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지금은 기도의 시간
본문 : 창세기 32:22-31, 디모데후서 3:14-4:5, 시편 121편, 누가복음 18:1-18
【창세기 32:22-31】
그 밤에 야곱은 일어나서,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데리고, 얍복 나루를 건넜다. 야곱은 이렇게 식구들을 인도하여 개울을 건너 보내고, 자기에게 딸린 모든 소유도 건너 보내고 난 다음에, 뒤에 홀로 남았는데, 어떤 이가 나타나 야곱을 붙잡고 동이 틀 때까지 씨름을 하였다. 그는 도저히 야곱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서, 야곱의 엉덩이뼈를 쳤다. 야곱은 그와 씨름을 하다가 엉덩이뼈를 다쳤다. 그가, 날이 새려고 하니 놓아 달라고 하였지만, 야곱은 자기에게 축복해 주지 않으면 보내지 않겠다고 떼를 썼다. 그가 야곱에게 물었다. «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 » 야곱이 대답하였다. « 야곱입니다. » 그 사람이 말하였다. « 네가 하나님과도 겨루어 이겼고, 사람과도 겨루어 이겼으니, 이제 네 이름은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다. » 야곱이 말하였다. « 당신의 이름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십시오. » 그러나 그는 « 어찌하여 나의 이름을 묻느냐? » 하면서, 그 자리에서 야곱에게 축복하여 주었다. 야곱은 « 내가 하나님의 얼굴을 직접 뵙고도, 목숨이 이렇게 붙어 있구나! » 하면서,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고 하였다.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솟아올라서 그를 비추었다. 그는, 엉덩이뼈가 어긋났으므로, 절뚝거리며 걸었다.
【누가복음 18:1-8】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늘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으로 비유를 하나 말씀하셨다. « 어느 고을에,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존중하지 않는, 한 재판관이 있었다. 그 고을에 과부가 한 사람 있었는데, 그는 그 재판관에게 줄곧 찾아가서, ‘내 적대자에게서 내 권리를 찾아 주십시오’ 하고 졸랐다. 그 재판관은 한동안 들어주려고 하지 않다가, 얼마 뒤에 이렇게 혼자 말하였다. ‘내가 정말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존중하지 않지만, 이 과부가 나를 이렇게 귀찮게 하니, 그의 권리를 찾아 주어야 하겠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가 자꾸만 찾아와서 나를 못 견디게 할 것이다.' »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 너희는 이 불의한 재판관이 하는 말을 귀담아 들어라.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밤낮으로 부르짖는, 택하신 백성의 권리를 찾아주시지 않으시고, 모른 체하고 오래 그들을 내버려 두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얼른 그들의 권리를 찾아 주실 것이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 볼 수 있겠느냐? »
-인사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여러분 모두 반갑습니다. 교회를 이루는 기쁨이 우리 안에 있기를 바랍니다.
서로에게 인사를 전해 주십시오. 반갑고 친절한 인사를 건네주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읽는 이유
오늘 우리가 하나님 말씀 앞에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이라 불리는 성경이 여기 있습니다. 이 성경을 읽는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하나님 말씀이니까 읽습니다. 그 안에 진리가 있기에 읽습니다. 이렇게 정답처럼 들리는 답도 이유겠지만 저는 오늘 창세기 말씀을 놓고 문득 성경에는 사람의 이야기가 담겨 있어서가 아닐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도 어떤 사람인가 하면, 내가 닮은 사람들, 나를 닮은 사람들, 나와 똑같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성경 안에 담겨있습니다. 어떤 면에서 그런가 하면 인생이라는 굴곡에 따라 보람을 느끼고 기뻐하기도 하고, 한없이 슬퍼하고 고통스러워하기도 하는 사람이 나라는 사람이지요. 때로는 세상살이에 휩쓸리듯 살다가도 문득 내 영혼의 공허감 속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살려고 애쓰는 존재. 이런 사람의 모습이 성경 안에 담겨 있습니다. 나 같은 이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는 모습을 우리는 성경에서 볼 수 있습니다.
-야곱이라는 사람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야곱이라는 사람을 만납니다. 야곱은 여러분에게 어떤 사람으로 느껴지십니까? 매력적인 인물입니까? 요즘 이런 스타일의 사람을 내 삶에서 만난다면 친한 친구 관계가 될까요? 야곱이라는 인물은 적어도 굉장히 우리의 시선을 주목시키는 인물인 것은 분명합니다. ‘창세기’ 안의 인물들과 비교해 보십시오. 야곱은 아브람처럼 믿음이 뛰어나 보이지 않습니다. 요셉처럼 신앙이 진득해 보이지도 않습니다. 노아처럼 하나님께 순종했던 모습도 야곱에게는 잘 보이지 않습니다. 저의 평가입니다. 여러분도 야곱이라는 사람의 인물평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런데도 창세기 말씀의 주요 인물은 야곱입니다. 야곱은 갈등의 사람입니다. 그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성경은 그가 형 에서와 갈등을 일으킬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형 에서와 싸웠고, 태어나는 순간에도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습니다. 성장 과정 역시 끊임없이 형과의 갈등, 경쟁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갈등의 사람이기도 하지만 좋은 말로 해보면 무엇인가 인생에서 갈구하는 욕망이 큰 사람이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우리는 야곱을 닮았습니다. 어떤 면에서 그런가 하면 살려고, 살아남으려고 애를 쓰는 모습이 야곱을 닮았습니다. 그렇기에 야곱은 우리와 똑같은 모습의 사람, 우리와 닮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보다
야곱의 인생에 아주 중요한 2개의 장면이 있습니다. 누구나 인생에서 삶의 전환점이 된 중요한 장면이 있을 것입니다. 야곱도 그렇습니다.
첫 장면은 28장의 장면입니다. 형 에서가 화가 났습니다. 야곱으로부터 장자의 권리를 뺏겼기 때문입니다. 동생 야곱을 잡아 죽이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야곱은 그곳에 있다가는 그저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선택한 길이 외삼촌 라반이 사는 하란 땅으로 도망가는 방법입니다. 난생 처음으로 부모의 곁을 떠났습니다. 길을 걷고 걷다가 어떤 곳에서 하룻밤을 묵게 됩니다. 이 밤에 야곱은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요? 두려움과 공포심이 극도로 다다랐을 것입니다. 슬프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한 이 밤에 야곱을 돌덩이 하나를 가져다가 베고 잠을 청합니다. 그 밤에 야곱은 꿈을 꿉니다. 하늘과 땅이 층계로 이어져 있습니다.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아있습니다. 그 층계에 서 있는 하나님을 봅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약속의 말씀을 듣습니다. 그러고서는 잠에서 깨어나는데, 야곱은 그 때 깨달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아! 내 인생에 하나님이 계시구나!’
야곱이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었나요? 아니지요.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을 어떻게 모르겠습니까? 하지만 자신의 하나님이심을 그제서야 깨닫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하나님의 품안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자각합니다. 이 사건은 야곱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순간 중 하나였을 것입니다. 어떤 순간인가 하면 하나님이 곁에 계심을 깨닫는 순간입니다.
우리도 야곱과 인생의 경로가 크게 다르지는 않습니다. 세상에 이렇게 와있지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미처 깨닫지도 못한 채 인생의 시간을 허비합니다. 그러면 남는 것은 악바리 같은 생존 의지만으로 살게 됩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게 됩니다. 야곱의 인생이 이런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인생의 최악의 순간, 들판에서 돌을 베고 잠을 자야하는 이 순간 자신의 인생에 하나님이 함께 계심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난처한 야곱
야곱의 인생에 두 번째 중요한 장면은 오늘 말씀 장면입니다. “하나님과 씨름한 사람”이 야곱입니다. 오늘 우리가 봉독한 말씀 첫 장면에 보면 고향으로 돌아가는 사람치고는 좀 이상하게 보이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야곱이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11명의 아들을 강 건너로 보냅니다. 자신의 재산도 먼저 강 건너로 보냅니다. 지금 상황이 무슨 상황인가요? 야곱은 이제 아버지의 집을 떠날 때 빈털터리 신세, 불쌍하기도 하고, 초라하기도 한 그런 상태의 야곱이 아닙니다. 야곱은 하란 땅에서 열심히 일을 한 결과 엄청난 재산을 지닌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내 2명과 여종 2명에게서 나은 아들 11명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이제 형 에서를 만나러 가는 길에 조금은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갈 수도 있을 법합니다. 그런데 당당하게 자신이 지닌 모든 것을 내세워 강을 건너고, 형을 만나면 좋을 텐데, 아내와 자식, 재산을 먼저 강 건너로 보냅니다. 자신은 뒤에 남습니다. 좀 이상하지요? 야곱은 왜 이렇게 행동했을까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형에 대한 두려움이 여전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먼저 형에게 큰 선물도 미리 보냈습니다. 그리고 형이 어떻게 나오는지 보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복수심에 불타는 형 에서가 자신을 잡으려고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 장면을 보면, 사람은 참 변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자신은 이미 다른 존재가 되어 있습니다. 빈털터리 신세로 밤새 두려움에 떨던 이전의 야곱이 아닙니다. 가정을 이뤘고, 어마어마한 재산을 보유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아버지의 집을 떠나 올 때와 똑같은 모습으로 남습니다.
혼자 남습니다. 왜일까요? 여전히 형 에서에 대한 두려움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이전의 조건, 이전의 상황에 얽매여 있는 야곱의 모습입니다. 과거의 사건들에 붙들리고 얽매여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겁쟁이 야곱으로 돌아와 있습니다. 야곱은 아직도 여전히 과거 수동적이고 철들지 않은 자아를 지닌 어린아이로 되돌아 가버립니다. “내 안의 어린아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 보니 아무리 사회적으로 성공을 거두고 높은 지위에 오른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갈등과 스트레스 상황에 맞닥뜨리면 어린 시절 자신이 사용했던 방어기제가 등장한다고 말합니다. 다 큰 성인이 되어서도 가끔 이해하지 못할 어린아이 같은 판단과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고요. 정신적인 스트레스 상황이 가해지면 가장 자주 사용해왔던 방어기제가 자기 안에서 스멀스멀 등장하는 법입니다. 야곱에게 방어기제는 무엇이었을까요? 아마도 도망, 도주이지 않을까요? 아내와 자식을 먼저 강 건너 보내고, 자신의 재산도 먼저 보냈습니다. 하지만 형이 자신에 대해서 화를 풀지 않고, 해를 가하려는 기미를 보이면 분명 야곱은 도주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씨름하다.
이 밤에 야곱은 무엇을 했을까요?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이 질문을 잠시 놔두고 누가복음으로 가보겠습니다. 오늘 복음서 말씀에서 예수께서 가르치고 있는 말씀은 기도에 대한 강조의 말씀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사람들을 존중하지도 않는’ 재판관이 등장합니다. 이 사람에 대한 묘사를 보자면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안하무인의 사람’으로 묘사됩니다. 무례하고 냉혹한 사람입니다.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는 사람이지요. 그러나 이 재판관에게도 골치 아픈 일이 있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간청하러 오는 과부 때문입니다. 밤낮으로 부르짖는, 택하신 백성의 권리를 찾아주시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간청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불의한 재판관도 아무런 힘도 없는 과부의 청 앞에 두 손을 다 들게 됩니다. 기도하는 자, 자신의 권리를 위해 애쓰는 자의 모습이 과부의 모습입니다.
다시 야곱의 이야기로 와보십시오. 야곱은 그 밤에 무엇을 했을까요? 무엇이 필요한 시간이었을까요? 성경은 야곱이 하나님의 천사와 씨름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천사는 하나님 자신을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야곱은 밤새 하나님과 씨름했습니다. 하나님과 밤새 씨름을 했다는 말이 제게는 밤새 하나님께 기도했다는 말로 읽힙니다. 하지만 여러분 이 기도는 우리가 평소에 가볍게 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싸움이나 투쟁과도 같은 기도입니다. 제게는 그 밤의 야곱이 그렇게 보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히브리어로 ‘얍복’이라는 말과 ‘씨름하다’는 말이 어원이 같다고 합니다.
밤이 새도록 야곱은 이 ‘어떤 이’로 묘사된 하나님과 밤새 씨름하였습니다. 날이 새려고 하자 이 ‘낯선 이’는 야곱에게 놓아달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야곱은 놓아줄 생각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에게 축복해 주지 않으면 보내지 않겠다.” 야곱의 절박감에 대한 깊이가 담겨 있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에 대한 절박감이었을까요? 야곱이 말하는 축복이 무엇인지 우리가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요즘 세상에서의 축복의 이미지는 당연 부자, 돈 같은 것이겠지요. 하지만 야곱은 이미 얻을 대로 다 얻은 사람입니다. 소유하려 했던 것을 이미 다 손에 쥔 사람입니다. 야곱은 그러나 모든 것을 보내놓고 홀로 남았습니다. 빈손, 빈털터리 신세로 하나님과 얼굴을 맞대고 치열하게 서있습니다. 야곱이 청하는 축복이란 이런 것입니다.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갈망하고 애쓰는 내 인간적인 욕심이 이끄는 대로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많은 것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애를 쓰고 살아내려고 해보았지만 내가 왜 사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얻은 것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허기를 느낍니다. 그래서 이 밤에 이것을 알려주시지 않는다면, 이것을 깨닫는 축복을 내려 주시지 않는다면 나는 이 자리에서 죽어도 좋겠습니다.”
-새로운 이름을 얻다.
이 때 야곱과 씨름하던 하나님은 야곱에게 엉뚱한 질문을 하십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갑자기 싸우다가 이름을 묻는다는 사실이 엉뚱하게 보이지만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고대인들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 각자의 운명을 ‘이름’을 통해서 주신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이름을 고대 셈족어에서 ‘쉼’이라고 발음합니다. ‘쉼’은 이름이라는 뜻도 있지만 기억, 역사라는 의미를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사라의 이름도 바꿔주셨지요. 그리고 바울도 새 이름을 얻었습니다. 야곱이 자신의 이름을 ‘야곱’이라고 밝히자 하나님은 야곱에게 새로운 이름 ‘이스라엘’을 주십니다. 야곱은 하나님께 이름을 묻지만 대답을 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영원히 미지의 존재로 남지만 야곱은 하나님과 씨름했던 그 땅을 ‘하나님의 얼굴, 브니엘’이라고 이름을 붙입니다.
야곱이 치열한 씨름, 이 기도의 시간을 통해서 얻은 것은 무엇일까요? 축복이라는 이름의 많은 재물이었을까요? 사회적 명성과 지위였을까요? 야곱에게 정말 축복이란 이런 것입니다.
야곱의 인생을 보십시오. 형의 그늘에 가려진 채로 살았습니다. 형제, 자매 간의 치열한 싸움과 갈등이 얼마나 많습니까? 여전히 이런 것에 사로잡힌 채 세상을 치고 박는 경쟁으로만 이해하는 어른이 된 사람도 많습니다. 야곱은 그래서 더욱 더 엄마의 치맛자락만 붙잡고 사는 어린 아이였습니다. 부정과 회피의 사람이겠지요. 아버지의 사랑의 결핍감 때문에 삐뚤어진 방식으로 아버지의 사랑을 얻으려고 했습니다. 소위 팥죽 사건이지요. 삼촌의 속임수에 속아 당하는 나약하고 수동적인 인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야곱은 더 이상 누군가의 발뒤꿈치를 붙잡으려고 바둥거리는 인생의 야곱이 아니라 하나님과 겨루어 새 이름을 얻은 자입니다.
-말씀 맺기
하나님과 겨루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더 이상 회피하여 도망할 곳이 없는 인생임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아무 것도 지니지 못한 채로 서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 앞에 내놓을 수 있는 것은 자신이 살아온 자신의 이름뿐입니다. 이 이름에는 자신의 인생, 자신이 살아온 방식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 담겨 있습니다. 이 모두를 하나님 앞에 놓고 우리는 격렬한 싸움을 벌여야 합니다. 이를 저는 치열한 기도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의 인생을 내어 놓고 드리는 기도입니다.
여러분, 기도가 어렵습니까? 여러분의 기도를 가로 막는 것이 무엇입니까? 기도를 제쳐두고 해야할 일이 많은가요? 그 가운데 내 인생을 좌지우지 할 만한 것이 있나요? 저는 하나도 없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오늘 이 시간이 우리가 하나님과 씨름해야 할 시간이라고 믿습니다. 여러분, 삶의 여러 가지 어려움으로 힘들고 어려우십니까? 여러분 자신의 인생을 놓고 하나님께 드려보시기를 바랍니다. 차분히 하나씩 이마에 땀을 흘려가며 일하는 사람처럼 열심으로, 입시를 준비하는 학생처럼 차분하고 꼼꼼하게 기도의 시간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새로운 이름으로 우리를 새롭게 하시리라 믿습니다. 그런 아름다운 기도의 시간이 우리의 삶 가운데 풍성하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