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시돈 땅 사르밧에도”
본문 : 열왕기상 17장 8-16절
주님께서 엘리야에게 말씀하셨다. « 이제 너는, 시돈에 있는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에서 지내도록 하여라. 내가 그 곳에 있는 한 과부에게 명하여서, 네게 먹을 것을 주도록 일러두었다. » 엘리야는 곧 일어나서, 사르밧으로 갔다. 그가 성문 안으로 들어설 때에, 마침 한 과부가 땔감을 줍고 있었다. 엘리야가 그 여인을 불러서 말하였다. « 마실 물을 한 그릇만 좀 떠다 주십시오. »
그 여인이 물을 가지러 가려고 하니, 엘리야가 다시 여인을 불러서 말하였다. « 먹을 것도 조금 가져다 주시면 좋겠습니다. » 그 여인이 말하였다. « 어른께서 섬기시는 주 하나님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합니다. 저에게는 빵 한 조각도 없습니다. 다만, 뒤주에 밀가루가 한 줌 정도, 그리고 병에 기름이 몇 방울 남아 있을 뿐입니다. 보시다시피, 저는 지금 땔감을 줍고 있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가서, 저와 제 아들이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것을 모두 먹으려고 합니다. » 엘리야가 그 여인에게 말하였다. «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방금 말한 대로 하십시오. 그러나 음식을 만들어서, 우선 나에게 먼저 가지고 오십시오. 그 뒤에 그대와, 아들이 먹을 음식을 만들도록 하십시오. 주님께서 이 땅에 다시 비를 내려 주실 때까지, 그 뒤주의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을 것이며, 병의 기름이 마르지 않을 것이라고,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 그 여인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다. 과연 그 여인과 엘리야와 그 여인의 식구가 여러 날 동안 먹었지만, 뒤주의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고, 병의 기름도 마르지 않았다. 주님께서 엘리야를 시켜서 하신 주님의 말씀대로 되었다.
-인사
주안에서 사랑하는 파리중앙교회 성도 여러분, 모두 반갑습니다.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서로에게 인사를 전하고 오늘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무척이나 더운 날씨입니다. 지난 주간, 길을 걸어가다가 햇볕이 너무 뜨거워서 그늘 쪽으로 걸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바삐 발을 움직이는데 발밑에 개미떼가 열심히 이동하면서 일을 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순간 “개미들은 안 덥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에게는 이 시간이 여름 더위를 피해서 휴식을 취하는 시간이 필요하다면, 어떤 누군가에게는 열심히 일을 해서 겨울을 준비하는 시간입니다. 전도서 3장 1절의 말씀에 “모든 일에는 다 때가 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마다 알맞은 때가 있다.”고 구약성경의 지혜자는 말합니다.
지금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에게 지금이 무슨 때라고 생각하시나요? 가끔씩은 여러분의 자리에 멈춰 서서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를 구해보시기 바랍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오늘 말씀은 한 시인의 싯구 하나로 말씀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알렉산드로 푸시킨(1799-1837) 시인을 아십니까? ‘푸시킨’이란 시인의 이름은 가물가물 할지 몰라도 그가 쓴 싯구는 모두가 들어 본 적이 있습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슬픈 날을 참고 견디면 기쁜 날이 오고야 말리니, 마음은 미래에 살고 현재는 우울한 것 모든 것은 순간에 지나가고 지나간 것은 다시 그리워지나니”
여러분의 세상살이가 여러분 마음대로 되나요? 그렇지 않지요? 내 맘대로 되지 않습니다. 이런 사실은 조금만 세상살이의 경험이 쌓여도 자연스럽게 터득이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내가 바라는 대로 맘껏 꾸려지는 인생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도 하나님을 통해서 내가 바라는 바를 이루는 것으로 그렇게 오해하면 낭패를 경험하게 되지요.
-엘리야와 과부
오늘 본문 말씀은 어쩌면 삶이라고 하는 어려움과 난관 속에서 악전고투하는 신앙인들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가진 이들이 실제 실생활의 어려움들을 견디느라 애를 쓰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는 중요한 두 명의 인물이 등장합니다. ‘엘리야’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엘리야는 ‘바알 신앙’이라는 거대한 세력과 싸우느라 진이 다 빠졌습니다. 엘리야는 북이스라엘에서 활동했던 예언자입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나라, 북이스라엘의 왕들이 대대적으로 북이스라엘 국가 신앙을 ‘바알 신앙’으로 선택했습니다. 당연히 엘리야는 이에 저항해야 했습니다. 이런 시대를 사는 엘리야는 불행한 사람인가요? 행복한 사람인가요? 모두가 바알을 섬기는 시대에 여호와 하나님 신앙을 가지고, 저항해야 했던 사람 엘리야입니다. 엘리야가 얼마나 용기가 있는 사람인가 하면 다음 장 18장에 보면 450 명 바알 선지자들에게 맞서서 혼자서 대결을 벌입니다. 오늘 말씀은 그 앞에 벌어진 사건입니다.
또 다른 한 사람이 오늘 말씀에 등장합니다. 남편이 없는 여인인 ‘과부’라고 말씀은 이 여인을 소개합니다. 그런데 그냥 과부가 아니라 ‘사르밧’의 과부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 여인의 이름은 모르는데 그 출신지는 압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의 북쪽 너머에 있는 ‘시돈’이라는 곳입니다. 오늘날로 치면 레바논 지역입니다.
말씀은 참 이상합니다. 여인의 이름은 소개하지 않고 있지만, 그 출신지는 알려주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 여인의 이름보다 중요한 것이 출신지입니다. ‘시돈의 사르밧’은 페니키아 문명의 발상지입니다. 페니키아 문명은 모든 유럽 어족의 기원이 되는 알파벳이 처음 만들어진 문명입니다. 엘리야와 이 과부의 시대의 시돈 지역의 왕은 ‘엣바알’이라는 자였고, 이 ‘엣바알’의 딸이 너무나도 유명한 북왕국 이스라엘의 아합왕의 아내 ‘이세벨’입니다. 여러분, 이세벨 왕비 아시지요? 19장에 보면 엘리야를 죽이려고 악의를 품고 자객들을 보냈던 여자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시돈의 여인의 이름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이 여인의 출신지라고 은근히 말하고 있습니다. 시돈 땅은 ‘바알 신앙’이 기본적으로 깔려있는 곳입니다. 이 곳에 살고 있지만 바알 신앙에 휩쓸리지 않은 한 여인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바알신앙의 소굴과도 같은 곳에 살지만 여호와 하나님 신앙으로 사는 사람이 있다는 말입니다.
-사르밧으로 가라
하나님이 엘리야에게 시돈에 있는 사르밧 과부에게 가라고 하셨습니다. 이 짧은 한 구절에 이토록 어마어마하게 큰 말씀의 엄중함이 담겨 있습니다. 시돈 지방 사르밧에 살고 있지만 시돈 지방의 신앙 풍습에 휩쓸리지 않고 있던 여인을 하나님이 사용하려고 하십니다. 마치 하나님을 위해 대기하고 있었던 듯합니다. 지금 엘리야는 왜 이 여인을 찾아가게 되었습니까?
사실은 온 나라에 기근이 들었습니다. 객관적인 상황이 너무나도 어려운 처지에 놓였습니다. 그리고 신앙적인 상황도 엘리야의 목숨을 호시탐탐 노리는 처지입니다. 모든 면에서 어려움에 놓였습니다. 이런 시기에 하나님의 사람이 남아있습니다. 어려운 시절, 어쩌면 희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시대에 하나님의 사람들이 곳곳에서 자신의 삶을 지키고 견디고 있습니다. 어느 곳엔가 숨겨져 있습니다. 우리의 비관적인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모두 사라져 없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어디에나 남아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그런 분이어야 한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그런 존재임을 자각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제가 강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강요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여러분의 신앙적인 자각입니다. “나는 오늘 왜 비(非)신앙인이 아니라 신앙인인가?”입니다. 오늘 이 시대 세상의 많은 이들이 신앙을 가진 이들을 비웃고, 신앙을 우습게 여기는 시대에 “왜 나는 신앙인인가?”
-일상의 한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사르밧 과부에게 보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의 눈에는 비참함과 안타까움이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이 여인의 형편이 좋지 못합니다. 가난합니다. 시냇가의 물조차도 구하지 못해 사람과 짐승들이 쓰러지던 가뭄의 시절입니다. 이런 시절을 이 여인은 아들 하나 데리고 살면서 버티고 버텼습니다. 엘리야와 만나는 장면을 한번 보십시오. 성문 근처에서 나뭇가지를 줍고 있습니다. 일상적인 일입니다. 질 좋은 장작은 없지만 나뭇가지라도 주워 불을 피우는 일상의 일입니다.
그러던 이 여인이 지금 삶의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습니다. 지금까지 견뎌왔지만 이제 어쩌면 더는 견딜 수 없는 지경에 도달했습니다. 이 여인의 일, 이 여인의 처지가 여러분의 삶의 경험과 비슷한가요?
이 여인의 처지를 보십시오. 밀가루 한 줌, 기름 몇 방울이 전부입니다. 딱 한 끼, 초라한 식사 한 끼입니다. 그런데도 일상생활을 이어나가는 여인의 모습이 안쓰럽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참으로 알 수 없는 분이십니다. 하필이면 이런 처지의 여인에게 가라고 하시니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인간적인 눈으로 바라보면 이 장면은 참으로 민망한 장면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지만 엘리야는 조금의 거리낌도 없어 보이지 않습니까? 이 여인에게 엘리야가 “물을 좀 달라, 가진 것으로 음식을 만들어 내달라.”고 요구합니다.
-하나님, 여인을 만나시다.
그런데 여인의 처지가 어떤가요? “이것을 가지고 가서, 저와 제 아들이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것을 모두 먹으려고 합니다.” (17:12b) 이렇게 말합니다. 처지가 참 안타깝습니다. 하나님이 엘리야에게 이런 절박한 상황에 놓인 여인을 찾아가서 만나게 하셨습니다.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엄마로서 아들에게 음식을 해 먹이고자 땔감도 줍고, 남은 것을 다 모아서 음식을 차리는 여인을 엘리야가 만나고 있습니다.
엘리야는 ‘나의 하나님은 여호와이시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그런데 지금 이 여인을 찾아온 이가 엘리야가 맞지요? 사르밧의 가난한 이 여인이 지금 누구를 만나고 있습니까? 엘리야인가요? 하나님이시지 않나요? 무슨 소리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엘리야를 통해 사르밧의 여인을 찾아오셨다는 말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 가난한 처지의 여인을 찾아가셨습니다. 이 여인은 이제 음식을 해먹고 나면 죽을 일만 남았다고 판단하던 여인입니다. 이 여인에게 죽을 길이 아닌 사는 길이 있음을 알리고 있는 장면입니다.
오늘의 말씀의 변곡점이 있습니다. 바로 이 지점입니다. 이 여인이 바라보던 것은 땅 바닥에 떨어진 땔감이 될 만한 나뭇가지들입니다. 그리고 통에 남은 한 줌의 밀가루와 기름 몇 방울이었습니다. 엘리야는 이런 여인의 시선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선지자의 입을 통해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도록 돌리고 있습니다.
“마실 물을 달라, 먹을 것을 달라.” 엘리야가 내놓는 주문은 따르기에 부담스럽습니다. 모두가 목마른 시기에 물을 달라 합니다. 먹을 것이 풍성한 시기도 아닌데, 남은 것이 없는 현실인데 먹을 것을 가져오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잘 들으십시오. 이것은 단순히 자신에게 자선을 베풀어달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 말씀은 이 여인에게 거룩한 부담감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죽음이 기다리는 길이 아니라 사는 길에 들어서려면 시선을 내가 가진 초라한 것에서 하나님께로 돌려야 하는 부담감을 감내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산수
여러분, 성경에 등장하는 이 여인은 과부입니다.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는 성경에서 마치 한 쌍처럼 대표적인 약자들입니다. 누군가를 위해 수고하고 봉사하기 보다는 돌봄을 받아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여인에게 삶의 우선순위를 조정해준다고 읽히지 않습니까?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음식을 만들어서, 우선 나에게 먼저 가지고 오십시오. 그 뒤에 그대와, 아들이 먹을 음식을 만들도록 하십시오.” (13절)
자, 여러분, 지금 이것으로 음식으로 해서 먹고 나면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지 않습니까? 그 후에는 어떻게 합니까? 여인의 판단은 지극히 상식적인 생각입니다. 우리의 생각도 이에 한 치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즉, “1-1은 0”입니다. 이런 여인에게 엘리야는 지금 하나님의 산수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산수는 1-1은 뭐라고 할까요? “1-1은 ∞”입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요? 하나에서 하나를 빼면 무한대가 될 수 있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산수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말씀을 잘 보십시오. 여기에 조건 하나가 있습니다. “먼저 엘리야를 위하여, 그 다음에는 당신과 아들을 위하여!”입니다. 이 말은 이런 뜻입니다. 먼저 하나님을 위하고 그다음에 자기를 위하면, 삶의 한계상황을 헤쳐 가는 새로운 길이 열린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믿어지십니까?
하나님이 어느 때에 사르밧의 과부에게 하나님의 산수를 가르쳐주고 있습니까? 풍족할 때입니까? 아무 염려나 근심이 없고 평온할 때입니까? 아닙니다. 가장 가난할 때, 이제 더는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다고 여겨지는 때에 그의 삶에서 하나님의 산수가 풀어지도록 가르쳐주십니다. 우리 삶의 어려움이 있습니다. 있을 수밖에 없지요. 인간사는 그렇습니다. 그렇기에 그 속에서 피어나는 인생의 꽃이 아름답습니다. 구원 받았는지 궁금해 하지 마시고, 구원 받은 사람으로 사십시오.
-하나님을 영접하다.
이제 여인은 더 이상 사르밧 사람이 아닙니다. 극심한 가난으로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린 사람도 아닙니다. 이제 이 여인은 자기를 찾아오신 하나님을 영접한 사람입니다. 그것도 자신의 가진 것을 다 털어서 음식을 정성스레 만들어 주님께 내놓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의 길로 들어선 여인! 이 여인이 참으로 복되고 아름답습니다.
오늘 말씀은 이렇게 끝을 맺습니다. “그 여인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다.” 이 여인이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주님께서 엘리야를 시켜서 하신 주님의 말씀대로 되었다.” 지금까지 이 여인의 처지는 온통 삶의 물음표로 가득 차있었습니다. “없어지면 어떻게 하지? 안되면? 그 다음에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우리의 삶은 온통 물음표로 가득합니다. 그렇기에 어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믿는 이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단단해집니다. 우리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으로 강건하시기 바랍니다. 시대는 흉흉하나, 그렇다고 시대에 나 자신을 맡기지 마십시오. 우리가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이제 오늘 우리는 작은 결단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 삶을 하나님의 뜻, 하나님이 바라시는 바를 먼저 바라보도록 합시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