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
본문 : 이사야 11:1-10, 로마서 15:4-13, 시편 72:1-7, 18-19, 마태복음 3:1-12
로마서 15:4-13】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것은, 우리에게 교훈을 주려고 한 것이며, 성경이 주는 인내와 위로로써, 우리로 하여금 소망을 가지게 하려고 한 것입니다. 인내심과 위로를 주시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같은 생각을 품게 하시고,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해주시기를 빕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려고 여러분을 받아들이신 것과 같이, 여러분도 서로 받아들이십시오. 내가 말하는 것은 이러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드러내시려고 할례를 받은 사람의 종이 되셨으니, 그것은 하나님께서 조상에게 주신 약속들을 확증하시고, 이방 사람들도 긍휼히 여기심을 받아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시려고 한 것입니다. 기록된 바 “그러므로 내가 이방 사람들 가운데서 주님께 찬양을 드리며, 주님의 이름을 찬미합니다” 한 것과 같습니다. 또 “이방 사람들아, 주님의 백성과 함께 즐거워하여라” 하였으며, 또 “모든 이방 사람들은 주님을 찬양하여라. 모든 백성들아, 주님을 찬양하여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사야가 말하기를 “이새의 뿌리에서 싹이 나서 이방 사람을 다스릴 이가 일어날 것이니, 이방 사람은 그에게 소망을 둘 것이다” 하였습니다.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께서, 믿음에서 오는 모든 기쁨과 평화를 여러분에게 충만하게 주셔서,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여러분에게 차고 넘치기를 바랍니다.
【마태복음 3:1-12】
그 무렵에 세례자 요한이 나타나서, 유대 광야에서 선포하여 말하기를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였다. 이 사람을 두고 예언자 이사야는 이렇게 말하였다. «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예비하고, 그의 길을 곧게 하여라.' » 요한은 낙타 털 옷을 입고, 허리에는 가죽 띠를 띠었다. 그의 식물은 메뚜기와 들꿀이었다. 그 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부근 사람들이 다 요한에게로 나아가서, 자기들의 죄를 자백하며,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 요한은 많은 바리새파 사람과 사두개파 사람들이 세례를 받으러 오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말하였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닥쳐올 징벌을 피하라고 일러주더냐? 회개에 알맞은 열매를 맺어라. 그리고 너희는 속으로 주제넘게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다’ 하고 말할 생각을 하지 말아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실 수 있다. 도끼를 이미 나무 뿌리에 갖다 놓았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다 찍어서, 불 속에 던지실 것이다. 나는 너희를 회개시키려고 물로 세례를 준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더 능력이 있는 분이시다. 나는 그의 신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다. 그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그는 손에 키를 들고 있으니, 타작마당을 깨끗이 하여,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이다.”
-인사합시다.
주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두 반갑습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서로에게 인사 나누겠습니다. 바깥의 날씨는 차갑지만 따뜻한 마음 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날씨가 차갑습니다. 코로나가 다시 유행을 하고 있다는 뉴스도 들려옵니다. 모두 건강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주님 오심을 기다리는 강림절 제2주일 말씀을 기쁨으로, 차분히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쁘다는 감정과 차분하다는 감정이 잘 어울리지 않는 것 같지만 이 두 가지가 우리에게 필요한 절기입니다. 성도 여러분, 마음속에 촛불 하나 더 밝히셨는지요?
우리나라 축구 대표팀이 월드컵에서 극적으로 16강에 진출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선수들이 열정을 쏟아 붓는 것을 보아도 그렇고, 온 세상 사람들이 ‘축구’라는 스포츠에 마음을 모으고, 기대하는 것을 보고, 열정을 투여하는 것을 보면 스포츠라는 것이 참으로 대단해 보입니다. 근데 어떻게 보면 축구라는 스포츠를 보면요 이렇습니다. 건장하고, 체력 좋고, 빠르고, 발로 공을 잘 다루는 젊은이 22명이 운동장에서 공 하나를 놓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놀이에 불과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가끔은 웃겨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것을 지켜보면서 기쁨을 얻기도 하고, 희망을 갖기도 하는 것을 보면 사람은 ‘자신의 열정을 투여할 곳을 찾고, 무엇에선가 희망을 발견하려고 하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사람들의 희망 바라기는 인류가 사라지지 않는 한 계속될 것입니다.
-로마 교우들에게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희망 찾기란 이런 것입니다.
오늘 로마서 말씀의 거의 마지막 부분을 읽었습니다. 모두가 아시다시피 로마서라는 성경말씀은 바울 사도께서 로마에서 교회를 이루는 그리스도인에게 보낸 편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로마서는 놀랄만한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사도 바울이 한 번도 로마를 가본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바울의 모든 편지, 갈라디아서, 데살로니가서, 고린도서 등등 이전에 바울의 편지는 이미 방문했던 교회에다가 보냈던 편지입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하지요. 바울 사도께서 자신이 세운 교회에다가 편지를 쓰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적어도 방문했던 곳이라면 그 방문했던 교회 교인들을 당연히 잘 알지요. 교회의 사정, 교회가 처한 상황, 교인들의 형편, 신앙의 상태… 당연히 바울이 훤히 아는 교회입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자신이 한 번도 가본 적이 없고, 만난 적도 없는 교회 교인들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왜요? 중요한 것은 이렇습니다. 이 점입니다.
바울은 3차에 걸쳐서 세 번이나 선교 여행을 마무리했습니다. 그 즈음 고린도 교회에서 바울은 조용히 지낼 시간이 생겼습니다. 그 시간에 무엇을 했을까요? 휴식도 필요하고 건강 회복도 중요하겠지만 무엇보다 자신 스스로를 정리해야지요. 삶도, 주변도 정리해야할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또 다른 계획을 세웁니다.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려는 계획을 세웁니다. 신약성경에서 말하는 땅 끝이란 지중해 바다 서편 오늘날 스페인 바다 너머입니다. 이곳이 세상의 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쨌든 바울 사도는 로마에 들렀다가 스페인까지 가서 전도할 작정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바울을 미워하거나 비방하는 사람들이 로마 교회에 있다는 사실을 바울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신앙을 총 정리할 필요를 느꼈습니다. 로마 교회 교인들이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자신의 신앙과 신학을 써서 보내게 됩니다. 그렇게 작성한 편지가 로마서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 기독교가 믿는 교리들의 대부분이 바로 바울의 로마서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역사하심이란 참으로 대단한 일입니다. 바울이 로마서에 편지를 쓰게 된 이유는 어쩌면 인간적인 불편함이 그 속에 묻어있을 수도 있겠습니다. 바울 입장에서 “내가 무작정 로마 교회로 가면 난처한 일이 생길 수도 있겠구나, 혹은 나를 지지하는 교인들과 반대하는 교인들이 분열이 생겨 로마 교회에 피해가 갈수도 있겠구나.” 사람의 성정이라면 당연히 이런 마음이 들겠지요. 그래서 자신의 신앙을 잘 소개하려고 로마에 써 보낸 단순한 편지가 서양철학과 역사에 큰 영향을 끼치고, 우리가 믿는 바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지금 우리가 하는 일들이 하찮은 일이란 하나도 없는 법입니다. 지금 우리 교회가 세상적인 눈으로만 보면 작은 규모에다가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교회지만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와 의지를 알아주시고 들어주시면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크신 역사가 드러나는 것에 우리는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 ‘이곳 파리 땅에 참으로 아름다운 교회가 있었다.’ 그러니 이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을 지니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성경학자는 ‘로마서는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유언과도 같다’고 평가합니다. 실제로 로마에서 정말로 목숨을 잃게 될 수도 있겠지만 주님의 일이라면, 죽는다 할지라도 내게 맡겨진 소명이라면 가야겠지요.
-서로 받아들이십시오.
그렇다면 사도바울이 로마교회 교인들에게 부탁하고 당부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7절에 그 답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려고 여러분을 받아들이신 것과 같이, 여러분도 서로 받아들이십시오.”(7절) 사도 바울께서 로마 교회를 위해 주는 처방의 말씀은 “서로 받아들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참으로 열심히 살아가지만 그래서 돈도 벌고, 공부도 하고, 얻을 것, 누릴 것을 채워나가지만 그 가운데 충분히 흡족하게 가져 보지 못한 경험이 있습니다. ‘받아들여짐의 경험’입니다. 누군가로부터 충분히 받아들여졌다는 경험을 가진 사람은 내면이 풍족한 사람입니다. 진짜 부자입니다. 그렇기에 세상살이 풍랑이 일어도 거뜬히 견딜 수 있는 사람입니다. 사람의 평생 동안 꾸준하게 -마치 화수분처럼- 누릴 수 있는 진정한 행복감은 여기서 판가름 난다고 합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어린 시절 충분히 사랑받고 자란 아이와 그렇지 못한 아이입니다. 충분히 사랑받았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좋은 물질적 조건이 아닙니다. 충분히 받아들여진 경험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어떤 신학자는 인간이 구원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나를 받아들이셨다는 사실을 내가 충분히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하나님 안에서의 충분함, 충만감은 우리 생의 풍성한 자양분이 됩니다. 하지만 가끔 우리는 이 영원한 샘물을 잊고 살지요. 메말라 목마름을 경험합니다.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절기란 이것을 다시 상기하는 일입니다. ‘내게, 내 곁에 주님이 계셨구나’하고 깨닫는 오늘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받아들이는 사람
하지만 여러분, 내가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알기 전에 주님이 나를 받아들이셨음이 전제가 됩니다. 우리는 받아들이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렇기에 교회는 받아들임을 연습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아담이 죄를 짓고 나서 한 일이 뭔지 아시지요?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여 숨었습니다. 아담이 나무 뒤에 숨어 있을 때 하나님께서 물으셨습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그때 아담은 “저는 벗은 몸인 것이 두려워서 숨었습니다.”(창3:10b)라고 대답합니다. ‘벗었다, 두렵다, 숨었다’, 이 세 단어는 진정한 한 세트입니다. 우리 삶의 실상을 제대로 요약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벗은 몸이란 여러분, 연약함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을 남들에게 드러내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남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 즉 우리 시대의 연약함은 바로 실패한 인생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연약한 이들을 사정없이 물어뜯는 세상이기에 우리는 강한 척 해야 할 때가 많습니다. 세상에서 상대하기 싫을 만큼 거칠게 구는 사람들 많이 만나 보셨지요? 저도 그런 사람 제법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 거침이 불편하게 느껴지지만 한편으로는 상처 입은 사람일수록 거칠게 군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상처 입은 짐승이 으르렁대는 모습을 보십시오. 상처가 큰 사람일수록 거칠게 구는 법입니다. 사람이란 이런 상처를 자꾸 겪다 보면 나중에는 실체를 알 수 없는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마련입니다. 실패, 거절, 버림받음, 인정받지 못함 등이 우리를 괴롭힙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꾸만 자기를 치장하려 듭니다. 생의 방향도 다른 이들의 칭찬을 목적으로 살아갑니다.
그 어느 때보다 풍요로운 물질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지만 오늘 이 시대를 ‘궁핍한 시대’라고 부르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아모스 선지자의 혜안이 여전히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배고파 하겠지만, 그것은 밥이 없어서 겪는 배고픔이 아니다. 사람들이 목말라 하겠지만, 그것은 물이 없어서 겪는 목마름이 아니다. 주의 말씀을 듣지 못하여서, 사람들이 굶주리고 목말라 할 것이다.”(암8:11b) 이 시대 이런 희망 하나쯤은 품을 수 있어야겠습니다. 받아들이는 교회입니다.
-광야의 사람이 필요합니다.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일의 두 번째는 광야의 사람을 맞아들이는 일입니다. 오늘 복음서 말씀은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칩니다. 주님의 길을 위해 광야의 사람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한 주, 한 달, 한 해라는 시간의 단위가 있는 것은 인간의 삶에 마디도 같은 것입니다. 식물의 줄기에는 마디가 있습니다. 그 마디에 이르면 성장이 좀 멈추는 듯 여겨집니다. 하지만 마디가 생겨야 더 튼튼하게 성장할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마디가 없이 성장하면 풀처럼 꺾이고 마는 것이지요. 사람에게도 마디가 필요합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 부끄러운 일이지만 예전 제 대학시절 기숙사에 머물 때였습니다. 봄 학기에 사용한 이부자리를 여름학기동안 기숙사 창고에다가 대충 싸두었다가 가을학기를 맞으며 꺼내서 덮었습니다. 그날 밤 제게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밤새 긁적였습니다.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옴인지 벼룩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 일로 밤새 긁느라 한잠도 못자고 다음날 병원에 다녔던 기억이 납니다. 사람의 일에도 환기가 필요하지요. 그 이불을 깨끗이 세탁하고 잘 말리는 일이 필요하듯이 우리의 영혼의 환기가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선다고 표현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세례자 요한과 같은 광야의 사람은 영혼의 환기를 요구하는 사람입니다. “당신 정말 잘살고 있습니까?” 하고 물어주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의 목소리, 이 외침을 통해서 우리는 번쩍 각성하게 되지요.
힘겨운 날, 바쁘게만 보내는 날들이 계속되면 우리의 양심도, 감성도, 신앙적 결의도 희미해지는 것이 당연합니다.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모른 채 세상 바람에 이리저리 밀려다니는 것은 아닌지요?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우리는 무엇인가에 사로잡히고 맙니다. 우리가 유혹에 넘어가지 않으려면 가끔은 우리를 타격하는 말과 만나야 합니다. 우리의 영혼의 정수리를 내리치는 말, 우리의 양심을 뒤흔드는 말, 위선을 벗겨버리는 말, 나약함을 질타하는 말이 필요합니다. 이 말을 멀리 두려고 할 때 우리의 영혼의 추락이 시작됩니다.
세례자 요한은 마지막 예언자로 불렸던 사람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세상에서 적당히 눈감고 살면서 ‘그래도 이만하면 내가 괜찮은 사람이지, 신앙인이지’ 생각하는 알량한 자기 위안을 가차 없이 때립니다. 그래서 그들은 위험한 사람으로 치부됩니다. 인기도 없습니다. 인기에 영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을 예언자라고 부르는 까닭이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열정에 사로잡혀 외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광야의 사람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본 실상은 생명을 풍요롭게 하고, 사람들을 속박에서 풀어주어야 할 종교가 사람들을 노예로 만드는 것을 보고 그는 분노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이 시대에 나타난다면 오늘날 교회들이 야단을 맞을까요? 아니면 칭찬을 받을까요? 당장 저부터 종아리를 맞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아마도 우리는 엄청 불편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압니다. 그런 이들이야말로 주님 오실 길을 닦는 사람임을 말입니다. 그는 굽은 길을 곧게 하고, 골짜기는 메우고, 산과 언덕은 평평하게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힌 이들은 자기 이익에 따라 처신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자유롭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요구하는 것
세례자 요한은 그들에게 두 가지를 요구합니다.
첫째는 회개에 알맞은 열매를 맺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신약성경이 말하는 회개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메타노이아, 즉 삶을 바꾸라, changer de vie는 말입니다. 내가 살아가는 삶의 방식, 삶의 태도, 내가 의지하는 것들. 이 모든 것을 바꾸는 것이 회개란 뜻입니다. 회개의 말은 난무하지만 회개의 열매가 없는 세상은 여전합니다. 요한의 요구하는 바는 네가 삶의 방식과 태도를 바꾸어 변화된 결과를 주님 오시는 길 앞에 내놓으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속으로 주제넘게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다’ 하고 말할 생각을 품지 말아야 합니다. 이 말은 자신들은 남들보다 우월한 선택받은 이들이라는 헛된 자부심에 사로잡혀 다른 이들을 낮춰보는 일을 말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눈에 이런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은 참된 하나님의 사람들로 보이지 않았겠지요. 이들의 신앙적인 자기 확신이 때로는 교만으로 나타나고, 더 나아가 타인에 대한 혐오와 폭력으로 삶을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는 모습은 전혀 예수와 닮지 않았는데, 예수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고 자부하는 이들을 보는 것처럼 고통스럽기도 하고, 슬픈 일이 또 있을까요?
-말씀 맺기
말씀을 맺겠습니다. ‘요한 크리소스톰’이라는 4세기 콘스탄티노플 주교였고, 유명한 설교가였던 분이 있습니다. 이 분이 설교를 얼마나 잘했든지 <황금의 입>이란 별명을 얻었던 분이 있습니다. 이분의 말씀 가운데 ‘회개하는 법’이라는 글이 있는데, 그 중에 눈에 띄는 한 단락이 있습니다.
“회개란 다른 사람들의 잘못을 잊는 것”입니다. 다른 이들에 대한 악감정이 일어나더라도 그 감정에 사로잡히지 말고, 죄지은 이들을 용서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우리의 가장 중요한 소명은 이웃이 하나님과 연결되도록 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와 이웃이, 우리와 세상이 평화를 이루도록 하는 일. 이것은 하나님이 가장 바라시는 바이고, 예수께서 이 땅 위에 오시는 이유입니다. 여러분이 이 일의 협조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광야에 들어가 40일 동안 기도하셨고, 또 분주한 생활 가운데서도 고요한 곳을 향해 기도하셨지만, 예수님의 삶의 자리는 사람들 한 복판이었습니다. 사람들의 욕망이 바글거리고, 비열한 음모와 거짓 술수가 판을 치기도 하고, 사람들의 희노애락의 온갖 감정들이 시시때때로 만나는 세상 한 복판, 바로 그곳이 예수님의 마음이 머문 곳입니다. 그 진흙탕 같은 그곳에서 예수님은 가장 아름다운 삶을 사람들에게 열어 보이셨고, 또 그들을 하늘의 길로 인도하셨던 것입니다. 이곳이 우리가 사는 세상입니다. 우리도 이 세상에 살아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흙탕물에 같이 더러워지시겠습니까?
주님을 온 몸과 마음으로 맞아들이십시오. 주님의 용서와 도우심을 구하십시오. 주님과 만나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가장 시급한 일입니다. 우리의 영혼의 심지에도 하늘의 불꽃이 타올라야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 주시는 이 소망이 다시 한번 우리의 지친 삶을 일으켜 세우는 삶의 묘약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