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6월 4일 성령강림 후 제1주 (2023년-23호)

제목 : 주님의 말씀마저도

본문 : 예레미야 23:33-40

« 이 백성 가운데 어느 한 사람이나 예언자나 제사장이 너에게 와서 ‘부담이 되는 주님의 말씀’이 있느냐고 묻거든, 너는 그들에게 대답하여라. ‘부담이 되는 주님의 말씀’이라고 하였느냐? 나 주가 말한다. 너희가 바로 나에게 부담이 된다. 그래서 내가 이제 너희를 버리겠다 말하였다고 하여라. 또 ‘부담이 되는 주님의 말씀’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예언자나 제사장이나 백성이 있으면, 내가 그 사람과 그 집안에 벌을 내리겠다고 하여라. 친구나 친척끼리 서로 말할 때에는 ‘부담이 되는 주님의 말씀’이라고 말하는 대신에 ‘주님께서 무엇이라고 대답을 하셨느냐?’ ‘주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느냐?’ 하고 물어야 한다고 일러주어라. ‘부담이 되는 주님의 말씀’이라는 표현을 너희가 다시는 써서는 안 된다. 누구든지 그런 말을 쓰는 사람에게는 그 말이 그에게 정말 부담이 될 것이라고 하여라. ‘그렇게 말하는 것은 살아 계신 하나님, 우리의 하나님, 만군의 주의 말씀을 왜곡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하여라. 이제 예언자에게 물을 때에는 ‘주님께서 무엇이라고 대답을 하셨느냐? 주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느냐?’ 하고 물어라. 내가 사람을 보내서 ‘부담이 되는 주님의 말씀’이라는 말을 쓰지 말라고 했는데도 내 명령을 어기고 ‘부담이 되는 주님의 말씀’이라는 말을 써서 말한다면,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반드시 내가 그들을 뽑아서, 멀리 던져 버리겠다 하더라고 전하여라. 그들뿐만 아니라 그들과 그들의 조상에게 준 이 도성도 함께 뽑아서, 멀리 던져 버리겠다 하더라고 전하여라. 내가 이와 같이 하여, 그들이 잊을 수 없는 영원한 수치와 영원한 치욕들을 당하게 하겠다 말했다고 전하여라. »

-인사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의 인사를 전합니다. 주님의 날을 맞아서 주의 전에 나온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한낮에는 벌써 제법 더운 날씨가 우리에게 다가와 있습니다. 아침, 저녁으로 일교차도 큽니다. 건강 유의하시기 바라고, 좋은 날씨의 풍요로움 가운데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가 우리 가운데 있기를 바랍니다. 서로 인사 나누겠습니다. 서로에게 친절하고 따뜻한 인사를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는 올 해의 23번째 주일을 맞았습니다. 주님께 드리는 귀한 시간입니다. 마음과 몸을 가다듬고 정성껏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에 집중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본문 말씀 이해를 위해

오늘 말씀은 예레미야 23장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우리 각자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내게 생명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그렇게 믿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내게 부여하신 생명을 잘 살아야 하는데, 그야말로 풍성하게 살아내야 하는데, 그렇다면 하나님이 내게 갖고 계신 계획이 있으실 것이고, 그 계획이 무엇인지 무척이나 궁금합니다. 그래서 뭔가 좀 아는 것 같은 사람들에게 물어 보기도 하고, 지혜나 권면을 듣기도 합니다. 하지만 인간이 갖고 있는 것이란 늘 불완전하고 균형감이 떨어져 있습니다. 때로는 편협한 생각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분이 내게 말해주는 것이 맞는 말인지 의아스러운 때가 있습니다. 

이 지점에서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알고 싶으시다면 우리 손에 들린 하나님의 말씀을 밀접하게 대하십시오. 사람을 향한, 인류를 향한, 또 나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 생생하게 여기에 살아있는데, 우리는 해답을 찾느라 너무 먼 곳을 돌아다니는 수고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가까이 대하도록 하십시오. 하나님 뜻 안에서 풍성하게 잘 살고 싶으시거든 주님의 말씀 앞에 서도록 해보십시오.

그런데 예레미야 23장의 말씀을 오늘 말씀으로 선택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에 시선을 집중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한편으로는 전혀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대하는 것에 흥미도 없고, 어느새 점점 더 하나님의 말씀이 껄끄러운 일이 되어 버린 사람들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흥미가 떨어져서 일수도 있고, 말씀에서 하시는 말씀이 불편해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불편하다? 오늘 우리의 영적인 상태와 비슷한 일은 예레미야 시대에도 빈번한 일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 잘 들여다보았으면 합니다.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나오는 말이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한번 찾아보십시오. “부담이 되는 주님의 말씀”이라는 말입니다. 

-부담이 되는 주님의 말씀

“부담이 되는 주님의 말씀”, 이 문구를 우리 손에 들린 새번역 성경 말구요, 예전 우리가 보던 개역성경에는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여호와의 엄중한 말씀”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엄중하다’는 단어는 엄격하고 정중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 의미로만 오늘 말씀을 받아들이면 본문을 오해하고 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엄격하고 정중하다는 것이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는 것이 문제겠지요. 

그래서 보다 분명히 알기 위해서 다른 번역서를 살펴보았습니다. 영어성경으로 권위를 갖고 있는 킹 제임스 버전에는 “burden of the Lord”, 권위 있는 프랑스 번역판인 Louis Segond 판에는 “la menace de l’Eternel”, “하나님이 지어주신 짐, 하나님의 위협, 위태롭게 하심” 정도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엄중하다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이 짐스럽다는 말과는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 말씀의 번역처럼 “부담이 되는 주님의 말씀”이라고 말씀을 이해하면 좋을 듯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짐스럽다”며 가벼이 여기며 조롱하는 사람들에 대한 경고의 말씀인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반복적으로 나오는 “부담이 되는 주님의 말씀”이라는 말 앞에 우리가 모두 숨을 고르고 멈춰 섰으면 좋겠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이 짐스럽고, 부담이 된다고 여기는 오늘 우리 시대의 모습과 우리 신앙인의 태도와 너무나도 닮아있던 예레미야 시대의 모습입니다. 너무나 분명하고 명료하게 다가옵니다. 

– 궁정 예언자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부담스럽다”고 여길까요? 예레미야 선지자 시대로 한 번 가보겠습니다. 성경에 보면 두 부류의 예언자가 등장합니다. 한 부류가 머무는 곳은 궁정입니다. 임금이 사는 곳에 머무는 궁중 예언자 그룹이 있습니다. 이 예언자들이 하는 일이 무엇일까요? 왕과 왕의 가족이 불안해 할 때마다 그들에게 “다 잘되어 가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잘되어 나갈 것입니다.” 이렇게 말해주는 예언자들입니다. 궁정에 머물면서 왕가의 앞날에 복을 빌어주고, 점을 쳐주는 예언자들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궁정 예언자들의 특징이 무엇일까요? 이들의 모습은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을 향하지 않고, 권력자들을 향해 서 있습니다. 

예언자란 누구입니까? 뭐하는 사람입니까? 하나님이 맡겨 주신 말씀을 용감히 전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궁정 예언자들이란 사람들은 권력자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만 합니다. 처음에는 그러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어느새 그런 일만 담당합니다. 영적으로 잠자고 있는 사람들을 깨우는 것이 예언자의 역할입니다. 그런데 깨우기는커녕 사람들을 더욱 더 깊은 잠에 빠지게 합니다. 그 꿈이 달콤하겠지요?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모든 게 잘될 것이라는 예언자들의 말을 듣고 잠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다른 예언자

그러나 다른 부류의 예언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전하는 말은 이런 역할을 했습니다. 그 시대의 죄, 곧 왕과 고관들, 직업적인 종교인들의 죄와 불의를 고발하고, 하나님의 뜻에서 멀어진 백성들의 죄를 고발합니다. 예언자들의 말은 주저함이 없습니다. 단호합니다. 23장 29절에 보면,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은 ‘불’과 같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바위를 부수는 망치’와 같다고 말합니다. 그들의 말은 달콤하지 않고, 부담스러운 말입니다. 때로는 사람들의 마음에  상처가 되는 것 같기도 하고, 우리가 가진 신앙의 자존심을 건드립니다. 하지만 예언자들이 쓴 소리, 아픈 소리만 한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어두운 역사 속에서 시달리고 고통당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희망과 위로를 전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예레미야 시대는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유대 나라가 마지막 운명을 다하는 시대였습니다. 바람 앞의 촛불과 같은 유대 나라입니다. 여러분 바람 앞에 촛불 보셨습니까? 꺼지기 전에 불이 파르르 떱니다. 나라가 망하던 시대, 이와 함께 하나님 신앙도 모두 바람 앞의 촛불과 같은 신세가 되어 버린 시대에 “괜찮습니다. 임금님. 지금 잘하고 계십니다.”라고 말해도 되나요?

-시대를 넘는 하나님의 말씀

이 예레미야의 시대가 얼마나 참혹했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시대 참된 예언자들이 등장해서 “그러면 안된다, 그렇게 하나님을 저버려서는 안된다. 그렇게 하나님 믿는 신앙을 가벼이 여겨서는 안된다”고 말했습니다. 

이 예레미야 시대에 예언자들이 하던 역할을 오늘 우리 시대로 가져 오면 교회의 역할이라고 바꾸어 말할 수 있습니다. 교회입니다. 교회의 역할이란 것은 교회 안에 속한 사람들의 역할이라는 말과도 같습니다. 그런데 왠지 우리는 자신이 없습니다.

조금 세게 말해 볼까요? 오늘 우리가 사는 시대는 신앙이 아무 것도 아닌 시대가 되어 버렸습니다. 신앙이 가볍다는 말입니다. 신앙을 가졌다 하더라도 교회 생활을 통해서 제 잇속 챙기는 일로 사용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신앙이 사그러져 가고 있는데도 안타까워하지 않는 시대입니다. 아무렇지도 않은 시대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모욕을 당하고 수치를 당해도 나의 일처럼 마음아파 하지 않는 시대입니다. 정말 끝도 없이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신이다?

최근 넥플릭스에서 방영한 <나는 신이다>라는 시리즈가 꽤나 많은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그것 봤냐고 물어봅니다. 여러분도 보셨겠지요? 끔찍하지요? 화가 나지요? 왠지 씁쓸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엄중하게 한번 보았으면 합니다. 이 모든 것이 JMS 정명석이나 신천지 이만희의 잘못일까요? 그들이 너무나도 교활하고 악랄해서 순진한 사람들이 당한 것일까요? 저는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들이 잘못이 없다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심판받을 것입니다. 마땅합니다. 

정명석이나 이만희,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겁게, 엄중하게 듣기를 게을리 한 한국 교회의 부산물입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벼이 여기고, 입맛에 따라 고르게 하고, 듣는 사람 취향에 맞춰서 하나님의 말씀을 변질시키고 왜곡하고, 성도들 역시 자신을 위로하고 도움이 되는 것만 찾아듣고, 조금만 불편해도 말씀을 거절해 버리는 말씀의 취사선택의 결과가 오늘날 주님의 몸인 교회가 이렇게 모욕을 당하고 수치를 겪는 시대를 맞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신앙의 자존감

여러분, 듣기 힘드시죠? 오늘 예레미야의 말씀은 참으로 듣기가 어려운 말씀입니다. 어렵고 힘들면 사람들은 대개 피하는 방식을 택합니다. 하지만 피하기만 해서는 안 되는 지점에 우리 신앙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지요? 

여러분, 요즘 많은 사람들이 ‘자존감’이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합니다. 당연히 사람은 자존감이 높은 생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심리학자가 자존감을 맷집에 비유해서 표현하더군요. 여러분 맷집이 뭔지 아시나요? 복싱 경기를 보면 어떤 선수는 꽤나 많이 두들겨 맞았는데도 거뜬한 선수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을 가리켜서 맷집이 좋은 선수라고 말합니다. 자존감이 높으면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좀 불편해도 참아낼 줄도 알고, 웃어 넘길 줄도 압니다.

신앙도 자존감이 있습니다. 신앙의 자존감이 높으면 불편한 말씀을 들을 줄 압니다. 불편한 말씀도 자기 것으로 삼을 줄 압니다. 이런 신앙의 자존감이 우리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예언자도 제사장도 친구나 친척도

오늘 말씀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십니다. 예언자나 제사장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부담이 되는 주님의 말씀”이라고 말합니다. 친구나 친척끼리도 하나님의 말씀이 부담된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예언자나 제사장의 자리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이거나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인 자리입니다. 오늘 우리처럼 말입니다. 이곳에서 예언자, 제사장이 그 입으로 하는 말이 하나님 말씀은 부담스럽다고 말합니다. 친구나 친척 사이는 가장 친한 사이입니다. 속에 있는 것도 꺼내서 말할 수 있는 관계입니다. 이 사람들 사이에서 나오는 말도 “부담이 되는 주님의 말씀”이라고 말합니다.  

게다가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예레미야에게 묻는 것이 아니고, 조롱하기 위해 묻고 있는 겁니다. 인간이 무지에다가 오만함까지 더한 상태입니다. 그들의 말에 하나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너희가 바로 나에게 부담이 된다. 그러니까 너희가 곧 내 짐이다.”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대하면서 가슴이 덜컥 내려앉습니다. ‘너희가 바로 나에게 부담이 된다.’ 이런 말씀을 듣는 사람이 내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듣고 계십니까? 달콤한 이야기, 듣기 좋은 이야기, 듣고 싶은 이야기만 들으려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쓴 소리를 제대로 들어야 우리 삶이 빗나가지 않습니다.

-다시 말씀 앞에서

우리가 성경을 읽는 것, 말씀 앞에 서는 까닭은 교양을 얻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마음에 위안을 얻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많이 읽어서 상 타려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참 사람이 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열고 성경을 읽으면, 우리가 성경을 읽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우리 삶을 읽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어느새 하나님의 말씀은 거울이 되어 우리의 살아가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비추어낸다는 것입니다. 진실을 보기 싫어하는 사람들은 성경을 읽지 않습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어렵다는 핑계로. 부담스럽다는 핑계로. 또 어떤 사람들은 성경을 편하게 읽는 방법을 터득했습니다. 성경에서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것입니다. « 부담이 되는 주의 말씀 »에는 눈을 감고, 귀를 막아버리는 것이지요. 

-바룩 이야기 

예레미야 36장에는 아무 의미심장한 장면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전했던 예레미야는 집권자들의 미움을 사 감옥에 갇히고 맙니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레미야는 자기 비서인 바룩을 불러 하나님의 말씀을 불러줍니다. 바룩은 그것을 파피루스로 만든 두루마리에 기록합니다. 예언자는 바룩을 성전에 보내 모든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합니다. 바룩은 그 사명을 잘 감당했습니다. 바룩이 그 두루마리를 읽을 때 왕의 측근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예언의 말씀을 듣고 매우 놀랐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왕에게 예언자의 말을 전합니다. 여호야김 왕은 그 두루마리를 가져오라고 해서는 여후디를 시켜 낭독하게 합니다. 왕은 예언의 말씀을 들으면서 격분합니다. 자기의 정책에 대해 조목조목 비판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침 겨울이었기 때문에 왕 앞에는 난로가 있었습니다. 왕은 두루마리에서 서너 칸을 읽어 내려갈 때마다 읽은 부분을 칼로 오려서는 난로에 던져 넣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보십시오. 여호야김도 사라지고, 그의 궁전도 불탔습니다. 하지만 약하고 타기 쉬웠던 파피루스에 담겨있던 예언의 말씀은 지금도 여전히 훌륭하게 보전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예레미야서가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죽을 수 없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그렇습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영원하신 분에게 기대십시오. 영원하신 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진지하고 엄중하게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