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3월 19일 사순절 제 4 주 (2023년-12호)

제목 : 치유 사건 그 후
본문 : 사무엘상 16:1-13, 에베소서 5:8-14, 시편 23편, 요한복음 9:1-41

【요한복음 9장 1-14절】

예수께서 가시다가, 날 때부터 눈먼 사람을 보셨다. 제자들이 예수께 물었다. « 선생님, 이 사람이 눈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이 사람의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 »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 이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요, 그의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그에게서 드러내시려는 것이다. 우리는 나를 보내신 분의 일을 낮 동안에 해야 한다. 아무도 일할 수 없는 밤이 곧 온다.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 나는 세상의 빛이다. »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신 뒤에, 땅에 침을 뱉어서, 그것으로 진흙을 개어 그의 눈에 바르시고,
그에게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으라고 말씀하셨다.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다.) 그 눈먼 사람이 가서 씻고, 눈이 밝아져서 돌아갔다. 이웃 사람들과, 그가 전에 거지인 것을 보아 온 사람들이 말하기를 « 이 사람은 앉아서 구걸하던 사람이 아니냐? » 하였다.
다른 사람들 가운데는 « 이 사람이 그 사람이다 » 하고 말하는 사람도 더러 있었고, 또 더러는 « 그가 아니라 그와 비슷한 사람이다 » 하고 말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눈을 뜨게 된 그 사람은 « 내가 바로 그 사람이오 » 하고 말하였다. 사람들이 그에게 물었다. « 그러면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소? » 그가 대답하였다. « 예수라는 사람이 진흙을 개어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하였소. 그래서 내가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소. » 사람들이 눈을 뜨게 된 사람에게 묻기를 « 그 사람이 어디에 있소? » 하니, 그는 « 모르겠소 » 하고 대답하였다. 그들은 전에 눈먼 사람이던 그를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데리고 갔다. 그런데 예수께서 진흙을 개어 그의 눈을 뜨게 하신 날이 안식일이었다.

-인사

주님의 평화를 전합니다. 오늘 사순절 4주일을 맞이합니다. 오늘 예배가 파리의 현재 상황 때문에 이 번 한 주 비대면으로 진행합니다. 우리가 사는 이 땅의 혼란과 어려움을 보게 됩니다. 이 일을 놓고도 우리가 기도해야겠습니다.

지난 한 주간 잘 지내셨는지요? 서로에게 인사를 전하고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 나누겠습니다. 서로에게 인사해주십시오. 반갑습니다. 여러분.

거룩한 주님의 날이 오늘 여러분에게 의미 있는 날이기를 바랍니다. 갑자기 뜬금없지만 사람이 일생동안 며칠을 살까요? 우리는 보통 인간의 평균수명이 어느 정도인지 알고는 있지만 며칠을 사는지는 잘 인지하지 못합니다. 제가 계산을 해보니 한 사람의 인생이 80년이라고 한다면 29,200일입니다. 어떤가요? 숫자가 큰가요? 아니면 얼마 안 되나요? 제게는 얼마 많지가 않은 숫자로 느껴집니다. 그렇기에 하루가 정말 소중하다는 사실을 새삼 느낍니다. 하루하루가 소중하고 귀합니다. 하지만 제가 소중하고 귀하다고 말한다고 해서 여러분의 인생이 저절로 귀해지지는 않겠지요.
오늘 하루가 귀한 날이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까요? 비싼 식당에 가서 값비싼 음식을 먹으면 오늘 하루가 오랫동안 기억날 만큼 귀한 날이 될까요? 오늘의 하루가 귀하게 여겨지기 위해서는 하루를 의미있게 가꾸어야 합니다. 사람이 귀하고 값지게 여기는 것은 여러 가지 많은 것들이 있겠지만 ‘의미’를 찾고 깨닫는 것에 그 인생이 달려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오늘의 의미는 무엇인지요? 작은 성취감, 혹은 작은 만족감, 감사, 미소. 이런 것 아닐까 싶습니다.
여러분 각자가 인생의 의미를 찾기 위해 애쓰며 사시리라 믿습니다. 오늘 우리가 나누는 이 시간이 의미 있는 시간이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9장을 읽기 위해서

오늘 우리가 나눌 말씀은 사실은 요한복음 9장 전체입니다. 41절까지 이어지는 긴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 이렇습니다. 9장 1-41절까지 여러 다른 주제의 말씀들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단 하나의 사건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요한복음 2장 같은 경우에는 25절정도 밖에 안 되지만 3개의 이야기 덩어리로 되어있습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 이야기”와 “성전을 정화하신 사건”과 “예수님과 사람들 사이에 대한 대화”입니다.
그에 비해서 오늘 9장은 41절까지 긴 말씀이지만 하나의 주제가 전부입니다. 꽤 긴 말씀이라 우리는 14절까지만 읽었습니다만 여러분 마음속에 9장 전체를 놓고 오늘 말씀을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사실 오늘 말씀은 아주 단순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눈먼 사람을 고쳐주셨다는 아주 단순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앞을 보지 못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의 말씀대로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었더니 깨끗하게 나았다. 이것이 전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몇 절 만으로도 오늘 말씀을 다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가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문제가 발생합니다. 늘 문제는 사람이지요. 언제나 문제를 일으키는 이는 사람입니다. 어딘가 모르게 세상과 사람들에 대해 잘못된 이해를 가지고 있는 이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오늘 말씀의 제자들의 편견입니다. 잘못된 이해입니다. 불행한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 불행의 원인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합니다. “저 사람은 분명히 무슨 죄를 저질러서 저렇게 되었을 거야, 아니면 저 사람의 조상죄 때문에 벌을 받아서 저럴거야.” 이런 말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습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이런 오해를 기반으로 일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제법 많습니다. 그렇지요?
이 사람들은 주변 사람들에 대해 오해를 합니다. 그 오해가 거듭되면 신념이 되기도 하고, 신앙처럼 단단하게 굳어지기도 합니다. 오늘 말씀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예수님이 앞을 못 보는 사람 하나를 치료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이 사건을 놓고 더 큰 문제를 발생시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 제목은 “치유 사건”이 아니라 “치유 사건 그 후”입니다. 사람들이 어떤 일을 벌이는 지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 속에 나, 나의 모습, 나의 시선, 나의 신앙이 담겨 있는 지를 발견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으로 우리를 깨우쳐 주시는 하나님 앞에 온전히 서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 불필요한 호기심

오늘 말씀에는 태어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던 사람이 나옵니다. 우리가 그의 이름은 알 수 없지만 그가 어떤 일을 하면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는 알 수 있습니다. 그 일은 바로 구걸입니다. 예수님 시대가 오늘날과 같이 사회복지 시스템이 있는 게 아니기에 눈먼 사람이 자신의 노동으로 살아갈 수는 없고, 누군가에게 의존하거나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만 살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아마도 사람들 눈에 많이 띄었던 것 같습니다. 구걸을 했기에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있었겠지요.

오늘 말씀의 시작은 길을 지나가던 예수님의 눈에 띈 이 사람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길을 가던 제자들은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이 사람이 눈 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이 사람의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 하고 묻습니다. 이 질문을 들으신 예수님의 대답 이전에 우리는 우리에게 이 질문에 대해 먼저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려움이나 불행처럼 여겨지는 일을 한번도, 정말 단 한 번도 겪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요? 그런 인생은 없습니다. 그리고 그 일의 원인을 명백하게 알 수 있는 것도 있지만 반면에 정말로 이유를 도무지 알 수 없는 일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일주일 후에 시험을 앞 둔 학생이 있습니다. 이 기간 동안 이 학생이 할 일은 시험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학생이 시험 준비를 하나도 하지 않았다면 그 결과는 뻔합니다. 점수가 좋지 않을 겁니다. 이 성적의 결과로 이 학생은 불행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불행감의 이유는 분명합니다. 시험에 준비를 하지 않은 것이 그 이유지요. 하지만 우리 사람의 인생이란 이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인생은 도표나 도식이 아니기에 알 수 없는 일들, 이해할 수 없는 일들로 가득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지 궁금해 합니다.
오늘 말씀 속 제자들도 그렇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앞을 못 보는 사람의 불행, 그 이유는 무엇이냐는 궁금증이 생길 만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하나님의 뜻은 당신이 하시는 일들을 그에게서 드러내시려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자칫 이 말씀을 오해하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능력을 입증하기 위해 그를 불행에 빠뜨렸다고 이해하기 쉽습니다.
이 말을 좀 더 설명하면 하나님의 관심은 현실을 교리적으로, 이론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그의 생명을 온전하게 해주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시선이 집중되어야 할 것은 알 수 없고, 설명할 수 없는 현실에서 그 이유와 시선을 두지 말고, 그런 현실에 놓인 생명이 자신의 삶을 제대로 살 수 있도록 애쓰는 데에 있다는 말입니다.
주님은 땅에 침을 뱉어서 그것으로 진흙을 개어 그의 눈에 바르시고는,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는 가서 씻고, 눈이 밝아져서 돌아갔습니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누구나 다 이 이적에 놀랐습니다. 여기까지라면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다른 치유 이야기와 다를 바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여기서부터가 시작입니다.

-어리석은 논쟁

여러분 주변에 예상하지도 못했던 큰 기쁨을 얻게 된 사람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의 첫 번째 반응은 무엇입니까? 함께 기뻐하는 것입니다. 앞을 보지 못하던 사람이 앞을 보게 되었으면 함께 축하해주면 될 일입니다. 하지만 그 후에 일이 이상하게 진행이 됩니다. 벌어진 사건에 대해 들고 난 바리새파 사람들 사이에 이상한 논쟁이 벌어집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가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것으로 보아서, 그는 하나님에게서 온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고, 다른 이들은 죄가 있는 사람이 어떻게 그러한 표징을 행할 수 있겠느냐고 주장합니다. 여러분은 어느 편에 서시겠습니까? 아니면 우리의 생각은 무엇인가요?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이런 논쟁에 참여해서 열띤 논쟁을 벌이는 이 바리새파 사람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똑똑해 보입니까? 성경 지식, 율법 지식이 많아 보여서 부럽습니까? 우리 옛 말에 이런 이들을 ‘헛 똑똑이들’이라고 불렀습니다. 똑똑하고 명석해 보이지만 하나도 사람 같지 않습니다. 시력을 회복한 사람의 기쁨에 동참할 마음이 없는 사람들이기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이 무엇인지를 우리는 똑바로 보아야 합니다.
바리새파 사람들 이들은 이 상황에서 빛을 되찾은 사람의 이웃이 되지 못하고 이 상황에 대한 심판관, 재판관이 되었습니다. 누군가를 헛된 지식으로 판단하는 일에는 익숙할 뿐이지 정작 보아야 할 것은 보지 못하는 이들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에 어떤 어리석은 사람이 시장에 가는 길에 신발 하나를 사야겠다고 생각하고는 노끈으로 발 크기를 쟀습니다. 시장에 도착했는데 노끈이 없어졌습니다. 노끈이 주머니에 없는 겁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는 신발을 못사고 그냥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자기 발이 거기 있는 데도 그는 노끈에만 정신이 팔렸던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모습이 꼭 그렇습니다.

저는 우리 안에 바로 이 모습의 신앙이 있지는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도 한 번 새겨 보셨으면 합니다. 우리 주변에 신앙이 좋다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입니까? 성경에 대해 많이 아는 사람인가요? 은연중에 우리는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가진 성경 지식으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기가 참 쉽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기준이 되는 것은 하나님 생각이지요. 하나님은 잃어버린 양을 어깨에 메고 기쁨으로 돌아오는 분이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우선입니다.

-촌철살인의 대답

이렇게 논쟁만 벌이던 유대 사람들은 눈을 뜬 사람을 직접 불러다가 물었습니다. “그가 당신의 눈을 뜨게 하였는데, 당신은 그를 어떻게 생각하오?”(17절) 그러자 그는 서슴없이 “그분은 예언자입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이 대답을 듣고 유대 사람은 어떻게 했을까요? “그렇구나”하고 받아들였을까요? 아니요. 전혀 아닙니다. 유대 사람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참 이상하고 웃긴 장면입니다. 눈을 뜬 사람을 불러다가 직접 그 대답을 들어보자고 해놓고 막상 대답을 듣고서는 그 말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간단합니다. 이미 자신들의 정답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신들이 원하는 대답이 나오지 않기 때문에 이제는 눈 뜬 사람의 부모를 불러다가 묻습니다. 부모는 난처해졌습니다. 사실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앞을 못 보던 아들이 예수님의 치유로 눈을 뜬 것일 뿐입니다. 기쁘고 감사할 일일 뿐입니다. 그러나 기쁨을 누릴 여유가 없습니다. 유대 사람들의 이런 질문들을 계속 들어야만 하니 참 슬픈 현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유대 사람들이 무섭습니다.

이제 다시 주인공인 눈 뜬 사람에게 질문이 돌아옵니다.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라. 우리가 알기로, 그 사람은 죄인이다.”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는 말처럼 오용되는 말이 없습니다. 큰 교회당을 짓고, 헌금을 바치고, 말끝마다 ‘주님, 주님’ 한다고 과연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이 하시려는 일, 곧 생명이 온전해지고 모두가 평화롭게 공존하며 사는 세상을 위해 헌신할 때 드러나는 실체입니다.

“나는 그분이 죄인인지 아닌지는 모릅니다. 다만 한 가지 내가 아는 것은, 내가 눈이 멀었다가, 지금은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9:25)

이런 대답을 촌철살인이라고 하지요. 맹인이었다가 눈 뜬 사람, 평생을 구걸하며 살던 이 사람이 맞습니까? 그의 말에 지혜가 있습니다. 얄팍한 율법 지식을 뛰어넘는 무엇인가가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상황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말하고 있습니다. 핵심을 꿰뚫는 대답입니다. 이 대답은 율법에 대해 좀 안다 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거리는 유대 사람들, 바리새파 사람들의 허위의식을 고스란히 드러내 줍니다. 그가 하는 일이 그가 누구인지를 드러내는 법입니다. 나쁜 열매를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좋은 열매를 맺는 나쁜 나무가 없는 것이지요.

-오늘 말씀 맺기

오늘 우리는 한 사건 너머를 보려고 말씀을 이렇게 보았습니다. 하나의 치유 사건으로 끝나지 않고 자만과 우월감으로 똘똘 뭉친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을 어떻게 망쳐가는 지를 오늘 말씀을 통해서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9절입니다. “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못 보는 사람은 보게 하고, 보는 사람은 못 보게 하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못 보는 사람’은 자기의 무지함을 자각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주장 속에 하나님의 율법을 많이 안다고 자랑하는 자신의 교만이 담겨있음을 깨닫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무지와 교만을 깨닫는 사람은 결국에는 보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보는 사람’이란 스스로 본다고 자신감으로 확신하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이 장님이면서도 장님인 줄을 모릅니다. 그렇기에 정작 보아야 할 것은 보지 못하게 됩니다. 다메섹으로 가던 사울은 스스로 ‘본다’는 자부심에 가득 찼던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환한 빛 앞에서 소경이 된 것은 은총이었습니다. 자기의 눈멂을 자각할 때라야 비로소 눈을 뜰 수 있기에 그렇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눈이 먼 사람이냐?”고 화를 냅니다. 주님은 다만 탄식하실 뿐입니다.

“너희가 눈이 먼 사람들이라면, 도리어 죄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지금 본다고 말하니, 너희의 죄가 그대로 남아 있다.”(41b)

오늘 말씀을 끝맺음 하면서 여러분에게 묻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눈 뜬 사람입니까? 아니면 어떤 사람입니까? 눈을 뜨기는 원하십니까? 하나님의 진실하심에 눈을 뜨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