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월 16일 주현 후 제2주 (2022년-03호)

제목 : 성령의 선물을 받은 우리

본문 : 이사야 62:1-5, 고린도전서 12:1-11, 시편 36:5-10, 요한복음 2:1-11

【고린도전서 12:1-11】
형제자매 여러분, 신령한 은사들에 대하여 여러분이 모르고 지내기를 나는 바라지 않습니다. 알다시피 여러분이 이방 사람일 때에는, 여러분은, 이리저리 끄는 대로,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끌려 다녔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에게 알려드립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 예수는 저주를 받아라 » 하고 말할 수 없고, 또 성령을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 예수는 주님이시다 » 하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지만, 그것을 주시는 분은 같은 성령이십니다. 섬기는 일은 여러 가지지만, 섬김을 받으시는 분은 같은 주님이십니다. 일의 성과는 여러 가지지만, 모든 사람에게서 모든 일을 하시는 분은 같은 하나님이십니다.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 주시는 것은 공동 이익을 위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을 통하여 지혜의 말씀을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주십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주십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기적을 행하는 능력을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하는 은사를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영을 분별하는 은사를 주십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여러 가지 방언을 말하는 은사를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그 방언을 통역하는 은사를 주십니다. 이 모든 일은 한 분이신 같은 성령이 하시며, 그는 원하시는 대로 각 사람에게 은사를 나누어주십니다.

-인사

하나님께서 파리중앙교회 성도 여러분 모두에게 크신 은혜로 함께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함께 모이지는 못했지만 성도들을 위해 이 시간 인사를 전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예배 역시 비대면 예배입니다. 프랑스 내에 확진자만 하루 30만 명이 매일 쏟아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확산세가 언제 진정될지 알 수 없습니다. 지구 밖 우주를 향해 우주선을 쏘아 올리는 시대를 우리가 살아가지만 인간이 이토록 미약하다는 사실을 겸손히 깨달아야 할 것 같습니다. 세상 앞에 인간은 한없이 미약한데 세상을 다 지배한 듯이 살아간다는 것은 교만한 일입니다. 세상을 다 지배할 수도 없고, 세상의 이치를 다 알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체념한 채로 살아야 합니까?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 시간들은 우리에게 가장 크신 존재인 하나님 앞에 선 나와 우리를 돌아보아야 할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앞에 세상 앞에 겸손한 태도를 합니다. 함께 모이지 못하는 예배지만 우리가 하나님께 마음을 다해 예배드리는 일은 우리의 태도를 보여드리는 일입니다. 우리가 자연의 지배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우리는 그저 창조주 ‘하나님의 청지기’라는 사실, 맡아서 잘 보존하고 관리할 책임이 있다는 의무가 있음을 각성하는 일이 이 시대, 코로나 시대 우리의 일이라고 믿습니다.

여러분, 한 주간 여러분의 삶을 하나님 앞에 내어놓는 그런 예배가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나누는 말씀의 빛으로 우리의 삶을 조명하여 밝히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말씀 앞에 겸손하고 겸허하게 서시기 바랍니다.

고린도 교회

세상에는 참 많은 교회가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정상적인 교회가 사도신경을 고백합니다. 사도신경을 통해서 그렇게 하듯이, 우리가 예배시간에 공동의 고백을 기억하여 낭독하면서까지 아무리 공동의 신앙을 고백한다 하더라도 세상의 모든 교회들은 각자가 가진 독특한 자기만의 색채가 색깔이 있습니다. ‘사람 사는 것이 다 비슷비슷하지 뭐’라고 말한다 해도 모두 똑같은 삶의 방식을 세상의 모든 가정이 똑같이 갖고 있는 것은 아니지요. 같은 이치입니다.
구체적으로 보면 우리는 파리에 사는 한인 공동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간적으로는 2022년도에 살고 있습니다. 파리에 살고 있기에 우리만 가진 독특한 우리만의 색채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다 조금씩은 프랑스어를 이해합니다. 모두가 프랑스의 독특한 경제제도, 세금제도, 복지제도에 대해 이해하고 있습니다. 한국에 살고 있었다면 전혀 알 수도 없는 일들이겠지요. 난데없는 질문입니다만 우리가 이런 사실을 어떻게 알지요? 당연합니다. 우리가 프랑스 땅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우리는 비행기를 타고 여러 나라를 다닐 수도 있는 시대를 살고 있어서 다른 문화에 대한 이해도가 빠른 편입니다. 하지만 2000년 전에는 어땠을까요?

2000년 전에 그리스 펠레폰네소스 반도 입구에 있었던 항구도시 고린도에 생생하게 존재했던 교회에 관한 말씀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이야기입니다. 이곳 고린도 지역은 서쪽은 ‘아드리아해’라는 거대한 바다가 있고, 동쪽은 ‘에게해’라는 큰 바다가 있습니다. 이 두 바다를 연결하는 항구 도시가 바로 ‘고린도’입니다. 동쪽 바다와 서쪽 바다를 연결하는 중요한 통로가 되는 항구도시입니다. 이곳에 교회가 있습니다.

어린 10대 시절을 부산이라는 항구도시에서 보낸 저로서는 항구도시가 갖는 독특한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어린 시절 높은 곳에 올라서 바다를 내려다보면 엄청나게 큰 배들이 바다를 뒤덮고 있는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시골 촌놈이었던 제게 바다가 주는 위압감이 엄청났던 것으로 기억납니다. 높은 곳에서 바닷가 쪽으로 내려 가보면 가까운 바다를 나가는 쪽배로부터 통통거리며 느린 속도로 지나가던 배들까지 모두 기억납니다. 무엇보다 바다의 비릿한 냄새가 떠오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고갔고, 타지방의 많은 장사꾼들이 오가면서 물건을 사고파는 시장을 이루는 바닷가 항구도시가 생각납니다. 경상도 내륙지방의 사람들도 돈을 벌기위해 대도시 부산으로 몰려오던 시대였던 것으로 기억납니다. 경상도 지역만이 아니라 전라도 말을 사용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여러 사람들이 어린 시절 제가 다니던 한 교회에 모였습니다.

똑같지는 않겠지만 ‘고린도’도 이런 항구였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고린도에 거주했습니다. 교통과 상업이 발달한 덕에 경제적인 부가 축적이 되었습니다. 많은 타지방 사람들이 배로 물건을 옮기고, 사고파는 큰 시장들이 형성이 되었습니다. 그중에서 각 지방 사람들이 갖고 있는 독특한 신앙들이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토속 종교 같은 것이지요. 그리고 고대 항구도시가 갖는 특징이 하나 더 있습니다. 윤리적으로 퇴폐적인 독특한 문화가 있었습니다. 부산의 항구 주변을 뒤덮고 있던 싸구려 술집들이 제 기억 속 항구도시의 모습입니다. 이런 곳에 고린도 교회가 있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사도 바울이 2차 전도여행 당시 아테네에서 쫓겨 가듯 고린도로 내려갔었습니다. 이 때 세워진 교회가 고린도 교회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고린도 지역색을 당연히 다분히 많이 갖고 있겠지요? 우리가 프랑스 색을 갖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신령한 은사

고린도 교회가 갖고 있는 특색은 무엇이었을까요? 오늘 우리가 읽은 고린도전서 12장 1절의 말씀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신령한 은사들에 대하여 여러분이 모르고 지내기를 나는 바라지 않습니다.”
이 말씀 한 구절에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특징이 숨겨져 있고, 고린도 문화가 배어 있습니다.
앞서서 말씀드렸듯이 고린도 교회는 많은 각기 다른 지방색을 가진 교인들이 있었습니다.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사람들은 자신들의 독특한 지방색을 숨길 수 없습니다. 아무리 교회로 들어온 사람들이라고 해도 이 사람들은 자신들의 조상 때부터 믿어왔던 신앙의 방법으로 기독교 신앙을 대하려고 했습니다. 신앙의 습관이라고 불러도 될 것 같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오늘 12장 1절에 드러납니다. ‘신령한 은사’라고 불리는 신앙의 모습입니다. 달리 말하면 고린도 교회 내에 많은 사람들이 ‘신령한 은사’라는 어떤 것을 간곡히 바라면서 신앙생활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이 사람들을 가리켜서 ‘영 열광주의자들’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합니다. 어떤 상황인지 조금 이해가 가시는지요?

제가 그래도 여러분 보다 한국뿐만 아니라 세상의 여러 교회를 다녀보지 않았겠습니까? 한국의 어떤 교회는 분위기가 엄숙합니다. 소리 내어 기도하는 것을 엄격하게 제한합니다. 어떤 교회는 반대로 그야말로 소위 ‘뜨겁게 뜨겁게’를 외칩니다. 찬양할 때 박수는 기본이고, 소리를 내는 정도가 아니라 소리를 질러가며 기도해야만 되는 교회도 있습니다. 특히나 은사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도 무척 민감합니다. 어떤 교회는 은사를 조심스럽게 다룹니다. 어떤 교회는 반대로 은사를 받아야만 하고, 그 받은 은사를 일일이 확인하고 점검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합니다.

바울이 본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여러 가지 은사 체험이 많은 사람들이었나 봅니다. 그래서 그런지 다소 과한 은사 경험들이 교회 안에 난무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들을 탓하거나 나무라거나 금기시 하지는 않았습니다.

-신령한 은사의 변질

고린도 교회 교인들 중 많은 이들이 영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알 수 없는 말들로 기도하거나 소리내어 기도하는 사람들은 고린도 교회 내에 있었던 특별한 사람들임에 분명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로 인해 교회 안에 갈등이 생겼습니다. 어떤 갈등이었을까요?
자신들만 특별하다는 생각, 자신들이 받은 은사만 대단하다는 자부심,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라는 우월감이 사람들을 사로잡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람들의 우월감, 자부심이 나중에는 신앙적으로 변질되었습니다. 예수 이름의 능력보다는 자신이 가진 은사가 더 우월한 걸로 착각하는 사람들도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은사는 말 그대로 하나님의 선물인 것인데, 은사를 통해 내뿜는 능력이 온전히 자신의 능력인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들도 등장했습니다.
그러니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까요? 교회 내 성도들 간의 갈등입니다. 누가 우월한 은사를 지닌 사람인지 차별하는 일들이 발생합니다. 정말 심각한 것은 자신을 스스로 신적인 위치로 격상시켜서 예수 보다 자신이 위라는 착각으로 자기가 받은 영적인 언어를 통해서 예수를 멸시하고 모욕하는 일도 발생했습니다. 또 은사를 자신이 독차지 하여 마치 마술 부리듯 행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바울은 따끔하게 이들을 지적합니다. 영적인 언어를 금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사람, 성령으로 감동한 사람은 예수를 저주하는 말을 하지 않고, 예수가 주님이라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역설적으로 이런 사람들이 많았다는 말입니다. 교회 내에서 자신이 받은 특별한 은사를 통해서 자신을 높이기 위해서 예수를 저주하기도 예수님의 주인 되심을 거역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교회에 있다는 것이 참으로 이상하게 여겨지는 것이 오늘 우리의 시선입니다. 일견 그렇게 보입니다. 하지만 이런 일은 교회 안에 다반사입니다. 자신이 받은 은사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채, 교회 안의 특권처럼 발휘되는 일이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직분에 따라, 자신이 내는 헌금에 따라 교회 안의 일들을 다투는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오늘날의 방식으로 변질된 신앙의 모습일 것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은사

바울은 이제 분명히 말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정말로 다양하듯이 하나님이 주시는 은사는 정말 너무나도 다양합니다. 각각의 사람이 갖고 있는 특별하고 개별적인 특성에 따라, 개별적인 은사를 주십니다. 당연합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함부로 규정할 수 없는 독특함이 그 사람 안에 존재하는 것이니까요. 지난 시간 하나님의 창조를 언급하면서 제가 드린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사람들을 만드실 때, 공장의 기계가 물건을 찍어내듯이 만드신 것이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오직 나 하나만 존재하는 것처럼 특별한 손길로 나를 빚으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렇기에 내 안에는 특별한 하나님의 정성이 묻어있고, 하나님의 싸인이 있습니다. 여러분! 위대한 예술 작품을 남긴 대가들이 작품의 구석에 자신의 독특한 문양, 싸인을 남기듯이 말입니다. 어느 것으로도 바꿔치기 할 수 없는 나 자신입니다.

그렇기에 이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수십억의 사람들이 존재하지만 나는 정말로 하나님의 손길로 빚으신 특별한 존재이고, 그에 따라 독특한 은사를 내 안에 주셨다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타인들을 비하하고 조롱할 때, ‘존재할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는 표현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존재할 가치가 없는 존재는 없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손길로, 그 속에 독특하고 특별한 은사를 지닌 존재니 그 가치가 얼마나 큽니까? 여러분은 그런 사람입니다.

다시 바울이 말하는 은사로 가보겠습니다. 은사는 선물입니다.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런데 그 선물의 기원이 모두 같습니다. 이 선물이 모두 같은 분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은사를 주시는 분은 같은 성령입니다. 각자 다른 종류의 성령이 아닙니다.
여러분, 한번 돌이켜 보십시오. 여러분의 인생의 연한이 얼마인지 각각 다릅니다만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받은 은사를 헤아려 보시기 바랍니다. 특별한 상황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손길을 통해서, 알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을 통해서, 그리고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의 손길을 통해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은혜를 입었습니까? 이런 작은 조각 같은 은사들이 모여서 내가 지금 이룬 것, 내가 성취한 것, 내가 지금 나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의 밑바탕이 되었습니다. 은사의 결과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공통적으로 고백할 일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주 성령으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우리의 입술로 고백하는 일입니다. 입술로 한다 해서 입술만의 고백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의 심령 깊은 곳에서 우리의 입술로 고백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은사의 목적

우리는 우리가 받은 은사를 누릴 권리가 있습니다. 네 누릴 권리를 모른 채 살아가면 억울하지요. 하지만 더 큰 목적이 있습니다. 은사의 목적입니다. 모두 우리가 다른 은사를 받은 사람들입니다만 우리는 각자가 받은 은사로 같은 주님을 섬기는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우리의 은사의 목적은 “주님을 섬기는 일”입니다.
은사는 희랍말로 ‘카리스마’입니다. ‘카리스마’라는 단어를 많이 들어 보셨지요? 눈에 힘주고 말을 세게 하는 힘있고 능력있어 보이는 사람을 카리스마 있다고 요즘 세상에서는 말하지만 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 카리스마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지혜의 말씀을 주신다고 바울은 정리합니다. 어떤 사람에겐 지식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병 고치는 은사를 주십니다. 기적을 행하는 은사, 예언하는 은사, 영을 분별하는 은사 등 각각의 은사는 끝도 없이 다양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을 우리는 확인해야 합니다. “이 은사는 무엇을 위해 필요한 것인지”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고린도전서 12장 1-11절 사이에서 발견해 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이렇게 찾았습니다. 7절의 말씀입니다.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 주시는 것은 공동 이익을 위한 것입니다.”

‘공동의 이익’입니다. 우리가 은사를 누리는 것, 정말 어떤 값을 지불하고도 얻을 수 없는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이 은사는 목적이 있습니다. 분명한 목표와 초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바울은 분명히 말합니다. “공동의 이익”입니다. 공동의 이익이란 모두를 살리는 데 유용한 일이라는 말입니다. 이 본문에서 공동은 교회 공동체를 말하는 것일 겁니다. 네 좋습니다. 우리가 받은 은사, 곧 은혜의 선물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니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것이 옳습니다. 공동의 이익을 조금 확대해 보십시오. 곧 하나님의 선물은 사람을 살리는 데 사용되어야 합니다. 고통 속에 빠진 사람을 위로하는 일, 큰 위기를 맞아 좌절 가운데 있는 이들을 돌보는 일. 사람을 살리는 일입니다. 희망을 전염시키는 일이 공동의 이익입니다.

제가 참 좋아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전부터 알고 있었던 이야기인데, 최근에 읽은 책 가운데 다시 소개되고 있어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4년 겨울이었습니다. 영국군과 독일군은 전선에서 대치하고 있었습니다. 이러던 중에 크리스마스가 다가왔습니다. 양측 군대의 장군들은 명령을 이렇게 내렸습니다. “적군이 크리스마스나 새해에 공격을 고려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이 기간 특별 경계를 유지하라” 마침내 크리스마스 이브가 되었습니다. 해가 진 저녁 영국군 제2연대 소속 앨버트 모렌은 불신감으로 눈을 깜박였습니다. “저 반대편에 있는 게 뭐지?” 불빛이 하나씩 깜박이고 있었습니다. 크리스마스 트리였습니다. 그 때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크리스마스 캐럴이 이렇게 아름답게 들린 적이 있었던가. 영국 병사들은 이에 뒤질세라 “저 들 밖에 한밤중에”를 한 소절씩 돌려가며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독일군들은 박수를 보내며 “오 탄네바움(소나무야, 소나무야)”를 불러 화답했습니다. 두 적진이 한참 동안 캐럴을 주고 받다가 마침내 라틴어로 “참 반가운 성도여”를 다같이 합창했습니다. 소총수인 그레이엄 윌스엄스는 훗날 이날 이 시간을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정말로 특이한 밤이었습니다. 전쟁을 멈추고 두 나라 병사들이 같은 캐럴로 찬양하고 있었습니다.”>

전쟁 통의 한 가운데서도 희망은 전염됩니다. 전쟁을 중단하고 희망을 노래하는 일은 병사들이 받은 은사의 최종적인 일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을 화해시키고 희망을 전염시키는 일은 은사를 받은 사람들의 일입니다.

-맺음말

주안에서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은사를 우리의 삶 전체를 통해서 받은 사람들입니다. 어떻습니까?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각자의 색깔에 맞게 독특하고 개별적인 은혜의 선물을 주셔서 우리는 잘 활용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세상살이의 문제로 인해, 우리가 건너고 있는 시대의 어려움 때문에 은사의 목적을 잊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우리의 인생길에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