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믿음의 길
본문 : 이사야 1:1, 10-20, 히브리서 11:1-3, 8-16, 시편 33:12-22, 누가복음 12:32-40
【이사야 1:1, 10-20】
이것은,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하여 본 이상이다.
너희 소돔의 통치자들아! 주님의 말씀을 들어라.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여라.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무엇하러 나에게 이 많은 제물을 바치느냐? 나는 이제 숫양의 번제물과 살진 짐승의 기름기가 지겹고, 나는 이제 수송아지와 어린 양과 숫염소의 피도 싫다. 너희가 나의 앞에 보이러 오지만, 누가 너희에게 그것을 요구하였느냐? 나의 뜰만 밟을 뿐이다! 다시는 헛된 제물을 가져 오지 말아라. 다 쓸모 없는 것들이다. 분향하는 것도 나에게는 역겹고, 초하루와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참을 수 없으며, 거룩한 집회를 열어 놓고 못된 짓도 함께 하는 것을, 내가 더 이상 견딜 수 없다. 나는 정말로 너희의 초하루 행사와 정한 절기들이 싫다. 그것들은 오히려 나에게 짐이 될 뿐이다. 그것들을 짊어지기에는 내가 너무 지쳤다. 너희가 팔을 벌리고 기도한다 하더라도, 나는 거들떠보지도 않겠다. 너희가 아무리 많이 기도를 한다 하여도 나는 듣지 않겠다. 너희의 손에는 피가 가득하다.
너희는 씻어라. 스스로 정결하게 하여라. 내가 보는 앞에서 너희의 악한 행실을 버려라. 악한 일을 그치고, 옳은 일을 하는 것을 배워라. 정의를 찾아라. 억압받는 사람을 도와주어라. 고아의 송사를 변호하여 주고 과부의 송사를 변론하여 주어라. »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오너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빛과 같다 하여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며, 진홍빛과 같이 붉어도 양털과 같이 희어질 것이다. 너희가 기꺼이 하려는 마음으로 순종하면, 땅에서 나는 가장 좋은 소산을 먹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거절하고 배반하면, 칼날이 너희를 삼킬 것이다. » 이것은 주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이다.
【히브리서 11:1-3, 8-16】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확신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선조들은 이 믿음으로 살았기 때문에 훌륭한 사람으로 증언되었습니다. 믿음으로 우리는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졌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보이는 것은 나타나 있는 것에서 된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고, 장차 자기 몫으로 받을 땅을 향해 나갔습니다. 그런데 그는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했지만, 떠난 것입니다. 믿음으로 그는, 약속하신 땅에서 타국에 몸 붙여 사는 나그네처럼 거류하였으며, 같은 약속을 함께 물려받을 이삭과 야곱과 함께 장막에서 살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설계하시고 세우실 튼튼한 기초를 가진 도시를 바랐던 것입니다.
믿음으로 사라는, 나이가 지나서 수태할 수 없는 몸이었는데도, 임신할 능력을 얻었습니다. 그가 약속하신 분을 신실하신 분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는 한 사람에게서, 하늘의 별과 같이 많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이 셀 수 없는, 많은 자손이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모두 믿음을 따라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들은 약속하신 것을 받지는 못했지만, 그것을 멀리서 바라보고 반겼으며, 땅에서는 길손과 나그네 신세임을 고백하였습니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자기네가 고향을 찾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들이 만일 떠나온 곳을 생각하고 있었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들은 더 좋은 곳을 동경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곧 하늘의 고향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불리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도시를 마련해 두셨습니다.
-인사
주안에서 사랑하는 파리중앙교회 교우 여러분 모두 안녕하십니까?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인사 나눕시다. 서로에게 따뜻하고 반가운 인사를 전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절기상 입추라고 합니다. 말 그대로 ‘가을의 입구’로 들어서는 시간이라고 말하지만 아직 여름이 지나갔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자연을 바라볼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자연은 정말 자연스럽습니다. 어느덧 여름인가 싶더니, 아침 저녁으로 바람이 서늘합니다. 자연스러움은 작위적이지 않다는 말입니다. 작위적이란 말은 억지로 하는 것입니다. 뭔가 억지로 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는 우리 삶이 되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사야의 시대
오늘 말씀을 나누기 위해 선택한 말씀은 구약의 이사야서와 신약의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제가 늘 말씀드리는 것입니다만 어느 말씀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말씀에는 시대가 담겨져 있습니다. 성경말씀 속에 한 시대를 살아간 하나님의 사람들이 숨겨져 있습니다. 말씀이 시대라는 배경과 상관없이 하늘로부터 뚝 떨어진 것이라는 말씀 이해는 말씀을 잘 이해하는 것을 방해합니다. 우리도 시대라는 현실을 배경으로 신앙생활을 해나가기에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가 처음 봉독한 말씀을 기억해 보십시오. 이사야 1장 1절입니다. “이것은,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하여 본 이상이다.” 그가 본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이상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과 상관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은 특정한 인간의 시대, 인간의 역사 속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이사야는 유다 왕 4명의 시대를 거치면서 살았던 인물입니다.
‘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왕’이 다스리던 시대는 당연히 그 시대만이 가진 독특한 특징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활동을 하게 된 시대는 어떤 시대였을까요? 저는 전쟁을 경험하신 어르신들을 뵐 때마다 늘 안쓰럽고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전쟁이란 총을 쏘고, 폭탄이 터지는 일, 건물이 파괴되는 것이 아닙니다. 전쟁은 그 시대를 살아낸 모든 사람들에게 커다란 상처를 남깁니다. 사람들의 꿈을 좌절시킵니다. 희망을 앗아갑니다. 그리고 전쟁에 당면한 한 사람에게만 인생에 상처를 내는 것이 아니라 대를 이어서 상처를 냅니다. 예전에 소설가 김형경 님의 심리학 에세이 “남자를 위하여”라는 책에서 본 기억이 납니다. 오늘날 40대 후반에서 50대 남자들이 사회적 관계 맺기가 어려운 이유를 설명하면서 전쟁을 경험한 부모 세대의 상처의 경험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탓이라는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단계별 시대
평온의 시대 : 지금 우리는 이사야가 살아간 시대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그가 활동하던 시대는 이런 시대였습니다. 이전에 북이스라엘과 남 유다는 비록 분단은 되었지만 각각 평온의 시대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적어도 다른 나라와 큰 전쟁을 벌여서 온 나라가 초토화되는 경험은 없었다는 말입니다.
앗수르의 등장 : 그러나 전쟁의 기운이 점차 드리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북동쪽의 ‘앗수르’라는 나라가 강성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날 이라크 지역,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강 지역을 기반으로 둔 큰 제국입니다. 이 앗수르가 점점 자신의 힘을 발휘하여 남쪽으로 남쪽으로 자신의 세력을 넓히려고 합니다. 이 강대한 앗수르의 힘 앞에 놓인 나약한 여러 나라들이 있었습니다. 시리아, 북이스라엘이 우선 침략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시리아-이스라엘 동맹 : 이럴 때 힘이 약한 나라들은 어떻게 주로 대응할까요? 시리아와 북이스라엘은 군사적인 동맹을 맺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고 남유다에게도 이 동맹에 참여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이사야가 활동하던 예루살렘은 남유다 지역입니다. 남유다의 왕은 진퇴양난에 놓였습니다. 이 동맹에 참여하자니 앗수르가 너무 무섭고, 그렇다고 동맹에 참여 안하자니 우선 시리아와 북이스라엘에게 눈치가 보입니다. 약소국의 설움입니다. 지금 세상도 이와 비슷하지요? 지금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는 유럽 서방 국가들과 러시아 사이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 민족도 늘 중국, 일본, 러시아, 미국 등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살아왔습니다. 말씀 속 이사야의 나라 남 유다는 큰 고민에 빠졌습니다. 진퇴양난입니다.
결국 ‘앗수르’ 대 제국은 몇 년이 지나지 않아서 자신들의 군사적인 힘을 발휘하여 시리아는 속국으로 만들고, 북이스라엘을 멸망시켜 버렸습니다. 북이스라엘이란 나라는 이제 사라져버리게 된 것입니다.
-북 이스라엘 멸망의 여파
피난길 : 나라가 없어지면 어떻게 될까요? 살기 위한 최선의 방법으로 북이스라엘 사람들은 남 유다 예루살렘으로 피난길에 올랐습니다. 당연하지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피난길에 들어서 예루살렘으로 들어왔습니다. 북에서 피난 내려온 사람들을 유다 사람들은 어떻게 했을까요? 이사야의 눈에 비친 유다 사람들의 반응은 이랬습니다. 말씀 한 구절 읽어드리겠습니다. 이사야 5:8입니다. “너희가, 더 차지할 곳이 없을 때까지, 집에 집을 더하고, 밭에 밭을 늘려 나가, 땅 한가운데서 홀로 살려고 하였으니, 너희에게 재앙이 닥친다!”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가시나요? 여기서 말하는 이는 이사야이고, 듣는 너희는 유다 사람들입니다. 유다 사람들이 벌이는 짓들을 보면 “더 차지할 곳이 없을 때까지” 집을 계속해서 구입합니다. 피난 내려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살 집이 없습니다. 살 집을 구하려고 해봐도 집을 구할 수가 없습니다. 왜요? 남 유다 사람들이 모두 집을 차지해버렸기 때문입니다. 이런 어려운 때를 악용해서 집값을 올려 돈을 벌려고 벌이는 짓들입니다. 부동산 투기 공화국이라는 소리를 들었던 우리나라의 모습이 떠오르실 겁니다. 한 사람이 열 집, 100 집에 살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하지만 피난 내려온 사람들을 이용해 먹기 위해 남 유다 사람들이 벌인 일을 이사야는 고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입에 풀칠을 하기 위한 작은 밭떼기도 구할 수가 없습니다. 왜요? 유다 사람들이 모두 차지해버렸습니다.
바알신앙 : 그리고 유다 땅에 이상한 신앙 풍습이 유행하기 시작했습니다. 북이스라엘 땅에는 바알 신앙이 아주 융성해있었습니다. 여러분, 엘리야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절 아합왕과 이세벨 왕비 기억하시죠? 북이스라엘의 모습이었습니다. 피난민들이 남쪽 유다 예루살렘으로 내려오면서 바알신앙도 가지고 내려왔습니다. 예루살렘 성전 중심의 신앙이 본격적으로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세상풍조 : 그 당시 정신적인 풍조를 드러내는 말씀을 보면 이렇습니다. 이사야 3장 16-23절입니다. “시온의 딸들이 교만하여 목을 길게 빼고 다니며, 호리는 눈짓을 하고 다니며, 꼬리를 치고 걸으며, 발목에서 잘랑잘랑 소리를 내는구나. 그러므로 나 주가 시온의 딸들 정수리에 딱지가 생기게 하며, 나 주가 그들의 하체를 드러낼 것이다. » 그 날이 오면, 주님께서는 여인들에게서, 발목 장식, 머리 망사, 반달 장식, 귀고리, 팔찌, 머리 쓰개, 머리 장식, 발찌, 허리띠, 향수병, 부적, 가락지, 코걸이, 고운 옷, 겉옷, 외투, 손지갑, 손거울, 모시 옷, 머릿수건, 너울 들을 다 벗기실 것이다. 예루살렘을 뒤흔들던 퇴폐적인 문화가 바로 이 모습입니다.
신앙생활은 어떻게 변화되었을까요?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이 이에 해당이 됩니다. 11-13절에 이사야를 통해 듣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무엇하러 나에게 이 많은 제물을 바치느냐? 나는 이제 숫양의 번제물과 살진 짐승의 기름기가 지겹고, 나는 이제 수송아지와 어린 양과 숫염소의 피도 싫다. 너희가 나의 앞에 보이러 오지만, 누가 너희에게 그것을 요구하였느냐? 나의 뜰만 밟을 뿐이다!” 신앙이 형식, 껍데기만 남아버렸습니다.
“다시는 헛된 제물을 가져 오지 말아라. 다 쓸모없는 것들이다. 분향하는 것도 나에게는 역겹고, 초하루와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참을 수 없으며, 거룩한 집회를 열어 놓고 못된 짓도 함께 하는 것을, 내가 더 이상 견딜 수 없다.” 하나님이 예배 받으시기를 거절하십니다. 여러분에게 이 말씀이 어떻게 들리십니까? 하나님 앞에서 두렵습니까? 우리는 두려워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슬픔과 탄식을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왜 망했을까?
정치적, 외교적, 군사적 실패입니다. 이것은 역사가들의 평가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역사가의 평가에만 머무를 수는 없습니다. 이것에 더해 신앙의 눈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얼마나 많은 일들이 있습니까? 때로는 경제적인 관점으로 봐야 합니다. 경제라는 색안경이 필요하지요. 다른 시선도 필요합니다. 정치, 외교, 군사 같은 큰 관점도 있겠지만 개인적인 이득의 관점, 개인 안전의 관점 등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관점, 우리의 삶에서 정말 결핍된 시선은 하나님의 관점, 하나님의 시선입니다. 하나님이 보신다면 어떠실까?입니다.
구약성경에는 사무엘 상하, 열왕기상 라는 역사서로 알려진 책이 있습니다. 그런데 역사서도 시선이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왕하 17:7-8입니다. “이렇게 된 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들을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어 이집트 왕 바로의 손아귀로부터 구원하여 주신 주 하나님을 거역하여, 죄를 짓고 다른 신들을 섬겼기 때문이며, 또 주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의 면전에서 내쫓으신 이방 나라들의 관습과, 이스라엘의 역대 왕들이 잘못한 것을, 그들이 그대로 따랐기 때문이다.” 성경의 시선입니다.
그들이 왜 망했을까? 이스라엘은 왜 망하고, 유다는 왜 갈팡질팡 진퇴양난의 처지에 놓이게 되었을까? 경제, 군사, 외교의 문제가 아니라 신앙의 문제라고 지적합니다.
-믿음이란
오늘 우리의 삶을 들여다보아야 할 시간입니다. 우리 역시 많은 문제를 안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문제가 발생할 때 마다 어떻게 하십니까? 우리는 문제를 풀기 위해 대처 방법으로 세상의 여러 가지 시선으로 여러분 각자의 문제를 바라볼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의 시선 가운데 믿음의 시선이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믿음의 시선이란 하나님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입니다.
이는 곧 오늘 히브리서가 지적하는 믿음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교회 생활을 하면서 믿음이라는 단어를 참 많이 들으며 생활합니다. 하지만 가끔 의문이 듭니다. 믿음이라는 같은 단어를 사용해서 대화를 하는 데도 마음 속 어디선가 ‘어, 내가 이해하는 뜻과 좀 다르네.’ 이런 생각 경험해 보셨는지요? 우리가 모두 믿음을 주제로 놓고 이야기 나누지만 우리가 가진 믿음에 대한 전 이해는 조금 다릅니다. 그렇기에 ‘같지만 다른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게 우리의 한계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믿음은 무엇인가? 우리는 어떤 상태, 어떤 행동, 어떤 마음가짐을 믿음이라고 부를까요? 우리도 믿음이 무엇인지 알고는 있습니다만 어떤 한 관점에서 믿음을 규정하는 신약성경의 한 대목을 여러분과 다시 읽고 싶습니다. 히브리서 11:1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확신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우리 입에 익은대로 개역성경으로 암송하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입니다.
‘믿음’이란 희망하는 대상을 목적으로 합니다. 목적이 없다면 믿음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라는 것이란 즉 아직 실현되지 않은 것, 아직 현실화되지 못한 것을 말합니다. 현실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내 것이 아직 아닙니다. 그런데 믿음은 아직 현실이 되지 않은 것을 현실이 되게 해줍니다. 즉 여기 내가 있고, 내가 희망하는 바가 있습니다. 이 둘 사이를 이어주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이 둘 사이에는 아무런 연결점이 없었는데, 믿음이 이 둘을 연결한다는 말입니다. 믿음은 우리가 희망하는 것을 확신하게 합니다.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이니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의 논리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내놓게 되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자기가 바라는 바가 이루어졌느냐, 아니냐의 관점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졌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바라는 것들’은 희망하는 것들이라고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그 희망하는 것들은 ‘보이지 않는 것들’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미래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냥 바라기만 하면 되는 것이냐, 아니면 나의 저급한 욕망도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기대하고 소망하는 믿음만 있으면 되는 것인가? 라는 오해입니다.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우리가 바라고 희망하는 구체적인 내용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우리의 응답이라는 차원에서만 의미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했다고 합니다. 히브리서가 강조하는 것은 그의 믿음이 그의 인생을 안내했다는 점입니다. 미래가 손에 잡을 수 있듯이 확실하지는 않았지만 믿음으로 갈대아 우르를 떠났고, 중간 기착지인 하란을 떠나서 가나안까지 갔습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가서 부자가 되겠다는 욕망을 실현하려는 게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했을 뿐입니다. 그는 가나안에서도 하나님의 부르심과 약속을 확실하게 붙들었습니다. 그의 아내 사라도 나이가 출산 시기를 지났지만, 아들을 허락하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이들의 믿음을 가리켜 본문은 희망하는 것들의 즉 실상이요 확신이라고 했습니다.
-맺으며
여러분, 혼란스럽고 어렵기만 한 이 세상살이가 얼마나 버겁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을 헤쳐나가느라, 갖가지 삶의 방법을 찾느라 골몰합니다. 지쳐버렸습니다. 이것이 우리 인생살이의 실상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우리와 똑같이 버거운 인생을 살았지만 하나님을 의지했던 한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라하시니 가고, 하나님이 떠나라 하시니 그 말씀에 순종하여 산 사람이 있습니다. 그에게는 다른 어떤 사람도 가지지 못한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자신을 부르셨다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약속을 붙드는 삶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저는 아브라함의 삶을 ‘본질을 놓치지 않는 삶’이었다고 평가하고 싶습니다. 그도 인간인지라 실수도 많이 하고, 그가 저지른 어리석은 일은 얼마나 많습니까?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는 믿음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집으로 가지고 가야할 단 한 가지는 이것입니다. 세상살이에 바쁘더라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부르시고 인도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어제도 그랬지만 오늘도 이 사실은 유효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 사실을 믿느냐에 있습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