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3월 12일 사순절 제 3 주 (2023년-11호)

제목 : ○○ 과 화해하라!
본문 : 출애굽기 17:1-7, 로마서 5:1-11, 시편 95편, 요한복음 4:5-15

【요한복음 4:5-15】
예수께서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는 마을에 이르셨다. 이 마을은 야곱이 아들 요셉에게 준 땅에서 가까운 곳이며, 야곱의 우물이 거기에 있었다. 예수께서 길을 가시다가, 피로하셔서 우물가에 앉으셨다. 때는 오정쯤이었다. 한 사마리아 여자가 물을 길으러 나왔다.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마실 물을 좀 달라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은 먹을 것을 사러 동네에 들어가서, 그 자리에 없었다. 사마리아 여자가 예수께 말하였다. « 선생님은 유대 사람인데, 어떻게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 » (유대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과 상종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대답하셨다. «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알고, 또 너에게 물을 달라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았더라면, 도리어 네가 그에게 청하였을 것이고, 그는 너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 »
여자가 말하였다. « 선생님, 선생님에게는 두레박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선생님은 어디에서 생수를 구하신다는 말입니까? 선생님이 우리 조상 야곱보다 더 위대하신 분이라는 말입니까? 그는 우리에게 이 우물을 주었고, 그와 그 자녀들과 그 가축까지, 다 이 우물의 물을 마셨습니다. »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 이 물을 마시는 사람은 다시 목마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속에서, 영생에 이르게 하는 샘물이 될 것이다. » 그 여자가 말하였다. « 선생님, 그 물을 나에게 주셔서, 내가 목마르지도 않고, 또 물을 길으러 여기까지 나오지도 않게 해주십시오. »

-인사

주안에서 사랑하는 파리중앙교회 귀한 성도 여러분, 주님의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있기를 바랍니다. 서로에게 인사 전하고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서로 주님의 평화를 전해주십시오. 인사하십시오.

-오늘 말씀을 나누기 전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언급하고 설교를 시작해야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듭니다.
지난 한 주간 한국 땅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참담하기가 그지없는 뉴스였습니다. JMS 라는 사교 집단이 한국 사회를 뒤흔듭니다. 스스로 메시아를 자칭하는 교주 이 사람이 행한 엽기적인 범죄들이 가히 충격적이지만 한편으로는 기독교의 이름을 빌어서 벌인 일들이라 고통스럽게 느껴집니다. 그중에서 안타깝고 슬픈 것은 현재 일반 교회가 전하는 복음의 소식과 이들이 전파하는 내용이 세상 사람들 눈에 구분이 안 될 정도로 비슷하게 받아들여져서 그런 것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이것이 문제의 중요한 지점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교회의 복음이 변질되고 어수선하기에 그렇습니다. 이러면 이런 사교집단이 교회에 들어오기가 쉽습니다. 한국 교회가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법에만 오랫동안 관심을 기울인 결과가 이런 일을 낳았습니다. 교회에 그리스도의 정신이 사라지고 이익집단이 되어가기에 그렇습니다.

혹시 파리에도 이 사람들 집단이 있나요? 예방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여러분, 혹시 성경공부를 하자고 권유를 받게 되면 꼭 제게 알려주셔야 합니다. 특히나 ‘세대 구분’해가면서 몇 년도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뭐를 잘 맞히고, 이런 식의 성경해석과 설명으로 착착 맞아 떨어진다고 설명하면 충분히 의심스럽습니다. 가벼이 여기지 마시고, 교회의 올바른 지도를 받는 것이 여러분의 영혼을 망치지 않는 일입니다. 목사인 저를 이용하셔야지 다른 곳에서 솔깃한 소리에 현혹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꼭 당부의 말씀으로 드립니다.

-복음의 발휘

사순절 3주일입니다. 사순절 1주의 말씀 주제가 ‘인류에게 가해진 유혹’이라고 한다면, 2주 말씀은 마음에 밝혀진 촛불하나의 ‘믿음’과도 같습니다. 오늘 사순절 3주일의 말씀 주제는 ‘화해’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다.

오늘 말씀도 그렇습니다만 복음은 사람을 살립니다. 복음은 사람을 살리지만 따뜻하고 달콤하게만 다가와 솔깃하게 들리지만은 않습니다. 때로는 날카롭게, 복음은 때로는 내 마음의 깊은 곳을 건드리기에 고통스럽게 다가오기도 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사람의 영혼을 고치는 능력이 있음을 기억하고 오늘 말씀을 대해야 할 것 같습니다.

-상처투성이 인간

세상에 상처 없이 사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여러분, 한번 손을 들어 표시해 주십시오. “나는 일생동안 한 번도 상처를 받은 적이 없다. 그리고 누구에게 상처를 준 적도 없다!”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크고 작은 상처가 있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상처가 무겁고 무서운 점은 평생 그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상처가 그다지 크지 않아서 일상생활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않는다면 그대로 살아도 괜찮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상처로 인해서 일상생활 뿐 아니라 일생동안 매여 있다고 한다면 치료를 받거나 누군가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할 것입니다. 마치 어두운 지하 감옥에 갇혀서 발목에 쇠고랑이 채워져 있는 모습이 연상됩니다. 상처로 인해 옴짝달싹 못하는 것이지요.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닌 인생입니다. 이런 인생을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상처는 나 자신을 자유롭지 못하게 하고 힘들게 합니다. 그리고 상처는 또 하나의 특징이 있습니다. 주변에 영향을 심하게 끼칩니다. 영향력이 강해서 상처 입은 당사자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도 크게 영향을 끼칩니다. 좀 심하게 말하면 주변 사람 모두를 수렁으로 끌고 들어가는 일이 되기도 합니다.

너 나 할 것 없이 사람은 부족한 존재입니다. 그리고 어느 지점에서는 결핍감이 있기 때문에 우리 인간은 상처 입기 쉬운 존재입니다. 특별한 사람만 상처를 지니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지요. 그렇기에 이 지점 여기에서 화해가 필요합니다. 여러분 화해의 경험이 있으시지요? 어린 시절, 학창 시절에 그야말로 사사로운 감정이나 다툼 때문에 불편한 관계에 있다가 어느 날 누군가의 용기나, 어떤 계기로 서로 화해하게 된 경험이 있으시지요? 그 화해의 경험으로 가보시기 바랍니다. 속이 시원하고 후련해집니다. 뭔가 새로워진 것과 같은 느낌이 듭니다. 누군가와 화해하는 일은 이렇게 대상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정말 어려운 화해가 하나 있습니다. 이런 화해를 ‘자기 자신과의 화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자신과 화해한다는 말을 이해하실 수 있겠습니까? 자기 자신과 화해하는 것이 뭐가 어렵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여러분, 자신과 화해하는 것이 정말 어려운 이유는 갈등의 상대가 잘 보이지 않는데 있습니다. 타인과 갈등이 있으면 갈등의 상대가 분명합니다. 하지만 자신과 갈등하고 있으면 갈등의 상대가 자신이라는 것을 잘 인지하지 못합니다. 밖에서, 타인에게서 원인과 이유를 찾습니다. 상처의 지점을 찾지 못하면 해결이 되지 않겠지요. 나 자신과 화해한다는 것은 이렇듯 어려운 일입니다.

-상처로 가득한 여인

저는 오늘 요한복음 4장의 너무나도 유명한 이야기, 이 ‘사마리아 여인’을 상처 입은 사람으로 보고 싶습니다. 나름대로 애를 쓰면서 살았지만, 상처를 진정으로 해소할 길을 찾지 못한 채, 자신과 화해하지 못한 채로 인생을 살다가 어떤 계기, 한 만남을 통해 자신과 화해의 길을 찾기 시작한 사람 이야기입니다. 이 여인이 우연히 마주하게 된 분은 예수라고 불린 분입니다.

오늘 말씀 속 오늘의 복음 말씀은 이런 장면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말씀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쪽에서 갈릴리 방향으로 가고 계십니다. 남쪽에서 북쪽으로 이동 중이신데, 그 중간 지점이 바로 사마리아 지역입니다. 그 곳에서 사건이 벌어집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자신들의 조상 대대로 사용하던 우물에 물을 길으러 나왔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곳을 지나가던 예수님 일행이 휴식을 위해 우물가에 머물고 있었고, 예수님 제자들이 먹을 것을 구하려고 마을로 들어간 후라 예수님과 이 사마리아 여인이 단 둘이 대면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오늘 복음에서 만나는 사건의 시작점입니다.

-여인 이야기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말씀에 우리의 소설적인 상상력을 더해서 읽어 보겠습니다.

《 여기 한 여인이 있습니다. 오늘 하루 먹을 것을 마련하기 위해, 그야말로 오늘 하루 살아남기 위해 음식을 만들려면 물을 길으러 나가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시간에 물을 길으러 나갈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의 눈길이 두렵습니다. 지나갈 때마다 사람들이 자신의 뒤에서 수군거립니다. “저 여자는 행실이 불량하다, 팔자가 사나워 보인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운명이다.” 이런 말을 처음에 들었을 때는 화도 났지만 그러나 지금은 모든 것이 내 탓으로 여겨집니다. 지금은 내 자신의 운명, 팔자로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나는 한낮인 12시 즈음, 사람들이 대낮의 더위를 피해서 밖으로 나오지 않는 시간에 물을 길으러 나가는 것이 이제는 자연스럽습니다. 오히려 사람을 만나지 않으니 다행이라고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사람들의 친절함과 다정한 미소가 그립기도 합니다.
아무도 없는 줄 알았던 우물가에 한 사람이 앉아 있어서 깜짝 놀랐습니다. 그 남자의 행색은 유대지방 출신 남자임에 분명했습니다. 낯선 남자가 우물가에 있어서 두려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대대로 유대 사람들과 서로 교류도 하지 말고, 말도 섞지 말라고 우리 사마리아 지방 사람들에게 가르쳤습니다. 나는 우리 조상들이 가르쳐 준대로 유대 출신 사람들을 좋아하지는 않습니다만 하지만 왜 서로 그렇게 적대시하는지는 정확히는 모릅니다. 말조차도 서로 나누어서는 안 되는 이유를 솔직히는 모릅니다. 조상들이 전해준 말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은 없습니다.
우물가의 낯선 남자가 내게 말을 걸었습니다. 물을 한 그릇 달라고 합니다. 행색을 보아하니 많이 지친 듯한 모습이지만 그의 눈빛은 다른 유대 사람들과 달리 적개심을 품지는 않아 보였습니다. 나는 우리 조상들이 가르쳐 준대로 말했습니다. “유대 남자인 당신이 사마리아 사람 여자에게 말을 걸고, 물을 달라고 청하는 게 맞습니까?” 나는 넌지시 거절의 의사를 표했지만 그 낯선 남자에게서 들려오는 말은 의외의 대답이었습니다. 나는 그의 말을 다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이 말을 듣는 순간 내 앞에 앉아계신 이 분은 나를 다 알고 계신 듯 느껴졌습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그 순간 나는 번뜩 깨달았습니다. 내가 목이 마른 사람이라는 것을. 인생의 갈증에 시달리다 못해 남편을 다섯이나 갈아치워 봤지만 갈증이 해소되기는커녕 그 남자들로 인해, 세상 사람들의 손가락질로 상처만 더욱 깊어지게 되었습니다. 외로움은 더욱 깊어졌고, 상실감은 더욱 커져갔습니다. 이런 인생의 굴레에서 헤어 나오려고 온갖 애를 써봤지만 발버둥 칠수록 사람들은 나에게 더욱 더 매몰차게 손가락질을 합니다. “루저, 팔자가 드센 여자, 실패한 인생 등등”
우물가에서 만난 분이 전해준 말을 나는 다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그분이 내게 남긴 것이 있습니다. 나는 앞으로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인생길을 찾으려고 합니다. 나의 작은 이 결심은 그분이 내게 주신 것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이 내게 주신 선물입니다. 그분은 아마도 하나님 자신이신 줄도 몰라요. 》

-말씀 맺기

저는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딱 하나만 발견했으면 좋겠습니다. 딱 하나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깨닫게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은 ‘내가 목마른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는 목마름을 해소하느라 내 나름대로의 방법들을 많이 찾으며 살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여러분의 깊은 속의 갈증을 해소할 수 있을까요? 값 비싼 것들, 돈이 제법 많아지면 될까요? 세상 사람들이 인정해 주고 칭찬 받으면 해소가 될까요? 가족들이 인정해 주면 해소될까요? 해소가 되는 부분도 있겠지요. 하지만 주님 외에는 영원한 해소는 없습니다. 주님만이 우리의 갈증을 해소해 주실 영원한 샘물입니다.

우리는 화해하지 못했습니다. 상처 난 나 자신을 몰랐고, 어디서 상처가 났는지도 잊었으며, 내가 온전한 나로 서지 못하는 것이 화해하지 못한 나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복음은 우리를 나 자신을 깊이 들여다보는 차원의 화해의 기회를 제공할 것입니다. 복음은 상처 나서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내 자신을 볼 수 있는 시선을 제공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에서처럼 우리가 화해해야 할 대상이 너무 많습니다.

오늘 말씀이 그렇습니다. 이 여인의 모습을 통해 우리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 볼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