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8월 21일 성령강림 후 제11주 (2022년-34호)

제목 : 신앙은 풀어내는 일입니다.

본문 : 예레미야 1:4-10, 히브리서 12:18-29, 시편 103:1-8, 누가복음 13:10-17

【예레미야 1:4-10】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 내가 너를 모태에서 짓기도 전에 너를 선택하고, 네가 태어나기도 전에 너를 거룩하게 구별해서, 뭇 민족에게 보낼 예언자로 세웠다. » 내가 아뢰었다. « 아닙니다. 주 나의 하나님, 저는 말을 잘 할 줄 모릅니다. 저는 아직 너무나 어립니다. » 그러나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 너는 아직 너무나 어리다고 말하지 말아라.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그에게로 가고, 내가 너에게 무슨 명을 내리든지 너는 그대로 말하여라. 너는 그런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늘 너와 함께 있으면서 보호해 주겠다. 나 주의 말이다. » 그런 다음에, 주님께서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고, 내게 말씀하셨다. «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맡긴다. 똑똑히 보아라. 오늘 내가 뭇 민족과 나라들 위에 너를 세우고, 네가 그것들을 뽑으며 허물며, 멸망시키며 파괴하며, 세우며 심게 하였다. »

【누가복음 13:10-17】

예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고 계셨다. 그런데 거기에 열여덟 해 동안이나 병마에 시달리고 있는 여자가 있었는데, 그는 허리가 굽어 있어서, 몸을 조금도 펼 수 없었다. 예수께서는 이 여자를 보시고, 가까이 불러서 말씀하시기를, « 여자야, 너는 병에서 풀려났다 » 하시고, 그 여자에게 손을 얹으셨다. 그러자 그 여자는 곧 허리를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그런데 회당장은,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치신 것에 분개하여 무리에게 말하였다. « 일을 해야 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엿새 가운데서 어느 날에든지 와서, 고침을 받으시오. 그러나 안식일에는 그렇게 하지 마시오. » 주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 너희 위선자들아, 너희는 저마다 안식일에도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끌고 나가서 물을 먹이지 않느냐?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자가 열여덟 해 동안이나 사탄에게 매여 있었으니, 안식일에라도 이 매임을 풀어 주어야 하지 않겠느냐? »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니, 그를 반대하던 사람들은 모두 부끄러워하였고, 무리는 모두 예수께서 하신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두고 기뻐하였다.

-인사

주안에서 사랑하는 파리중앙교회 성도 여러분 모두 안녕하세요? 우리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에 이른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은혜를 은혜로 받아들이는가, 받아들이지 못하는가는 우리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내게 미치지 못한 것이 아닌 것이지요. 아무쪼록 여러분 생애, 한번 뿐인 인생을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로 가꾸시기를 바랍니다.

-희망을 잃은 시간

오늘 설교 말씀을 나누기 위해서 예레미야서와 누가복음의 말씀을 함께 봉독했습니다. 조금 긴 단락이지만 말씀 속에 깊이 들어가는 우리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먼저 누가복음의 말씀을 살피려고 합니다. 복음서의 한 장면입니다. 저는 복음서를 대할 때마다 우리 인생의 한 장면과 꼭 닮았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예수께서 만나는 사람들, 그 속에 저도 있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때로는 주님 때문에 감격스럽고, 때로는 주님 말씀에 마음이 찔려서 부끄럽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복음 속에서 제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지요. 저는 오늘 이 장면도 우리 인생살이의 한 장면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장면은 특별합니까? 네 특별합니다. 왜냐하면 주님과 마주친 순간이기에 그렇습니다. 하지만 특별할 것도 없는 것이 이 하나의 장면입니다. 우리의 일상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특별하지 않지만 특별한 순간입니다.

오늘 말씀에는 두 가지 장면이 교차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장면입니다. 이 장면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시간적으로 안식일은 유대인들에게 절대적인 의미를 갖는 날입니다. 그리고 공간으로서 회당은 유대인들의 종교집회 장소입니다. 예수님은 주로 안식일마다 회당에 들르신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회당에서 종종 가르치셨습니다. 평범한 안식일 날이지만 평범하지만은 않은 만남의 순간입니다.

다른 한 장면이 있습니다. 열여덟 해 동안이나 허리를 펴지 못하는 장애를 갖고 있는 한 여자가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18년이란 세월은 참으로 길고 긴 세월입니다. 이 여인의 현재 나이가 얼마나 되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만 어쩌면 이 여인이 예수님과 만난 이 시간은 거의 노인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열여덟 해라는 시간을 가늠해 보는 것은 병마로 인해 이 여인의 삶이 얼마나 피폐해져 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평균 수명이 오늘날의 반도 안 되는 2000년 전 사람입니다. 지금으로부터 18년 전으로 돌아가 보십시오. 때는 2004년입니다. 그 때 여러분은 무엇을 하고 계셨습니까?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분도 계실 것이고, 대부분의 성도님들은 지금 보다 훨씬 젊고 의기충천하던 시절입니다. 까마득한 시간입니다. 그 때로부터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일들이 여러분 삶에 있었습니까? 어마어마한 사건들이 그 시간 속에 담겨있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의 이 여인은 그 때로부터 지금까지 계속 아파왔습니다. 점점 허리가 굳어지는 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사실은 며칠만 아파도 삶의 리듬이 깨져 버립니다. 그런데 그 긴 세월을 여인은 어떻게 견딜 수 있었을까요? 그리고 자신의 병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가졌을까요?

-하늘을 보지 못하는 사람

예수님 당시 시대를 우리 시대의 눈으로 ‘고대 사회’라고 표현합니다. 고대인들은 이런 인간의 모든 질병, 사고를 죄와 연결해서 생각했습니다. 불치병이나 장애는 자신의 조상이나 당사자의 죄가 원인이라는 겁니다. 오늘 우리의 눈에 어떻게 보이시나요? 우리 주변에도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없다고 할 수는 없는 것만 같습니다. 이런 불행한 일들이 사람들의 인식 너머의 현상이기에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죄를 원인이라고 해야 죄를 용서받고 치유될 가능성도 열리게 됩니다. 좋은 뜻으로 시작된 그런 생각이 시간이 지나면서 오히려 불행에 빠진 사람들을 더 옥죄는 수단으로 변질되기 시작했습니다. 불치병 환자들이나 장애인들은 그 불행 자체도 힘들었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징벌을 받았다는 사실로 인해서 더 절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대다수 사람들은 그런 선입견에 물들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이 정말 놀라운 것은 이런 편견과 선입견에서 완전히 자유로우신 분입니다.

이 여인이 앓는 병명이 오늘날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사실 성경이 말하는 바는 이 여인이 겪는 병을 과학적으로 진단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한 여인의 비참함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여인이 앓던 이 병의 증상을 보면 허리가 굽어서 조금도 펼 수 없었다고 말합니다. 허리가 굽었다는 사실은 많은 것을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허리가 굽었다는 것은 고개를 들어서 하늘을 바라보는 일을 할 수 없는 사람. 마치 세상일에 이리저리 끌려 다니며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만 같습니다.

-그래도 회당으로 나온 여인

장애인들에게도 ‘이동권’이라는 권리가 있다는 사실 잘 아시지요? 장애인들도 자신의 의사에 따라 자유롭게 가려는 곳으로 이동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합니다. 우리는 육체가 멀쩡하다고 여겨서 한 번도 심각하게 듣지 않았던 그런 권리입니다. 그런데 굽은 허리로 열여덟 해를 살아온 이 여인이 나와 앉은 자리는 회당이었습니다.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은 묘사입니다만 어떻게 보면 참 놀라운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신의 불편한 몸을 이동시키는 것에 많은 노력과 애씀이 필요한 여인입니다. 어쩌면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와 있는 곳이 회당입니다. 여러분, 회당은 오늘날로 말하면 우리 예배당과 같습니다. 이 예배당의 목적이 무엇인가요?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한 목적으로 모이는 장소가 회당입니다. 이것은 이 여인의 신앙심을 엿볼 수 있는 모습입니다.

회당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단순한 예배 참석, 교인의 의무 이런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겠지요. 이 여인에게 예배는 일종의 숨쉬기와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요? 반드시 해야 하는, 잠시도 멈춰서는 안 되는 일, 이 여인에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은 이런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일주일에 한번 하나님을 만나는 이 시간, 하나님께 마음을 풀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예배는 이런 것일까요?

-회당에서 예수님을 만나다

그 운명의 날, 여인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회당에 들어갔습니다. 특별할 것 없는 날입니다. 18년 동안 계속 반복해서 해오던 날 중의 하루입니다. 하지만 그 날은 특별합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주님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이 전하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여러분, 2000년 전 예수님 시대에, 유대교 회당 안에 여성의 자리, 그것도 장애를 가진 여인의 자리가 있었을까요? 오늘날과 같이 장애인 석이 따로 마련이 되어 있었을까요? 아니겠지요? 여성, 장애인, 노인. 사회적 차별의 대표적인 모습을 골고루 갖춘 여인에게 회당의 구석자리라도 쫓겨나지 않고 있을 수 있다면 참 다행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의 시선이 머무는 곳을 보십시오. 예수님의 시선은 곧 하나님의 시선입니다. 하나님의 시선은 이런 사람을 그냥 보고 가벼이 지나치지 않습니다. 제 개인적인 경험입니다만 프랑스 땅에 살면서 참 감격스러웠던 장면 중 하나로 기억합니다. 시리아 난민이자 노인인 한 여인이 지하철 통로에 ‘시리아 난민, 도와주세요’ 라는 종이판을 놓은 채 졸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카톨릭 교회 어느 수도회 낡은 복장을 한 늙은 수도사가 그 여인을 보고 무릎을 굽혀서 그 여인의 손을 잡으며 미소를 띠는 장면을 제 눈앞에서 보았습니다. 종교도 서로 다르고, 여자의 손을 남성인 사람이 잡았습니다. 게다가 동전 지갑을 꺼내서 얼마를 적선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피곤에 쩔어 졸고 있는 여인을 보며 손을 한번 따뜻하게 잡아주고 따뜻한 미소 한번 보내는 모습이었습니다. 그 때의 장면으로 돌아가 보면, 제 눈에는 주님을 본 듯 했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눈에 들어온 여인의 모습이 이렇지 않았을까요? 허리를 펴지 못하는 그 여인 속에서 하나님은 이미 활동하고 계셨습니다. 18년 동안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회당을 들락거렸지만 한 번도 주목의 대상이 되지 못했던 그런 여인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여인을 주목하여 보시고 그를 가까이 부르셨습니다. 어리둥절해 있는 여인에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자야, 너는 병에서 풀려났다.” 이 말이 이 여인에게 어떻게 들렸을까요?
그리고 나서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스스럼없이 손을 얹으셨습니다. 너무나 아름답고 감격스런 장면입니다. 예수께서 이 여인을 보시고, 가까이 부르시고, 병에서 풀려났다고 선언하시고, 손을 얹으시는 일련의 행동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습니다. 한 생명이 그렇게 살아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곧 여인의 허리가 펴졌습니다. 열여덟 해 동안이나 여인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던 병이 마침내 떠나간 것입니다. 여인을 사로잡고 있던 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바이러스 감염인지, 척추측만증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과의 만남이 그 여인을 부자유에서 해방시켜 주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이 세상에 온 것은 의인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죄인들을 위해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맺힌 것을 풀어 자유롭게 하는 의사이십니다.

허리를 펼 수 있게 된 여인은 하나님께 영광의 찬송을 올렸습니다.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는 이의 찬송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놀라운 사건을 목격한 사람이라 해서 다 그 이적을 기뻐한 것은 아닙니다.

-붙들려 매인 사람들

이렇게 얘기가 끝나면 해피엔딩으로 좋겠지만 그렇지 못합니다. 어쩌면 이제부터가 오늘 말씀의 주제입니다. 이어지는 사건이 있다는 말입니다. 회당장은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치신 것에 분개했습니다. 그는 회중에게 말하였습니다. “일을 해야 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엿새 가운데서 어느 날에든지 와서, 고침을 받으시오. 그러나 안식일에는 그렇게 하지 마시오.”

어떻습니까? 여러분. 그가 무엇을 말하나요? 그가 꺼내든 논리는 결국 예수가 안식일 규정을 위반했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목숨, 사람의 생명 보다 귀한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원하시는 일도 사람을 살리는 일입니다. 안식일도 사실은 그런 의미로 보아야 합니다.

안식일의 원래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일하시고 안식하신 날을 의미합니다. 다르게 말하면 하나님의 창조에도 리듬이 있습니다. 사람은 이 창조의 리듬 속에 몸을 맡겨야 사는 법입니다. 여러분도 스포츠 관람을 좋아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축구 선수 중에 ‘리오넬 메시’라는 선수가 있습니다. 이 선수는 다른 선수들처럼 덩치가 우람하지도 않습니다. 170cm 정도라고 하니 운동 선수치고는 너무나 작습니다. 그리고 축구는 공을 놓고 달리는 경기인데, 메시라는 선수는 달리기도 그렇게 빠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선수가 공을 대하는 모습을 보면 춤 같이 느껴집니다.
여러분, 춤을 잘 춘다는 것이 무엇인가요? 춤은 리듬을 잘 타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요? 안식일이 존재하는 이유는 창조의 리듬 안에 머물며 살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그 리듬에 맞추어 살기로 약속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래야 어그러졌던 우리가 회복됨을 믿습니다. 왜냐하면 안식일은 생명이 진정으로 회복되는 날이기에 그렇습니다. 허리를 편 이 여인은 예수를 통해 진짜 안식일을 경험한 것입니다.

마치 자기 권위가 훼손되기라도 한 것처럼 화를 내고, 회중들에게 일장 연설을 한 회당장은 대체 어떻게 된 사람일까요? 허리가 굽은 진짜 환자는 바로 이 사람이 아닐까요? 주님은 법이 인간 위에 군림하는 것을 보시고는 그 법을 의도적으로 위반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이런 일의 연속입니다. 주님은 유대인들이 부정하다고 하는 것과 끊임없이 접촉하셨습니다. 물론 접촉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접촉을 통한 정화가 목적입니다. 접촉을 통해서 깨끗하게 하시는 것이지요.

-손으로 만지시는 하나님

삶의 곤고함에 지친 여인의 손을 잡은 노인 수도사, 열여덟 해 동안 굽은 허리로 하늘을 올려다보지 못하던 여인에게 손을 대신 예수님, 그리고 오늘 예레미야의 입에 손을 대신 하나님. 이 말씀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손을 대는 것이지요. 손으로 접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접촉이 있는 곳에 무슨 일이 발생합니다. 하나님의 손길이 닿아본 분들은 모두 아실 겁니다. 사람이 진짜 살아나는 것이지요. 진짜 생명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접촉하다는 뜻을 가진 영어 단어 ‘TOUCH’나 불어 단어 ‘TOUCHER’의 뜻은 단순한 접촉도 있지만 ‘감동시키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감동’이란 마음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굳어서 움직일 수 없는 마음이 풀어지기 시작하는 것이고, 굳어졌던 마음 때문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 일이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믿고 그것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훨씬 많습니다. 그렇게 살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너희 위선자들아, 너희는 저마다 안식일에도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끌고 나가서 물을 먹이지 않느냐?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자가 열 여덟 해 동안이나 사탄에게 매여 있었으니, 안식일에라도 이 매임을 풀어 주어야 하지 않겠느냐?”(15-16)

예수님은 안식일 법이 충실하게 지켜져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 그렇기에 안식일에 병자를 고친 예수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선자’라고 말합니다. 위선자란 문자적으로 보면 ‘가짜 선을 행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중에서도 거짓을 뜻하는 ‘위’는 ‘사람인변’의 글자입니다. 그러니까 위선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안식일이 지켜져야 한다고 강변하는 사람들 속에서 위선을 보셨습니다.

-맺으며

지금 이 세상에는 이 여인의 처지와 다를 바 없이 사는 이들이 많습니다. 여러분 마음 속에 떠오르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정말 말씀이 내게 ‘말씀이 되는 것’은 정말 위선적으로 사는 세상의 누구누구가 떠오르는 것보다도 예수님이 지적하시는 사람들 속에서 내가 보이는 것입니다. 예수님 앞에 있는 군중, 무리 속에서 내가 보이는 것입니다. 위선자의 모습을 한 나 말입니다.
요즘 세상이 어렵다고 말합니다. 사는 것도 어렵고, 경제도 힘들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지금이야말로 하나님을 믿는 이들의 아름다움이 드러나야 할 때입니다. 신앙은 묶인 것을 푸는 일입니다. 신앙은 양날의 칼과 같습니다. 바르게 이해하고 따라가면 풍요로운 생명의 세계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참된 해방의 세계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그런 길을 가고 있다고 믿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자신을 점검해 볼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