요구하시고, 주님을 따르기 원하지만 쉽게 결단하지 못하는 이에게는 결단을 촉구하십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부름 앞에 서있습니까? 머리 둘 곳조차 없으신 주님은 지금 역시 이 세상에서 머리 둘 곳조차 없는 이들 곁에 머물고 계신다고 저는 믿습니다. 주님의 교회란 이 부르심에 응답하는 교회입니다.

-결심 혹은 결단

우리에게 새로운 한 주간 주어질 것입니다. 길에 나가시게 되면, 길거리의 사람들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한가로운 행위가 아닙니다. 신앙적인 일로서 신앙의 마음으로 사람들을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길 위의 사람들은 모두 어딘가를 향해 갑니다. 혹은 누군가를 향해 가고 있습니다. 발걸음이 분주한 이들도 있고, 느긋하게 어슬렁거리는 이들도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 육신이 걷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하고 싶은 일을 하려는 것을 마치 걸어 나가는 것처럼 걷는다, 나아간다고 표현합니다.
하지만 그 곳의 끝에는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불안하고 초조해 합니다. 걷는 자신이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를 아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사람은 길을 걷습니다. 이때 ‘길’은 삶의 지향을 나타내는 은유입니다. 어떤 길을 택하느냐가 우리 삶의 내용을 결정합니다. 우리는 “나는 길이다” 하신 예수님을 길로 삼아 인생길을 걷는 나그네들입니다. 그 길을 충실하게 잘 걷고 계십니까?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기독교 신앙을 배우는 게 아니라 예수님과의 관계로 들어간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배운다는 것은 예수님과 하나가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에게 와서 배운 다음에 각자의 길을 가라고 말하지 않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라.”는 이 말씀에 어떤 반응을 보이느냐가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이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닙니다. 예수님께 몰려들었던 수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와 고난에 대한 말씀을 듣고 물러갔다거나,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당하는 장면에서 제자들도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는 사실을 보면 예수님의 제자로 산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놀랍게도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명령을 들었습니다. 그게 단순히 교회 잘 나오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의 현재와 미래의 운명에 관계된 명령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이 곧 하나님 나라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보다 더 시급한 일은 우리에게 없었습니다. 여러분이 세상살이에서 무엇을 하고 살든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는 사실에, 즉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새롭고 고유한 생명을 얻는다는 사실에 모든 것을 걸어두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