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0월 30일 성령강림 후 제21주 (2022년-44호)

제목 : 종교개혁주일에 읽는 삭개오 이야기

본문 : 하박국 1:1-4, 2:1-4 데살로니가후서 1:1-4, 11-12, 시편 32:1-7, 누가복음 19:1-10

누가복음 19:1-10】

예수께서 여리고에 들어가 지나가고 계셨다. 삭개오라고 하는 사람이 거기에 있었다. 그는 세관장이고, 부자였다. 삭개오는 예수가 어떤 사람인지를 보려고 애썼으나, 무리에게 가려서, 예수를 볼 수 없었다. 그가 키가 작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예수를 보려고 앞서 달려가서, 뽕나무에 올라갔다. 예수께서 거기를 지나가실 것이기 때문이었다.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러서 쳐다보시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 삭개오야, 어서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서 묵어야 하겠다. » 그러자 삭개오는 얼른 내려와서, 기뻐하면서 예수를 모셔 들였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서, 모두 수군거리며 말하였다. « 그가 죄인의 집에 묵으려고 들어갔다. » 삭개오가 일어서서 주님께 말하였다. « 주님, 보십시오.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습니다. 또 내가 누구에게서 강제로 빼앗은 것이 있으면, 네 배로 하여 갚아 주겠습니다. »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인자는 잃은 것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

-인사

거룩한 주일입니다. 거룩한 날이지만 맘껏 기쁜 맘을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소식 들으셨겠지만 서울 이태원에서 큰 사고가 나서 150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했습니다. 사람의 죽음 앞에서 원인과 이유를 놓고 함부로 말하기 보다는 죽은 자들을 하나님께서 품어주시기를 바래야겠습니다. 한편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이들에게도 주님의 깊은 위로가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 앞에 나온 여러분들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특별히 어제는 홍기원 형제님 샤메인 자매님의 결혼식이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축복 속에 새롭게 가정을 이룬 두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귀한 가정 이루시기를 바랍니다. 축복합니다.
이 시간 서로에게 인사를 전하고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말씀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서로에게 따뜻한 위로와 친절의 인사를 전해주시기를 바랍니다. 반갑습니다. 축복합니다.

-교회의 본질

앞서 말씀 드린대로 오늘 주일은 종교개혁 505주년 기념주일이기도 합니다. 유럽 역사에서 ‘종교개혁’, ‘교회 개혁’이라는 단어가 나오면 당연히 등장하는 인물이 있습니다. ‘마르틴 루터’입니다. 하지만 마르틴 루터라는 한 사람 개인의 역량이나 능력으로만 이루어진 교회 개혁은 결코 아닙니다. 이미 14세기 영국의 존 위클리프로부터 시작되어 15세기 체코의 얀 후스를 거쳐 16세기 독일의 마르틴 루터에 이르기까지 개혁가들이 일관되게 주장한 바가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가 복음의 본질을 되찾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되찾아야 한다는 말은 뭔가를 이미 전에 잃었던 적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어려운 말이 필요 없습니다. 잃은 것은 교회의 본질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 예수님 그 자신입니다. 교회에서 예수님이 사라진다해도 얼마든지 겉모습은 화려하고 멋들어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아닌 것이지요. 이를 잘 드러내는 사건이 있습니다.

1517년 10월 31일 마르틴 루터는 오늘날 독일의 비텐베르크 성당 정문에다가 95개조나 되는 반박문을 붙입니다. 이 내용은 타락한 교회의 모습을 하나하나 지적하는 내용입니다. 그 중에 우리가 아는 몇 가지가 있습니다. 바로 면죄부에 대한 비판입니다. 면죄부가 무엇입니까? 말 그대로 죄가 없다고 증명해 주는 증명서입니다. 죄를 사하는 증서들을 인간들이 돈을 받고서 남발했다는 말입니다. 이런 것을 교회가 발행했습니다. 왜요? 죄에 빠진 사람들이 안타까워서요? 죄로 인해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안심시키고 구하려고요? 아닙니다. 당시 로마 카톨릭 교회의 수장 교황 레오 10세는 성베드로 성당을 개축하는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서 이런 일을 벌였습니다. 유럽의 온 교회가 조직적으로 이에 가담했습니다. 마르틴 루터의 반박문이란 교회가 이럴 수는 없다는 신학적 항의문입니다. 처음에 카톨릭 교회에서는 반응을 보였을까요? 한낱 독일 촌구석의 젊은 신부 하나가 그렇게 주장한다고 해서 변할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나중에 조금 시끄러워지자 마르틴 루터를 보고 ‘주님의 포도밭을 망치는 멧돼지’라고 비난했습니다. 루터가 분란을 일으켜 사회통합을 깨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루터는 보름스에서 열린 제국 의회에 소환되었습니다. 이 곳에 나와서 지금까지의 발언과 신학적 입장을 철회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거절할 경우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고민에 빠진 루터는 며칠간의 말미를 달라고 했습니다. 번민하던 그는 마침내 의회 앞에 나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취소할 수 없고 하지도 않겠습니다. 왜냐하면 양심에 어긋난 행동을 한다는 것은 옳지 않을 뿐 아니라 안전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여기 제가 확고부동하게 서 있습니다. 저는 달리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이여, 이 몸을 도우소서. 아멘.”

루터라고 고민이 없었겠습니까? 자신의 안전에 대해서 염려스러웠을 것입니다. 목숨이 달린 일이니까 그렇습니다. 그리고 학자로서 대학교수로서 자신의 신분에 대해 보장받고 싶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일생을 편안히 안전과 신분을 보장받은 채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으며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 보다 앞서는 것이 있었습니다. 신앙적인 양심입니다. 교회의 본질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를 묵상해야 하는 것은 루터를 추앙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이 날을 추억하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우리 시대 교회의 본질에 대해 우리는 묵상해야 합니다. 교회가 병들지 않도록 돌봐야 합니다. 마음을 써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묻어나도록 삶을 가꾸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우리의 주님이신 그리스도시기 때문입니다.

-삭개오를 소개합니다

오늘 우리는 복음서 누가복음 19장의 말씀을 우리 앞에 놓았습니다. 이 말씀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간절히 바라시는 모습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는 누가복음 19장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 때문에 자기가 가진 재산의 절반을 잃게 된, 어쩌면 경우에 따라서는 네 배로 갚아야 하는 상황에 놓인 어떤 한 사람의 이야기를 접하게 됩니다. ‘삭개오’라는 사람이 그 주인공입니다. 이 사람의 거주지는 ‘여리고’라 불린 아주 오래된 고대 성읍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에집트를 탈출하여 가나안 땅으로 진입할 당시에도 존재했던 도시입니다.

이 사람의 직업은 세리장이면서 또 돈이 많은 부자였습니다. 그런데 세리장이고 부자라는 두 가지 특징만 가지고도 유대 사회에서 이 사람에 대한 평판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당시 세리들은 동족에게서 세금을 걷어 로마에게 바치는 일을 해서 살아갔습니다. 세금의 많고 적음을 떠나 하나님 외에 다른 존재를 위해서, 그것도 이방인인 로마 황제를 위해서 세금을 내야한다는 사실에 대다수의 유대인들은 분노를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분함을 직접 로마에게 터트릴 수 없는 상황입니다. 유대 백성들의 원망은 자연스럽게, 그 세금 징수 업무를 담당하는 유대인 세리들에게 집중되었습니다. 동족이면서 동족의 고혈을 빨아서 사는 사람들. 이런 세리들의 입장은 어떨까요? 이웃들로부터 경멸의 눈초리를 받는 사람의 마음은 어떻게 되던가요? 여러분 삶의 경험을 꺼내보시기 바랍니다. 이런 사람들은 대개가 뒤틀리게 마련입니다. 어쩌면 진짜 시대와 상황의 피해자는 자신들이라고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아무도 원하지 않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니까요. 자신들이야말로 그 사회의 피해자라고 생각한 세리들은 갖은 방법을 동원하여 부를 축적했을 것입니다. 가난한 동포들은 이런 세리들을 더더욱 미워했을 겁니다. 미움과 착취의 악순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세리장이었던 삭개오에게 의지할 것이라고는 자신이 모은 재산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삭개오’란 이름은 원래 ‘순진함, 정결함’이란 뜻의 ‘자카이(Zakai)’에서 나온 것입니다.
여기 부모이신 분은 아시겠지만 자식이 태어나면 이름을 지어줘야 하는데, 이 일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집안의 돌림자가 있다면 이것도 고려해야 하고, 발음도 고려해야 하고, 너무 오래된 이름도 안됩니다. 그렇지요? 대부분의 부모가 그렇듯이 삭개오의 부모는 그가 ‘착하고 정결하게’ 살기를 바라면서 그런 이름을 지어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름값을 하며 살기가 그리 쉽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세리장인 그를 ‘더러운 욕심쟁이 삭개오’, ‘치사한 부자 놈 삭개오’라고 불렀을 겁니다. 그런 소리를 들으면서 삭개오는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요? 슬프기도 하고 고통스럽게 느꼈을 겁니다. 하지만 삭개오의 마음은 점점 모질게 단단해졌을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그는 모든 것을 다 포기한 채 그저 돈 버는 일에만 몰두함으로써 절망감을 잊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렇게 돈을 착취해가면서라도 벌면 그의 영혼의 충족감이 찾아올까요? 이것이 오늘 이 시대 우리의 물음이기도 합니다.

-삭개오에게 벌어진 사건

그런데, 이런 삭개오의 삶에 전혀 예기치 못한 사건이 벌어집니다. ‘삭개오’는 소문 하나를 들었습니다. 여러분 혹시 시골살이 해보셨나요? 대도시에서 성장하신 분들은 잘 모르시겠지만 규모가 작은 마을에서 살다보면 소문이 엄청나게 빠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시시콜콜 사소한 일까지 서로 다 알게 됩니다.

그런데 삭개오 마을에 소문하나가 돌기 시작했습니다. 별명이 ‘죄인과 세리의 친구’라고 알려진 예수라는 사람이 바로 그가 살고 있는 여리고 읍내를 지나간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 예수가 그곳을 지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본다’는 것이 만나고 대면하고 대화를 나누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멀리서 지나가는 예수를 보았다는 말입니다. 오늘의 본문이 말해 주듯이 삭개오는 키가 작은 사람이라서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예수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었습니다. 다급해진 삭개오는 왜 그런지 예수를 꼭 한번 봐야겠다는 생각에 삭개오는 부리나케 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마침내 그는 사람들과 얘기하며 천천히 그곳을 지나가고 있던 예수의 얼굴을 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그곳을 그냥 지나쳐 가셨더라면, 그 날의 일은 삭개오에게 그저 하나의 에피소드로 남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나무 밑을 지나던 예수의 발걸음이 갑자기 멈췄습니다. 느닷없이 예수님은 고개를 들어 삭개오를 쳐다보셨습니다. 드디어 삭개오는 예수님의 시선과 마주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삭개오야, 어서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서 묵어야 하겠다.” 이 말씀입니다. 이 대목에 대해서 어떤 누군가가 사역(私譯), 그러니까 개인적으로 번역한 말씀 대목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예수께서 나무 위의 ‘삭개오’를 올려다 보면서 “여보세요, 삭개오씨. 나무에서 내려오십시오. 오늘 제가 당신 집에서 하룻밤 신세를 지겠습니다.” 훨씬 부드럽지요?

삭개오는 예수님의 그 부름을 듣고 기뻤습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기쁨에도 종류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삭개오의 기쁨은 어떤 기쁨일까 생각해 보면, 자신의 존재를 재확인 받는 감격스러운 기쁨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 우리 삶의 모습들을 가만히 보면, 우리의 삶의 대부분은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일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밥을 먹고 거울을 보고 돈을 벌고…’ 이 모든 일들이 사실은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일이지요. 자기 자신 안에서 발견하는 자신을 확인하는 것을 요즘 말로 ‘자존감’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삭개오는 오늘 예수님의 부름을 듣고 자신을 재확인하는 경험을 했습니다. 삭개오의 기쁨은 이런 것이지 않을까요? 6절 말씀에 따르면, 삭개오는 얼른 내려와서 기뻐하면서 예수를 모셨습니다.

우리가 삭개오에게 벌어진 사건에서 보아야 할 점은 여기에 있습니다. “그가 많은 재산을 내놓았다”는 일이 아니라 “그가 예수를 만났는데, 예수를 통해서 그의 삶이 근본적으로 변화되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말씀의 이 부분,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습니다. 강탈한 것이 있으면 네 배로 갚아 주겠습니다.” 삭개오의 이 말은 우리 한국말로는 나중에 그렇게 하겠다는 말처럼 미래의 일로 들리지만 신약성경의 언어인 고대 그리스어 시제는 미래시제가 아니라, 현재시제입니다. “지금 당장” 그의 삶에 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부자 청년과 비교

여러분 다시 말씀 드리지만 예수님과 제자들 일행은 갈릴리를 떠나서 지금 예루살렘으로 여행 중에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루살렘 근처, 여리고에서의 사건이지요. 지점을 다시 확인하십시오. 그리고 이 여정에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을 만나셨습니다. 그 중에 하나님을 믿는 많은 신앙인들은 만났습니다.

이 누가복음의 기록자는 누가입니다. 그리고 누가는 참 친절합니다. 왜냐하면 누가는 말씀을 읽는 사람들을 위해서 친절하게 장치를 하나 마련해 놓았습니다. 삭개오 이야기를 잘 이해하라고 삭개오와 비교되는 인물 이야기 하나를 앞에다가 배치해 놓았습니다. 비교해서 읽으라고요.
즉 누가는 소개합니다. 삭개오의 이야기를 제대로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와 대조되는 다른 한 인물을 살펴보라고 말합니다. 그 인물은 바로 전 장인 18장에 등장하는 부자 젊은이입니다. ‘부자 청년 이야기’ 여러분 기억하시나요? 그는 신실하고 진지한 사람이었습니다. 종교적으로도 나무랄 데 없이 살았고, 모두가 부러워할만한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도 삭개오처럼 영혼의 갈증과 허기를 느끼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가 이끌려 예수를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진지하게 영생에 대해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대견하게 여기시면서도 그를 붙들어 매고 있는 무엇인가를 보셨습니다. 그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그가 가진 것”이었습니다. 뭔가를 움켜쥐고 있는 손으로는 다른 것을 붙잡을 수 없는 법입니다.

동남아시아에서 원숭이 잡는 법 중의 하나가 있습니다. 원숭이들이 자주 지나다니는 나무 위에다가 원숭이가 손을 겨우 집어넣을 구멍을 파고 좋아하는 음식을 넣습니다. 그런데 그 구멍에다가 손을 넣어서 음식을 잡으면 주먹이 커집니다. 그런데 이렇게 음식을 손에 쥐고서는 구멍에서 손을 뺄 수가 없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원숭이들이 음식을 가져가려고 구멍에 손을 넣었는데 사람들이 자기를 잡으려고 오는 소리가 들리는데 끝내 음식을 움켜쥐고서 놓지를 않아서 사람들에게 잡히는 원숭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놓아야 잡을 수 있고, 버려야 떠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단도직입적으로 부자 청년에게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는 결단하지 못했습니다. 성경은 그가 근심했다고 말합니다. 그는 예수를 떠나갔습니다.

그가 떠나간 후 예수님 제자들에게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이 더 쉽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을 들은 제자들은 놀랐습니다. 유대인들은 ‘부유함’을 경건한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로 이해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말씀은 충격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삭개오는 예수님께서 뭐라 요구하기도 전에 예수님이 원하는 삶을 결단하고 나섰습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원하시는 삶은 착실한 신앙인으로, 가진 돈과 지위를 고스란히 간직한 채, 무사히 무탈하게 살아가는 삶이 아닙니다. 때로는 강력한 바람처럼, 뜨거운 불길처럼 다가오는 하나님의 요청 앞에, 이웃의 고통 앞에 철저하게 응답하는 결단, 철저한 변화야말로 예수께서 인간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임을 삭개오는 오늘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던 삭개오는 삶의 근본적인 변화를 감행함으로써 답답했던 예수님의 마음에 큰 기쁨을 안겨 주었습니다. 누가복음 18장과 19장의 이 두 개의 다른 사건, 부자청년과 삭개오 이야기를 놓고서 발터 라우쉔부쉬(Walter Rauschenbusch)라는 독일의 목사님이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마침내,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손뼉치며 기뻐하셨다!” 여러분, 너무 멋지지 않습니까?

우리 안에 있는 이기적인 욕망이 타인의 고통에 대한 무관심과 만나서 버무려지고 부풀어 오를 때, 우리의 소유의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우리는 모두가 거대한 낙타가 되어 버리고 맙니다.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않은 탐욕, 과시 욕, 집단 이기주의, 병든 마음과 시선. 과연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의 욕심의 크기가 낙타보다 못하다고 자부할 수 있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말을 듣고도 실천을 회피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상황은 마찬가집니다. 그러나 뽕나무 위에서 예수의 눈길과 만난 삭개오는 예수의 말을 채 듣기도 전에 철저하게 자신의 삶을 바꾸었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더 많은 삭개오를 찾고 계십니다. 이기적인 마음 씀씀이를 포기하고 하나님과 이웃을 향해 결단하는 삶을 살 때,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보시며 “다시 한 번, 내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걸 보았다”말씀하시며 기뻐하실 것입니다.

-맺는 말

예수님을 보기 위해 삭개오는 나무에 올랐습니다. 우리 교회가 그런 나무가 되었으면 하는 작은 소망을 여러분에게 전합니다. 저뿐만 아니라, 지금 예배를 드리는 여러분 모두에게, 이 교회가 영혼의 뽕나무가 되기를 바랍니다. 바로 이곳을 통해 주님의 시선과 만나고, 주님의 음성과 만나고, 삶의 변화를 경험하시기를 바랍니다. 교회는 단순히 기독교적 교양을 함양하는 곳이 아닙니다. 나를 바라보시는 그리스도의 시선을 의식하고, 나를 새로운 삶으로 초청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곳입니다. 삭개오에게는 그곳이 뽕나무 위였다면, 오늘 우리에게는 바로 이 교회 공동체입니다. 교회를 개혁하는 것은 우리 교회가 그런 곳이 되는 것입니다.

이곳이 그런 곳이 될 때, 그리고 저와 여러분이 그런 사람이 될 때, 그럴 때 이곳은 그저 단순한 건물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 영적인 생명력을 공급해 주는 거룩함의 원천이 될 것입니다. 이 거룩하고도 소중한 시간에 우리를 바라보시는 주님의 시선과 만나 새로운 삶을 결단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