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7월 31일 성령강림 후 제8주 (2022년-31호)

제목 : 즐겁고 행복한 인생

본문 : 호세아 11:1-11, 골로새서 3:1-11, 시편 107:1-9, 43, 누가복음 12:13-21

【누가복음 12:13-21】

무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이 예수께 말하였다. « 선생님, 내 형제에게 명해서, 유산을 나와 나누라고 해주십시오. »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관이나 분배인으로 세웠느냐? » 그리고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 너희는 조심하여, 온갖 탐욕을 멀리하여라. 재산이 차고 넘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거기에 달려 있지 않다. »
그리고 그들에게 비유를 하나 말씀하셨다. « 어떤 부자가 밭에서 많은 소출을 거두었다. 그래서 그는 속으로 ‘내 소출을 쌓아둘 곳이 없으니, 어떻게 할까?’ 하고 궁리하였다. 그는 혼자 말하였다. ‘이렇게 해야겠다. 내 곳간을 헐고서 더 크게 짓고, 내 곡식과 물건들을 다 거기에다가 쌓아 두겠다. 그리고 내 영혼에게 말하겠다. 영혼아,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물건을 쌓아 두었으니, 너는 마음놓고, 먹고 마시고 즐겨라.’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사람아, 오늘밤에 네 영혼을 네게서 도로 찾을 것이다. 그러면 네가 장만한 것들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자기를 위해서는 재물을 쌓아 두면서도, 하나님께 대하여는 부요하지 못한 사람은 이와 같다. »

-인사

파리중앙교회 교우 여러분 모두 안녕하십니까?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멀리 타지에 계신 분들, 한국에 방문 중이신 분들 모두 반가운 마음을 전합니다. 이 시간 서로에게 인사하겠습니다.
거리에 나가보면 제법 한산합니다. 아마도 휴가철이라 그런 것 같습니다. 휴가철을 맞아서 한적한 곳에서 휴식을 가지시는 것도 좋은 일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일은 일에 대한 열심과 열정의 영역이 있지만 한쪽에는 쉼과 휴식의 영역이 있습니다. 급격히 달려가던 길을 멈추면 보이지 않던 것도 보이고, 들리지 않던 것도 들리게 되는 법입니다. 하나님도 일하시고 쉬셨다고 하시니 여러분의 삶에 진정한 휴식이 있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시작하며

오늘 나눌 말씀은 누가복음 12장의 말씀입니다. 오늘 방금 전에 우리가 주의 깊게 읽었고 마음에 담아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을 ‘즐겁고 행복한 인생’이라고 정해보았습니다. 지구 위에 사는 모든 사람의 목적은 똑같습니다. 즐겁고 행복한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즐거움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즐겁고 행복한 인생을 거절할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시고 가장 처음 하신 말씀이 “좋았다”인 것을 보면 인간의 즐거움을 찾는 일은 당연한 일입니다. 당연히 행복감을 만끽하며 사는 것은 인생의 가장 큰 목적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오늘 말씀 속에도 보면 즐겁기 위해, 행복하기 위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 사람은 즐겁고 행복한 삶을 위해 삶의 방향을 어느 쪽으로 잡은 사람입니다.

-말씀의 첫 단락

오늘 말씀을 보면 두 개의 단락으로 나뉘어 있다는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13-15절 단락과 16-21절 단락으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첫 번째 단락입니다. 무리 중에 있던 어떤 사람 하나가 예수님께 요청했습니다. “선생님, 내 형제에게 명해서, 유산을 나와 나누라고 해주십시오.” 이 사람은 누구인가요? 모릅니다. 하지만 아마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던 사람들 가운데 하나인 것으로 보입니다. 앞서서 예수님이 어떤 말씀을 하셨길래, 이 사람에게 어떤 분으로 예수님이 보였길래 이 사람이 이런 요청을 드렸을까요? 아마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던 중에 예수님의 말씀의 권위와 말씀 속 지혜를 느낀 사람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니 현재 자신이 처한 가장 중요한 문제인 형제와의 재산 나눔의 문제에 권위로 잘 처리해 달라고 부탁한 것이겠지요.
늘 그렇지만 예수님은 사람들의 생각과는 다른 관점과 관심의 목적을 갖고 계십니다. 사람들이 자기들의 재산 나눔에 관심이 있고 온 신경이 거기에 쏠려 있다는 사실을 예수님은 보셨습니다. 그리고 한 말씀 툭 던지십니다. “사람의 생명이 재산의 많음에 달려 있지 않으니, 탐욕을 멀리하라.”고 경고하십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너는 너의 생명을 구하는 일을, 너는 재산을 얻는 일과 동일하게 보는구나!” 라는 말씀입니다. 이 사람의 요청과 예수님의 대답이 전혀 다릅니다. 이 사람의 요구에 전혀 다른 답을 하신 것입니다.

-비유의 시작

이어 두 번째 단락으로 이어집니다. 예수님이 비유를 하나 말씀하십니다. 추가적인 설명을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말씀하신 이 비유가 그 유명한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입니다. 그러니까 재산이 많은 사람입니다. 부자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부자인데 어리석다? 어떤 사연이 담겨있을까요? 이것을 살펴보는 것이 오늘 우리의 말씀듣기입니다.

자, 어떤 부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밭에서 많은 소출을 얻었습니다. 좀 덧붙이자면 원래 부자입니다. 그런데 이번 농사에 큰 수확을 얻었습니다. 자, 잘 보십시오. 그가 많은 소득을 얻은 곳은 자신 소유의 밭입니다. 부당하게 남의 것을 빼앗거나, 훔치거나, 못된 계략을 꾸며서 얻은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늘날처럼 이 땅의 부동산 등기부 등본을 떼어볼 수 있다면, 이 부자에게 많은 소출을 안겨준 그 땅의 소유주가 이 부자가 맞습니다. 자신의 밭에서 얻었으니 정당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소출을 얻었는데, 얼마나 많은 소득이 있었는가 하면 성경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쌓아둘 곳이 없을 정도로 많이 얻었다”고 합니다. 오늘날처럼 이렇게 극도의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날 사람들에게 가장 바라던 바가 이루어진 셈입니다. 예전에 어떤 영화를 보니까 일확천금을 얻게 된 사람이 현금을 손에 가득 쥐고 위로 뿌리면서 즐거워하는 그런 장면처럼 느껴집니다. 한 때 광고에도 등장했던 멘트인 “여러분, 부자 되세요!”가 실현된 상황입니다.

-부자의 계획과 생각

이렇게 엄청난 부를 얻게 되면 그 다음 행보는 무엇일까요? 이 돈을 어떻게 쓸 것인지 계획을 세워야지요. 부자는 들뜬 마음으로 자기가 얻은 부를 어떻게 할 것인지 계획을 세웁니다. 행복한 고민인가요? 우선 자신의 곳간을 헐고 새로 지을 계획을 세웁니다. 곳간이 낡았으니 도둑이 들어 훔쳐갈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작아서 재산을 다 보관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크고 튼튼하게 자신이 얻은 것, 자신의 재산을 안전하게 보관할 공간을 마련합니다. 오늘날이라면 가진 재산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 재테크 같은 것을 하는 그런 것입니다.
그리고 압권인 장면이 등장합니다. 이 부자는 자신에게 말합니다. 뭐라고 말하지요? 이렇게 말합니다. “내 영혼아…” 저는 이 장면이 이 비유의 최고의 장면처럼 느껴집니다. 여러분은 이 부자처럼 자신에게, 더 나아가 자신의 영혼에게 무엇인가를 확인하고 언급한 경험이 있습니까? 누군가는 아침마다 거울을 보면서 자기를 확인하거나 확신하는 이런 비슷한 말들을 할 것 같기도 합니다. “넌 할 수 있어” 와 같은 다짐입니다. 저는 이와 비슷한 경험이 있습니다. 저의 30대 시절에 버킷 리스트 가운데 마라톤 대회 42.195km 완주가 제 인생에서 이뤄보고 싶은 것이었습니다. 대회에 나가 마라톤을 완주하고 거울 앞에 서 있는데, 그렇게 제 자신이 뿌듯하더군요. 그래서 거울 속 나를 보면서, “재현아, 장하다. 대견하다.”고 스스로 말해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부자의 이 모습은 훨씬 더 큰 행동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영혼에게 말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이 사람의 인생 전체를 건 말이기도 하고, 자신의 생명과 육신과 영혼을 통틀어서 말한 것입니다. 이해가 가시는지요?

이 부자는 이어서 이렇게 자신의 영혼에게 말합니다.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물건을 쌓아 두었으니, 너는 마음 놓고, 먹고 마시고 즐겨라.” 이 말을 통해서 이 사람의 인생의 목적이 무엇이었는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라고 뭐가 얼마나 다르겠습니까? 돈 걱정 없이 사는 것이 모든 현대인들의 목적이자 바램인 것을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에게 행운이 찾아들어 여러 해 동안 사용할 것을 손에 쥐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영혼에게 속삭입니다. “먹고, 마시고, 즐겨라.” 이제 그의 인생은 즐겁고 행복할 일만 남았습니다.

-하나님 말씀하시다

그러나 급격한 반전이 벌어집니다. 하나님이 이 부자에게 말씀하십니다. “어리석은 사람아, 오늘밤에 네 영혼을 네게서 도로 찾을 것이다. 그러면 네가 장만한 것들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20절)
이런 말을 들으면 어떠신가요? 마음 한켠으로는 뜨끔하기는 할 것 같기도 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은근히 기분이 나쁠 수도 있습니다. 죽음이나 공포심을 무기로 즐거운 인생을 망가뜨리는 언어폭력처럼 들립니다. 특히나 하나님이 이런 분이라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행복한 걸 바라지 않으시는건가? 아니면 하나님은 인간이 감당하지 못할 것을 강요하시는 분이신가라고 말입니다.
더 나아가 아주 극단적인 거 하나 더 말씀드리자면 지옥 공포심을 자극적으로 불러일으킵니다. ‘예수 믿지 않으면 죽은 다음에 지옥에 떨어져 유황불 구덩이와 구더기가 들끓는 통에 들어가 영원히 고통받는다’는 류의 이야기들입니다. 이런 종류의 공포심은 기독교 신앙이 아닙니다. 오늘 비유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오늘밤에 네 영혼을 네게서 도로 찾을 것이다”라는 표현 역시 죽음에 대한 공포심을 자극하거나 즐겁게 살려는 꿈을 훼방하려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지금 여기서 우리가 살아가는 삶을 직시하라는 요구입니다. ‘어떤 삶이 정말 풍요로운가’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자 방향 제시입니다. 내가 방향을 잡은 즐겁고 행복한 인생이란 어느 방향인가? 부산행 기차를 타면 부산에 도착합니다. 내가 올라탄 행복을 구하는 방향으로 나는 가는 것입니다.

-구약의 땅에 대한 전통

오늘의 말씀을 통해 무엇을 보셨습니까? 무엇이 보입니까?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말씀 속에 있습니다. 성경 속에 등장하는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에게는 일관된 전통 같은 것이 있습니다. 구약의 전통에서는 마치 입에 붙어버린 말처럼 반복해서 하는 말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가 약자의 대명사인 것이지요.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의 전통”입니다.
이처럼 “땅에 대한 전통”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왕국사를 보면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에 정착하고 난 이후에 드러난 특징들이 있습니다. ‘땅을 소유한 자들의 등장’하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가나안에 정착하기 이전에 땅은 소유의 개념이 아니었습니다. 계절과 목초지의 조건에 따라 텐트를 쳤다가 거두는 일의 반복입니다. 하나님이 조건을 허락해 주셔서 가라하시면 가는 것이고, 여기에 멈추라고 하시면 멈추는 일입니다. 가축을 먹이기 위한 목초지나 우물 등이 모두 공동의 소유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어느 누구도 내 개인 소유물이라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가나안에 정착한 이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더 이상 불편한 텐트에 살지 않습니다. 초원을 따라 이동하지 않아도 됩니다. 가축은 가둬놓고 기르면 됩니다. 이제 이들은 큰 집을 짓고 살게 되었고, 훨씬 안락하고 안전한 삶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제 이들은 땅을 차지하고 살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구약의 전통은 땅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땅은 개인 소유물이 되어버렸다는 말입니다.

오늘 말씀 비유 속 주인공 부자의 모습을 보십시오. 그가 엄청나게 큰 소득을 얻은 곳이 어디입니까? 무엇으로부터 입니까? 바로 “땅”입니다. 땅에서 곡식과 식물이 자라 사람을 먹이고 살립니다. 곡식을 키우고 열매를 맺게 하는 이 땅의 신비로움은 하나님의 손길이라는 생각이 녹아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삶의 모양이 바뀌었습니다. 땅은 소유하는 것으로 변했다는 말입니다.
구약성경의 이런 전통을 우리가 새겨들어야 할 것입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왔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이 주신 것은 신비이자 은혜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느 순간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소유의 개념으로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 구약시대처럼 천막을 치고 유랑하며 살자는 말이 아닙니다. 공산주의 사회처럼 모든 사유재산제를 철폐하자는 주장도 아닙니다. 우리는 신앙인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 누구의 것인지 새겨듣는 일을 소홀히 다루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가 가진 것들의 주인이 누구이신지를 명심하고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바알 신앙

오늘 우리가 읽어야 했던 성서일과 구약의 말씀은 실은 호세아입니다. 호세아 예언자뿐만이 아니라 고대 이스라엘 선지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바알숭배를 가장 큰 죄라 여기고, 바알숭배와 투쟁했습니다. 아합 왕과 이세벨 왕비 시대에 활동한 엘리야가 대표적입니다. 선지자들은 왜 바알숭배를 배척했을까요? 우리는 지금 성경을 통해서 배운 대로 바알숭배를 무조건 나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바알은 생긴 것도 추하고, 역겹고, 추종자들을 성적으로 문란하거나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어서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보는 것은 바알신앙을 오해하는 겁니다. 바알은 가나안의 원주민들이 원래부터 섬기던 신의 이름입니다. 가나안 사람들은 농경문화를 크게 꽃피운 사람들인데, 자신들의 풍요로운 삶을 가능하게 해주는 신을 바알이라고 보았습니다. 바알은 다산과 풍요의 원천이라고 말입니다. 이스라엘 선지자들이 아무리 말려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알숭배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습니다. 모두가 재물을 축적하고 쌓는 일에만 집중하는 삶, 이런 삶의 방향을 선택했다는 말입니다. 오늘 비유 속 부자가 선택한 삶의 방향입니다.

-우리는 괜찮은가?

이제 오늘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시선을 돌려볼 차례입니다. 나는 자유롭습니까? 나는 부자가 아니니까 괜찮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이 정말 이 부자와 같이 쌓아둔 것이 없다고 여기십니까? 여러분이 몰래 숨겨둔 재산이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은 세상적인 물질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이 없다고 말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가진 것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80억분의 1의 재능을 가진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 여러분 각자 한 사람만이 가진 특별한 능력이 있다는 말입니다. 달란트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루 종일 사용하는 여러분의 마음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감정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시간이 있습니다. 이것들 모두를 무엇을 위해 사용해 오셨습니까? 앞으로 무엇을 위해 사용할 계획이십니까?
하나님께 거지에게 하듯이 적선하지 마십시오. 지하철 갈아타는 곳을 지나다 보면 구걸하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이따금 측은한 마음이 들어서 동전 하나를 내어놓곤 하지요. 왜요? 불쌍하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 전체를 놓고 삶의 일부, 아주 작은 부분을 가끔 생각날 때 하나님께 내놓습니다. 적선과 다르지 않습니다. 나는 부자가 아니니까 나에게 해당사항이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나는 주님께로부터 온 것을 무엇을 위해 쌓아놓고 있고, 무엇을 향해 사용하고 있는가?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이 말씀으로 삶의 방향을 점검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내 것들’이라고 여기는 것들이 어디서 온 것인지 진정한 감사의 영역은 없는지 살펴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무엇을 위해 쓸지를 기도로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자기를 위해서는 재물을 쌓아 두면서도, 하나님께 대하여는 부요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오늘 말씀은 말합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아낌없이 모든 애정과 시간과 전력을 부으면서도 하나님의 마음을 살피는 것에는 이따금 적선하듯 살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