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9월 18일 성령강림 후 제15주 (2022년-38호)

제목 : 하나님과 재물

본문 : 예레미야 8:18-9:1, 디모데전서 2:1-7, 시편 113편, 누가복음 16:1-13

【누가복음 16:1-13】

예수께서 제자들에게도 말씀하셨다. «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청지기 하나를 두었다. 그는 이 청지기가 자기 재산을 낭비한다고 하는 소문을 듣고서, 그를 불러 놓고 말하였다. ‘자네를 두고 말하는 것이 들리는데, 어찌 된 일인가? 자네가 맡아보던 청지기 일을 정리하게. 이제부터 자네는 그 일을 볼 수 없네.’ 그러자 그 청지기는 속으로 말하였다. ‘주인이 내게서 청지기 직분을 빼앗으려 하니, 어떻게 하면 좋을까?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낯이 부끄럽구나. 옳지,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알겠다. 내가 청지기의 자리에서 떨려날 때에, 사람들이 나를 자기네 집으로 맞아들이도록 조치해 놓아야지.’ 그래서 그는 자기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하나씩 불러다가, 첫째 사람에게 ‘당신이 내 주인에게 진 빚이 얼마요?’ 하고 물었다. 그 사람이 ‘기름 백 말이오’ 하고 대답하니, 청지기는 그에게 ‘자, 이것이 당신의 빚문서요. 어서 앉아서, 쉰 말이라고 적으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묻기를 ‘당신의 빚은 얼마요?’ 하였다. 그 사람이 ‘밀 백 섬이오’ 하고 대답하니, 청지기가 그에게 말하기를 ‘자, 이것이 당신의 빚문서요. 받아서, 여든 섬이라고 적으시오’ 하였다. 주인은 그 불의한 청지기를 칭찬하였다. 그가 슬기롭게 대처하였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자기네끼리 거래하는 데는 빛의 자녀들보다 더 슬기롭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어라. 그래서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처소로 맞아들이게 하여라.

지극히 작은 일에 충실한 사람은 큰 일에도 충실하고, 지극히 작은 일에 불의한 사람은 큰 일에도 불의하다. 너희가 불의한 재물에 충실하지 못하였으면, 누가 너희에게 참된 것을 맡기겠느냐? 또 너희가 남의 것에 충실하지 못하였으면, 누가 너희에게 너희의 몫인들 내주겠느냐? 한 종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그가 한 쪽을 미워하고 다른 쪽을 사랑하거나, 한 쪽을 떠받들고 다른 쪽을 업신여길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

-인사

주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두 안녕하십니까?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서로에게 인사를 전하고 말씀 나누겠습니다. 따뜻한 인사를 전합시다.

아침저녁으로 서늘한 바람이 붑니다. 가을이라는 계절이 우리에게 성큼 다가와 있습니다. 여름철에는 해도 일찍 뜨는데, 요즘에 보면 이미 해도 늦게 뜨고 점점 짧아지는 것을 느낍니다. 한 해가 이렇게 빨리 지나가는 것을 보면서, 해는 지고 어두워져 가는데, 갈 길이 먼 나그네 신세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트루키에(터키)의 노벨 문학상 작가인 오르한 파묵, ‘내 이름은 빨강’ 작가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글쓰기는 바늘로 우물 파기라고 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세상일에는 거저 되는 일보다는 열정과 인내가 필요한 일이 많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세상을 바라보는 그리스도의 눈이 필요합니다. 말씀의 고마움과 말씀에 대한 열정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돈의 세상

오늘 말씀 제목, “하나님과 재물”에서 보셨듯이 오늘은 돈 얘기가 오늘 말씀의 주제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돈의 힘은 막강합니다. 돈이 힘을 발휘하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이고, 돈으로 무엇이든, 여러분의 행복조차도 살 수 있다고 우리가 사는 세상은 말합니다. 사건 사고를 다루는 TV 프로그램을 보게 되면, 사람 사이에 벌어지는 참극의 3대 원인 중 하나가 금전이라는 분석을 듣게 됩니다. 돈은 사람들에게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마음을 심어줍니다. 한편으로는 사람을 가장 초라하고 비참하게 만드는 것 중의 하나가 돈 문제임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목사로서 이 본문을 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러분에게 돈을 탐하지 말라고 애써 설교한다고 해도 제 말이 허공을 맴돌 가능성이 높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리고 실제 생활을 전혀 모르는 엉뚱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만큼 돈의 문제는 우리 생활 깊숙이 녹아있는 문제이고 어떤 눈으로 보면 돈은 모든 것을 지배하고 초월하는 거대한 주제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나눌 비유의 주제이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영원한 주제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40일 광야 생활 하실 때, 사탄으로부터 들었던 첫 질문이 “빵의 문제”, 곧 돈의 문제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렇기에 천천히 말씀을 들여다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이 말을 잘 들여다보면 재물 역시도 우리의 실제 삶에서는 하나님과 같은 힘을 발휘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가 없다는 말이겠지요. 돈 싫어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돈이 있으면 돈이 제공하는 편리함을 부정하며 살기가 쉽지 않습니다. 또 돈이 풍부하면 하고 싶은 것도 맘껏 할 수도 있다고 믿기 때문이니 말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도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하나입니다. 우리가 복음서를 읽다 보면 수없이 많은 예수님의 비유를 만나게 됩니다. 늘 느끼고 깨닫는 것이지만 예수님의 비유는 간단합니다. 그 의미의 깊이가 깊고 넓은 것과는 상관없이 간단하고 어떻게 보면 명료한 주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해하기도 그렇게 어렵지만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인 눅 16:1-13절에 나오는 ‘불의한 청지기’는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해하기가 만만치 않습니다. 쉽지가 않습니다. 특히나 앞뒤가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말씀은 이렇습니다.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

먼저 이 비유를 듣는 청자(聽者)가 누구인지 먼저 확인해 봐야 합니다. 1절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도 말씀하셨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 비유를 듣는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하지만 이 비유를 듣고 반응하는 사람들은 바리새파 사람들입니다. 14절입니다. “돈을 좋아하는 바리새파 사람들이 이 모든 말씀을 듣고 나서, 예수를 비웃었다.” 이렇게 되어 있는 것을 보면, 실질적으로 이 말씀을 들어야 되는 사람은 바리새파 사람들입니다. 자기 의에 갇혀 있는 사람들이지요.

-비유 내용

어떤 부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재산을 관리하고 있는 청지기가 재산을 낭비한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청지기는 주인의 의심을 샀고, 주인은 마침내 청지기를 해고하게 됩니다. 청지기는 실직자가 된 것입니다. 요즘이야 퇴직금이나 실직 수당을 받기라도 하지만 당시에는 거의 대책이 없었겠지요. 청지기는 속으로 이렇게 한탄합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낯이 부끄럽구나.”(3절)
뒤늦게 후회해보아야 소용이 없는 상황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물이 엎질러졌기 때문입니다. 청지기는 자신의 처지를 돌아보았을 것입니다. 육체로 하는 일은 안해 봐서 손은 곱상하고 포동포동합니다. 팔과 다리는 얇아지고, 몸의 근육은 없고, 몸매는 이미 요즘 말로 ‘거미형 인간’이 되어버렸습니다. 노동을 견뎌낼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밥을 빌어먹기도 부끄러웠습니다. 몸이 힘든 것은 고사하고, 그는 사회적으로 몰락한 자신을 향한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견딜 자신이 없었을 것입니다.

자, 이때 어떻게 하면 청지기 자리를 쫓겨난 후에도 굶어죽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지 머리를 굴렸습니다.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일일이 불러서 계약서를 새로 작성하게 했습니다. 기름 백 말을 빚진 사람에게는 오십 말로 계약서를 다시 쓰게 했습니다. 밀 백 석은 팔십으로 낮춰주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주인의 재산을 낭비하던 청지기였는데, 마지막까지 주인의 재산을 낭비했습니다. 이게 발각되면 오늘날 같으면 문서 위조로 형사 처분의 대상이 될 겁니다. 조용히 떠나도 시원치 않을 마당에 문제가 더 심각해진 겁니다.

청지기가 한 일은 얼마 지나지 않아 주인의 귀에 들려왔습니다. 그런데 주인의 반응은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습니다. 주인이 청지기를 칭찬했다고 합니다. “그가 슬기롭게 대처하였기 때문이다”(8절)다는 겁니다. 우리가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지점에 도달했습니다. 불호령이 떨어질 거라는 우리의 예측과 달리 그는 청지기를 칭찬합니다. 그가 슬기롭게 대처했다는 것입니다.

-불편한 지점

우리는 불편한 지점에 도달했습니다. 무엇이 불편하게 느껴지나요? 도덕과 윤리라는 우리의 안의 기준이 스멀스멀 우리 마음에서 올라옵니다. 그렇지요? 우리는 늘 그렇습니다. 어떤 일이 벌어지고 나면 내가 설정해 놓은 기준으로 그 사건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옳다, 그르다’를 판단 내려 버립니다. 그렇기에 청지기의 행동이 칭찬을 받는다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윤리고 도덕이고 다 팽개치고 제 살 궁리만 하면 그만이라는 말인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제 것만 잘 챙기면 된다는 말인가요? 예수님이 이런 삶의 묘수와 같은 비법(?)을 가르치시는 걸까요?
이 대목에서 우리가 유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이야기가 비유라는 사실입니다. 비유를 이해하기 위해서 중요한 것은, 그 비유가 윤리적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그 비유가 드러내려고 하는 지점이 무엇인가입니다.

그렇다면 이 비유는 무엇을 말하려고 있는 걸까요? 여기서 주인이 칭찬한 것은 청지기의 불의한 행동이 아니라, 살 길을 찾기 위해 그가 보인 지체 없는 결단과 실행입니다. 해고를 통보받고, 상황의 엄중함을 정확히 파악하고, 살길을 모색하고, 지체 없이 실행에 옮기는 청지기의 모습이야말로, 주님을 따르는 이들에게 기대되는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나라에 대한 소망을 두고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자기들의 상황을 빨리 파악하고, 그렇게 단호하게 행동하기를 바라신다는 것입니다. 즉 너무 늦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 오기 전에 지체하지 말고 ‘하나님나라’를 위해 결단하고, 실행에 옮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이사야는 “주님 내가 여기 있습니다.”라고 하나님께 응답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역시 주님의 부름을 받았을 때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두 손을 모으기 위해서는 손에 든 것을 일단 내려놓아야 하는 것처럼, 주님의 부름에 응답하기 위해서는 옛 삶의 방식을 포기해야 합니다. 값진 진주를 발견한 상인은 자기의 재산 일부가 아니라 전부를 다 팔아 진주를 샀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향해 가는 내가 되기 위해 맨 먼저 해야 하는 일은 무엇일까요?

-16장 전체로 이해하기

이 말씀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16장 전체가 말하는 맥락에서 오늘 본문을 보아야 합니다. 16장의 전체 주제는 돈입니다. 오늘 본문 바로 뒤에 나오는 바리새인에 관한 이야기에서 바리새인을 가리켜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14절) 그런 사람은 예수님의 이야기를 비웃습니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 이야기(19-31절)의 배경도 재물과 돈입니다. 돈이 남아돌았던 부자와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생명을 부지하면서 상처투성이로 살았던 거지 나사로가 죽은 다음에 전혀 다른 운명에 처해졌습니다. 이 세상에 잠시 살 동안에는 돈이 사람을 지배하는 것 같지만 영원한 삶에서는 돈이 무기력하다는 것입니다.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에서도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어라. 그래서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처소로 맞아들이게 하여라.”(9절)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에 나오는 청지기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에 나오는 부자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불의한 청지기는 미래를 위해서 이웃과의 관계를 새롭게 맺었습니다. 빚을 졌던 사람들은 훗날 청지기에게 버팀목이 될 것입니다. 거지 나사로 이야기에 나오는 부자는 자기 혼자의 자족적이고 이기적인 자기 중심적인 삶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부자는 그저 무관심했을 뿐이지 특별히 거지 나사로에게 잘못하고, 못되게 군것은 아니었습니다. 훗날 나사로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이 말을 단순히 어려운 이웃을 도우면서 살아야 구원받는다는 의미로 제한시하면 곤란합니다. 구제는 당연한 일입니다. 그건 누가 시키고 말고도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사람은 서로 도와가며 살아야 합니다. 이런 기본적인 휴머니즘이 없다면 그건 그리스도인 이전에 사람의 도리도 못하는 겁니다. 복음서 기자들이 전하는 이 비유는 더 근본적인 것입니다.

-돈의 지배를 거절하라

주님은 불의한 청지기에 대한 비유를 들려주신 후에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해하기도 어렵고 조금 불편하기도 합니다. 그런 불편함은 이중적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도 좋아하는 재물에 ‘불의한’이라는 형용사를 쓰고 있다는 것이 그 하나이고, 그것으로 친구를 사귀라는 말이 다른 하나입니다. 돈이 무슨 죄가 있기에 ‘불의한’이라는 오명을 써야 합니까? 사람들은 돈은 교환의 매개이기 때문에 잘만 사용하면 참 좋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옳은 말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한계 또한 분명한 말입니다. 사실 돈은 매혹적입니다. 그 매혹을 떨쳐버릴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예나 지금이나 돈은 유사 신입니다. 주님은 재물이 어떻게 사람들을 지배하는지를 꿰뚫어보셨습니다. 건강한 노동을 통해서가 아니라, 어두운 거래를 통해 획득한 돈은 우리 정신을 타락시키게 마련입니다. 주님은 돈을 ‘맘몬’이라고 하셨습니다. 게다 ‘불의한’이라는 말까지 덧붙였습니다. 바울 사도는 디모데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말합니다.

“부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유혹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도 해로운 욕심에 떨어집니다. 이런 것들은 사람을 파멸과 멸망에 빠뜨립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좇다가, 믿음에서 떠나 헤매기도 하고, 많은 고통을 겪기도 한 사람이 더러 있습니다.”(딤전 6:9-10)
초대 교회에서도 흔히 벌어지던 일이라고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도 무소유를 선언하고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돈의 지배력에 저항하라는 말입니다. 저항의 가장 좋은 방식은 나보다 더 필요한 사람에게 주는 것입니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는 말은 바로 이런 사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듯이 하나님과 재물을 겸해서 섬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두 주인을 섬기는 하인은 충성된 사람이 아니듯이 하나님과 재물을 겸해서 섬기는 사람은 충성된 사람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삶에서 충성되지 않으면 영원하고 참된 것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이런 말씀 자체를 모르는 그리스도인은 없습니다. 문제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해서 섬기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구분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래서 대개 헌금을 잘 드리기만 하면 되나, 하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것을 떼어먹지 말라고 윽박지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렇게 헌금만 잘 드리면 재물을 섬기지 않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으로 신자들에게 인식이 되어 있습니다. 아닙니다. 오늘 본문의 주제는 헌금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헌금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보장되는 건 결코 아닙니다.

-충실한 삶을 위해

다시 한번 9절의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어라. 그래서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처소로 맞아들이게 하여라.”(9절)

여기서 우리는 아주 급진적인 사상과 만납니다. 우리가 어려운 이들을 위해 사용한 돈이야말로 우리를 영원한 나라로 이끄는 길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불의한 재물’은 가난한 이들과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 우리가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일컫는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주님께서는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마25:40)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돈 세상을 넘어서라

지금 우리 삶을 지배하는 주인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입니까, 돈입니까? 주님은 한 종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잘못된 주인을 모시면 인생이 고단해집니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들을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로 이해하고 이것을 이용하고 사용하여 내가 할 일을 찾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제안드리고 싶은 것은 현실적인 최선의 길은 돈이 지배하지 못하는 삶의 영역을 확대하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삶에 그런 영역이 무엇일까요? 숨 쉬는 건 돈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늘과 산을 바라보는 데에도 돈이 아무런 역할을 못합니다. 해외여행을 하려면 돈이 필요하지만 자기가 살고 있는 동네를 처음에 온 것처럼 구경하는 데에는 돈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교회당을 크게 건축하려면 돈이 많이 들어가지만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교회의 본질에 집중하면 돈이 필요 없거나 적게 듭니다. 이런 영역을 더 넓혀가야 합니다.
이 일은 돈이 없어도 모든 삶에서 그것이 가능합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관심으로 우리의 영혼이 충만하다면 그때는 돈이 우리를 지배하지 못합니다. 죽는 순간을 생각해보십시오. 죽음 앞에서는 돈이 무능하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됩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을 깨닫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바로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결단해야 할 시간입니다. 재물에 지배당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재물을 이용하고 사용하는 것은 맞지만 재물은 이용하는 것이지 지배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재물의 종이 되지 마십시오. 돈을 소유하고 사용하며 살지만 돈의 지배를 받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더 나가서 돈을 다스리는 삶을 확대하시기 바랍니다. 돈이 우리의 주인이 아닙니다. 불의한 청지기가 지혜로웠다는 것은 그가 돈을 다스렸기 때문입니다.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에서 부자는 돈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우리의 재능과 건강과 시간과 물질은 하나님의 일을 위해 하나님께 봉헌되어야 할 것임을 잊지 마십시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