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평화의 길을 가는 이들
본문 : 이사야 2:1-5, 로마서13:11-14, 시편 122편, 마태복음 24:36-44
【이사야 2:1-5】
이것은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을 두고, 계시로 받은 말씀이다. 마지막 때에, 주님의 성전이 서 있는 산이 모든 산 가운데서 으뜸가는 산이 될 것이며, 모든 언덕보다 높이 솟을 것이니, 모든 민족이 물밀듯 그리로 모여들 것이다. 백성들이 오면서 이르기를 « 자, 가자. 우리 모두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의 하나님이 계신 성전으로 어서 올라가자.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님의 길을 가르치실 것이니, 주님께서 가르치시는 길을 따르자 » 할 것이다. 율법이 시온에서 나오며, 주님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 나온다. 주님께서 민족들 사이의 분쟁을 판결하시고, 뭇 백성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실 것이니, 그들이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나라와 나라가 칼을 들고 서로를 치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군사훈련도 하지 않을 것이다. 오너라, 야곱 족속아! 주님의 빛 가운데서 걸어가자!
【마태복음 24:36-44】
“그러나 그 날과 그 시각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이 아신다. 노아의 때와 같이, 이 인자가 올 때에도 그러할 것이다. 홍수 이전 시대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며 지냈다. 홍수가 나서 그들을 모두 휩쓸어 가기까지, 그들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였다. 인자가 올 때에도 그러할 것이다.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을 터이나,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두 여자가 맷돌을 갈고 있을 터이나,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그러므로 깨어 있어라. 너희는 너희 주님께서 어느 날에 오실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명심하여라. 집주인이 도둑이 밤 몇 시에 올지 알고 있으면, 그는 깨어 있어서, 도둑이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두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는 시각에 인자가 올 것이기 때문이다.”
-인사합시다.
주님의 평화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두에게 임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날씨가 많이 쌀쌀해졌습니다. 몸도 마음도 움츠러들기 쉬운 이 때입니다. 그러나 이 시간 우리는 주님을 예배하기 위해, 또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모였습니다.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이 시간 우리가 서로에게 인사를 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강림절의 시간 우리는?
오늘 우리는 강림절(대림, 대강)을 시작하였습니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강림절을 한 주, 한 주 맞이하면서 촛불을 하나씩 밝힙니다. 우리 현대인들은 촛불 하나의 위력을 잘 모르지요. 당연히 늘상 밝은 빛을 전기를 통해 마음껏 얻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옛 사람들은 촛불 하나의 위력을 잘 압니다. 어두운 방 안에 촛불 하나가 켜지면 어두워서 식별할 수 없었던 것들이 밝히 드러납니다.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것은 촛불 하나 내 마음에 밝히는 것과 비슷합니다. 빛이 우리에게 다가올수록 우리 마음의 어둠은 사라지는 법입니다.
이제 4주 동안 우리는 성탄을 기다리고자 합니다. 성탄은 산타할아버지가 오시는 날이 아니라 우리 주님 되시는 예수께서 우리에게 오시는 날이고 기다림으로 주님 오심을 준비하는 시간이 강림절입니다. 누군가를, 혹은 무엇인가를 기다린다는 것은 그리움이 가득한 일입니다. 이 기다림 속에는 절망과 좌절 속에서 찾은 희망 같은 것입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사람들은 기다림을 원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을 기다리는가? 주님이 오시면 우리는 반가워할까요?
예전 제 젊은 시절에- 청년 여러분, 제게도 젊은 시절이 있었답니다.- 친구들과 담소를 나누다가 함께 웃음을 터뜨린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어떤 누군가의 묘지명에 쓰인 글이라고 합니다. 그 문장은 “우물쭈물 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입니다. 조지 버나드 쇼 1938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가 자신의 묘비에 새겨달라고 말한 문장이라고 합니다. 그 시절에는 그저 ‘유쾌하고 멋스러운 묘비명이구나.’ 하고, 자신의 죽음마저도 저리도 해학이 가득한 묘비명으로 남길 수 있다는 사실에 멋스러움이 마음에 남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이 어느 날 갑자기 두려움이 가득한 말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습니다. 제 눈앞에서 누군가가 직접 말하는 진짜 말로 들리더라는 말입니다.
실생활에서도 그렇겠지만 신앙적인 부분, 우리 신앙의 삶에서도 우리는 주님을 믿는다고는 하지만 우물쭈물하기 일쑤입니다. 주님을 믿는다고는 하지만 실제로 주님이 내게 주님인지 아닌지 잘 모릅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주님으로 섬기는 삶을 살지 않기에 신앙이 실감이 나질 않습니다. 그렇다고 신앙을 버릴 수도 없습니다. 그야말로 우물쭈물입니다.
-이사야는 몽상가?
오늘 우리는 말씀 속에서 이사야가 꾸었던 꿈에 대해 살필 수 있습니다. 이 꿈은 자면서 꾸는 꿈이 아니라 살면서, 살아가면서 꾸는 꿈입니다. 하나님의 꿈이기도 하고, 이사야의 꿈이기도 한 그런 꿈입니다.
이사야가 활동하던 이 시기는 유다 나라 입장에서 본다면 정치적인 분위기가 뭔가 암울한 기운이 감도는 그런 시기였습니다. 왜냐하면 이웃나라인 북이스라엘이 당대 근동의 최고 군사력을 보유한 아시리아에 의해서 무너진 기원전 721년 전후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북이스라엘이 무너지고 난 후에 당연히 이사야가 속한 남 유다는 아시리아의 군사적 압박을 심하게 받았겠지요. 곧이어 닥쳐올 군사적인 위협이 뻔한 위협적인 상황과 시대가 이사야가 살던 시대입니다.
어떻게 보면 요즘 우리나라 한반도의 상황과 비슷합니다. 북한과 군사적으로 대립적인 태도가 첨예합니다. 북한은 바다에다가 미사일을 쏘아서 얼마든지 방향을 남한을 향할 수 있다고 으름장을 놓는 것 같습니다. 이미 핵개발에 성공한 이 미사일에는 소형 핵탄두를 실을 수 있을 정도로 무기를 만들었습니다. 남쪽의 어떤 정치인들은 우리도 당장 핵을 개발하자고, 군사력을 더 증강하자고 아우성칩니다.
이사야 시대도 그랬습니다. 안보 불안증으로 겁먹고 있었을 유대나라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이사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국가 위기의 순간에 이사야는 무슨 말을 했을까요? 2장 4절의 말씀을 다시 들어보십시오.
“그들이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나라와 나라가 칼을 들고 서로를 치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군사훈련도 하지 않을 것이다.”
이웃나라인 북이스라엘이 망했습니다. 강대한 군사력을 보유한 앗시리아의 힘에 무너져 내렸습니다. 이제 곧 앗시리아는 방향을 남 유다로 틀 것입니다. 위기가 곧 찾아올 것입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무기로 써야할 칼과 창을 대장간에서 녹여서 농사를 지을 호미도 만들고 쟁기도 만들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군사훈련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사야는 한가로운 사람이거나, 현실을 모르는 몽상가처럼 보입니다.
-실현되지 않은 예언
실제로 이사야의 이런 희망 가득한 메시지는 그 시점에서 볼 때 아무런 근거가 없었습니다. 이사야의 이런 예언은 실현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사야의 메시지가 선포되고 전쟁 위기로 불안한 백 이삼십 년이 흐른 뒤에 예루살렘은 새로운 제국 바벨론에 의해서 함락되었고 예루살렘 주민들은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 끌려갔습니다. 이사야의 희망은 여지없이 무너졌습니다.
그렇다면 이사야는 뭔가 헛것을 보고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들은 것일까요? 왜냐하면 예언이 성취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얼마든지 “당신의 예언은 틀렸소!”하고 이사야를 비난할 수 있지 않을까요?
언젠가 유튜브에 예언자를 자칭하는 어떤 사람의 영상을 보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아마도 알고리즘에 따라서 제게 뜬 것 같은데, 여러분도 비슷한 경험들이 있으실 겁니다. 이 사람, 자칭 예언자가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어느 날 얼마 후면 전쟁이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날 것이고, 지금 땅굴을 파서 이미 북한이 ‘전쟁 준비를 끝냈다’는 주장을 정말 하나도 주저함 없이 설파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때 믿는 사람들은 어떻게 행동하라는 황당무계한 소리였습니다. 요즘 시대는 그야말로 진짜 같은 가짜들이 득세하는 시대입니다. 특히나 신앙적으로 볼 때, 가짜들의 목소리가 더 위력이 쎄 보이는 시대입니다.
위대한 선지자들의 글을 읽는 우리들이 오해하지 말아야 할 사실은 선지자를 점쟁이 비슷한 사람으로 보면 안됩니다. 어떤 사업을 하면 성공할지, 어떤 주식을 사면 대박이 날지, 남북한이 언제 통일할지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점쟁이이지 선지자는 아닙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는 사람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들으려고 하지 않아도 그는 하나님의 뜻을 전해야만 합니다. 그는 미래에 벌어질 구체적인 일을 예측해서 말하는 게 아니라 시대를 분별하는 눈으로 하나님의 뜻을 품고 그 미래를 선포합니다. 120-30년이 흐른 뒤에 바벨론에 의해서 예루살렘이 파멸되었다고 해서 이사야의 설교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이사야가 선포한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할 때, 그리고 사람들이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실현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때를 가늠하지 못하는 사람과 세상의 일에만 일희일비하면서 마음이 쏠려있는 사람은 이사야의 예언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저는 이사야 보다 2천7백 년이 지난 시대를 사는 사람으로서 이사야의 이 선포를 하나님이 이사야에게 주신 말씀이라고, 즉 진리라고 믿습니다. 이사야가 바라보는 하나님의 때와 그 하나님이 행하실 일을 저도 이사야와 같은 시선을 가지려고 마음을 쓰면서 기다리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본문 4절이 정확하게 묘사했습니다. 이 구절을 읽을 때마다 저는 가슴이 뭉클합니다. 여러분도 똑같은 심정을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다시 들어보십시오. 이번에는 공동번역으로 읽겠습니다.
“그가 민족 간의 분쟁을 심판하시고 나라 사이의 분규를 조정하시리니, 나라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민족들은 칼을 들고 서로 싸우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군사 훈련도 하지 아니하리라.”
이사야서의 이 말씀에는 이사야의 꿈이 담겨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새로운 꿈을 꾸라고 주신 하나님의 꿈이기도 합니다. 모두가 전쟁의 위협감과 불안감으로 떨고 있을 때, 이런 시대 사람들의 마음은 모두가 날카로워지고, 거칠어질 때, 하나님이 꾸시는 꿈을 꾸는 하나님과 같이 꾸려는 사람입니다.
꼭 전쟁과 같은 혹독한 시대는 아니더라도 세상의 모습이 격한 시대일수록 사람의 감정은 메마르고 사람의 성정은 거칠고 모질어집니다. 사람도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치 건들이기만 해봐라.’라는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많은 것처럼 여겨지는 것은 우리가 사는 시대가 치열한 경쟁을 중심으로 삼는 아귀다툼의 시대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지금 우리는 개인적으로도 전쟁하듯이 삽니다. 삶을 전쟁터로 여깁니다. 늘 긴장 상태로 산다는 것은 고단한 일입니다. 군대를 가면 사격 훈련이라는 것을 합니다. 진짜로 총알을 장전하고 총을 쏘는 훈련입니다. 총을 실제로 쏜다는 것이 재밌게 느껴집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사격장에서는 구타를 해서라도 긴장 상태를 유지하게끔 합니다. 조금만 방심해도 사람의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기에 그렇습니다. 실제로 총을 쏘는 일 보다 긴장 상태를 유지시키는 일이 엄청난 압박감으로 작용합니다. 그런 긴장 상태가 계속되면 사람이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은 이런 긴장 상태를 유지하는 방식을 택합니다. 우리 손에 들린 칼과 창을 내려놓으면 불안해서 견디지 못합니다. 예를 들면, 돈이 없으면 무시당하고 불행하고 불안하다 여기니 모든 삶을 움직이는 동력이 돈이 되어버립니다. 또한 사람 사이의 관계가 거칠다보니 상대에게 따뜻하고 편안함을 얻고 위로를 느끼기 보다는 ‘저 사람이 나를 이용해 먹는 구나’하는 긴장된 마음으로 상대를 대하게 됩니다.
-평화를 연습하라
그러니 어떻게 할까요? 남들이 그러니, 세상이 그러하니 나도 그렇다는 말은 신앙적이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 잊어버렸던 무엇인가를 끄집어내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은 묻어두고 방치했던 그 무엇입니다. 오늘 이사야의 말씀에 비추어 보면 이런 것입니다. ‘평화를 연습하는 일’입니다. 모두가 칼을 들었습니다. 모두가 창을 들고 생활의 장으로 나섭니다. 자신을 지킬 도구가 그것이라고 믿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이 도구는 남을 죽이거나 상하게 할 뿐입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있는 칼과 창을 녹여서 나와 남을 살릴 수 있는 농사를 지을 도구를 만드는 일을 이사야는 우리에게 꿈꾸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꿈이라고 말합니다.
지난 주간 정지아 소설가의 <아버지의 해방 일지>라는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이 소설의 첫 문장이 “아버지가 죽었다.”라고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 아버지는 어떤 분인가 하면 우리나라 해방 전후 시절에 빨치산이 되어 전쟁 후 ‘좌익처단법’에 의해 오랜 시간동안 사상범으로 감옥살이를 해야 했던 그런 분입니다. 좌익 우익 대립이 극렬하던 시대의 희생자인 셈이죠. 이 아버지는 감옥에서 나온 후에도 혁명가로서의 꿈을 잃지 않고 완고하리만치 사회주의자로서의 꿈을 품고 살았는데, 하지만 실제 생활에서는 세상일도 서툴고, 잘 모르고, 농사일도 글로만 아는 무능하기 그지없는 그런 아버지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아버지는 남에게 속아서 손해 보는 일들도 부지기수였는데, 가족들의 핀잔이 있을 때마다 아버지가 뱉는 말씀은 “사램이 오죽허면 글겄냐?” 전라도 사투리로 그 상황을 받아넘기는 삶이었습니다.
난처한 자신의 상황을 넘기기 위해 내뱉는 말이었겠죠. 그런데 이 말이 이상하게도 마음에 남았습니다. “사람이 오죽하면 그러겠냐”는 말이 나를 위로하는 듯 따뜻하게 들렸습니다. 그리고 사람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가 담긴 말처럼 들렸습니다. 누군가를 지적하고 탓하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실수하고 잘못을 저지른 상대에게 “그럴 수도 있었겠구나.” 위로하고 신뢰하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없는 말입니다.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의 비유의 둘째 아들도 역시 자신의 잘못을 지적하고 혼내키는 아버지보다는 자신을 신뢰하고 품어주는 아버지에 대한 믿음의 기억이 있었기에 돌아갈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들과의 평화를 연습해야 합니다. 기억 속에 묻어둔 하나님의 마음을 꺼내서 먼지를 털어내고, 깨끗하게 광이 나도록 닦아야 합니다. 이것이 전쟁의 공포 가운데서도 찾아낸 이사야의 평화 연습입니다.
-주님이 오시면
교회는 주님이 오시는 날을 4주간이나 만들어 놓았습니다. 무엇을 할까요? 무엇을 기도할까요? 오늘 우리는 가장 먼저 우리가 주님을 기다리고 있는지, 아닌지를 먼저 살펴보아야 합니다. 세상이 기다리는 성탄이 아니라 내가 준비하는 성탄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나서는 우리에게 “이 시간을 무엇으로 채울 것인지”에 대한 결단의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드는 일”을 선포했습니다. 우리 역시 이사야와 같은 하나님의 꿈을 마음에 품기를 바랍니다.
-말씀 맺습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여러분, 주님을 만나 뵙기 원하십니까? 그분을 만나면 무슨 말씀을 듣고 싶습니까? 또 무엇을 구하고 싶습니까?
마가복음 10장에 보면, 여리고 길 가에 앉아 있던 눈먼 거지 바디매오는 나사렛 예수가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는 “다윗의 자손 예수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하고 외쳤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꾸짖었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주님께서 발걸음을 멈추고 그를 부르시자, 그는 겉옷을 벗어 던지고 주님께로 나아갔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바라느냐?”고 묻자 그는 즉시 “선생님, 내가 다시 볼 수 있게 하여 주십시오” 하고 대답합니다. 여기서 즉시라는 단어를 가벼이 넘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바디매오는 ‘주님을 만나면 꼭 해야지’하고 주님께 꼭 드릴 말씀 하나를 마음에 가지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자, 그의 눈이 밝아졌습니다.
오늘 우리는 바디매오를 부러워 해야 하지 않을까요. 병 고침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꿈에도 잊지 못할 소망 하나를 간직하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느닷없이 이런 말씀을 드리는 까닭은 결국 인생은 눈 뜨기를 배우는 과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돌아보니 발자욱마다 은총’이었듯이 오늘 우리의 삶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기적들 사이를 걷는 우리임을 깨닫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평화의 길을 선택하고 용감히 걸어 나가는 여러분의 강림절의 시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