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살아있는 자의 하나님
본문 : 학개 1:15b-2:9, 데살로니가후서 2:1-5, 13-17, 시편 98편, 누가복음 20:27-38
【학개 1:15b-2:9】
때는 다리우스 왕 이년 여섯째 달, 그 달 이십사일이다. 그 해 일곱째 달, 그 달 이십일일에, 학개 예언자가 주님의 말씀을 받아서 전하였다. “너는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 유다 총독과 여호사닥의 아들 여호수아 대제사장과 남아 있는 백성에게 전하여라. ‘너희 남은 사람들 가운데, 그 옛날 찬란하던 그 성전을 본 사람이 있느냐? 이제 이 성전이 너희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이것이, 너희 눈에는 하찮게 보일 것이다. 그러나 스룹바벨아, 이제 힘을 내어라. 나 주의 말이다. 여호사닥의 아들 여호수아 대제사장아, 힘을 내어라. 이 땅의 모든 백성아, 힘을 내어라. 나 주의 말이다. 내가 너희와 함께 있으니, 너희는 일을 계속하여라. 나 만군의 주의 말이다. 너희가 이집트에서 나올 때에, 내가 너희와 맺은 바로 그 언약이 아직도 변함이 없고, 나의 영이 너희 가운데 머물러 있으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머지 않아서 내가 다시 하늘과 땅, 바다와 뭍을 뒤흔들어 놓겠다. 또 내가 모든 민족을 뒤흔들어 놓겠다. 그 때에, 모든 민족의 보화가 이리로 모일 것이다. 내가 이 성전을 보물로 가득 채우겠다.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은도 나의 것이요, 금도 나의 것이다. 나 만군의 주의 말이다. 그 옛날 찬란한 그 성전보다는, 지금 짓는 이 성전이 더욱 찬란하게 될 것이다.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내가 바로 이 곳에 평화가 깃들게 하겠다. 나 만군의 주의 말이다.’”
【누가복음 20:27-38】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개파 사람 가운데 몇 사람이 다가와서, 예수께 물었다. “선생님, 모세가 우리에게 써 주기를 ‘어떤 사람의 형이 자식이 없이 아내를 남겨 두고 죽으면, 그 동생이 그 형수를 맞아들여서 뒤를 이을 아들을 자기 형에게 세워주어야 한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일곱 형제가 있었습니다. 맏이가 아내를 얻어서 살다가 자식이 없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둘째가 그 여자를 맞아들였고, 그 다음에 셋째가 그 여자를 맞아들였습니다. 일곱 형제가 다 그렇게 하였는데, 모두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나중에 그 여자도 죽었습니다. 그러니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서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일곱이 다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말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지만, 저 세상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에 참여할 자격을 얻은 사람은 장가도 가지 않고 시집도 가지 않는다. 그들은 천사와 같아서, 더 이상 죽지도 않는다. 그들은 부활의 자녀들이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죽은 사람들이 살아난다는 사실은 모세도 가시나무 떨기 이야기가 나오는 대목에서 보여 주었는데, 거기서 그는 주님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있다. 하나님은 죽은 사람들의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들의 하나님이시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고 있다.”
-인사
주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모두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거룩함을 쫓아 이곳에 나오신 줄로 믿습니다. 서로에게 따뜻한 인사를 전하고 말씀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축복합니다.
한 주간 잘 지내셨습니까? 저는 한 주간 보내면서 마음 한 구석에 불편한 기색이 느껴졌습니다. 뭔가 슬픈 것 같기도 하고, 뭔가 답답한 마음 같기도 했습니다. 젊은이들의 목숨이 속수무책으로 죽어나갔는데, 책임이 있다는 사람은 없고, 책임 회피하는 이들만 보이는 것 같아 슬픈 마음이 들었습니다. 젊은이들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젊은이들의 죽음에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만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2600년 전 즈음에 거룩한 도성이라 불리던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졌습니다. 나라는 송두리째 빼앗겼고, 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예레미야는 이 도성 예루살렘 거리에 무심한 표정으로 오가는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탄식을 내뱉습니다. 선지자 예레미야 애가 1:12에 보면 예레미야는 “길 가는 모든 나그네들이여, 이 일이 그대들과는 관계가 없는가?”
예레미야의 탄식이 저 먼 옛날 우리와 상관도 없고, 동떨어진 음성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마음임을 절감하게 됩니다. 우리 기독교가 이 세상의 ‘무당들의 신앙’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공동체 사회에 대한 책임 의식입니다. 기독교는 무당들처럼 복, 복을 말하는 세상적인 복을 추구하는 신앙 체계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세상에 대해 늘 책임적인 자세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 안에 담겨 있다는 말입니다.
제가 주보 앞면에 몇 달째 한국 초기 교회사의 한 장면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한국 초기 기독교 역사를 살펴보니 기독교 신앙이 한국 사람들의 마음에 아주 급속도로 빠르게 녹아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분명히 있었습니다. 식민지 시대 민족적인 의식과 함께 기독교가 성장했다는 사실입니다. 나라 잃은 민족을 위로하고자 한 것이 기독교 신앙이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의료와 교육, 복지 등 사회적인 책임에 대해 소홀히 하지 않은데 이유가 있었던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구약성경에서 만나게 되는 예언자 역시 신앙적인 책임 의식을 안고 있습니다.
-예언자들의 전통
구약성경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예언자라고 불린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특히나 예언자들의 이름을 딴 책들이 우리 성경에 있습니다. 나중에 사람들은 말씀들을 놓고 예언자들을 구분했는데, 그들은 3 대(大) 예언자와 12 소(小) 예언자들입니다.
자, 성경 공부하는 마음으로 기억해 보겠습니다. 3대 예언자는 누구인가요?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입니다. 이 분들은 구약성경에서 많은 분량을 차지하지요. 그리고 12 소 예언자는 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댜, 요나, 미가, 나훔, 하박국, 스바냐, 학개, 스가랴, 말라기입니다. 참으로 많은 예언자들입니다. 이 예언자들을 보면서 제게 순진하고 소박한 질문이 하나 생깁니다. 이 질문은 이런 겁니다. ‘구약성경에는 왜 예언자가 이렇게 많이 등장할까? 하나님께는 왜 이렇게 예언자가 많이 필요할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시대성(時代性)’입니다. 각각의 예언자의 각각의 시대를 품고 있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시대만이 가지고 있는 개별적인 현실의 상황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각각의 시대마다 예언자는 등장합니다. 이 예언자들이 하나님의 시선을 놓치지 않고 유지합니다.
시간은 흐르고 시대는 달라집니다. 시대에 따라 생각이 변하기도 하고, 상황이 달라지기고 합니다. 이 말을 고스란히 오늘날로 가져와 보면 오늘도 여전히 예언자가 필요하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예언자에 대해 오해를 하지 마십시오. 미래를 예측하여 점을 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예언자는 하나님께서 시대마다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온몸으로 맡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았습니다. 때로는 무뎌진 마음을 지적하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때론 상처입은 백성들을 위로하는 따뜻한 시선이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의 시선이 필요한 것과 동일합니다.
-학개의 시대
오늘 우리가 봉독한 말씀은 ‘학개’라는 이름의 예언자의 말씀입니다. 그 이름만큼이나 낯설고 자주 대하지 못한 말씀의 사람입니다. 낯설지만 앞서 말씀드린대로 예언자는 시대의 사람입니다. 오늘 말씀의 시작은 그 시대가 어떤 시대였는지를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학개’라고 불린 이에게 임한 시대와 시간이 말씀에 나옵니다. “다리우스 왕 이년 여섯째 달, 그 달 이십사일”이라고 합니다. 사실 성경에 그 날짜가 분명하게 명시된 기록은 흔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학개 선지자의 시대는 분명합니다.
말씀에 나오는 다리우스는 고대 페르시아의 왕입니다. 페르시아는 오늘날 이란의 선조격인 나라입니다. 페르시아는 바벨론을 무너뜨리고 등장한 나라이고, 다리우스 왕은 페르시아의 제3대 왕에 해당이 됩니다. 유대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바벨론이라는 나라가 자신들을 다스리다가 갑자기 페르시아로 그 지배 국가가 바뀐 것입니다. 그리고 재위 2년이면 정확히 기원전 520년입니다. 이때 바빌론에 포로로 끌려갔던 유대 민족에게 어떤 일이 벌어진 걸까요?
유대 민족에게 바빌론 포로 생활이 끝이 났습니다. 페르시아 초대왕 고레스는 유대민족에게 너희들 나라로 돌아가도 좋다는 허락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제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된 시대가 되었습니다. 게다가 다리우스 왕은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은 지도 거의 2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기 시작한 기원전 538년부터 성전을 재건하려고 애를 썼습니다만 주민들의 숫자도 부족했고, 당장 먹고사는 문제도 시급했으며, 정치적으로 불안한 요소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학개가 나서서 성전 재건을 독려합니다.
사실 예루살렘 성전은 현재까지 세 번에 걸쳐서 건축되거나 재건되었습니다. 첫 성전은 다윗의 아들 솔로몬에 의해서 기원전 10세기에 처음으로 세워졌습니다. 솔로몬 성전은 기원전 587년에 바벨론 제국에 의해서 파괴되고 무너졌지요. 두 번째 성전은 스룹바벨에 의해서 기원전 6세기 초에 재건되었는데, 이 성전은 기원전 63년경 로마 폼페이우스 장군에 의해서 무너졌습니다. 세 번째 성전은 유대 왕인 헤롯에 의해서 예수님이 활동하던 시기에 건축되었습니다만 70년 경 복음서의 시대에 로마 티투스 장군에 의해 파괴되었습니다. 세 번에 걸친 예루살렘 성전은 다 붕괴했습니다.
학개가 말하는 “그 옛날 찬란한 그 성전”은 첫 성전인 솔로몬 성전을 가리킵니다. 학개 선지자가 말하는 그 성전은 60년 전에 이미 무너졌기에 그 영광을 직접 눈으로 본 사람은 나이가 많은 노인들뿐입니다.
-학개가 전하는 바
오늘 말씀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학개 선지자는 아주 중요한 신앙적인 제안을 내놓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은 무엇보다도 그들이 살려면 이러이러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누군가 여러분에게 “살려면, 정말 제대로 살려면 이러이러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귀담아 듣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무엇일까요? 그 내용은 이것입니다. “성전 재건”이 매우 시급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성전을 다시 짓는 문제라는 겁니다. 조금만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왜 학개는 예루살렘 성전 재건과 동시에 그 성전에서 드리는 성전 예배의 회복이 그렇게 중요하다고 여겼을까요?”입니다.
여기에 아주 중요한 신앙적인 문제가 담겨 있습니다. 잘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한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지난 몇 년간 코로나라는 엄청난 재난이 우리를 거쳐 지나갔습니다. 코로나뿐이 아닙니다. 그 밖에도 많은 좋지 않은 여건들로 인해 교회는 점점 어려워지고 있고, 우리의 신앙은 시들시들해져만 갑니다. 하지만 성경을 제가 보니 이럴 때 학개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성전 짓는 일을 제안했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프랑스 빠리 이 땅에 성전 하나를 지어야겠습니다. 성전을 지으려면 당장 큰돈이 필요합니다. 여러분이 가진 것을 모두 내놓으십시오. 통장에 갖고 있는 돈도 내놓고, 대출도 받아서 교회에 내놓으십시오. 자 어떻습니까? 아마도 이것은 무리한 요청일 것입니다. 학개가 백성들에게 요구한 것이 이런 무리를 해서라도 성전 건물을 짓자고 한 것일까요?
왜 성전을 재건해야 한다고 생각했을까요? 하나님이 지시하신 것이니까요?
학개의 입장을 보아야 합니다. 학개는 주어진 주변 환경들을 보았습니다. 주변 여건들을 보았습니다. 돌아온 유대사람들의 모습을 보니 먹고 사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흔히 말하는 경제적인 문제입니다. 사는 게 힘들어서 그렇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마음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과 점점 멀어지는 것만 같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하나님 신앙은 점점 뒤로 밀리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신앙이 내 삶에서 부차적인 일로 넘겨집니다. 주가 아니라 부입니다. 내 생각에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일을 하고 나서 시간이 남으면 해야 하는 것이 신앙생활인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오늘 우리가 아니라 학개 시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바벨론으로부터, 그리고 페르시아로부터 새로운 신앙을 가지고 온 사람들도 있었는데 ‘별 숭배 신앙’이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다. 늘 그렇지만 젊은 세대들은 늘 새로운 것, 화려한 것을 좋아합니다. 자신들의 선조들의 신앙은 왠지 모르게 구닥다리 같기만 한데, 화려한 페르시아의 문명의 혜택을 받은 세대들은 그들의 신앙도 고스란히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이것이 학개가 본 상황입니다. 모두가 길을 잃은 것처럼 보입니다. 잃어버린 신앙을 회복할 수 있는 것은 옛것이 좋은 것이니 옛날로 돌아가자는 단순한 선전 구호가 아닙니다. 학개가 봤을 때 유대 사람들의 모습은 “그림자를 사냥하는 사람들”처럼 보였습니다. 본질을 잃은 것이지요. 또 “공허한 것을 쫓느라 인생을 허비하는 사람들”처럼 보였습니다. 성전을 다시 짓는다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삶의 본질을 놓치고 허망한 그림자를 쫓아다니는 사람들을 회복시키는 일입니다. 삶의 구심점을 만드는 것입니다. 성전을 짓고, 그 안에서 드리는 성전 예배는 삶을 회복하는 그 구심점이 될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만나는 학개의 마음입니다.
-내 마음 안에 성전을 지어라
자, 학개가 유대 백성에게 성전을 지을 것을 독려한 것처럼, 우리는 우리에게, 우리 자신에게 성전을 지을 준비가 되어 있는지 물을 순간입니다. 어떻게 물어야 할까요?
여러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요?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삶입니다. 그것도 우리의 일상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성전을 지을 준비가 되어 있냐는 물음은 우리의 일상에 물어야 합니다. 일상은 참 귀한 것입니다. 왜인가 하면 우리는 일상의 삶을 통해 구원받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일상이란 것이 참 귀한 것이지만 우리는 일상 속에만 파묻혀 살면 길을 잃을 때가 많습니다. 일상에 코를 박고 살면 안된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보면, 수영을 처음 배울 때 정말 힘든 것은 팔젓기도 아니고, 발젓기도 아닙니다. 호흡입니다. 숨쉬기요. 참 이상하지요. 이렇게 살면서 쉬운 것이 숨쉬기인데, 우리의 영혼의 숨쉬기가 안됩니다. 쉽지가 않습니다. 왜 일까요? 일상의 호흡이 제대로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일상에도 호흡이 필요합니다. 제대로 숨쉬기입니다. 일상에서 제대로 숨을 쉰다는 것은 고개 들어 하늘을 보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물리적인 하늘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정말로 편안한 것은 우리의 호흡이 안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조금만 긴장하고 몸이 좋지 않으면 당장 호흡이 가빠집니다. 오늘 우리의 삶이 이토록 강퍅하고 거칠고 모진 이유는 우리의 영혼의 호흡 상태가 좋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전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학개가 백성들을 독려하여 지을 성전은 사실 실제 겉보기에는 형편없습니다. 당연히 이전 성전과 비교해서 보면 그렇습니다. 이전에 세워져 있다가 파괴되어버린 성전은 솔로몬이 지은 성전입니다. 이 솔로몬 성전의 화려함은 온 세상이 알 정도로 대단했습니다. 모든 보화와 보물이 이 솔로몬 성전으로 모였습니다. 그러나 그 성전은 지금 학개 시대의 이 사람들에게 없습니다. 이제 성전을 새로 지어야 합니다. 거친 나무로 제대로 다듬지 못한 채 얼기설기 지어야 하는 것이 지금 학개 시대의 현실입니다. 백성들의 경제적인 상황과 그 땅의 현실이 그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성전은 솔로몬 성전보다도 귀한 일을 해낼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속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서로 위로하고 보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앞서 우리 자신의 성전을 지을 준비가 되어 있는지 물었습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여러분의 마음속에 하나씩 성전을 지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 각자의 성전을 지음으로 우리의 영혼을 돌아볼 수 있는 장소를 만드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을 지으시기를 바랍니다.
누가복음 20장의 말씀에 보면 “사두개파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사두개파 사람들의 주된 주장, 이 사람들이 믿는 바는 ‘부활이 없다’고 믿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지독한 현실주의자들의 모습입니다. 눈앞에 보이는 것, 자신의 감각 기관으로 확인 가능한 것만이 진리인 셈입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 하나님은 죽은 하나님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이끌어 가심을 믿습니다. 보이지 않으니 없는 분이 아닙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