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사람아, 이 뼈들이 살아날 수 있겠느냐?
본문 : 에스겔 37:1-14, 로마서 8:6-11, 시편 130편, 요한복음 11:1-45
【에스겔 37:1-14】
주님께서 권능으로 나를 사로잡으셨다. 주님의 영이 나를 데리고 나가서, 골짜기의 한가운데 나를 내려 놓으셨다. 그런데 그 곳에는 뼈들이 가득히 있었다. 그가 나를 데리고 그 뼈들이 널려 있는 사방으로 다니게 하셨다. 그 골짜기의 바닥에 뼈가 대단히 많았다. 보니, 그것들은 아주 말라 있었다. 그가 내게 물으셨다. “사람아, 이 뼈들이 살아날 수 있겠느냐?” 내가 대답하였다. “주 하나님, 주님께서는 아십니다.” 그가 내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 뼈들에게 대언하여라. 너는 그것들에게 전하여라. ‘너희 마른 뼈들아, 너희는 나 주의 말을 들어라. 나 주 하나님이 이 뼈들에게 말한다. 내가 너희 속에 생기를 불어넣어, 너희가 다시 살아나게 하겠다. 내가 너희에게 힘줄이 뻗치게 하고, 또 너희에게 살을 입히고, 또 너희를 살갗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불어넣어, 너희가 다시 살아나게 하겠다. 그 때에야 비로소 너희는, 내가 주인 줄 알게 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명을 받은 대로 대언하였다. 내가 대언을 할 때에 무슨 소리가 났다. 보니, 그것은 뼈들이 서로 이어지는 요란한 소리였다. 내가 바라보고 있으니, 그 뼈들 위에 힘줄이 뻗치고, 살이 오르고, 살 위로 살갗이 덮였다. 그러나 그들 속에 생기가 없었다. 그 때에 그가 내게 말씀하셨다. “사람아, 너는 생기에게 대언하여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렇게 일러라. ‘나 주 하나님이 너에게 말한다. 너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불어와서 이 살해당한 사람들에게 불어서 그들이 살아나게 하여라.’” 그래서 내가 명을 받은 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 속으로 들어갔고, 그래서 그들이 곧 살아나 제 발로 일어나서 서는데, 엄청나게 큰 군대였다.
그 때에 그가 내게 말씀하셨다. “사람아, 이 뼈들이 바로 이스라엘 온 족속이다.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의 뼈가 말랐고, 우리의 희망도 사라졌으니, 우리는 망했다’ 한다. 그러므로 너는 대언하여 그들에게 전하여라. ‘나 주 하나님이 말한다. 내 백성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무덤 속에서 너희를 이끌어 내고, 너희를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겠다. 내 백성아, 내가 너희의 무덤을 열고 그 무덤 속에서 너희를 이끌어 낼 그 때에야 비로소 너희는, 내가 주인 줄 알 것이다. 내가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서 너희가 살 수 있게 하고, 너희를 너희의 땅에 데려다가 놓겠으니, 그 때에야 비로소 너희는, 나 주가 말하고 그대로 이룬 줄을 알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
-인사
인사 나눕시다. 성도 여러분 안녕하세요? 서로에게 인사를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파리의 분위기가 그리 좋지 못해서 불편한 마음이 듭니다. 시위를 통해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는 것 참 좋습니다. 민주시민의 권리지요. 그러나 폭력은 안됩니다. 폭력은 단순히 물리적 힘을 발휘하는 것이 아닙니다. 폭력은 사람을 망가뜨립니다. 폭력을 행하는 사람은 폭력에 익숙해집니다. 폭력을 당하는 사람은 폭력에 길들여지고 무력감에 빠지게 됩니다. 물리적 폭력, 언어적 폭력, 제도적 폭력 등 우리 사회에 만연하지요.
오늘은 사순절 제5주일입니다. 폭력을 거부하고 거절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정신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까지 일련의 과정을 보면 얼마나 인간이 폭력적인 존재인지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께 직접 가해진 폭력도 얼마나 잔인하고 흉포합니까? 십자가 사건은 폭력에 대한 거절이기도 합니다. 세상을 위해 염려하고 기도하는 것, 그리스도인의 사명인줄로 믿습니다.
-에스겔을 소개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에스겔’입니다. 오늘 말씀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 또 오늘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성경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필요합니다. 구약성경에는 예언서라는 부분이 있습니다. 예언서는 대 예언서와 소 예언서로 나뉘는데, 대 예언서는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입니다. 소 예언서는 12권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대 예언서라고 해서 더 중요하고 소 예언서라고 해서 덜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책의 크기가 그렇다는 겁니다.
중요한 것은 오늘 우리가 만나는 예언자 에스겔이라는 인물입니다. 에스겔, 그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그가 살았던 시대가 있습니다. 당연한 말 같지만 인간은 누구나 시대와 역사 안에서 살아갑니다. 밖에서가 아니라 안에서 살기에 영향을 받기 마련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시대를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사는 세상이니 당연히 ‘세상이 이렇구나’ 라고 느낍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지금 살고 있는 세상이 어떤 것 같아요? 한국 사회, 프랑스 사회가 어떻다고 말할 수도 있고, 아니면 온 세상이 어떻다고 생각해봐도 좋습니다. 저도 사람이기에 저만의 시선이 있습니다. 저도 제 스스로의 시선이 있지 않겠습니까? 오늘날 요즘 사람들의 모습이 어떻게든 보입니다.
제 눈에는 비친 많은 사람들의 가장 큰 특징은 불안해 보인다는 점입니다. 세상이 평화로운데 그 사람만 불안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세상 자체가 불안하지요. 가까운 곳에서는 여전히 전쟁 중입니다. 물가는 오르고, 살기 힘들다는 소리들이 들려옵니다. 이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습입니다.
-에스겔의 시대
그렇다면 에스겔이 살던 시대는 어떤 시대였을까요? 불행하게도 에스겔은 자신의 나라가 망하는 딱 그 시대의 사람이었습니다. 더욱 불행하게 여겨지는 점은 왕이 된지 3개월 만에 포로가 되어 바빌론에 끌려가는 유다의 왕 ‘여호야긴’이 있었습니다. 그 일행 속에, 그 포로 행렬 속에 있던 사람이 에스겔이라는 사람입니다. 그의 나이는 25살입니다.
자, 여러분, 에스겔이 어때 보입니까? 그의 인생이 행복의 조건들을 가졌나요? 그의 인생에 탄탄대로가 열렸나요? 아니겠지요. 정반대입니다. 언제 죽을 지도 모르고, 앞으로 어떻게 살게 될지도 모르는 포로 신세가 되었습니다. 잘 먹고 잘 사는 문제가 아니라 생존 그 자체를 걱정해야 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 모습이 에스겔에게 주어진 세상입니다.
유다 포로민들에게 주어진 땅은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 사이에 있는 땅, 그발 강가에 자리를 잡고 살았습니다. 성경은 에스겔이 머물고 있던 곳을 ‘델아빕’이라고 하는 데 그 뜻은 ‘홍수 때문에 폐허로 변한 땅’이라는 뜻입니다. 이 곳이 유다 포로민들의 정착지입니다. 이제 이 시기는 바빌론 포로시기입니다.
-절망의 한 가운데서
그런데 구약성경 예언서와 관련된 책을 보다가 아주 흥미로운 대목을 만났습니다. 이 책에서 표현하기를 “유대인들의 이 ‘바빌론 포로 시기’는 가장 풍성하고 창조적인 시기”라고 말합니다. 우리 같이 보통의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말입니다. 조건이 이러한데, 환경이, 상황이 이런 꼴인데 풍성한 창조의 시기라는 말이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그런 이유가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모두가 절망으로 좌절하고 있을 때, 일어서기 위해 애쓰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하는 사람,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절망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입니다. 절망과 좌절로 모든 것을 끝내는 사람과는 분명히 다르겠지요.
저는 성경 속 ‘바빌론 포로시기’를 대할 때마다 늘 ‘빅터 프랭클’이라는 사람과 ‘윤동주’ 시인이 떠오릅니다. 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만 윤동주 시인과 빅터 프랭클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비극적이고 참혹한 역사의 현장에서 아름답게 피어오른 꽃 한 송이와 같은 사람입니다. 빅터 프랭클은 나치의 포로수용소로 끌려갔다가 살아남은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수용소에서 모두가 악마가 되어가는 현실 속에서 좌절했습니다. 악마가 되어가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이 사람은 이 때 드러나는 인간의 모습을 두 단어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혐오감, 그리고 무감각.
그분의 책 가운데 한 대목 읽어드리겠습니다. <한 사람이 숨을 거두자 나머지 사람들이 아직 체온이 남아 있는 시신 곁으로 다가갔다. 그 중에 한 사람이 죽은 사람이 먹다 남긴 지저분하기 짝이 없는 감자를 낚아채 갔다. 그 다음 사람은 시신이 신고 있는 나무 신발이 자기 것보다 좋다고 생각했는지 신발을 바꾸어 갔다. 세 번째 사람도 죽은 사람의 외투를 가지고 앞에 사람이 했던 것과 똑같은 행동을 했다… 나는 담담한 심정으로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았다.>
딱 이랬습니다. 유대 백성은 모두 불안한 포로의 삶을 하나님을 떠나는 것으로 바꾸었습니다. 왜냐하면 바빌론의 신 마르둑은 풍요의 신이고, 힘의 신, 능력의 신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마르둑 보다 약하기 때문에 ‘우리가 졌다, 우리가 망했다’ 마음을 먹고, 굴복하니 마음이 편해집니다. 그리고 그 땅에서의 삶이 보전이 되는 듯한 마음이 듭니다.
한편으로 유대 백성들은 바빌론의 문화에 동화되어 살기로 작정했습니다. 신앙도 믿음도 이제는 남의 일, 성가시고 귀찮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실 있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은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이 있습니다. “여기 촛불 하나가 켜있습니다. 바람이 불기 시작합니다. 어떻습니까? 촛불이 위태위태하지요? 이제 바람은 폭풍이 되었습니다. 폭풍 앞에서 작은 불은 꺼져버립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여기에 큰 불이 났습니다. 폭풍과 같은 큰 바람이 불어오면 어떻게 될까요? 불은 더욱 거세게 타오릅니다. 곤경과 재앙 앞에서 약한 신앙은 더욱 약해집니다. 하지만 강한 신앙은 더욱 굳세어 집니다.” 이것은 제 말이 아니라 빅터 프랭클의 말입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을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일꾼으로 삼아 하나님을 거절만 해온 백성들, 죄를 짓는 일에 익숙하고,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은 굳을 대로 굳어진 백성에게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 명하셨습니다. 들을 생각이 없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말씀을 전한다는 것은 외롭고도 힘겨운 일입니다. 이런 상태에 놓인 에스겔을 하나님은 어느 골짜기로 이끄십니다.
-에스겔 하나님 앞에 서다.
오늘 말씀은 에스겔이 본 환상입니다. 하나님께 이끌려서 어느 골짜기 한 가운데 에스겔은 놓였습니다. 그런데 그곳을 보니 죽은 뼈들로 가득한 골짜기라는 사실을 보았습니다. 에스겔의 마음에 드는 생각은 무엇일까요? 두려움일까요? 이 장면에서 희망을 발견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물으셨습니다. “사람아, 이 뼈들이 살아날 수 있겠느냐?”
지금 우리의 현실은 어쩌면 에스겔이 보았던 해골의 골짜기와 다를 바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풍요로운데, 풍요를 약속하는 거짓 신들을 따라가느라 하나님을 잊은 채 살아갑니다. 욕망을 따라 사느라 버겁고, 남들과 여전히 비교하고 괴로워합니다. 하나님을 잊고 산다는 것은 하나님과 상관 없는 삶을 산다는 말과 동의어입니다. 이 말은 내 삶에서 하나님의 뜻을 묻는 시간이 없다는 말하고도 같은 말입니다. 이것이 이미 우리에게 익숙한 삶이 되어버렸는지도 모릅니다. 말라비틀어진, 도무지 생기라고는 찾을 수 없는 모습이 공포 영화의 한 장면이 아니라 생생한 나의 현실, 우리의 현실이라는 것을 찾아내야 하는 것이지요.
모두가 이제는 어쩔 도리가 없다고 말할 때 예언자 에스겔은 놀라운 비전 하나를 본 것입니다. 그 곳, 메마른 뼈들이 가득한 참담한 광경 속에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물으십니다. “사람아, 이 뼈들이 살아날 수 있겠느냐?” 에스겔은 “주 하나님, 주님께서는 아십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하나님은 뼈들에게 당신의 계획을 전하라고 명하십니다. 그들 속에 생기를 불어넣어, 다시 살아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직접 하시는 것이 아니라 에스겔에게 대언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고 사람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뼈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뼈들이 서로 이어지고, 뼈들 위에 힘줄이 뻗치고, 살이 오르고, 그 위에 살갗이 덮였습니다. 하지만 아직 그들은 온전히 일어서지 못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생기에게 대언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외칩니다. “너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불어와서 이 살해당한 사람들에게 불어서 그들이 살아나게 하여라.” 에스겔이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자, 그들이 살아나 제 발로 일어나서 엄청나게 큰 군대를 이루었습니다. 아담의 코에 불어넣어졌던 그 바람, 성령의 바람이 불자 그 뼈들이 살아났습니다.
-살아날 수 있겠는가?
오늘 이 본문의 말씀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 것 같습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죽은 사람인지, 살아있는 사람인지 먼저 보라고 하신다고 저는 믿습니다. 좌절로, 절망으로, 열등감과 열패감으로, 방탕과 무기력으로, 냉소와 혐오로, 그리고 타인에 대한 무관심으로 이 생을 이어가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사람아, 이 뼈들이 살아날 수 있겠느냐?” 이 말씀에 주님 앞에 서서 대답할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이 사순절기에 간절히 소망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