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임마누엘
본문 : 이사야 7:10-16, 로마서 1:1-7, 시편 80:1-7, 17-19, 마태복음 1:18-25
【이사야 7:10-16】
주님께서 아하스에게 다시 말씀하셨다. « 너는 주 너의 하나님에게 징조를 보여 달라고 부탁하여라. 저 깊은 곳 스올에 있는 것이든, 저 위 높은 곳에 있는 것이든, 무엇이든지 보여 달라고 하여라. » 아하스가 대답하였다. « 아닙니다. 저는 징조를 구하지도 않고, 주님을 시험하지도 않겠습니다. » 그 때에 이사야가 말하였다. « 다윗 왕실은 들으십시오. 다윗 왕실은 백성의 인내를 시험한 것만으로는 부족하여, 이제 하나님의 인내까지 시험해야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주님께서 친히 다윗 왕실에 한 징조를 주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며, 그가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 아이가 잘못된 것을 거절하고 옳은 것을 선택할 나이가 될 때에, 그 아이는 버터와 꿀을 먹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아이가 잘못된 것을 거절하고 옳은 것을 선택할 나이가 되기 전에, 임금님께서 미워하시는 저 두 왕의 땅이 황무지가 될 것입니다.
마태복음 1:18-25】
예수 그리스도의 태어나심은 이러하다.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나서,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서 약혼자에게 부끄러움을 주지 않으려고, 가만히 파혼하려 하였다. 요셉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주님의 천사가 꿈에 그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네 아내로 맞아 들여라. 그 태중에 있는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것이니, 너는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 이 모든 일이 일어난 것은, 주님께서 예언자를 시켜서 이르시기를, «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할 것이다 » 하신 말씀을 이루려고 하신 것이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요셉은 잠에서 깨어 일어나서, 주님의 천사가 말한 대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그러나 아들을 낳을 때까지는 아내와 잠자리를 같이하지 않았다. 아들이 태어나니, 요셉은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
-인사합시다
주안에서 사랑하는 파리중앙교회 성도 여러분, 거룩한 주일이자 강림절 4주일입니다. 이제 다음 주일을 성탄주일로 맞이하면서 한 해를 마감하게 됩니다. 말씀을 나누기 전에 서로에게 인사를 전해 주시기 바랍니다. 모두 반갑습니다. 날씨가 아주 춥습니다.
-우리네 모습
성도 여러분, 요즘 어떠십니까? 예전에 대통령 선거에 나섰던 어떤 후보가 토론회에 나와서 “살림살이가 나아지셨습니까?”하고 물었던 기억이 납니다. 우리도 서로 물어야겠지요. “어떠십니까?”
세상에서 불길한 소문들이 들려옵니다. 물가는 오르고, 경제가 안 좋습니다. 새해부터 당장 전기 요금, 교통비가 전례 없이 많이 오를 것이라고 말하는데, 걱정 근심거리가 한 두가지가 아닐 것입니다. 당장 우리 눈앞에는 많은 일들이 벌어집니다. 처리해야할 일, 해결해야할 일이 우리 눈앞에 산더미 같습니다. 저는 이 시대를 바라보면서 여러분과 똑같은 위기감을 느낍니다. 당장 우리네 살림살이, 형편의 어려움. 성도 중 누군가는 극단의 어려움에 떨어지지 않을까? 이런 고민을 합니다. 이러다보면 기도도 쉽지 않고, 책 한권 집중해서 읽기 어렵고, 근심과 걱정을 잔뜩 품고 잠들게 되는 게 보통 우리들의 모습일 것입니다. 한편으로 저는 고단한 현실에 좌절로 하루를 마감하지 않고, 미소와 감사로 하루를 마감하는 일에도 관심을 가지려고 신경을 씁니다. 여러분도 그러시죠?
눈앞의 일들의 고단함을 견딜 수 있는 것을 ‘저 너머’를 바라보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나그네는 해가 지기 전에 자신의 고단함을 쉬게 할 수 있는 ‘저 너머’의 누군가의 집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을 보며 희망을 얻습니다. 수험생은 합격이라는 ‘저 너머의 불빛’을 보며 힘든 하루를 이겨냅니다.
여러분은 무엇으로 하루를 견디고, 일 년을 살아오셨습니까? 저는 우리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눈앞의 현실을 살지만 현실에 붙잡히고 매인 사람이 아니라 저 너머를 바라보며 사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땅의 사람이 아니라 하늘의 사람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주 하나님께로 우리의 마음을 들어 올릴 때 하나님의 바람이 불어옵니다. 이 바람이 하는 역할은 무엇일까요? 내 영혼을 환기시킵니다.
구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영’, 즉 성령을 ‘바람’을 뜻하는 ‘루아흐’라는 단어와 같이 사용했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바람’입니다. 문득 갑자기 왜 바람이라고 표현했을까?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상상을 해보자면 유럽에 사는 우리도 여름마다 비슷한 경험합니다. 북아프리카의 뜨거운 공기가 지중해 바다를 건너 넘어옵니다. 그러면 기온이 40도를 넘나듭니다. 뜨거운 공기가 온 대지를 덮고 한 공간에 갇힙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면 꽉 막혔던 뜨거운 열기가 순식간에 사라집니다. 그리고 죽은 것만 같았던 대지의 풀들이 일어납니다. 이 모습을 보면서 세상 만물을 깨어나게 하는 역할을 하시는 하나님의 영이라고 생각한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언제나 새롭습니다. 그런데 때로는 하나님은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던 상식, 생각의 습관, 관습을 깨뜨리면서 우리에게 오십니다.
-마태가 소개하는 배경
오늘 마태복음에서 읽은 예수님의 탄생 전 이야기를 한번 보십시오. 성경 안에는 족보가 등장하는 곳이 여러 곳이 있습니다. 그 중에 마태복음은 참 특이하게도 첫 장 첫 구절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는 이러하다”고 시작합니다. ‘누구는 누구를 낳고’라는 구절이 계속 이어집니다. 누군지 알 수도 없는 낯선 이름을 가진 이들이 반복되지요. 어떤 누군가는 농담 삼아 마태복음이 이렇게 족보로 시작하지 않았다면 사람들이 훨씬 많이 성경을 읽었을 것이라고 농담합니다. 이렇게 족보가 계속되다가 “아브라함으로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요, 다윗으로부터 바빌론에 끌려갈 때까지 열네 대요, 바빌론으로 끌려간 때로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이다.”(1:17) 라고 끝이 납니다. 사실 이 족보는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요람이 웃시야를 낳았다고 되어 있지만 이스라엘 역사서에서 사실은 요람과 웃시야 사이에 (아하시아-요아스-아마샤)의 3대가 생략되어 있습니다. 14대-14대-14대 라는 숫자에 맞추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14는 완전수인 7의 재수입니다. 마태가 그런 생략을 해서라도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아브라함부터임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구원사의 여정이 ‘예수 그리스도’에서 정점을 이룬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요셉을 소개합니다
그리고 이제 오늘 본문입니다. 18절부터입니다. ‘하나님의 상식 깨기’는 오늘 읽은 요셉의 이야기에 담겨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동정녀 마리아의 아들인 예수가 어떻게 요셉의 아들이 되어 다윗의 족보에 속하게 되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여기에 얽힌 신학적 논의는 실로 다양합니다. 다만 우리는 ‘요셉’이라는 이름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아는 또 다른 요셉이 있지요? 구약성경의 야곱의 아들 요셉입니다. 이 요셉이 형들의 미움을 사게 되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바로 꿈 이야기입니다. ‘해와 달과 별 11개가 자신에게 절을 하더라, 내가 묶은 볏단을 향해 형들이 묶은 볏단이 절을 하더라.’ 이런 꿈쟁이 요셉이 형제들에게 팔려 에집트에 내려갔다가 바로의 호감을 사 중용되었던 이야기를 우리는 잘 알지요. 그런데 야곱의 가족이 기근을 피해서 살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요셉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참으로 이렇게 묘합니다. 그래서 창세기 마지막은 요셉의 죽음과 장례 이야기로 끝이 나고, 출애굽기 첫 이야기는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난 이야기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요셉은 옛 세계와 새로운 세계의 연결고리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슨 역할을 할까요? 그는 주님 오시기 전과 후를 이어주는 연결고리입니다. 교회 역사에서 요셉은 오랫동안 중요 인물로 취급되지 못했습니다. 서양 미술사에서도 그는 늘 나이 많은 노인의 모습으로 형상화됩니다. 늘 영원한 젊음을 간직한 것처럼 묘사되는 마리아와는 대조적입니다.
-참으로 의로운 사람 요셉
그런데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마리아가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던 것입니다. 누가복음은 마리아가 어떻게 잉태되었는지를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지만 마태는 일체 그런 이야기 없이, 그야말로 다짜고자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고 이야기합니다. 이 대목은 많은 사람들을 당혹스럽게 합니다.
의로운 사람 요셉, 마리아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때 그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그 심정이 쓰라렸겠지요. 겪어본 사람이 아니면 알 수 없을 겁니다. 배신감에 치를 떨었을까요? 그러나 그는 자기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습니다. 마태는 그가 “약혼자에게 부끄러움을 주지 않으려고, 가만히 파혼하려 하였다”고 말합니다. ‘부끄러움을 주지 않으려고’라는 구절과 ‘가만히’라는 단어가 요셉이라는 사람을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그는 철저히 타자 중심적 사고를 하는 사람입니다. 요즘 이런 사람은 참 낮은 평가를 받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하나님이 드러내시는 의로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마음이 새로운 세상으로 넘어가는 디딤돌이 됩니다.
-임마누엘
구약의 요셉은 형들에게 황당한 자기의 꿈 이야기를 들려줘서 미움을 샀습니다. 그렇지요? 그런데 그에 못지않게 황당한 사건이 마리아의 약혼자 요셉에게 나타났습니다. 꿈입니다. 주님의 천사가 꿈에 요셉에게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라고 합니다. 마리아의 태중에 있는 아이는 성령으로 잉태되었고, 머지않아 아들을 낳게 될 텐데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일러주었습니다. 예수의 이름 뜻은 ‘주께서 구원하신다’라는 뜻입니다. 천사는 그 아이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마태는 이 일이 하나님의 구원사 속에서 일어난 일임을 입증하기 위해 이사야서를 인용합니다.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할 것이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예수는 곧 임마누엘이십니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 곧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입니다.
-가장 귀한 선물이신 주님
자, 그렇다면 성경에서 증언하는 이런 이야기들, 어렵고 힘든 사건들을 통해서 궁금한 것에 도달하게 됩니다. “왜 임마누엘이신 예수님은 오시는가?” 입니다. 왜 하나님은 오래 전 예언자들이 말했던 것을 이루시는 것일까? 정말 단순하고 소박한 질문이지만 정말로 중요하고 근본적인 질문일 것입니다. 왜 오시는가? 입니다.
20세기 최고의 신학자라고 알려진 ‘칼 바르트’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이 분이 쓰신 ‘로마서 주석’이라는 책이 나오자 사람들은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어린이들이 노는 평온한 놀이터에 폭탄이 떨어진 것 같다.”고 표현했습니다. 안온하고 평온한 목사들, 신학자들에게 폭탄과 같은 충격이 주어졌다는 말입니다.
이분이 1961년 미국의 시카고 대학에 초청 교수로 한 학기를 지내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지나 그의 마지막 강의가 있던 날 신학대학의 학장은 청중들에게 “바르트 박사가 건강도 여의치 않고 몹시 피곤한 가운데 있습니다. 어쩌면 그는 여러분의 질문을 받고 싶어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 그건 그에게 너무 큰 부담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러고는 말했습니다. “대신 제가 우리 모두를 대표해서 한 가지만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학장은 그 저명한 신학자를 향해서 질문을 던졌습니다. “당신이 얻은 그 수많은 신학적 통찰 가운데서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이미 수십 권의 책을 써낸 노대가에게 주어진 가장 단순하지만 최고의 질문이었습니다. 학생들은 그가 하는 말을 한 글자도 빼놓지 않고 받아 적으려고 펜을 들었습니다. 바르트는 지그시 눈을 감고 몇 분간 생각에 잠겼습니다. 얼마 후 그의 입가에 조용한 미소가 떠오르더니 그는 눈을 떴습니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얻은 신학적 통찰 가운데 가장 소중한 것은 이것입니다. 나는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압니다. 성경이 내게 그렇게 말했습니다.”
대 신학자의 입에서 나온 고백치고는 너무나 소박해서 어쩌면 듣는 이들이 맥이 탁 풀려버렸을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이것 이상의 고백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앞서 예수님은 왜 오셨는가? 하는 질문을 드렸습니다. 최고의 신학자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우리의 온갖 어려움, 우리의 온갖 질문들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 사랑에 취하여, 그렇게 살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이들을 가리켜 예수쟁이들이라고 부릅니다. 그런 예수쟁이가 되십시오.
-말씀을 맺습니다
인생이란 무엇입니까?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는 것 아닐까요? 그분의 뜻은 무엇입니까? 내가 인연을 맺고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나로 인해 기쁘고 하늘나라를 맛보게 되고, 자신의 생명의 충만함을 누리게 되고, 그것이 내게 기쁨이 되는 일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가리켜 ‘임마누엘’이라 부릅니다. 우리 곁에 계신 하나님이라는 뜻이지요. 하나님이 멀고먼 하늘, 어느 구석에서, 사람들이 모르게 몰래 숨어계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 곁에 계십니다. 그러기 위해서 오신다는 사실을 간절한 마음과 소망으로 우리는 기다립니다. 이것이 우리의 강림절의 이유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오늘 무엇을 낳고 계십니까? 평화입니까? 전쟁입니까? 사랑입니까? 갈등입니까? 임마누엘의 주님이 오늘 우리에게 오심을 참으로 고대하는 우리 생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