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족하고 충분하다
본문 : 아모스 8:1-12, 골로새서 1:15-28, 시편 52편, 누가복음 10:38-42
【누가복음 10:38-42】
그들이 길을 가다가, 예수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셨다. 마르다라고 하는 여자가 예수를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 이 여자에게 마리아라고 하는 동생이 있었는데, 마리아는 주님의 발 곁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었다. 그러나 마르다는 여러 가지 접대하는 일로 분주하였다. 그래서 마르다가 예수께 와서 말하였다. « 주님,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십니까? 가서 거들어 주라고 내 동생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 그러나 주님께서는 마르다에게 대답하셨다. « 마르다야, 마르다야, 너는 많은 일로 염려하며 들떠 있다. 그러나 주님의 일은 많지 않거나 하나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하였다. 그러니 아무도 그것을 그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
-인사
주안에서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서로에게 따뜻하고 친절한 인사를 전하고 이 시간 말씀의 시간으로 함께 나누겠습니다.
여러분, 혹시 식물 키워보셨습니까? 아마도 모두 비슷한 경험을 갖고 계시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도 초등학생 시절 어렴풋하게나마 콩을 심어본 기억이 납니다. 씨앗을 심고 물을 줍니다. 이미 키워본 경험이 있는 사람으로부터 노하우도 잘 전수받았습니다. 가르쳐 준대로 모두 했는데 씨앗에서 싹이 나지를 않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어느 날 조그마한 싹이 나오는 것이 보입니다. 이제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싹이 난 씨앗에서 금방 줄기가 돋고 잎이 번창합니다. 저의 초조함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지요. 조급했던 마음이 사라졌습니다. 모든 생명은 각각의 ‘성장의 때’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더욱 성장시켜야 할 시간이라고 믿습니다. 신앙이 성장한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교제가 더욱 깊어져야 하는 것이기도 하고, 하나님을 앎으로써 자신을 깊이 들여다 볼 수 있는 경지에 까지 이르러야 할 줄로 믿습니다.
-신앙의 동기
‘잘잘법’이라는 유튜브의 한 프로그램에서 시청한 내용입니다. 이미 시청하신 분도 계시겠지만 한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유명한 심리학 실험이 있다고 합니다. “원숭이- 바나나 실험”이라고 하는데,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원숭이가 사람과 아주 유사한 점이 있는데 바로 호기심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원숭이가 좋아하는 놀이 중 하나가 어린아이가 하는 간단한 퍼즐 맞추기입니다. 실험을 통해서 보면 퍼즐을 맞추고 나면 원숭이가 다음 퍼즐을 달라고 조릅니다. 말하자면 흥미와 관심인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실험이 들어갑니다. 어느 순간 퍼즐 맞추기에 성공하면 바나나 하나씩을 성공의 댓가로 주었습니다. 성공한 결과에 대한 보상으로 바나나를 계속 주다가 어느 순간 바나나 주기를 중단했습니다. 그랬더니 원숭이가 퍼즐 맞추기에 계속 흥미를 보였을까요? 예상하시다시피 바나나 보상이 주어지지 않자 원숭이는 퍼즐 맞추기에 흥미를 잃어버렸습니다.
이 실험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사람에게는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 “내재적 동기”와 함께 “외재적 동기”가 있습니다. 원숭이에게 내재적 동기는 퍼즐에 대한 흥미와 호기심입니다. 이에 반해 외재적 동기는 바나나인 셈입니다. 그런데 내안에서 발생한 동기에 따라 삶을 살던 내가 외재적인 동기가 들어오자 삶이 시들해졌습니다.
신앙은 이와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신앙도 동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이왕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섰으니, 우리 각자의 신앙의 동기도 한번 들여다보았으면 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합니다.”라고 말합니다. 교회의 예배에 참석하기도 하고, 하나님께 기도하기도 합니다. 모두 신앙적인 행동입니다. 그런데 모두 같은 신앙생활처럼 보이지만 방향은 두 군데서 옵니다. 외재적인 동기와 내재적인 동기입니다. 어느 것이 좋고, 어느 것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둘 다 필요한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께 칭찬받고 인정받는 것이 목표인 신앙이 있습니다. 보상이나 칭찬이 이에 해당이 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예를 들면 “죽어서 천국 가려고 신앙생활한다.”는 말을 떠올려 보십시오. 보상이라는 외재적 동기가 작용을 합니다.
하지만 그 이전에 우린 내재적 동기를 확인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사귐 자체가 기쁨인 동기도 있습니다. 내적인 동기가 있어야 하지요. 이를 찾지 못하면 시들해집니다.
-마르다의 염려와 근심
오늘 누가복음 말씀을 보면 예수님 일행이 어느 마을에 들어가셨습니다. ‘마르다’라는 이름의 한 여자가 예수님 일행을 자기 집으로 모셨습니다. 마르다는 원래 예수님을 알고 있었던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누가복음은 마르다의 가족관계를 상세히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요한복음에는 나사로, 마르다, 마리아 삼 남매로 묘사되기도 합니다. 이 삼남매가 사는 곳이 ‘베다니’라고 보아도 될 것 같습니다. 마르다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셨습니다. 평소에 예수님과 허물없을 정도로 가깝게 지냈기에 가능한 것으로 보입니다. 누가복음이 표현한 바에 따르면, 동생 마리아는 말씀을 듣느라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있었고, 언니 마르다는 예수님을 대접하기 위해서 음식을 장만하느라 마음이 분주했다고 합니다. 마르다는 일하다 말고 예수님에게 와서 이렇게 도움을 청합니다.
“주님,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십니까? 가서 거들어 주라고 내 동생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여러분, 이 상황이 눈에 선하게 그려지시지요? 예수님을 집에 모신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는 기쁨이 넘쳤을 겁니다. 예수님이 어디 보통 손님입니까? 요한복음 11장이 밝히고 있듯이 예수님은 죽었던 오빠 나사로를 살린 생명의 은인입니다. 주님과 일행을 모시는 것이 무척이나 큰 영광일 것입니다. 조금 과장을 하면 마르다는 며칠 전부터 음식 재료를 구하기 위해 시장을 보고 아침 일찍부터 온갖 맛난 음식을 만드느라 정신이 없었을 겁니다. 이웃집의 도움도 받았겠지요. 그런데 동생 마리아는 도울 생각을 하지 않고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있습니다. 마르다는 철없는 동생이 못마땅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마르다는 마리아를 직접 부르지 않습니다. 예수님께 철없는 동생을 좀 꾸짖어달라고 부탁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가운데 많은 분들이 마르다의 말에 동조하고 계실 것입니다. 마르다의 요구는 합리적입니다. 마르다가 잘못한 것이 있나요? 없습니다. 모두가 마르다가 아니라 마리아를 이상하다고 생각할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41-42절에서 예상외의 말씀을 ‘마르다’에게 하셨습니다. 선문답처럼 들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읽겠습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너는 많은 일로 염려하며 들떠 있다. 그러나 주님의 일은 많지 않거나 하나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하였다. 그러니 아무도 그것을 그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마리아의 입장
그렇지만 마리아의 입장도 전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마리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당시의 팔레스타인 사회의 관행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 마리아의 태도를 표현한 말은 ‘발 곁에 앉았다’는 표현입니다. 이 말 ‘누군가의 발치에, 즉 발 앞에 앉는다’는 것은 사람의 행동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더 나아가 “그의 제자가 되었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바울은 자기의 출신 배경을 설명하면서 “가말리엘 선생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의 율법의 엄격한 방식을 따라 교육을 받았다”(행22:3)고 말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문하’라는 말은 발아래를 뜻합니다. 유대의 랍비 전통에 의하면 오직 남성 제자들만이 스승의 발 앞에 앉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마르다가 책망하는 것은 마리아가 자기를 돕지 않는다는 사실도 있지만, 여성인 마리아가 사회적인 통념을 깨고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처럼 처신한다는 사실도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마리아는 전통적인 여성상에서 벗어난 여인이고, 마르다는 전통적인 여성상에 충실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르다는 우리다!
마르다는 많은 일로 염려하며 살아가는 현대인의 전형입니다. 현대인의 전형이라는 말은 저와 여러분이 ‘마르다’를 꼭 닮았다는 말, 아닐까요? 오늘 우리가 얼마나 많은 일로 염려하는지는 일일이 말하지 않아도 잘 압니다. 여러분, 제가 감히 짐작하건대, 우리는 오늘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면서부터 시작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염려입니다. 염려가 습관이 되었습니다.
실제로 염려할만한 일도 많습니다. 작게는 어제 못다한 일, 처리하지 못한 일에 대한 염려가 쌓여있습니다. 크게는 미래에 대한 염려가 있을 것입니다. 직장에 취직을 못해 염려하는 젊은이에게 염려하지 말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고 말할 수도 없지요. 막연히 잘될거다. 곧 사라질 것이니 너무 고민할 필요가 없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염려는 분명히 있습니다. 염려해야 합니다. 당장의 생계를 위해 염려하는 이들에게 그게 아니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가 분명히 보아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여러분, 너무나 많은 일이 문제입니까? 아닙니다. 문제는 너무 많은 일 때문이 아니라 너무 많은 일에 대한 염려로 분주한데 있습니다. 너무 많은 염려가 내 삶을 휘어 감고 있습니다.
우리 어르신들이 염려가 많으시죠? 염려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제 어머니가 떠오릅니다. 저희 어머니도 제가 대학을 들어가기 전에는 “대학만 들어가면”이라고 하시다가, 그 다음에는 “군대를 빨리 다녀와야”… 등으로 저에 대한 염려가 계속되고 지금도 여전합니다. 제게 늘 염려 섞인 말을 하셔서 어느 순간부터인가 오히려 염려로 가득한 어머니 인생이 염려스러워지기도 했던 기억이 납니다.
분주하게 지내다보면 가장 중요한 것을 잊게 마련입니다. 당장에 화급한 일에만 쫓기고 매달리다보면 정작 더 소중한 일은 잊기 쉽다는 말입니다. 먹고 살기 바쁘다는 핑계로 우리는 마땅히 해야 할 여러 가지 일들을 소홀히 할 때가 많습니다. 마르다는 분주함에 쫓겨 예수님의 마음을 미처 헤아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 할 수 있는 제일 큰 봉사는 그분의 말씀을 경청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좋은 일마저 염려의 대상이 됩니다. 이런 염려와 근심은 그것만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을 향한 불평으로 발전합니다. 이런 불평은 자신과 다른 사람의 삶을 크게 작게 파손합니다.
마르다가 볼 때 마리아는 철이 없습니다. 지금은 예수 발치에 앉아 있을 때가 아니라 손님들의 허기를 면하게 해주기 위해서 열심히 식사를 준비해야 할 때입니다. 마르다는 실제로 바빴습니다. 분주함으로 염려와 근심이 머리에 가득했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보니 동생 마리아가 못마땅한 겁니다. 만약 마리아가 아예 없었다면 마르다는 이렇게 불평하지 않았을 겁니다.
-교회 안에서도
교회에서도 이런 비슷한 상황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아니, 교회에서 이런 일은 부지기수로 벌어집니다. 자신과 생각이 다르고 행동이 다른 교우들로 인해서 뭔가 불편한 마음이 들 수 있습니다. “저 사람은 왜 교회 봉사도 안 하지”하고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여기서 진도가 조금 더 나아가면 자신이 손해를 보는 느낌이 들 수도 있고, 그렇게 “교회 일을 나 몰라라 하면 누가 봉사한다는 말이냐?” 하고 불평할 수도 있고, 비판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불평과 비판이 선의라는 사실은 저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선의라고 해서 무조건 옳거나 교회에 덕스럽게 영향을 끼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여러분이 교회 발전과 부흥을 위해서 신앙생활을 한다고 생각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누구를 돕기 위해서, 봉사하기 위해서 신앙생활 하는 것도 아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이기를 바랍니다.
누가 공동체 역시 이런 문제가 있었을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보셨듯이 누가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통해서 사람을 올바로 세우기 위해서는 이웃이 되어주는 사랑과 봉사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 후에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 이야기’를 통해서 봉사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주님의 말씀을 잘 듣는 생활에 맛 들이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봉사 활동과 은혜의 추구는 수레의 두 바퀴와 같습니다. 어느 한쪽이 없다면 수레는 제 구실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물어야 하는 것은 교회가 “얼마나 많은 일을 하는가?”, “얼마나 많은 이들을 돕는가?”가 아니라 “그 모든 일들을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하는가”입니다.
-족하다 충분하다
예수님은 마르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걱정한다는 사실을 짚은 다음에 이어서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충분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대목이 사본에 따라서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공동번역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로 되어 있습니다. 마르다는 많은 문제로 염려하고 근심하지만,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 정작 필요한 것은 많지 않다고, 즉 한 가지뿐이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마르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하였다. 그러니 아무도 그것을 그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마리아의 선택은 예수의 발치에서 말씀을 듣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과 영적으로 친밀해지는 사건입니다. 영혼의 시간입니다. 물론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늘 예수 발치에만 앉아 있을 수는 없습니다. 돈벌이도 하고, 밥도 먹고, 청소도 하고, 친구를 만나야 합니다. 마리아도 그런 일을 평소에 했을 겁니다. 그러나 지금은 예수가 자기 집에 들어온 순간입니다. 이 순간은 다른 일을 제쳐놓아야만 했습니다. 이 선택이 현명한 것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마리아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을 뿐입니다. 대화는 마르다와 예수님만이 합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지만 이 말씀의 주인공은 단연코 마리아입니다. 마리아는 철이 없어서가 아니라 자기에게 정말 좋은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말씀 맺기
우리 역시도 오늘 인생의 많은 선택지 가운데 중요한 하나를 선택한 것이라고 믿습니다. 저는 오늘 우리의 선택이 마리아의 선택처럼 우리 인생 전체를 놓고 볼 때 탁월한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늘 이 자리에 나아옴으로써 하나님의 현존 앞에 서고자 용기를 낸 것입니다. 삶의 여러 문제와 그 세상살이의 문제가 발생시키는 염려의 늪에서 허우적대지 않고 존재의 가장 깊은 차원에 이르고자 하는 인간의 가장 절실하고 가장 거룩한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염려가 아니라 우리의 영혼을 위해 염려합시다. 우리의 존재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염려해야 합니다.
삶의 모든 것을 돈으로 바꾸어 계산하도록 만드는 세상에서, 세상일에 대한 염려로 좌절하지 않고 거룩함을 구하기 위해 주 앞에 나온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주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삶의 등불이 되어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