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6월 18일 성령강림 후 제3주 (2023년-25호)

제목 : 하나님의 얼굴을 보다
본문 : 창세기 33:1-10

야곱이 고개를 들어 보니, 에서가 장정 사백 명을 거느리고 오고 있었다. 야곱은, 아이들을 레아와 라헬과 두 여종에게 나누어서 맡기고, 두 여종과 그들에게서 난 아이들은 앞에 세우고, 레아와 그에게서 난 아이들은 그 뒤에 세우고, 라헬과 요셉은 맨 뒤에 세워서 따라오게 하였다. 야곱은 맨 앞으로 나가서 형에게로 가까이 가면서, 일곱 번이나 땅에 엎드려 절을 하였다.
그러자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끌어안았다. 에서는 두 팔을 벌려, 야곱의 목을 끌어안고서, 입을 맞추고, 둘은 함께 울었다. 에서가 고개를 들어, 여인들과 아이들을 보면서 물었다. « 네가 데리고 온 이 사람들은 누구냐? » 야곱이 대답하였다. « 이것들은 하나님이 형님의 못난 아우에게 은혜로 주신 자식들입니다. » 그러자 두 여종과 그들에게서 난 아이들이 앞으로 나와서, 엎드려 절을 하였다. 다음에는 레아와 그에게서 난 아이들이 앞으로 나와서, 엎드려 절을 하였다. 마지막으로 요셉과 라헬이 나와서, 그들도 엎드려 절을 하였다. 에서가 물었다. « 내가 오는 길에 만난 가축 떼는 모두 웬 것이냐? » 야곱이 대답하였다. « 형님께 은혜를 입고 싶어서, 가지고 온 것입니다. » 에서가 말하였다. « 아우야, 나는 넉넉하다. 너의 것은 네가 가져라. » 야곱이 말하였다. « 아닙니다, 형님, 형님께서 저를 좋게 보시면, 제가 드리는 이 선물을 받아 주십시오. 형님께서 저를 이렇게 너그럽게 맞아 주시니, 형님의 얼굴을 뵙는 것이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 듯합니다.

-인사

주안에서 사랑하는 파리중앙교회 성도 여러분, 주님의 평화를 전합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우리가 이렇게 모였습니다. 무더운 날씨 속에 하루하루 살아내시느라 지난 한 주간 수고 많으셨습니다. 오늘 이렇게 귀한 시간 모였습니다. 이 시간이 참으로 귀한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서로에게 평화의 인사를 전하고 오늘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사람들

오늘 설교는 한 인물을 다룹니다. 성경에는 참으로 많은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특히 구약에는 사울, 사무엘, 삼손 등, 우리가 미처 잘 알지 못하는 인물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듯 하지만 잘 모르는 인물들을 소개하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생각이 어디에 미치는가 하면, 성도들이 “흥미로워할까?” 라는 생각으로 모아지기도 합니다. 혹시 “성경 속 이 사람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하고 자신의 삶과 멀리 떨어진 사람으로만 느끼면 참 의미 없는 소리가 되어버립니다. 이 사람들은 옛 사람들입니다. 사람이란 시대의 산물입니다. 그 시대 문화, 자연 환경, 먹는 음식, 삶의 양식들이 우리와 다른 옛날 사람들에 대해 말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이해가 쉽지 않기에 그렇습니다.

하지만 사람 자체만 놓고 보면 다릅니다. 그 사람을 관심을 가지고 잘 들여다본다는 것은 신앙적으로 의미가 있습니다. 그 속에 악마도 있고, 그 속에 하나님의 모습도 숨겨져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들 속에 “내가 있습니다.” 나의 모습이 타인에게 담겨져 있다는 말입니다. 타인을 통해 나를 보는 것이지요. 제 말을 이해하시겠지요? 사람에 대해 깊은 관심과 애정을 가지면 자신을 더욱 깊이 이해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가장 잘 이해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야곱

오늘 말씀에서 소개하고 있는 인물은 “야곱”이라는 인물입니다. 창세기가 총 50장인데, 25장에 야곱의 출생이 소개되고 있고, 35장까지 창세기의 주인공 격입니다. 그의 죽음은 49장에 있습니다. 꽤나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것을 보면 창세기가 소개하는 아주 중요한 인물임에 분명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의 인생을 살펴보자면, 성경에 많은 분량을 차지할 정도로 야곱은 존경받고 본받을 만하던가요? 꼭 그렇지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의 할아버지 아브라함처럼 믿음이 있지도 않습니다. 그 아들인 요셉처럼 하나님 앞에서 충실하거나 충직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성경이 소개하는 야곱의 인생은 그야말로 파란만장하고, 한편의 드라마 같은 인생입니다. 야곱의 인생을 보면 하나님이 없는 듯 살다가도 어느새 하나님 아니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도 하는, 어쩌면 오늘 우리 현대인들의 욕심과 탐욕, 좌절과 절망의 모습을 많이 담고 있는 야곱입니다. 이 속에서 또다시 한번 야곱은 하나님을 체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 된 듯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나누는 말씀 이야기의 핵심입니다.

최근 책을 읽다가 발견한 내용인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러분, <노인과 바다>, <무기여 잘 있거라>를 쓴 소설가 어니스트 헤밍웨이 아시지요? 이 소설가가 세상에서 가장 짧은 소설을 쓴 적이 있습니다. 영어 단어 6개로 이루어진 소설입니다. 궁금하시죠? 소설은 이렇습니다. “For sale, Baby shoes. Never worn” 우리말로 굳이 번역하자면 “아기 신발 팝니다. 한 번도 안 신었어요.” 왜 아기 신발을 팔까요? 그것도 한 번도 안 신은 신발을? 아니 한 번도 안 신은 게 아니라 한 번도 못 신겨 본 아기 신발을 왜 팔려고 내놓았을까요? 누군가가 태어날 아기에게 신기려고 새로 샀을텐데, 왜 팔려고 내놓았을까요? 무슨 사연이 있을까요?
작가는 이 짧은 글을 읽는 독자들의 상상력을 불러일으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의 인생 속에, 그 속에 어마어마한 사건들이 담겨져 있지요. 오늘 말씀 속 야곱이라는 인물에게도 그렇고, 이 자리에 계신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얼굴

얼굴이 잘 생기고 예쁘고 화려한 사람들이 많은 세상입니다. 어쩌면 얼굴이야말로 우리 내면의 모습을 잘 드러내 보여 줍니다. 화가 났는지, 기쁜지, 혹은 거짓말을 하는지, 진심인지 얼굴을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겉보기에는 매우 아름답고 멋져 보여도 인생의 깊이가 드러나지 않는 얼굴도 있습니다. 잘 생긴 것은 아닌데, 형언하기 어려운 아름다움이 배어져 있는 얼굴도 있습니다. 수술로 얼굴의 모양은 바꿀 수 있지만, 얼굴이 드러내는 깊이까지 바꿀 수는 없습니다.

-출생

오늘 말씀의 마지막 문장은 이것입니다. “형님께서 저를 이렇게 너그럽게 맞아 주시니, 형님의 얼굴을 뵙는 것이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 듯합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다니요? 그만큼 야곱의 마음을 잘 표현하는 말은 없을 것입니다.

에서와 야곱은 쌍둥이 형제입니다. 수십 년을 서로 상종도 하지 않다가 상봉하게 된 이 장면에서 야곱이 하게 된 말입니다. 형 ‘에서’의 얼굴을 보고서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처럼 기쁘다는 표현이지요. 그냥 기쁜 감정의 표현은 아닐 것입니다. 오랜 감정의 앙금이 눈 녹듯 사라지게 된 장면의 모습입니다.
오늘 이 두 사람은 이렇게 반갑게 만나지만 하지만 서로에게 결코 다정하고 친근한 사이가 아니었습니다. 일생을 서로 질투하고 대결하고, 경쟁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이 태어났을 때 먼저 나온 아이는 살결이 붉은데다가 온몸이 털투성이어서 그 이름을 ‘에서’라고 했고, 나중에 나온 아이는 형의 발뒤꿈치를 잡고 있어서 이름을 ‘야곱’이라고 지었습니다. 우리말에도 “발목을 잡는다”는 말이 있는데, 그다지 좋은 뜻은 아니지요? 두 아이는 한 배에서 났으면서도 기질은 영 딴판이었습니다. 25장 22절에 보면 어머니 태중에 있을 때부터 서로 싸웠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상황을 어머니 리브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렇게 괴로워서야, 어떻게 견디겠는가?” 마치 싸우고 경쟁하도록 운명을 타고난 이들입니다.

-성장

‘에서’는 성격이 뭐라고 할까요? 남성적이라고 할까요? 성격이 기개가 있고 거리낌이 없는 성품입니다. 에서는 나중에 동생인 야곱이 팥죽 한 그릇으로 장자의 명분을 넘겨달라고 말했을 때에도 야곱의 계책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동생 야곱이 눈먼 아버지를 속여서 축복을 가로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때 동생을 죽이리라고 마음먹게 됩니다.

거기에 비하면 야곱은 정말 비열한 사람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팥죽 한 그릇으로 장자의 직분을 가로챈 것도 문제지만, 아버지를 속이기 위해 몸에 털을 붙이고 음성까지 변조하면서 ‘에서’ 흉내를 내는 모습은 그리 좋아 보이질 않습니다. 잔머리, 잔꾀, 자기의 이득을 위해서는 불의한 일도 마다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경쟁이라는 긴장되는 감정 상태 잘 아시지요? 경쟁 상대와 다퉈 보셨지요? 이기셨나요? 지셨나요? 승패 여부와 상관없이 그런 감정을 지속하면 모든 사람에게 상처가 납니다.

-다툼의 결과

“야곱과 에서”는 서로 닮아있지 않습니다만 그들의 조상이 섬겨 온 하나님의 모습과도 닮아있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가 거울을 통해서나마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봅니다. 그러다 문득 우리 얼굴이 무엇을 닮아 있는 지 놀라게 됩니다. 여러분은 누구를 닮았습니까? 무엇을 점점 닮아갑니까? 겉모습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피부의 상태를 놓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울에 비친 여러분의 모습이 점점 무엇을, 누구를 닮아간다고 생각하십니까? 거울에 덕지덕지 세상에 찌든 사람이 보이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우리의 얼굴은 과연 누구를 닮았나요? “야곱과 에서”의 모습은 누구를 닮아 있나요?

형제 사이에 팥죽 사건으로 인해서 형 에서는 분노를 터뜨렸습니다. 장자가 누릴 권한, 아버지로부터 받아야 할 축복을 모두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분노로 그치는 게 아니라 결심을 내뱉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면, 야곱을 죽이겠다.”(27:41)고 마음을 먹습니다.
이 일로 인해서 형과 함께,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살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도망을 가야했다는 말입니다.

-돌아오는 길

장자의 명분과 권리를 훔치고, 아버지의 축복을 가로챈 야곱 그에게 주어진 것은 평안이 아니라 고생이었습니다. 그는 형의 분노를 피하여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고,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도 종살이와 같은 세월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외삼촌과 외사촌들도 날이 갈수록 적대적인 감정을 드러냅니다. 야곱은 쫓기듯 고향으로 돌아갈 결심을 하지만, 사실은 고향도 그에게는 편안한 곳이 아닙니다. 분노로 떨던 형 ‘에서’가 그곳에 있고, 그 분노를 피할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고향가는 길목에 있던 얍복강 나루에서 또 다른 시련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모순과 과오로 얼룩진 자기의 과거와 진지하게 맞서기 위해서 가족들을 먼저 강 건너로 보내놓고 한밤중에 홀로 하나님 앞에 섰습니다. 그가 살아온 날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을 겁니다. 자기가 이루었다고 생각했던 재산과 가족이라는 것도 더 허망해 보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영혼의 사투를 벌렸습니다. 성경에서는 그것이 하나님의 사자와의 씨름으로 형상화되고 있습니다. 그 씨름으로 그의 환도뼈가 부러졌습니다. 환도뼈는 남자의 힘의 근원을 가리키는 말이니까, 지금까지 그를 지탱해왔던 삶의 방식이 무너졌다는 말입니다. 환도뼈가 부러지는 아픔이 있었지만, 그 밤이 그에게 비극의 밤만은 아니었습니다. 그 밤에 그는 야곱이라는 부끄러운 이름 대신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되었습니다. 야곱으로 태어난 이스라엘로 환골탈태한 것입니다. 시련을 통해 그는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브니엘, 하나님의 얼굴

그가 아픈 다리를 끌며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습니다. 브니엘은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뜻입니다. 지난밤에 그는 소중한 것을 잃었지만, 그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소중한 것을 얻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얼굴입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한 번도 그의 곁을 떠나지 않으셨던 하나님, 그 하나님의 다정한 얼굴이 그를 비추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당장 형을 만날 일이 두렵습니다. 그래서 그는 몸을 일곱 번씩이나 굽히면서 형을 향해 나아갑니다. 그는 여전히 두려워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도망가지 않습니다. 앞으로 나아갑니다. 꿈속에서라도 만날세라 두려워했던 형 ‘에서’의 얼굴이 눈앞에 있습니다. 늘 자신을 향한 분노로 일그러진 모습으로 그려지던 형 ‘에서’의 얼굴에서 환한 미소가 번집니다. 어쩌면 동생 야곱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반응입니다. 여차하면, 형이 여전히 화를 품고 자신에게 달려들면 다시 도망을 쳤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형은 돌아온 동생이 그저 대견한 듯이 반갑게 맞이하고 있습니다. 재회의 눈물을 흘리는 형이 그곳에 있었던 것입니다. 에서는 달려와 동생의 목을 끌어안고 웁니다.

옛날의 서운했던 감정의 찌끼는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야곱은 목이 메었지만 차분하게 자기 가족들을 소개하고, 그리고 형에게 솔직한 자기 심정을 말합니다.

“형님께서 저를 이렇게 너그럽게 맞아 주시니, 형님의 얼굴을 뵙는 것이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 듯합니다.”

형님의 얼굴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 수 있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게 참으로 놀라운 고백입니다. 지난날에 매이지 않고 흔쾌히 형제를 받아들이는 에서의 모습도 아름답지만, 그런 형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야곱의 모습도 아름답습니다.

-마치며

저는 이 두 형제의 화해사건을 돌아보면서 우리가 언제쯤이나 서로를 통해서, 혹은 세상의 일들 속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아주 단순한 궁금증입니다만 가벼운 궁금증은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본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생각해 보면, 하나님이 주시는 순간,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일상에서 잊어버리거나 무시하지 않고, 나를 변화와 성장의 자리로 용기 있게 나서게 하는 일이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 감격과 기쁨의 인생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야곱은 오늘날의 현대인들, 누구 못지않게 욕심쟁이이자 탐욕스러운 인간의 모습을 전형적으로 갖고 있습니다. 그런 그가 앞으로 어떤 일생을 살지 불 보듯 뻔합니다. 일생을 이런 욕망 지향적으로 살 것이 거의 분명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만난 야곱은 자신의 일생동안 계속 자신의 욕심을 채워나가는 것으로 일생을 끝내지 않습니다. 그의 삶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문득문득 깨닫기도 하고, 하나님을 체험하기도 하고, 하나님을 느끼기도 합니다. 성장입니다. 마음 고쳐먹기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고쳐 잡은 경험이 무척이나 오래되었을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누구에게서 무엇에게서 하나님의 얼굴을 봅니까?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향해서 얼굴을 비추고 계신다고 믿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쳐다보지 않는다는 생각이 맞습니다. 때로는 우리가 먼지가 덕지덕지 가득한 거울로 하나님을 비춰 보려고 합니다. 이러면 하나님이 비뚤어 보이거나 하나님이 보이지가 않습니다.

환도뼈를 다친 야곱이 주저앉아 울지 않았습니다. 꾀를 부리지도 않았습니다. 묵묵히 일어서서 한 걸음씩 내딛은 것처럼 우리 역시도 앞으로 나아가는 용기가 있기를 바랍니다. 이 용기를 통해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 인생의 순간들이 풍성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