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5월 22일 부활절 제6주 (2022년-21호)

제목 : 평화를 주시는 예수님

본문 : 사도행전 16:9-15, 요한계시록 21:10, 22-22:5, 시편 67편, 요한복음 14:23-29

【사도행전 16:9-15】

여기서 밤에 바울에게 환상이 나타났는데, 마케도니아 사람 하나가 바울 앞에 서서 « 마케도니아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 하고 간청하였다. 그 환상을 바울이 본 뒤에, 우리는 곧 마케도니아로 건너가려고 하였다. 우리는, 마케도니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이라고 확신하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드로아에서 배로 떠나서, 사모드라게로 직행하여, 이튿날 네압볼리로 갔고, 거기에서 빌립보에 이르렀다. 빌립보는 마케도니아 지방에서 으뜸가는 도시요, 로마 식민지였다. 우리는 이 도시에서 며칠 동안 묵었는데, 안식일에 성문 밖 강가로 나가서, 유대 사람이 기도하는 처소가 있음직한 곳을 찾아갔다. 우리는 거기에 앉아서, 모여든 여자들에게 말하였다. 그들 가운데 루디아라는 여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색 옷감 장수로서, 두아디라 출신이요,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이었다. 주님께서 그 여자의 마음을 여셨으므로, 그는 바울의 말을 귀담아 들었다. 그 여자가 집안 식구와 함께 세례를 받고나서 « 나를 주님의 신도로 여기시면, 우리 집에 오셔서 묵으십시오 » 하고 간청하였다. 그리고 우리를 강권해서,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갔다.

【요한복음 14:23-29】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리하면 내 아버지께서 그 사람을 사랑하실 것이요, 내 아버지와 나는 그 사람에게로 가서 그 사람과 함께 살 것이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한다. 너희가 듣고 있는 이 말은, 내 말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다. » «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동안에, 나는 이 말을 너희에게 말하였다. 그러나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실 것이며, 또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실 것이다. 나는 평화를 너희에게 남겨 준다. 나는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아라. 너희는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다시 온다고 한 내 말을 들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아버지께로 가는 것을 기뻐했을 것이다. 내 아버지는 나보다 크신 분이기 때문이다. 지금 나는 그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말하였다. 이것은 그 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하려는 것이다.

-인사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거룩한 주일을 맞아 주 앞에 나온 여러분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서로에게 인사를 전합시다. 여러분, 반갑습니다.
지난 한 주간 동안 날씨가 꽤나 더웠습니다. 더워서 고생하신 분들도 계실 것 같습니다. 더위가 너무나 이르게 갑자기 찾아온 것 같아서 좀 당황스러웠다고 할까요? 그런 한 주간이었습니다. 늘 건강에 유의하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따로 말씀을 드리지는 않았지만 오늘은 우리 감리교회의 출발점이었던 영국 국교회 사제였던 ‘존 웨슬리’의 회심 284주년 기념주일이기도 합니다. 영국국교회가 왕과 귀족들의 전유물이 되어갈 때, 이 감리교회 운동은 낮은 탄광촌, 빈민가 등으로 낮고 낮은 곳으로 내려갔습니다. 감리교회는 초기에 교단으로 시작한 것이 아니라 신앙운동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신앙의 깊은 체험을 거룩한 삶으로 바꾸어내게 하는 운동이었습니다. 이 감리교회 운동이 도박과 폭력, 술취함과 방탕에 빠져있던 영국 사회를 구해냈다고 역사가들은 평가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감리교회 교단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정신, 감리교회 정신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개입하시는 성령

그러나 제가 운동이라고 표현했지만 교회의 신앙운동은 세상에서 행해지는 정치운동, 사회운동과는 다른 분명한 점이 있습니다. 사회운동은 인간의 선한 의지, 가난한 자나 소수자 등과 함께 하기 위한 인간적인 배려와 인간적인 각성으로 시작한다면, 신앙운동은 이에 더해 반드시 무엇인가가 하나 더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성령 하나님과 함께 하는 성령운동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개입이 없는 신앙 운동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의 마음에 오셔서 인간의 마음에 불을 붙이시고 인간을 하나님의 뜻으로 움직이도록 하시는 일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안에서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점이 있다면 성령께서 개입하신다는 점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 개입하시는 성령 하나님을 믿습니다. 여러분, 맞지요? 이 사실을 믿으시지요? 오늘 요한복음에서도 보면 예수께서는 이 일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한번 들어보십시오.

“아버지께서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내셔서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실 것이다.”(16절)

그러나 여러분,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성령 하나님이 삶에 개입하신다는 것은 조현병 환자 증상처럼 누가 귀에 대고 속삭이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성령께서 내 삶에 개입하신다는 것은 우리가 삶을 살아갈 때에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시간을 통해서, 내 삶을 통해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 알고 싶어 해야 합니다. 귀를 열면 소리가 들립니다. 또 오해하지 마십시오. 소리는 물리적인 소리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벌어진 현상일수도 있고, 어떤 일의 결과일수도 있습니다.

2천 년 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시작되었습니다. 당시에는 그 복음이 2천 년 후에는 저 동쪽 땅 끝의 한반도에까지 전파되리라는 걸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그 사람들은 동쪽 끝에 이런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사실도 분명히 몰랐겠지요. 사실 인간적인 관점으로 역사를 들여다보면 우연의 연속입니다. 어쩌면 복음이 제자들 지역에서, 그 세대에서 끝나버릴 수도 있었습니다. 운이 좋아서 이렇게 되었다고 말할 것입니다. 우연한 사건으로 시작해서 사람에게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그 일들이 겹치는 가운데 복음은 그 생명을 유지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유대교와 로마제국 사이에서 생존한다는 것은 기적 중의 기적입니다. 마치 눈바람이 세차게 부는 밭에 심겨진 모종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바는 다릅니다. 사람들의 일 가운데 하나님이 개입하심을 우리는 믿습니다. 그렇기에 복음이 전파되는 일 뿐만 아니라 그 당시 제자들이 성령에 이끌려 열정적으로 복음을 세상에 전하기 시작했다고 믿습니다. 그게 역사에서 계속되었습니다. 그 성령께서 사람의 역사에 개입하신 결과가 오늘의 세상의 기독교이고 우리가 신앙을 갖게 된 이유입니다. 여기에 헌신한 대표적인 인물이 사도행전의 주인공격인 바울 사도입니다. 그의 선교 사역 중에서 의미심장한 대목이 오늘 사도행전 16:6-15절에 나옵니다.

-어려움에 처한 바울의 사역

사도행전에 따르면 바울 사도는 ‘시리아 안디옥 교회’를 중심으로 3차에 걸쳐서 선교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1차에서는 바나바와 사이좋게 선교 사역을 마쳤습니다. 다시 선교 사역을 떠나려고 할 때 문제가 생겼습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마가 요한’의 처리 문제였습니다. 바나바는 마가를 동행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고, 바울은 반대했습니다. 결국 바울과 바나바는 갈라섰습니다.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떠났고,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갔습니다. 그것이 2차 선교사역의 시작입니다.

바울은 소아시아 지역에서 나름으로 성실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상황이 어려워졌습니다. 그게 바나바와의 인간적인 갈등에서 시작된 것인지도 모릅니다. 학자들은 그렇게 말하기도 합니다만 6절에 보면, 그 상황을 이렇게 전합니다.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는 것을 막으시므로…” 그래서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지역으로 갔습니다. 무시아 앞에서 비두니아로 가려고 했지만 또 일이 원만하게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예수의 영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행 16:7) 뭔가 어려운 일이 생긴 것 같습니다. 그것을 본문은 성령이 전하지 못하게 했다거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않은 것이라고 묘사했습니다.

자, 조금만 더 들어가 보겠습니다. 바울의 선교 사역을 방해한 사건들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몇 가지의 추론이 가능합니다.
첫째, 바울의 건강일지 모릅니다. 바울은 병약한 사람이었습니다. 지병도 안고 있었습니다. 오늘날까지도 궁금증을 자아내는 ‘육체의 가시’라고 말한 그 질병입니다. 그래서 주치의인 누가가 수행했다는 말도 있습니다.
둘째, 재정적인 어려움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바울은 원래 자비량 선교를 원칙으로 했습니다. 전업이 아니라 아르바이트로 돈을 벌어서 선교 사역을 감당하다보면 재정적인 문제로 더 이상 일할 수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셋째, 유대교나 로마 정권으로부터의 박해가 어려움의 이유인지 모릅니다.
넷째, 내부의 알력이 결정적인 문제였을지 모릅니다. 유대 기독교와의 충돌이 그것입니다. 다른 문제들에 비해서 훨씬 복잡해진 신앙고백의 문제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갈등과 다툼

제가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초대교회라고 우리가 편하게 말하는 기독교 시작점에는 유대교에 기반을 둔 기독교와 이방인들에게 기반을 둔 기독교의 두 기둥이 있었습니다. 때로는 한쪽의 주장이 너무 세서 갈등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런 차이가 시간이 지나면서 해소되지 않고 오히려 심해졌습니다. 일종의 힘겨루기 양상으로까지 확대되었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1장에서 유대 기독교의 주장을 ‘다른 복음’으로 부르면서 그것을 전하는 사람들에게 저주가 임하기를 바란다고까지 말했습니다. 과격한 발언입니다. 빌립보 3장에서는 그들을 가리켜 ‘육체를 신뢰하는 개’와 같다고 비난했습니다. 수사적인 의미가 있다고 하더라도, 바울이 바울답지 않게 거친 발언을 한 이유는 나름으로 이유가 있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한 곳에 유대 기독교가 대표자들을 보내서 바울의 복음이 충분하지 않다고 훼방을 놓았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터키 지역인 소아시아 지역에서 같은 기독교 세력끼리 충돌하게 된 것입니다. 바울의 인간적인 약점까지 물고 늘어지는 일이 생겼습니다. 볼품없이 생겼다거나, 말을 잘 할 줄 모른다거나, 사도권이 없다고 말입니다. 신학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감정적인 문제까지 얽혀든 겁니다. 그 사이에서 일반 기독교인들의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바울의 속이 터졌겠지요. 이런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하는 게 최선일까요?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대처했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계속 싸울 겁니다. 자신이 먼저 복음을 뿌린 지역이니까 자신에게 기득권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적당하게 타협합니다. 자신의 신학적 소신을 굽히든지 아니면 일부의 영역에서만 말씀을 전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는 겁니다. 바울은 다른 선택을 했습니다.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도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자리에 머물러서 이전투구 식으로 싸우지도 않았습니다. 자신이 신학적으로 옳은 것은 분명하지만 더 이상 다투지 않고 자리를 피했습니다. 유대 기독교가 지배하고 있는 소아시아를 포기하고 이제 바다를 건너 마케도니아 지역으로 가기로 결단한 것입니다.

-유럽의 마케도니아로

이런 상황을 가리켜 사도행전 저자는 오늘 본문에서 환상 이야기로 전하고 있습니다. 9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밤에 바울에게 환상이 나타났는데, 마케도니아 사람 하나가 바울 앞에 서서 « 마케도니아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 하고 간청하였다.” 제가 Emmanuel Carrere 라는 프랑스 작가가 쓴 “Le Royaume 왕국 »이라는 책을 보니까, 이 책에서 작가가 상상력을 발휘해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저자 ‘의사 누가’가 바로 이 ‘마케도니아’ 사람이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바울 일행이 이제 갈라디아 지역과 소아시아를 포함한 지중해 동편 지역을 포기하고 이제 바다를 건너 유럽 지역인 마케도니아로 선교지역을 바꾸기로 결정했다는 것입니다. 이게 쉽지 않은 결정입니다. 그들은 심각하게 고민하고, 수십 번 회의하고, 기도했을 겁니다. 소아시아 지역의 교회들은 바울이 자기 인생을 쏟아 부으면서 순전한 복음으로 세운 교회들입니다. 그 지역을 포기한다는 것은 그 지역의 신자들을 모두 유대 기독교의 세력권에 맡긴다는 뜻입니다. 바울 일행을 계속 붙들어두고 싶어 하는 신자들도 많았겠지요. 그들은 바울에게 배신감을 느낄지도 모릅니다. 어떻게 하는 게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일까요?

-결정, 결단

그들의 결정이 10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곧 마케도니아로 건너가려고 하였다. 우리는, 마케도니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이라고 확신하였기 때문이다.” 마케도니아로 옮기겠다고 결정난 뒤로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습니다. 그들은 드로아에서 배를 타고 ‘사모드라게’로 가서 다음날 ‘네압볼리’에 닿았습니다. 네압볼리는 빌립보로 가는 길목의 항구도시입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육로를 통해 그 유명한 빌립보에 들어갔습니다. 빌립보는 마케도니아 지방의 첫 성이고, 로마의 직할 식민지였습니다. 빌립보에서 첫 여성 세례 신자가 배출되었습니다. 자색 옷감 장사를 하는 ‘루디아’(두아디라 출신)였습니다. 그녀는 바울 일행을 자기 집에 유숙할 수 있도록 편의를 베풀었습니다. 재정적으로 후원했다는 뜻입니다. 이후로도 빌립보 교회는 꾸준하게 바울의 든든한 후원 교회가 되었습니다. 훗날 바울은 이 빌립보 교회를 향해 편지를 썼습니다. 그 빌립보 교회에 보낸 편지가 신약성경 속 빌립보서입니다.

-빌립보 교회

빌립보 교회의 설립은 세계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빌립보 교회 자체가 유럽의 첫 교회이고, 빌립보 교회의 설립으로 인해서 이제 복음이 유럽으로 전파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들이 사소해보일지 몰라도 역사의 터닝 포인트, 즉 변곡점입니다. 그 순간을 계기로 역사에 큰 변화가 일어납니다. 역사도 그렇고 개인의 인생도 물 흐름과 비슷합니다. 물 흐름에 삽질 하나로 방향을 조금만 바꿔주면 그 물길이 큰 변화를 만들어냅니다. 작은 사건이 흐름 전체를 바꿀 수 있습니다. 이것을 여러분은 인생살이에서 늘 경험할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오늘 이렇게 함께 예배를 드리는 여러분들이 여기에 모인 그 전환점이 어디 있었는지 돌아보십시오. 대개는 아주 사소한 사건일 겁니다. 특히나 신앙적인 전환점이 어디였는지를 한번 보십시오. 우연하게, 그리고 아주 작고 사소한 일들이 계기가 되어 우리 교회 공동체 안으로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물론 사람들 사이의 일들은 순수하게 깨끗하고 완전하게 처리되지 않습니다. 바울과 바나바의 갈등도 있었습니다. 신앙적인 차이로 인해 갈등도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가꿔왔던 여러 교회 공동체를 포기해야만 하는 상황도 생겼습니다. 하지만 인간이 하는 일들은 이렇지만, 이렇게 모가 나기도 하고 인간적인 나약한 모습이 담겨 있지만 성령 하나님이 그 속에서 활동하실 때 그 모든 것은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루어져 감을 우리는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이 맞는 말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아름다운 성당을 장식하는 스테인글라스의 탄생의 원인이 성당의 유리를 실수로 깨뜨려버린 인간의 실수에서 비롯되었다는 말도 있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기독교 역사의 전환점이 되었고, 지구를 한 바퀴 돌아 우리 민족에게도 복음이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아무 것도 손에 쥔 것은 없었지만 미래를 온전히 하나님께 맡기고 용감하게 방향을 튼 것입니다. 예수의 영에 사로잡힌 사람에게 나타나는 삶의 용기입니다.

-평화의 보혜사

우리는 모든 일에 성령 하나님의 이끄심이 숨겨져 있다고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성령이 우리에게 오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4장은 세상을 떠날 날이 다가옴을 감지하신 예수님이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용기를 북돋기 위해 하신 말씀 가운데 일부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아버지께서 ‘다른 보혜사‘를 보내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직 요한복음에만 등장하는 보혜사는 성령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보혜사라고 번역된 헬라어 파라클레토스parakletos는 위로자, 상담자, 대언자, 변호인을 뜻하는 말입니다. 성경 번역자들은 파라클레토스를 어떻게 번역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보혜사保惠師라는 조어를 만들었습니다. ‘지킬 ‘보’, ‘은혜 혜’, ‘스승 사’. 지키고, 생명을 선물로 주시고, 가르치는 분이라는 복합적 의미를 잘 담아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세상에서의 모든 일을 다 마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시지만 제자들은 고아처럼 버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보혜사께서 오셔서 그들 속에 머무시면서 ‘모든 것을 가르치고’, 또 주님이 그들에게 들려주셨던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실 것입니다.
성령께서 임하시는 것은 마치 우리의 어두운 심령에 불이 밝혀지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또 이웃들에게 선물이 되고 싶은 마음이 샘처럼 솟아나오기 때문입니다. 자기중심의 욕망에서 자유로워질 때 사람은 맑아지기도 하고, 따뜻해지기도 합니다. 주님은 보혜사를 보내주실 뿐만 아니라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고 말씀하십니다.

-맺는말

그러니 믿음을 가지십시오. 내게 생기는 좋지 않은 일들, 세상의 험한 일들이나 어쩌면 사탄이 계획하는 일 마저도 하나님의 세상을 향한 사랑을 입증할 뿐임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보내신 분께서 분부하신 모든 것을 이루기 위해 기꺼이 그 목숨을 거셨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을 향해 살았고, 세상에 대해 죽었습니다. 이미 죽은 자를 죽음으로 위협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주님은 마침내 두려움 없이 말합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를 마치신 예수님의 말씀이 귀에 들립니다. “일어나거라. 여기에서 떠나자.” 피하고 숨고 달아나려는 이에게 어둠의 시간은 공포이지만, 마주 서고 뚫고 나가려는 이에게는 더 큰 생명의 문입니다. 이 말씀은 바로 그런 삶을 향해 고개를 들라고 우리를 초대합니다. 주님의 도우심과 보호하심이 우리 교우들과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이 한 주간 동안에도 주님과 동행하는 기쁨을 한껏 누리고, 우리 내면에 깃든 평화와 고요함으로 주위를 물들이십시오. 주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