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7월 10일 성령강림 후 제5주 (2022년-28호)

제목 :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여라.

본문 : 아모스 7:7-14, 골로새서 1:1-14, 시편 82, 누가복음 10:25-37

【누가복음 10:25-37】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서, 예수를 시험하여 말하였다. «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하였으며,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읽고 있느냐? » 그가 대답하였다. «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하였고, 또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하였습니다. »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 네 대답이 옳다. 그대로 행하여라. 그리하면 살 것이다. » 그런데 그 율법교사는 자기를 옳게 보이고 싶어서 예수께 말하였다. «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서, 거의 죽게 된 채로 내버려두고 갔다. 마침 어떤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 이와 같이, 레위 사람도 그 곳에 이르러 그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 그러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길을 가다가, 그 사람이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측은한 마음이 들어서, 가까이 가서, 그 상처에 올리브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에, 자기 짐승에 태워서,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주었다. 다음 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어서, 여관 주인에게 주고, 말하기를 ‘이 사람을 돌보아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오는 길에 갚겠습니다’ 하였다.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서 누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 그가 대답하였다. «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여라. »

-인사

주안에서 사랑하는 파리중앙교회 교우 여러분,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이 시간 우리가 서로 인사를 나누고 나서 주님 주시는 말씀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서로에게 세상에서 가장 따뜻하고 친절한 인사를 전해 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모두 반갑습니다. 거룩한 주님의 날 예배로 하나님께 드릴 수 있다는 것은 크나큰 복입니다. 복 받은 우리가 복 받은 사람으로 살기 위해 주님의 말씀을 경청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

우리는 오늘 누가복음의 한 단락을 다함께 정성껏 읽었습니다. 복음서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누가복음만이 가지고 있는 특징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 특징은 누가복음에는 유난히 비유가 많이 나오는 복음서라고 합니다. 그 중에서도 우리가 알고 있는 너무나 유명한 비유들은 누가복음에 많이 나옵니다. 기억나시는 것이 있으신가요? 특히나 누가복음의 3대 비유라고 이름이 붙여진 비유가 있습니다. ‘탕자의 비유’가 있습니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 비유’가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읽은 소위 ‘선한 사마리아 사람 비유’라고 알려진 이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가 있겠지요.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 훨씬 더 쉽게 이해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비유가 듣는 이로 하여금 상상력을 불러 일으켜서 더욱 풍성해지는 효과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보다도 중요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이 비유 자체만으로도 너무나 아름다운 이야기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수 천년동안과 온 인류에게 깊은 감동과 함께 통찰을 준 비유가 오늘 우리가 누가복음에서 읽은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정말로 좋은 말씀은 내게 좋은 감정, 좋은 느낌으로만 다가오지 않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만나면 은혜를 받습니다. 은혜를 받으면 우리에게 찾아오는 감정은 기쁨과 만족감이 찾아옵니다. 좋은 감정이지요. 하지만 말씀을 만날 때 다른 감정도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동시에 도전을 받기도 합니다. 은혜를 받으면 기쁘고 위로가 되지만 도전을 받으면 감사하지만 좀 불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란 이렇습니다.

히브리서 4장 12절은 말씀의 이런 특성을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어서, 어떤 양날칼보다도 더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뚫어 혼과 영을 갈라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놓기까지 하며, 마음에 품은 생각과 의도를 밝혀냅니다.”
날카로운 것이 내 영혼을 건드리고, 수술하기 시작할 때,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 있을 것입니다. 내 마음이 뭔가 불편하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반가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 불편함 속에 내 영혼의 아픈 구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도전이 되는 말씀은 자기도 모르게 피하게 됩니다. 오늘 설교 본문인 누가복음 10:25-37도 도전적입니다. 새로운 깨달음을 주시는 말씀이기는 하지만 우리의 마음 한 구석을 불편하게 만듭니다. 그것을 한번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영생을 얻으려면

어떤 율법교사가 예수님께 다가와 질문을 합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기자는 ‘시험하기 위해서’ 질문을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좋게 이해하면 예수님이 율법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는지 궁금해서 일수도 있고, 말 그대로 나쁜 의도를 가지고 질문을 했습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너무나 중요한 질문입니다. 누구나 이 질문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정말로 참되게 귀한 인생을 살고 싶은 사람은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는 날이 옵니다.
예수님의 사역 중에 하나의 역할은 좋은 선생 역할입니다. 좋은 선생은 학생에게 정답을 떠먹여주지 않습니다. 수능 족집게 강사가 아닙니다. 스스로 답을 찾아가도록 훌륭한 길 안내 역할을 하는 사람이 좋은 선생입니다. 그래서 율법교사의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은 율법이 이에 대해서 뭐라 말하느냐고 되묻습니다. 되묻는다는 것은 질문을 잘못 들어서도 아니고, 답을 몰라서도 아니지요. 다만 우리가 정답이라고 알고 있는 그 답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답이 아직 자신의 정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정답이라고 하는 것을 알고 있을지라도 그 답이 그 사람의 삶에서 배어 나오지 않으면 아직 그 사람의 인생의 대답이 아닙니다.

율법교사는 신명기 6:5과 레위기 19:18을 인용해서 대답합니다. 온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정답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대답이 옳다. 그대로 행하여라. 그러면 살 것이다.”

율법교사는 자기가 율법에 조예가 깊다는 것을 은근히 자랑하는 투로 다시 묻습니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내 이웃이 누군지를 알아야 이웃을 사랑하지 않겠느냐 하는 겁니다. 율법교사다운 질문입니다. 당시 율법을 많이 공부한 이 사람은 누가 이웃인지, 또 누가 원수인지를 식별하는 일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당연히 이웃은 하나님을 믿는 유대인이고, 원수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이었습니다. 율법교사는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예수님이 한 번 더 정확하게 인정해주기를 기대한 겁니다. 노골적으로 말하면 율법은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하지만 반대의 대상이 있습니다. 이웃의 반대인 원수는 미워하고 징벌하라는 말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신앙생활의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내 의지와 소망에 끼워 맞추는 일과 내 의지와 소망을 하나님의 말씀에 맞추는 것, 어느 것이 옳습니까? 그렇지만 율법학자도 그렇고 오늘 우리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자신의 신념과 지식을 확인시켜 주는 일로 떨어졌습니다. 신앙이 잘못된 길로 엇나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현실적으로 구체적으로 말하면 유대 사람이자 정통한 율법 교사였던 자신의 입장에서 보면, 이웃하고 있는 사마리아 지방 사람들도 이웃일까요?

-제사장과 레위 사람

이 두 번의 질문 뒤에 예수님은 ‘내 이웃’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율법적으로 대답하지 않으시고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오늘 말씀에서 만나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강도들은 이 사람의 모든 걸 빼앗고, 옷을 벗기고 죽을 지경에 이르기까지 구타한 뒤에 길에 버리고 가버렸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은 사람들이 뜸한 광야입니다. 도적들, 강도떼들이 출몰하기에 맞춤한 환경입니다. 이 사람이 이렇게 방치되면 얼마 지나지 않아서 결국 죽게 될 겁니다.

마침 예루살렘 성전에서의 일을 다 마치고 휴식을 취하기 위해서 여리고로 내려가던 제사장이 이 사람을 보았습니다. 끔찍했겠지요. 피범벅이었겠지요. 독수리들이 시체를 쪼아 먹을 기회를 노리느라 높은 곳에서 배회하고 있지는 않았을까요? 제사장은 많은 생각을 했을 겁니다. 어려운 처지에 빠진 사람을 보면 누구나 측은한 생각이 들게 마련입니다. 도울 생각도 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제사장은 시체에 손을 대면 율법을 어기는 겁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강도들이 아직도 이 부근에 남아있을지 모르니까 빨리 피하는 게 좋습니다. 그의 생각이 실제로 어땠는지에 대해서 본문은 아무 말이 없습니다. 다만 제사장이 “그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라고 했습니다. 당장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제사장은 외면한 겁니다. 그 다음에 레위 사람이 지나가다가 제사장과 똑같이 행동했습니다. 레위인도 제사장보다는 못하지만 종교적으로 상위 계급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제사장이나 레위인 모두 그 위급 상황에 처한 사람을 나 몰라라 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의 등장

세 번째로 그곳을 지나간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이 비유를 듣고 있던 율법교사나 다른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의 등장을 예상하지 못했을 겁니다. 제사장과 레위 사람이 지나간 뒤에는 당연히 일반 유대인이 등장해야만 합니다. 사라마리아 사람은 유대인들에게 이방인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얼마나 강렬한 지, 사람들에게 세게 말하는 지 알 수 있는 것이 사마리아 사람의 등장입니다. 오늘 우리의 말씀 몇 구절만 앞으로 가보면 9장에 사마리아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심부름꾼을 앞서서 보내시는데, 그 곳이 사마리아의 한 마을입니다. 그 곳의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을 맞아들였나요? 아닙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마을로 들어오는 것을 거절했습니다. 그 때, 야고보와 요한 제자가 화가 잔뜩 나서 뱉은 말이 있습니다. “주님,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그들을 태워 버리리고 우리가 명령하면 어떨까요?” 유대인이었던 예수님의 제자들의 마음속에도 사마리아 사람들에 대한 깊은 거절과 원한이 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굳이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원수 같은 사마리아 사람을 말씀 가운데 꺼내듭니다.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 하필이면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비유를 들어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제사장과 레위 사람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는 아주 짧게 한 마디로 끝냈습니다. 그들은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는 아주 상세합니다.
이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 불쌍하게 여겼습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식으로 그 사람을 치료하고 돌봐주었습니다. 34절을 그대로 읽겠습니다. “가까이 가서, 그 상처에 올리브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에, 자기 짐승에 태워서,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그뿐만 아닙니다. 하룻밤을 거기서 보내고 여관 주인에게 두 데나리온을 주면서 다친 사람을 더 돌봐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비용이 더 들면 일을 마치고 돌아올 때 갚아주겠다고 했습니다. 가족이나 친지, 동족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자비를 베푼 사마리아 사람에게서 큰 감동을 받으셨습니까? 그래서 나도 그 사람처럼 살아야겠다고 다짐이 되십니까? 그런데 어딘가 모르게 불편합니다. 불편함이 느껴집니다. 이 불편함의 뿌리를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내가 그렇게 살지 못하기에 그렇습니다. 이 비유의 말씀을 직접 들었던 사람들 역시 소위 은혜 받고 감동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뭔가 불편함이 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웃이 되어준 사람은 자신들이 그토록 싫어하는 사마리아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비유에서 사마리아 사람은 칭찬받아 마땅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사장과 레위 사람이 무조건 비난받으면 안 됩니다. 우리가 그들의 입장이었다고 해도 그들과 비슷하게 행동했을 겁니다. 예수님도 이 비유를 통해서 누가 잘하고 누가 못했다는 것을 말씀하려는 게 아닙니다. 또한 사마리아 사람의 삶을 우리가 완벽하게 그대로 따라갈 수도 없을 것입니다. 복음서에는 이것과 견해가 다른 이야기도 나옵니다. 마리아가 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는 일이 있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었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누가 듣더라도 휴머니즘이 넘치는 발언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요 12:8) 가난한 이들, 즉 강도 만난 이들을 돕는 것이 중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핑계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상대화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믿음은 휴머니즘을 넘어서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도대체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는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요?

-강도 만난 사람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신 뒤에 예수님이 율법교사에게 한 질문이 중요합니다.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서, 누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당연히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율법교사는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기 싫어한 것 같습니다. ‘자비를 베푼 사람’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율법교사의 관심은 누가 자기의 이웃인가를 규정하는 데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이웃이 되어주는 데에 있었습니다. 관점이 완전히 다릅니다. 전자는 자기가 중심이 된 관점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강도당한 사람이 중심이 되는 관점입니다.

우리는 이웃과의 관계를 율법교사와 비슷한 관점에서 생각합니다. 내 관점으로 상대를 봅니다. 주관적으로 세상을 판단합니다. 내 편과 너의 편을 나눕니다. 조폭의 의리와 비슷합니다. 그래서 끼리끼리 어울립니다. 이게 우리의 숙명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 편이 아닌 대상은 부정하든지 무시하든지 배척합니다. 이런 삶의 태도가 정치나 사회적인 차원만이 아니라 일상에도 깊이 뿌리박혀 있습니다. 지난번 우리나라 대선도 그랬고, 지금 우크라이나를 둘러싼 전쟁의 중심에는 이런 갈등이 뿌리가 깊습니다.

-이웃이 되어 주어라

조금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율법교사 수준으로 살기만 해도 그런대로 괜찮습니다. 왜냐하면 이웃에 대한 관심이 그 생각의 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교사가 예수님의 질문에 대답하면서 인용한 두 번째 성경구절인 레위기 19:18을 보십시오. “한 백성끼리 앙심을 품거나 원수 갚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다만 너는 너의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여라. 나는 주다.” 이렇게 살기도 힘듭니다.

유대민족이 주변의 막강한 제국 틈바구니에서도 생존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가 내부의 결속입니다. 내부의 결속은 자기와 통하는 게 많은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율법은 가난한 사람, 과부, 고아 등을 사회가 책임지도록 명령합니다. 유대인들은 그걸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율법교사가 예수님에게 ‘내 이웃이 누구냐?’ 하고 물은 것은 자신들의 이웃 사랑이라는 전통을 자랑하고 싶었던 데에 있습니다. 그런 정도라도 이웃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사랑을 실천하면서 살면 누구에게만 인정받을 만합니다.

그러나 그런 방식의 삶은 아무리 고상해도 일정한 대상을 부정하게 됩니다. 이 비유에 세 번째로 사마리아 사람이 등장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웃을 자기처럼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유대인들도 사마리아 사람은 사랑할 수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고방식이 고착된 세상에는 왕따 현상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을 실천해야 할 대상과 미워해야 할 대상이 구별됩니다. 예수님은 율법교사에게 생각을 근본적으로 바꾸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이웃이 누군지를 고르지 말고 참된 이웃이 되어주라고 말입니다.

-사마리아 사람 예수

율법교사는 이 말씀을 듣고 생각을 바꿨을까요? 본문은 말하지만 않지만, 바꾸지 못했을 가능성이 훨씬 큽니다. 눅 18:18에는 어떤 부자 관리가 예수님을 찾아온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사람도 오늘 본문의 율법교사와 똑같이 “선하신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 사람은 어렸을 때부터 율법을 잘 지키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고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는 근심했다고 합니다. 그게 성실하고 평범한 사람들의 일반적인 태도입니다.

오늘 본문은 더 궁극적인 어떤 사실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곧 본문에 등장하는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참된 생명을, 영생을, 구원을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제사장도 우리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레위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이웃이라고 생각한 어떤 누구도, 심지어는 가족도, 또한 자기 자신도 우리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예수님만이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본문에서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강도 만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구원의 가능성이 없는 처지에 놓여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은 먼지처럼 사라지고 맙니다. 그리고 우리의 내면은 온갖 상처로 가득합니다. 겉으로는 세련되고 웃고, 뭔가 있어 보일지 몰라도 실제로는 강도 만난 사람과 똑같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유일한 이웃으로 경험하셨는지요. 그래서 구원의 빛을 보고 따라가시는지요? 당연히 그래야만 합니다. 우리는 그런 경험을 한 교회 안에서 서로 나누고 있습니다. 그런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예수님이 강도 만난 사람을 구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우리의 참된 이웃이라는 이 놀라운 사실을 알고 경험한 사람이라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 오늘 말씀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랑을 받은 경험이 있는 사람이 사랑할 줄 안다는 말이 있듯이 참된 이웃을 경험한 사람은 세상에서 이웃으로 살아가려고 노력합니다. 그렇습니다.
“가서, 너도 그와 같이 하여라.” 오늘 말씀의 주제이자 결론입니다. 이 말씀이 오늘 우리 앞에 떨어졌습니다. 이제 이 말씀을 붙들고 내게 그동안의 이웃은 누구이었는지, 이 품이 확장될 수는 있는지 묻고 그렇게 살아야 할 시간입니다. 주님 가르치신 길로 나아가는 우리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