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5월 14일 부활절 제 6 주 (2023년-20호)

제목 : 인생의 주도권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본문 : 욥기 23:1-10

욥이 대답하였다. 오늘도 이렇게 처절하게 탄식할 수밖에 없다니! 내가 받는 이 고통에는 아랑곳없이, 그분이 무거운 손으로 여전히 나를 억누르시는구나! 아, 그분이 계신 곳을 알 수만 있다면, 그분의 보좌까지 내가 이를 수만 있다면, 그분 앞에서 내 사정을 아뢰련만, 내가 정당함을 입이 닳도록 변론하련만. 그러면 그분은 무슨 말로 내게 대답하실까? 내게 어떻게 대답하실까?

하나님이 힘으로 나를 억누르실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내가 말씀을 드릴 때에, 귀를 기울여 들어 주실 것이다. 내게 아무런 잘못이 없으니, 하나님께 떳떳하게 말씀드릴 수 있을 것이다. 내 말을 다 들으시고 나서는, 단호하게 무죄를 선언하실 것이다. 그러나 동쪽으로 가서 찾아보아도, 하나님은 거기에 안 계시고, 서쪽으로 가서 찾아보아도, 하나님을 뵐 수가 없구나. 북쪽에서 일을 하고 계실 터인데도, 그분을 뵐 수가 없고, 남쪽에서 일을 하고 계실 터인데도, 그분을 뵐 수가 없구나. 하나님은 내가 발 한 번 옮기는 것을 다 알고 계실 터이니, 나를 시험해 보시면 내게 흠이 없다는 것을 아실 수 있으련만!

-인사합시다.

주안에서 사랑하는 파리중앙교회 성도 여러분, 모두 안녕하십니까? 여러분께 주님 평화의 인사를 전합니다. 여러분 모두 한 주간의 삶을 주님 앞에 가지고 나오신 줄로 믿습니다. 삶의 즐거움도, 삶의 고단함도 모두 주님과 함께 고백하고 나누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구두 한 켤레

혹시 여러분, 여러분이 벗어놓은 신발을 유심히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갑자기 난데없이 뜬금없는 소리처럼 들리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한국 방문 기간 동안에 짐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신발을 여러 켤레를 가지고 가지 않고, 가지고 간 운동화만 줄곧 신고 다녔습니다. 어느 날 문득 벗어놓은 신발을 보니 신발이 피곤해 보였습니다.
여러분, ‘빈센트 반 고흐’라는 화가 아시지요? 반 고흐는 자신과 주변 사람들의 낡은 신발을 자신의 화폭에 자주 담았던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 중에 “구두 한 켤레”라는 제목이 붙은 그림이 있습니다. 그런데 문학을 하는 작가나 철학자들은 이 구두 한 켤레의 그림을 보면서 갖가지 의미를 부여합니다. ‘하이데거’라는 독일의 철학자는 고흐의 이 구두가 그의 삶의 궤적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들으면 대단한 통찰 같기도 하지만 당연한 말입니다. 그가 늘 신고 다니던 신발을 보면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지요. 문학을 하시는 이승우 교수란 분은 이 ‘구두 한 켤레’ 작품은 고흐의 자화상이라고도 표현했습니다. 사실 누구나 그렇지만 우리 모두는 세상에 흔적을 남깁니다. 그리고 우리가 남긴 유형, 무형의 흔적들은 우리가 누구였는지, 우리가 현재 누구인지를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반 고흐는 네덜란드 개혁교회 목사의 아들입니다. 청년시절 아버지의 뒤를 이어 목회자가 되려고 하였습니다. 신학 수업도 받았고, 후에는 벨기에의 가난한 광산촌에 들어가 노동자들을 위한 목회도 했습니다. 1880년 8월 목회자를 그만 두고 화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간 곳이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 파리입니다. 이곳에서 그린 작품이 <구두 한 켤레>입니다. 온종일 신고 있다가 막 벗어놓은 듯한 신발입니다. 오랫동안 신어서 낡아빠지고, 더러워지고, 구두의 목은 구겨져 접혀 있습니다.
사람들은 고흐를 정신질환이 심각했던 사람으로 보지만 한편으로 고흐의 작품에는 기독교 신앙이 많이 배어져 있습니다. 실제로 고흐가 남긴 수많은 편지에는 기도문, 교회에 관한 이야기, 신앙논쟁들이 많이 담겨 있습니다. 고흐의 <구두 한 켤레>는 마치 순례자가 신고 걸었던 구두 같습니다. ‘삶’이라는 여행길을 치열하게 걸었던 고흐의 고단한 하루가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습니다.

-욥의 자화상

오늘 본문을 소개하기 위해 앞 말이 길었습니다. 오늘 말씀 욥기 23장 역시 고난이 닥친 현실 앞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치열하게 살고자 한 ‘욥’의 자화상 같은 말씀입니다. 그중 오늘 마지막 절 10절의 욥의 고백이 생생합니다.
“하나님은 내가 발 한 번 옮기는 것을 다 알고 계실 터이니, 나를 시험해 보시면 내게 흠이 없다는 것을 아실 수 있으련만!”
개역 성경으로 읽어보면 좀 더 생생합니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마치 먼 순례의 길을 마치고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깨달은 순례자 같은 욥입니다.

욥의 고난은 까닭이 없습니다. 이유를 모른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인과응보로 가득합니다. 세상일에 뭔가 잘못했기에 벌을 받는 것이고, 선을 행했으면 당연히 상이 돌아온다고 판단하기가 쉽습니다. 하지만 욥은 온전하고 정직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했고 악에서 떠난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욥에게 인과응보의 인간사의 논리가 전혀 통용되지 않습니다. 그의 불행에 이유가 없다는 말입니다. 자식도 다 잃고, 재산도 다 잃었습니다. 온몸에는 악성 피부병으로 고통당합니다. 마지막은 그의 아내의 말입니다.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는 게 낫겠다.”(2:9) 악담도 이런 악담이 있을까 싶습니다.

그러나 욥은 말합니다. “내가 발 한 번 옮기는 것을 다 알고 계시니”

사실 욥기를 읽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왜인가 하면 끝없이 이어지는 신앙논쟁이 그 주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찾아온 친구들과 욥은 거칠게 논쟁합니다. 친구들은 욥을 나무랍니다. 욥이 저지른 잘못 때문에 이런 불행이 닥친 것이니 지금이라도 허물을 자백하라. 자백하면 하나님이 욥을 용서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욥은 이 생각에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친구들의 생각은 인과응보적인 주장이고 논리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세상사는 얼핏 보면 무척이나 인과적입니다. 모든 벌어진 일에는 원인이 반드시 있습니다. 특히나 신앙적인 측면에서는 하나님 앞에 잘못했기에 벌을 받는다는 신앙적인 태도가 팽배한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세상사에 얼마든지 예외가 있습니다. 이유를 도무지 알 수 없는 불행을 당한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 모두에게 인과응보적인 손가락질을 하면 오늘날로 말하자면 2차 가해가 됩니다.

그래서 욥은 저항합니다. “너희는 내 마음을 모른다. 내 처지를 모른다. 내 신앙을 모른다. 내 몸을 짓누르는 육체의 아픔보다 내 마음을 짓누르는 재앙이 너무 무거워서 견딜 수 없다!” 그래서 욥이 한 말이 오늘 마지막 구절,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실 터이니”입니다. 이 말씀은 의미상 그러나 하나님은 다 아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나’에 주목하십시오. ‘그러나’ 이 단어에는 사람들은 모르지만, 사람들은 내 사정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내가 가는 길을 하나님은 아신다는 의미입니다. 욥기는 단순히 ‘고난을 겪는 자의 항변’이 아닙니다. ‘고난 중에 하나님을 이야기하기’가 욥기의 핵심입니다.

‘내가 발 한번 옮기는 것’은 ‘내가 당한 처지’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모르지만 하나님은 욥이 가는 길을 아십니다. 욥이 당한 처지를 헤아리십니다. 나만 이 길을 가고 있다면 답이 없습니다. 나만 이 일을 당했다면 억울합니다. 나를 둘러싼 처지만 생각하면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은 “어째서 내게(Why me)”일 뿐입니다.
하지만 욥은 시련을 만났을 때, “어째서 내게?”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속내를 말했습니다.
“주신 분도 주님이시요, 가져가신 분도 주님이시니, 주님의 이름을 찬양할 뿐입니다”(1:21b)
욥은 깨달았습니다. “Why not me, 나라고 불행에서 예외일 수는 없다!” 입니다. 고난은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한 말씀만 하소서

그럼에도 욥은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치열하게 물었습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욥기만 읽으면 저절로 떠오르는 작가가 있습니다. 박완서 작가입니다. 박완서 작가는 급작스럽게 닥친 아들의 죽음 이후 하나님으로부터 한 말씀이라도 듣기를 원했습니다. 욥도 마찬가지입니다. 고통의 원인을 알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욥에게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욥이 하나님께 따졌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욥은 하나님의 법정에 들어서기를 원했습니다. 이런 탄식이 오늘 말씀 2-7절의 말씀입니다.

욥의 탄식은 절망이기도 하지만 절망만은 아닙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탄원기도입니다. ‘탄원’이라는 말은 하소연이라는 뜻입니다. 도와달라는 부르짖음입니다. “어찌하면 하나님을 찾을 수 있습니까, 어찌하면 말씀드릴 수 있습니까, 어찌하면 내가 깨닫겠습니까!”
이런 안타까운 부르짖음 가운데서도 욥은 확신합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무죄를 선언하실 것이다. 하나님이 나를 떳떳한 자로 세워주실 것이다.” 욥의 이런 모습을 보면, 예수님의 옷자락이라도 닿으면 내가 나을 것이라는 마음을 가졌던 여인의 모습이 오버랩 됩니다.

“한 말씀만 하소서. 내 영혼이 나으리이다.”

-눈을 들어 하늘을 보라

욥은 시련 중에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만 체험하면 모든 문제가 다 풀릴 텐데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동쪽으로 가서 찾아보아도, 하나님은 거기에 안 계시고, 서쪽으로 가서 찾아보아도, 하나님을 뵐 수가 없구나. 북쪽에서 일을 하고 계실 터인데도, 그분을 뵐 수가 없고, 남쪽에서 일을 하고 계실 터인데도, 그분을 뵐 수가 없구나.”(8-9절)

여러분도 이런 심정을 느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욥의 이런 탄식은 시편 139편과 비교됩니다. 들어보십시오. “내가 주님의 영을 피해서 어디로 가며, 주님의 얼굴을 피해서 어디로 도망치겠습니까? 내가 하늘로 올라가더라도 주님께서는 거기에 계시고, 스올에다 자리를 펴더라도 주님은 거기에도 계십니다.”
욥은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고 탄식하는데, 시인은 하나님을 피할 수가 없다고 고백합니다.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욥에게는 수직의 차원이 없습니다. 지평선만 바라보면서 하나님을 찾습니다. 눈을 들어 하늘을 보시기 바랍니다. 눈을 감고 내 영혼의 깊은 곳을 탐색하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하늘을 보지 않는 생은 흔들리는 인생입니다. 땅만 보고, 땅에서 일어나는 일이 전부인 줄로만 배우고 살면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세상이 도전의 자리만 되고 맙니다. 사랑하고 어울리는 자리임을 알지 못한 채로 생을 끝내게 됩니다.

도종환 시인의 싯구가 생각납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흔들리고 넘어지고 좌절하면서 성장하는 것이 우리 삶입니다.

-상처인가, 무늬인가

아무리 큰 배라고 하더라도 작은 키가 움직이는 방향대로 나아가는 법입니다. 아무리 거센 시련의 바람이 불어와도 우리 주님 예수님을 향한 믿음의 키를 놓지 마십시오.
욥은 고통을 인과응보로 풀지 않았습니다. 고통이라고 부르지 않고, 시험하시고 단련하신다고 불렀습니다. 단련은 견뎌내는 것입니다. 견딜 줄도 알고, 견디는 법도 배우는 것이 인생살이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상처에 허덕입니다. 상처 때문에 슬퍼하고 괴로워합니다. 일생을요! 내게 상처 준 사람, 내게 상처 되었던 일들을 부둥켜안고 곱씹으며 자신의 일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여러분도 그러신가요?

여러분에게 제안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다시 묻겠습니다. 여러분에게 벌어졌던 일들, 상처인가요? 저는 상처대신에 무늬라는 단어를 드리고 싶습니다. 상처가 아니라 여러분 인생의 무늬 말입니다. 상처 많은 나무가 아름다운 무늬를 남기는 재목이 됩니다. 우리의 인생이 아무리 고난과 고통과 상처로 얼룩져 있다 해도 그것을 무늬로 받아들이는 일은 신앙의 일입니다. 신앙은 이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신앙의 위대한 힘입니다.

-인생의 주도권

인생의 주도권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내가 주도하는 인생이면 미완성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인생이기에 아름다운 끝이 있습니다. 살아있는 순교자로 불린 루마니아의 목사 ‘리처드 범브란트’라는 분이 계십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공산 체제가 들어선 루마니아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모질게 고문을 당하고 살아나신 분입니다. 이 분이 1966년 5월 미국 상원의회 청문회에서 말할 기회가 생겼습니다. 그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심판하실 때 우리가 어떻게 시련을 견뎌냈는지를 보시지 않고,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였는지를 보실 것입니다.”

시련 중에 있습니까? 여러분 어려움 가운데 고통당하고 고민하십니까? 하나님을 더 사랑하십시오. 하나님을 더 의지하십시오. 우리 인생은 하나님이 주도하십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