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4월 30일 부활절 제 4 주 (2023년-18호)

제목 : 우리는 하나님의 질그릇
본문 : 고린도후서 4:7-11

【고린도후서 4:7-11】

우리는 이 보물을 질그릇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 엄청난 능력은 하나님에게서 나는 것이지, 우리에게서 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방으로 죄어들어도 움츠러들지 않으며,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으며, 박해를 당해도 버림받지 않으며,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의 죽임 당하심을 우리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그것은 예수의 생명도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살아 있으나, 예수로 말미암아 늘 몸을 죽음에 내어 맡깁니다. 그것은 예수의 생명도 또한 우리의 죽을 육신에 나타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인사 나눕시다.

파리중앙교회 성도 여러분, 모두 안녕하세요? 모두 그립고 반갑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인사드립니다. 개인적인 일이지만 한국에서 머무는 일이 뭐가 뭔지도 모르게 바쁘게 지나고 있습니다. 다들 같은 경험을 갖고 계실테니 말을 덧붙이지는 않겠습니다만 잘 지내고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다음 주일, 5월 첫 주일에는 돌아가서 뵙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선택한 말씀은 고린도후서 4:7-11의 말씀입니다.

-My Left Hand

한국에서 지내면서 몇몇 지인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대부분이 50대 나이를 가진 분들입니다. 나이가 많이 들었다고는 할 수 없겠습니다만 한편으로는 마냥 젊지만은 않은 나이대의 지인들이었습니다. 대화를 하다 보니 우연찮게도 이런 말을 몇 차례나 듣게 되었습니다. ‘인생을 살아보니…’ 인생을 지내보니 이렇다, 저렇다. 이러저러하게 느끼고 회상하고 반성하는 말들이었습니다. 모두가 인생에 크나큰 파도를 넘느라 상처입기도 하고, 그릇으로 친다면 이가 나간 부분이 생겨난 사람들이 참 많구나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우연히 ‘왼손 피아니스트 이훈’이라는 분을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제가 직접 만난 건 아닙니다만 사람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있구나 하고 따뜻한 마음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분은 음악학교로도 유명한 선화예고를 졸업하고 독일과 네덜란드에서 유학하면서 촉망받는 연주자로 빠르게 성장했습니다. 그러다가 2012년 미국 신시내티 대학에서 박사학위 논문을 쓰다가 몸을 혹사하다가 뇌졸중으로 쓰러졌습니다. 논문을 쓰기 위해서 너무나 많은 에너지를 쓰고, 신경을 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혼수상태에서 깨어나 보니 이 뇌졸중으로 인해서 후유증으로 오른쪽 팔 다리가 마비되고 언어장애를 갖게 되었습니다. 아시겠지만 피아니스트에게 오른쪽 팔 다리를 못 쓴다는 것은 너무나도 치명적인 것이었습니다. 피아노 치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주로 멜로디라인은 주로 오른손으로 연주하기 때문에 피아노를 더 이상 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한쪽 발로만 페달을 밟게 되니 균형을 자주 잃어서 음악의 리듬을 맞출 수가 없었습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피아노를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은사님께서 ‘왼손으로 만이라도 해볼래?’ 라는 말에 갑자기 희망을 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알고 보니 왼손만을 위한 피아노 연주곡이 1000여 곡이 넘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스승은 이훈 씨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른 손을 위한 곡은 없어도 왼손 연주자용 악보는 많다. 하나님이 너를 특별하게 쓰시려고 하는 거다.” 어떻게 들으면 자신이 갖게 된 장애를 하나님이 특별하게 쓰시려고 하시는 거라는 말에 동의하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훈 피아니스트는 4년여 간의 재활기간을 이겨내고 2016년 다시 첫 독주회를 열었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꿈을 이렇게 전했습니다. “감사함을 잃지 않는 것, 그것이 저의 꿈입니다.”

우리의 삶은 이처럼 다채롭고 다양하고 예측이 불가한 일이 벌어집니다. 어떤 분은 사람의 이런 여러 모습과 상황을 이렇게 표현하더군요. 사람의 삶, 사람의 인생은 명사가 아니라 형용사이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명문대학, 월급 많이 받는 직장, 비싼 차, 좋은 집과 같이 명사가 인생이 아니라 그 가운데서 다양한 색을 내뿜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분에게는 (명사) 그냥 피아니스트가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에게 (형용사)인 ‘위로를 주는’ 피아니스트가 인생의 목적이 되었습니다.

-질그릇 사람

사람의 몸은 참 연약합니다. 유튜브나 텔레비전에서는 건강하고 탄탄한 몸을 가진 사람들만 나오지만 그래서 영원히 죽지 않을 것처럼 인생을 설계하지만 지구상에 존재한 인간 어느 누구하나도 죽음을 피해간 사람은 없습니다. 몸이라는 신체를 지닌 인간은 참 약한 존재이기도 하고, 또 그날그날 건강상태에 따라서 몸의 상태가 달라집니다. 거기다가 병이라도 생기면 사람의 몸은 치명적인 한계에 부딪힙니다. 사람은 이렇게 연약한 몸을 가진 존재입니다.

사람을 가리키는 단어가 참 많습니다. ‘몸뚱아리’라고 인간의 신체인 육체만을 의미하는 단어도 사람을 표현하지만 ‘인격’이라는 고귀한 단어를 사용하여 사람을 표현하기도 합니다. 각각의 언어에 사람을 표현하는 단어는 참으로 다양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흔하지만 아름다운 표현은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고린도후서에서는 사람을 가리켜서 인격체나 육신이나 이런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너무나도 생소하게 ‘그릇’(헬, 스큐오스)라고 부릅니다. 그것도 그냥 그릇이 아니라 질그릇입니다. 질그릇은 흙을 빚어 구워낸 토기이지만 유약을 바르지 않은 그릇입니다. 질그릇은 기본적으로 특별한 목적이 있는 그릇이 아닙니다. 밥그릇이 될 수도 있지만, 개밥그릇이 될 수도 있습니다. 여러 가지 용도로 다양하게 사용됩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오늘 말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이 보물을 질그릇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4:7a)

사람은 그릇입니다. 질그릇입니다. 그래서 깨지기 쉽습니다. 망가지기도 쉽구요. 잘 닦아놓지 않으면 어느새 더렵혀지고 맙니다. 사람을 가리켜서 그릇이라고 부른다는 것은, 바울 사도만의 의미를 갖고 있겠지요? 그것은 인간은 위대한 것 같지만 따지고 보면 지극히 연약한 존재라는 뜻이겠지요. 본문 첫 마디가 ‘우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 사도입니다. 넓게 보면 사도 바울과 동역하는 자들은 모두 ‘우리’입니다.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일꾼은 모두 ‘우리’입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바울은 참 잘난 사람입니다. 많이 배우기도 했고, 집안도 평판이 높은 집안입니다. 최고의 지식, 최고의 학문, 최고의 자질을 지녔습니다. 그랬던 바울이 지금 자기 자신을 가리켜서 “질그릇에 지나지 않는다.”고 고백합니다. 왜 그렇게 말할까요? 그의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된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담는 그릇인가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습니다. 길거리나 시장 같은 곳에서 우연히 마주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인격적으로 만났다는 말이 의미하는 바가 있습니다. 인격적인 만남은 인생을 바꿉니다. 여러분, 구약성경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이 마치 질그릇을 짓듯이 흙으로 사람을 빚으신 다음에 하신 일이 있습니다. 사람의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셨습니다. 그제서여 사람은 살아있는 영, 생령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아이들 동화책에 나오는 말이 아니지요.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에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신 것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아! 흙으로 지어진 몸에 하나님의 생기가 담겨야 했다는 것은, 사람의 몸이란 다름 아닌 그릇이라는 뜻이구나!’하고 말입니다.

그릇의 용도는 무엇인가를 담는 것입니다. 담기 위해서는 비워두어야 합니다. 비워야 채울 수 있고, 채워지면 다시 비워놓아야 합니다. 그 사람의 크기를 가리켜서 ‘사람됨’이라고 하지요. 그 사람됨을 ‘그릇’이라고 부르는 오늘 말씀에서 사람이라는 그릇 그 속에 무엇이 담겨 있느냐에 따라서 생김새와 그 쓰임새가 달라진다는 바울 사도의 통찰이 담겨져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말합니다. “우리는 이 보물을 질그릇에 간직하고 있습니다.”(4:7a) 다시 묻습니다. 무엇을 담는 그릇입니까? 보물을 담는 그릇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보물이 무엇입니까? 그릇의 가치는 그 그릇에 무엇이 담겨 있느냐 달려 있는 것 아닙니까? 바울의 이 말씀을 우리에게 가져와 보십시오. 우리 그릇에는 지금 무엇이 채워져 있습니까?

-무엇을 담아오셨나요?

오늘 우리가 주님 앞에 와 앉아있으니 비록 예배의 시간이고, 말씀의 시간이지만 하나님과 일대일로 만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과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과 그냥 무작정, 이유도 없이 만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가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과 만나는 주제가 있습니다. 그 첫 번째는 이것입니다. “무엇을 담았는지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그릇입니다. 질그릇과 같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나’라는 이 질그릇에 일생동안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담아오며 살았습니다. 그렇지요? 모두가 동의하실 것입니다. 이제 묻습니다. 무엇을 담았습니까? 무엇이 담겨져 있나요? ‘나’라는 사람이 ‘나’라는 그릇 안에 담은 것이 무엇인지 보십시오. 내가, 우리가 원하는 것들입니다. 어린아이 하나가 간식을 고를 때도 사탕을 고를 것인지, 과자를 집어 들든지, 쵸코렛을 고르든지 자기의 의사가 듬뿍 담겨 있습니다. 자기가 먹고 싶은 것, 자기가 담고 싶은 것을 담은 것이라는 말입니다.
지금 우리 각자의 그릇에는 우리가 담고 싶었던 것들이 가득 담겨 있을 것입니다. 모두 인정하실 것입니다. 인정하기 싫어도 어쩔 수 없습니다. 사실입니다. 우리가 바라고 소망하고, 때로는 욕망했던 모든 것이 담겨진 것이 우리 마음 그릇입니다. 남들에게 밝히기 싫어도, 조금은 부끄러워 숨기고 싶은 마음이 들어도 우리 각자의 그릇에 담긴 것은 우리가 잘 압니다. 그 그릇 속을 들여다보시라는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다시 보십시오. 무엇이 담겨져 있나요? 추하고 흉해서 들여다보기가 힘든 것이 있으신가요? 그럴 수도 있습니다. 너무나도 소중하고 아끼는 것이 들어있나요? 아마도 모두들 한 두 가지 정도는 그런 것이 담겨있을 것입니다. 아니면 너무 깊숙이 숨겨놓아서 내가 내 그릇에 담았다는 사실 조차도 잊어버린 것도 있을 수 있습니다. 먼지가 겹겹이 쌓인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자, 여러분, 중요한 질문입니다. 여러분의 그릇 속에 주님은 계신가요? 여러분, 내 삶의 주인이라고 고백하는 주님입니다. 주님이 계시다면 어떻게 계신가요? 질문이 어려워 이해하지 못하는 분이 계시지 않기 바랍니다. 그릇 어느 자리에 있느냐는 말입니다.

-무엇을 담고 싶은가요?

이제 우리는 두 번째 질문을 들어야 합니다. 그것은 이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무엇을 담고 싶은가?”라는 질문입니다. 여러분의 그릇에 지금까지 담았던 것들 여러분들이 다 확인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지금부터 나의 인생 끝 시간까지 무엇을 담고 싶은가? 라는 질문에 응답해야 합니다.

여러분, 구약 성경의 욥이라는 인물 아시지요? 욥은 하늘 아래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이었지만 모든 것을 다 잃게 된 사람입니다. 자식도 다 잃고, 가진 재산도 다 잃고 나서 자신도 불치의 병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의 마음을 다 이해하기가 참으로 어려울 것입니다. 이런 욥에게 ‘엘리후’라는 이가 찾아와서 이런 말을 남깁니다.

“그대는 하늘을 우러러 보라. 그대보다 높이 뜬 구름을 바라보라.”(욥 35:5)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엘리후’가 말한 것은 물리적인 저 하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이해하시겠습니까? ‘하늘을 우러러 보라. 사람보다 높이 떠 있는 구름을 바라보라. 저 구름 너머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말은 오늘 우리가 앞에서 나눈 제 그릇 속에 자신이 담은 것을 넘어서 이제 무엇을 담으려는가 하는 물음과 맞닿아 있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땅의 것들을 담느라고 수고했습니다. 땅은 소란하고 시끄럽습니다. 다툼이 있고, 싸움이 끊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땅에 살기에 땅의 이 소란하고 어수선함을 떠날 수는 없지만 우리가 담은 모든 것들이 땅의 것들만 담겨져 있다면 그것이 우리를 참으로 참되게 살게 만들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그릇 속에 담은 것들이 우리를 비록 풍족하게도 하고, 안락하게도 만들지는 모르겠으나 하지만 영원하신 하나님을 내 버린 우리의 삶은 불행한 삶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질그릇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것,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을 담아야 합니다. 즉 우리는 하늘을 담는 그릇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이런 삶의 지향들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이런 가치를 갖고 살지 않으면 아무리 많은 것들은 담고 산다고 해도 그 삶의 끝에 허망함의 나락이외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을 것입니다. 그의 인생의 어리석음 외에는 남는 것이 없을 것 입니다.

-말씀을 맺으며

오늘 말씀의 지은이, 오늘 말씀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두 번째 편지를 쓴 바울이라는 사람! 그가 살던 그 시대는 어마어마한 계급 사회이고, 차별적인 사회입니다. 그가 운이 좋아서 모든 것을 다 지닌 채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드높이고, 자신의 가문, 자신의 조상들이 믿던 바를 실현하기 위해 그의 젊은 날을 모두 투자하여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이려고 애쓰던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 바울, 예수님을 박해하던 사람이 예수님을 위해서 박해받는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교회를 핍박하던 사람이 십자가를 자랑하는 사람이 되었고,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세우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를 증거 하다가 체포되고, 감옥에 갇히고 매를 맞았습니다.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굶주리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그의 인생은 망하지 않았습니다.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이라고 칭함을 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물론 우리가 그런 칭호를 들으려고 이 세상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만 그가 선택한 인생은 비참함이 아니라 하늘을 담는 그릇을 자청한 삶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부르심을 받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지향해야 할 가치가 있다면 그것이 무엇입니까? 마음이 그릇이라면, 인생이 그릇이라면 예수 그리스도를 담았던 사람의 모습을 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죽고 예수님이 사는 인생을 살아내야 합니다. ‘나’라는 자아로 그득그득 채우고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으로 살아가는 인생이기를 바랍니다. 깨지기 쉬운 그릇 같은 인생이 아니라 예수님의 생명을 사방에 드러내는 인생이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생명, 한 번 살고 하나님께로 돌아갑니다. 엄연한 사실입니다. 죽음이 오기 전 우리 인생이 담긴 그릇들을 살펴보고, 비워내고 채워나갈 것들을 위해 기도하고 결단하는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