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오네시모를 부탁합니다.
본문 : 신명기 30:15-20, 빌레몬서 1:1-21, 시편 1편, 누가복음 14:25-33
【빌레몬서 1:1-21】
그리스도 예수 때문에 감옥에 갇힌 나 바울과 형제 디모데가, 우리의 사랑하는 동역자 빌레몬과 자매 압비아와 우리의 전우인 아킵보와 그대의 집에 모이는 교회에, 이 편지를 씁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려주시는 은혜와 평화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빕니다.
나는 기도할 때마다 그대를 기억하면서, 언제나 나의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나는 주 예수에 대한 그대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그대의 사랑에 관하여 듣고 있습니다. 그대의 믿음의 사귐이 더욱 깊어져서,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선한 일을 그대가 깨달아 그리스도께 이르게 되기를 나는 기도합니다. 형제여, 나는 그대의 사랑으로 큰 기쁨과 위로를 받았습니다. 성도들이 그대로 말미암아 마음에 생기를 얻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그대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아주 담대하게 명령할 수도 있지만, 우리 사이의 사랑 때문에, 오히려 그대에게 간청을 하려고 합니다. 나 바울은 이렇게 나이를 많이 먹은 사람이요, 이제는 그리스도를 전하는 일로 또한 갇힌 몸입니다. 내가 갇혀 있는 동안에 얻은 아들 오네시모를 두고 그대에게 간청합니다. 그가 전에는 그대에게 쓸모 없는 사람이었으나, 이제는 그대와 나에게 쓸모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나는 그를 그대에게 돌려보냅니다. 그는 바로 내 마음입니다. 나는 그를 내 곁에 두고 내가 복음을 위하여 갇혀 있는 동안에 그대를 대신해서 나에게 시중들게 하고 싶었으나, 그대의 승낙이 없이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대가 선한 일을 마지못해서 하지 않고, 자진해서 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잠시 동안 그대를 떠난 것은, 아마 그대로 하여금 영원히 그를 데리고 있게 하려는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이제부터는 그는 종으로서가 아니라, 종 이상으로 곧 사랑 받는 형제로 그대의 곁에 있을 것입니다. 특히 그가 나에게 그러하다면, 그대에게는 육신으로나 주님 안에서나 더욱 그러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그대가 나를 동지로 생각하면, 나를 맞이하듯이 그를 맞아 주십시오. 그가 그대에게 잘못한 것이 있거나, 빚진 것이 있거든, 그것을 내 앞으로 달아놓아 주십시오. 나 바울이 친필로 이것을 씁니다. 내가 그것을 갚아 주겠습니다. 그대가 오늘의 그대가 된 것이 나에게 빚진 것이라는 사실을 나는 굳이 말하지 않겠습니다. 형제여, 나는 주님 안에서 그대의 호의를 바랍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나의 마음에 생기를 넣어 주십시오. 나는 그대의 순종을 확신하며 이 글을 씁니다. 나는 그대가 내가 말한 것 이상으로 해주리라는 것을 압니다.
-인사
성도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이번 주 주말은 추석 명절입니다. 비록 멀리 떨어져 있는 우리지만 서로에게 따뜻한 절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서로에게 인사를 나누고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서로 인사 나누십시오. 오늘 이 시간이 헛되게 흘러가는 시간이 되지 않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귀한 말씀이 되기를 바랍니다.
-낯선 빌레몬서
오늘 우리는 빌레몬서 말씀을 봉독했습니다. 조금 긴 본문 말씀이지만 집중하여 잘 들으신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마주한 빌레몬서 말씀은 신앙을 가진 우리들이라고 해도 좀 낯섭니다. 왜냐하면 잘 다뤄지지 않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의 손이 닿지 않았던, 어쩌면 한 번도 제대로 읽어보지 않은 말씀일수도 있겠습니다. 빌레몬서를 가지고 오늘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편지로서의 경전 : 실은 세상에는 많은 종교가 있고, 그 종교마다 자신의 책을 가지고 있습니다. 불교는 그 이름을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양의 불경들을 가지고 있고, 이슬람교 역시 ‘꾸란’이란 경전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 역시 당연히 경전을 가지고 있지요. 이 경전을 우리는 ‘성경’이라 부릅니다. 우리는 우리의 경전인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생각과 마음을 살피고, 이것으로 우리의 삶의 기준으로 삼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기독교 경전인 성경에는 독특한 문서 양식이 있습니다. 율법이라고 알려진 법조문도 있고, 역사서도 있고, 설교문도 있고, 시나 지혜글도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봉독한 말씀은 편지라는 방식으로 쓰여진 글입니다. 서신서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제가 다른 종교의 경전에 대해 많이, 풍성하게 알지는 못합니다만 다른 종교 경전 안에는 편지라는 양식으로 쓰여진 글이 거의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기독교 성경 안에는 편지글로 신앙에 대한 설명을 하고 가르치는 말씀들이 무척이나 많습니다. 게다가 편지라는 방식만 선택해서 가상의 인물을 설정하여 편지라는 방식으로 말씀을 작성한 것이 아니라 우리와 다를 것 없는 한 사람이 실제로 특정한 대상을 향해서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직접 쓴 편지가 우리 성경에는 남아있고 참 많은 부분을 차지합니다. 로마서부터 거의 대부분이 편지입니다. 저는 오늘 신약성경의 뒷부분 거의 모두를 차지하고 있는 편지 형식의 말씀 가운데 하나를 가지고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신약의 편지들 : 이렇게 신약성경에는 편지가 많습니다. 그런데 좀 이상하지만 그중에는 편지를 쓴 사람이 누구인지, 받는 사람이 누구인지 명확하게 모르는 편지들이 많습니다.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서 예를 들어보자면, ‘히브리서’라는 신약성경 속 책을 떠올려 보십시오. 히브리서의 저자가 누구입니까? 그리고 이 편지를 받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정답은 모릅니다가 정답입니다. 누가 누구를 향해 어떤 목적으로 작성한 것인지 신약을 연구하는 이들은 히브리서의 저자에 대해 밝힐 수 없다고 말합니다. 짐작만 할 뿐입니다. 신약성경의 서신서 중에는 그러나 이와 반대로 이 편지를 쓴 사람이 누구인지, 받는 사람이 누구인지, 어떤 목적으로 썼는지 분명하고 명확하게 아는 편지가 많습니다. 그 저자 중에서 아주 유명한 사람이 있지요. 오늘 우리가 읽은 빌레몬서의 저자이기도 합니다. 누군지 아시겠지요? 바로 바울 사도입니다.
바울이란 인물은 실제로 그가 어떤 사람인지, 특히나 신앙에 있어 어떤 생각과 뜻을 품고 있던 사람인지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 비교적 분명히 그의 생애를 살필 수 있는 사람입니다.
바울사도의 편지들 : 바울 사도는 많은 편지를 남겼습니다. 편지라는 글이기에 잘 아시겠지만 분명한 대상이 있고, 그 편지를 받는 수신인인 사람이나 또는 교회가 갖고 있던 문제들이 있습니다. 신약성경에는 바울의 이름으로 쓰여진 편지가 14개라고 합니다만 실제로 바울이 직접 썼다고 여겨지는 확실한 편지는 총 7개입니다. 이렇게 신약성경 안에 자신이 직접 쓴 편지를 갖고 있습니다. 나머지 7개는 바울의 이름을 빌어서 쓴 편지들로 알려져 있습니다.
인물 바울 : 바울이란 인물은 예수님 보다 몇 년 뒤에 태어난 인물입니다. 예수님을 원래 알던 사람은 아니었지만 연대를 따져보면 예수님 보다 몇 살 동생뻘의 나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자라면서 다른 예수님의 제자들과는 다르게 독실한 유대교 바리새파 신앙인으로 교육도 충실하게 받은 사람입니다. 그랬던 그가 어느 날 부활하신 주님 예수님을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만났습니다. 바울이 왜 다메섹으로 향했는지 잘 아시지요? 이 여행은 단순히 개인적인 여행이 목적이 아니라 주님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을 잡아들이기 위해 특별한 신앙적인 신념을 가지고 떠난 길이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후에 주님을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는 사람에서 이제는 주님을 전파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회심 사건이 그를 다른 인생길로 인도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의 인생은 이처럼 알 수가 없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으려고 날뛰던 사람이 이제는 온갖 박해를 받아가며 예수를 전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 참 이해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이제 바울은 박해자 신분에서 전도자의 신분으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 여행을 다녔습니다. 우리가 들어본 바 있는 빌립보 교회, 데살로니가 교회, 고린도 교회, 갈라디아 지방의 여러 교회 등 셀 수 없이 많은 교회를 세운 사람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한곳에 정착하여서 선교활동을 벌이지 않았습니다. 아시아와 유럽의 여러 지방을 발로 뛰며 복음을 전했는데, 오늘 우리가 성경에서 만나는 데살로니가 전서, 갈라디아서, 고린도 전서, 후서, 빌립보서, 로마서는 바울이 직접 교회에 써서 보낸 편지가 우리 성경에 있는 그 편지들입니다. 바울이 쓴 편지 모두 다가 교회를 향해서, 교회의 문제들에 대해서 대답하기 위해서 쓴 편지입니다.
여러분, 그런데 잘 보십시오. 바울이 쓴 편지들은 하나같이 교회를 향해서 쓴 편지들입니다. 고린도 교회, 데살로니가 교회 등 교회가 바울의 편지의 수신인입니다. 딱 하나 예외가 있습니다. 하나의 편지만은 예외입니다. 이 편지는 교회가 아닌 사람에게 직접 쓴 편지입니다. 그 편지가 바로 ‘빌레몬서’입니다. 즉 ‘빌레몬’이라는 사람에게 직접 써서 보낸 편지입니다. 교회 전체가 아니라 사람에게 직접 썼다는 사실이 말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예를 들어 제가 교회 전체 카톡방에다가 글을 남기는 것과 누군가 교인 한분에게 글을 남기는 것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분명한 것은 개인에게 보낸 글이 훨씬 구체적이고 깊은 내용을 담고 있겠지요? 편지를 받는 이가 가진 특별한 사정이 도드라지는 글일 것입니다. 이와 똑같습니다.
바울 역시 빌레몬에게 부탁, 감사의 글을 남겼습니다. 사실 빌레몬서는 그래서 아주 짧고(1장) 아주 구체적인 사실이 담겨 있습니다.
-바울의 선교 여정
여러분 아시겠지만 바울은 총 3번에 걸쳐서 선교 여행을 떠났습니다. 3번의 여행 모두 다가 ‘안디옥’이라는 도시에서 출발하였습니다. 1차 여행은 비교적 간단하게 소아시아 지역을 돌아보는 여행이었다면 2, 3차 여행은 오늘날 유럽 땅에 까지 이르렀습니다. 그중에서 빌레몬서를 쓴 시기는 3차 여행 당시 ‘에베소’에 머무는 동안 쓴 편지입니다.
바울은 한 지역에 오랜 시간을 한곳에 머문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새로운 선교지를 향해서, 때로는 박해를 피해서 옮겨 다녔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3차 여행 당시에 오랜 기간 한곳에 머문 적이 있습니다. 27개월 동안 머물렀는데요, 그 장소는 에베소였습니다. 이곳 에베소에서 얼마나 전도가 잘 되었던지 선교의 문이 활짝 열렸다고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스스로 밝힐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호사다마라고 좋은 일에는 늘 좋지 않은 일이 끼어드는 법이지요. 그만 전도하는 일에 방해를 받고 모함을 받아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빌레몬서를 쓰다 : 감옥에 갇힌 바울은 무엇을 했을까요? 우리가 감옥에 갇혔다면 무엇을 할까요? 괴로워하겠지요? 그래서 억울함을 호소하고 탄원서를 쓸 수도 있고, 풀려날 방법을 찾겠지요. 바울은 어땠을까요? 그동안 자신이 선교지역과 세운 교회들에 대해서 많은 염려가 있었나봅니다. 교회의 문제에도 염려와 기도가 있었겠지만 어쩌면 그동안 처리하지 못한 사소한 개인적인 일들에 대해서 처리해야했습니다.
그런데 감옥에 갇힌 바울을 성심껏 돕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울의 시중을 들어서 감옥과 바깥 세상을 연결하는 일을 맡은 사람, 그의 이름은 ‘오네시모’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근데 옥중에 갇힌 바울을 충실히 돕던 이 사람 ‘오네시모’는 사실은 골로새 출신의 노예 신분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나라 역시 불과 100여년 전까지만 해도 신분제 사회였으니 2000년 전 로마 식민지는 엄연히 신분제 사회였지요. 로마의 지배를 받던 당시 노예가 되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전쟁에서 져서 포로가 되면 노예 신분이 됩니다. 노예상인에게 납치가 되어 노예가 되기도 했습니다. 또 다른 사람에게 진 빚 때문에 노예가 된 사람도 있습니다. 부모가 노예이면 신분을 그대로 물려받기도 했습니다.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오네시모는 자신이 섬기던 자신의 주인을 떠나서 이곳 에베소까지 이르게 된 것 같습니다. 오네시모는 원래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는데 바울의 시중을 돕다가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네시모의 원래 주인이 하필이면 바울이 알고 있었던 골로새 교회 지도자 빌레몬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편지의 내용
이제 바울은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돌려보내려고 합니다. 노예인 오네시모를 원래 주인인 빌레몬에게 보내는 단순한 일이 아닙니다. 노예를 주인에게 돌려보내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어 돌려보내라고 이 편지를 빌레몬에게 보냅니다. 그리고 오네시모라는 노예의 주인으로서가 아니라 교회의 사람으로서 오네시모를 자유인으로 인정해서 자신에게 돌려보내 달라고 부탁을 하기 위해서 이 편지를 씁니다. 바울의 심정이 엿보이십니까?
우리는 오늘 말씀 속에서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 감옥에서 자신과 디모데를 시중들어주던 사람, 오네시모가 골로새 지역에 있던 가정 교회의 지도자 빌레몬의 노예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는 다소 이상하게 들리지만 교회의 지도자가 노예를 부리고 있었다는 사실이 이상합니다. 하지만 우리 눈에 이상한 것이지 당시에는 당연한 일이기도 합니다. 신분제 사회였으니 말입니다.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교회의 지도자라는 사람이 노예를 부릴 수 있어?” 라는 생각이 떠오르겠지만 그것은 현대인인 우리의 생각일 뿐입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노예가 당연하던 시대 바울의 태도입니다. 오늘 말씀의 앞부분 1-2절에서 보면, 인사를 전하면서 빌레몬과 그 아내 압비아, 그리고 교회의 교인 아킵보와 그들의 집에 모이는 교회라고 표현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가정 교회인 셈입니다. 교회의 시작은 모두가 가정에서 시작합니다. 교인 중 누구 하나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고 사람들이 들어갈 만한 공간이 있으면 그 집에 모이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교회의 시작이지요. 바울은 이 교회를 지키고 있는 지도자 빌레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오네시모를 부탁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그대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아주 담대하게 명령할 수도 있지만, 우리 사이의 사랑 때문에, 오히려 그대에게 간청을 하려고 합니다.” (8-9절)
마땅히 해야 할 일은 그 집의 노예, 오네시모에 관한 일입니다. 바울은 명령할 수도 있지만 간청한다고, 부탁한다고 말합니다. 오네시모를 돌려보내니 종으로, 노예의 신분으로 놔두지 말고 자유로운 사람이 되게 해주어서 바울 자신에게 돌려 보내달라고 부탁합니다. 이해하셨습니까? 바울은 이 가정 교회의 정신적인 스승과도 같은 사람입니다. 골로새 지역 역시 바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교회가 없으니까 그렇습니다. 그렇기에 바울은 어쩌면 빌레몬에게 강하게 말할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부탁합니다. 간청합니다. 그를 다시 자신에게 돌려보내서 바울 자신을 돕도록 도와달라는 부탁입니다.
오네시모가 주인 빌레몬에게 어쩌면 잘못한 일이 있거나 경제적인 빚이 있는지도 모릅니다. 추측해 보건대, 18절에 보면 “그(오네시모)가 그대(빌레몬)에게 잘못한 것이 있거나, 빚진 것이 있거든, 그것을 내 앞으로 달아놓아 주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이 그 이유입니다. 바울의 마음은 잘못한 것과 같은 법적인 문제나 빚진 것과 같은 경제적인 문제로 오네시모를 판단하지 말고 “나를 맞이하듯이 오네시모를 맞아달라”고 말합니다. 당시 기준으로 보면 바울의 요구는 터무니없는 요구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의 문제는 사람을 법의 판단의 대상으로 이해하게 합니다. 경제적인 가치로 사람을 판단합니다. 그러나 사람을 사람 되게 하는 것은 ‘사람을 맞이하는 일’일 것입니다. 이 일이 쉬워 보이는 것 같아도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을 그 사람으로 보아주는 것이 쉽지 않은 세상입니다. 바울이 살던 시대 역시 법적으로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어 노예가 된 사람들을 그 사람 자체로 보아주는 일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람 바울이 지닌 시선은 사람에 대한 따뜻함입니다.
재미난 것은 ‘오네시모’의 이름의 뜻이 “쓸모 있는 사람”이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노예로, 종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이제 그리스도의 일을 돕는 쓸모 있는 사람으로 사람을 바라보는 바울의 따뜻한 시선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세상과 세상을 사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시선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신앙 공동체입니다. 세상을 살다 보면, 얼마나 예기치 않은 일이 많이 벌어집니까? 당연히 갈등과 어려움, 난처함이 생깁니다. 이런 일들을 바라볼 때 기독교인인 우리는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 늘 질문하게 됩니다.
-어떤 모습들
제가 어느 기업이라고 말하지 않겠습니다만 한국의 대형마트 체인을 운영하던 어떤 기업이 “주일은 열지 않습니다.”는 간판을 내걸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 당시 제 생각에 어느 독실한 신자가 운영하는 기업인가 보다 하고 가볍게 넘겼습니다. 얼마 뒤에 그 직장의 노동자들이 불법적으로 해고당하고, 길거리에 나앉은 노동자들을 보았습니다. 어느 날 화면에 잡힌 모습을 보니 마음이 참 불편했습니다. 오랜 기간 길거리에서 농성을 합니다. 기업주가 그 곁을 지나갑니다. 그런데 눈길 한번 주지 않았습니다. ‘주일은 열지 않는다’는 말 속에 담긴 말이 참 무색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900년 경 우리나라에 처음을 복음이 전해지던 시절, 강화읍 교회(현재, 강화중앙감리교회) ‘과부 김씨’가 교인으로 있었습니다. 자식이 없었지만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서 ‘복섬’이란 여종을 부리고 있었습니다. 과부 김씨는 80이 넘어서 처음 믿기 시작했는데, 교회에 나와서 처음으로 한글을 배워 성경을 읽게 되었습니다. 성경 읽는 재미가 쏠쏠했습니다. 글을 읽으니까요. 그러던 어느 날 마태복음 18장 18절을 읽었습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이 말씀을 읽고 나자 불현 듯 머리에 드는 생각이 자신에게 매인 것이란 다름 아닌 자신의 집의 여종 복섬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음 주일 교인들을 자신의 집으로 초청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복섬이를 방안으로 불러들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경말씀을 보니 우리 주인은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다 같은 형제라. 어찌 내가 하나님 앞에서 주인 노릇을 할 수 있겠소? 또 내가 복섬이를 몸종으로 부리는 것이 땅에서 매는 것인즉, 그러고서 어찌 하나님의 복을 받겠는가?” 라고 말한 후에 복섬이의 종 문서를 교인들이 보는 앞에서 불태워 버렸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렇게 말했답니다. “복섬아, 지금 이후 너는 내 종이 아니다. 너는 자유의 몸이 되었으니 내 집을 나가도 된다.”
결국 복섬이는 그 집의 양녀가 되었습니다. 이 광경을 본 교인들은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말씀 맺으며
목사인 제게 사람들은 가끔 구원에 대한 질문을 합니다. 어떻게 하면 구원받는지, 구원을 받았는지 아는 방법은 있는지 묻습니다. 오늘 바울이 보여준 모습, 과부 김씨가 보인 삶의 태도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이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세상과 사람을 보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이 되도록 하십시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