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믿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본문 : 요나서 3:1-10
주님께서 또다시 요나에게 말씀하셨다. « 너는 어서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이제 내가 너에게 한 말을 그 성읍에 외쳐라. » 요나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곧 길을 떠나 니느웨로 갔다. 니느웨는 둘러보는 데만 사흘길이나 되는 아주 큰 성읍이다. 요나는 그 성읍으로 가서 하룻길을 걸으며 큰소리로 외쳤다. « 사십 일만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진다! » 그러자 니느웨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그들 가운데 가장 높은 사람으로부터 가장 낮은 사람에 이르기까지 모두 굵은 베 옷을 입었다.
이 소문이 니느웨의 왕에게 전해지니, 그도 임금의 의자에서 일어나, 걸치고 있던 임금의 옷을 벗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잿더미에 앉았다. 왕은 니느웨 백성에게 다음과 같이 선포하여 알렸다. » 왕이 대신들과 더불어 내린 칙명을 따라서, 사람이든 짐승이든 소 떼든 양 떼든, 입에 아무것도 대서는 안 된다. 무엇을 먹어도 안 되고 물을 마셔도 안 된다. 사람이든 짐승이든 모두 굵은 베 옷만을 걸치고, 하나님께 힘껏 부르짖어라. 저마다 자기가 가던 나쁜 길에서 돌이키고, 힘이 있다고 휘두르던 폭력을 그쳐라. 하나님께서 마음을 돌리고 노여움을 푸실지 누가 아느냐? 그러면 우리가 멸망하지 않을 수도 있다. » 하나님께서 그들이 뉘우치는 것, 곧 그들이 저마다 자기가 가던 나쁜 길에서 돌이키는 것을 보시고, 뜻을 돌이켜 그들에게 내리시겠다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다.
-인사 나눔
주안에서 사랑하는 파리중앙교회 성도 여러분, 거룩한 주님의 날을 맞이하여 오늘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고자 합니다. 더운 여름 날씨에 지치지 않고, 건강한 여름나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서로에게 인사 전하고 오늘 우리가 나눌 요나서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보는 귀한 시간되기를 바랍니다. 서로에게 인사 전하십시오. 반갑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물고기 뱃속에?
2016년 56세의 스페인 어부 ‘루기 마퀴아즈’는 폭풍우로 바다에 빠진 후 고래에게 삼켜졌다고 합니다. 그의 주장으로 3일 밤낮을 고래 뱃속에서 어둠과 추위, 지독한 냄새 속에서도 손목시계의 불빛으로 버티며 지냈다고 합니다. 고래가 내뱉는 바람에 살아서 돌아왔다는 주장을 했습니다. 이것은 본인의 주장이니 사실 확인이 불가합니다.
또 2019년 3월 10일 남아프리카공화국 엘리자베스 항구 앞바다에서 사진기사 ‘레이너 쉼프’라는 사람이 동료들과 함께 바닷 속 정어리 떼 촬영을 하다가 14m 짜리 고래 한 마리가 삼키는 정어리 떼와 함께 고래 뱃속으로 빨려 들어갔습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고, 끔찍한 사고였습니다. 다행히 고래는 ‘레이너 쉼프’를 먹이감이 아니라고 판단해서 뱉어냈습니다. 그 경험을 이 사람은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고래 뱃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순간 본능적으로 숨을 참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앞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고, 몸에 가해지는 압박이 엄청났다”고 말했습니다. 이 소식은 보다 신뢰할 수 있는 소식이겠지요.
오늘날에도 고래 뱃속에 들어갔다가 나온 사람이 실제로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우리가 본문에서 만나는 사람은 큰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다 나온 사람의 원조격인 요나라는 사람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요나에 대한 이야기를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나를 떠올릴 때마다 ‘큰 물고기 뱃속에서 3일’이라는 사건을 기억합니다.
하지만 요나서가 다루고자 하는 이야기는 이런 신기하고 기묘한 물고기 체험 이야기가 결코 아닙니다. 이 일의 원인과 결과는 따로 있습니다.
-요나서 3장의 위치
오늘 본문은 요나서 4장 전체 말씀 가운데서 3장 전부를 우리가 읽었습니다. 요나 이야기는 사실 완벽한 하나의 이야기 구조를 지니고 있습니다. 요나 이야기를 <기-승-전-결>로 나누어 보자면 오늘 말씀은 승(承) 단락에 해당이 되는 이야기라고 구분해 볼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이 요나에게 ‘니느웨 도성으로 가라’ 하셨지만 요나는 몰래 ‘다시스 행’ 배에 올라타고, 결국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는 이야기가 기(起)에 해당이 된다면, 오늘 사건을 통해 드러나는 니느웨 백성의 회개가 ‘전(轉)’의 단락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결(結)의 단락은 회개한 니느웨 백성들의 모습을 보고 요나가 반응하는 바와 함께 하나님이 요나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결론에 해당이 됩니다. 이해가 가시지요? 오늘 우리의 본문은 이야기가 진행되는 ‘승(承) 단락’입니다.
오늘 말씀의 시작은 이렇습니다. “주님께서 또다시 요나에게 말씀하셨다.”(3:1)입니다. 눈에 띄는 단어가 “또다시”입니다. 하나님이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라고 하신 말씀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왜 두 번째로 지시를 하셨을까요? 우리가 아는 대로 하나님이 요나에게 처음 말씀 하셨을 때, 요나가 이를 지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니, 분명히 말하면, 요나는 지키지 못한 것이 아니라 지키지 않았습니다. 지키지 못하는 것과 지키지 않는 것은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다시스로 가기로 마음먹다.
1장 2절 “너는 어서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 성읍에 대고 외쳐라. 그들의 죄악이 내 앞에까지 이르렀다.” 이 말씀이 요나에게 임했을 때 요나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니느웨’로 향하지 않았습니다. 다시스로 도망하려고 욥바로 내려갔습니다(3절). 하나님의 명령은 올라가는 일이고 자신이 선택한 길은 내려가는 길입니다.
올라가는 게 쉽습니까? 내려가는 게 쉽습니까? 굳이 의미를 새겨본다면 하나님의 길은 올라가는 길입니다. 하지만 요나는 내려가는 길을 택했습니다. 유명한 항구 도시인 욥바로 내려갔습니다. 이 항구에는 당시 지중해 여러 지역을 가는 배들의 노선이 많습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려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골라 탔습니다.
자, 여기서 아무 의미도 없는 것 같은 ‘다시스’라는 장소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시스’라는 장소는 꿈과 환상, 이상향의 장소입니다. 열왕기상 말씀(10:22)에 보면, 솔로몬 시대에는 다시스의 배가 3년 마다 한 번씩 들어오는 데, “다시스 배가 금과 은과 상아와 원숭이와 공작새들을 실어 왔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그곳 ‘다시스’는 엄청난 보석들과 낯선 동물들이 사는 이상적인 나라였습니다. 흥미로운 곳이고 번잡한 곳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기에 적당한 곳이지요.
신약시대에도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내 증인이 되라.”(행 1:8)는 말씀이 나오지요? 이 때 ‘땅끝’이 바로 다시스, 오늘날 ‘스페인 땅’입니다. 성경시대에 아는 바다의 끝이 지중해입니다. 지중해 바다 끝, 스페인까지 가면 누구도 한 번도 나간 본 적이 없는 두려운 바다, 대서양이 열립니다. 성경 시대에는 사람들이 사는 육지 땅 끝이 바로 ‘다시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지리학적인 정보가 아니라 요나는 왜 도망칠 곳으로 ‘다시스’를 선택했을까요? 하나님으로부터 가장 멀리 도망치려는 의도입니다. 그곳으로 가 버리면 하나님이 요나 자신을 찾지 못하실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해가 가시지요?
-요나, 죽음으로 들어가다.
이런 이상향의 도시 ‘다시스’와 달리 ‘니느웨’는 요나 같은 유다 사람에게는 이미지가 영 좋지 않습니다. 좋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원망과 분노의 대상과 같은 도시입니다. 기원전 720년에 북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앗수르 나라의 수도가 바로 ‘니느웨’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서 그 도성 사람들의 악행이 얼마나 큰 지, 그들이 얼마나 못된 행실을 저지르는지 고발하라고 하셨습니다.
니느웨로 가시겠습니까? 다시스로 가시겠습니까? 하나님이 가라 하신 ‘니느웨’로 가는 길은 어려운 길, 불편한 길입니다. 자신이 가려고 하는 ‘다시스’로 가는 길은 쉽고 흥미진진한 곳입니다. 어쩌면 재물도 크게 얻게 될지도 모릅니다. 이 두 갈래 길 앞에서 요나는 하나님의 사명이 아닌 자신의 길을 택했습니다.
‘욥바’에서 배를 타고 ‘다시스’ 행에 배에 올라탔습니다. 요나의 지금 현재 심정이 어떨까요? 홀가분할까요? 불안할까요? 그런데 우리가 주의 깊게 살펴야 할 아주 신앙적이고 의미 있는 내용이 전개됩니다. 요나가 배를 탔습니다. 그런데 성서의 기자는 요나가 배의 가장 깊은 곳 제일 아래 층으로 내려갔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요나는 배가 난파당할 위험에 놓이자 제비에 뽑혀서 바다에 던져졌습니다. 요나는 제일 배의 제일 깊은 곳으로 내려갔지만 거기 보다 더 깊은 곳이 있었습니다. 깊은 바다였습니다. 그리고 큰 물고기 뱃속에 들어간 그는 말씀에 보면 2:2에 ‘스올’에까지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스올’은 지옥의 음부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죽은 자들이 있는 곳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죽음의 상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지금 요나가 놓인 상태가 죽음과도 같은 상태입니다. 하나님을 눈을 피하여 멀리 도망가보지만 이 일이 요나에게는 죽음과 같은 일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 쉬운 것처럼 여겨지는 세상을 우리가 살아가지요. 하나님을 멀리해도 아무렇지도 않다고 여기는 세상살이입니다. 나의 일생을 통해 주어지는 하나님의 명령도 그저 가벼운 잔소리에 지나지 않고,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말씀도 귀찮고 성가시게 하는 ‘불편한 꼰대짓’으로 둔갑하는 세상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취급한다는 말입니다.
요나서는 분명히 말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자는 자신이 찾은 길이 이상적인 곳이라고 생각하지만 말씀은 이 상태가 스올, 즉 죽음의 상태라고 지적합니다. 이 말씀을 여러분의 삶으로 가져오는 것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소홀하지 않습니다. 가벼운 농담거리도 아니고, 재미삼아 하는 취미생활도 아닙니다.
-큰 성읍, 니느웨
요나는 그의 내리막 길 끝, 스올에 이르고나서야 하나님께 회개의 고백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다시 그를 끌어올리셨습니다. 그리고 물고기는 요나를 토해내었습니다. 고통의 끝자락에서 요나가 붙잡은 것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명령과 사명이었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두 번째로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말씀입니다. 요나가 가야 할 곳은 니느웨, 앗수르라는 거대한 제국의 도성입니다. 하지만 니느웨는 요나에게 유대 사람들에게 불편한 도성입니다.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여겨지는 원수의 도성입니다. 요나는 사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니느웨가 회개하는 것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니느웨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과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제게 구약을 가르쳐 주셨던 왕대일 교수님의 글을 한번 찾아보았습니다. 아주 흥미로운 대목입니다. 3:3b의 말씀을 보면, 니느웨를 가리켜 뭐라고 합니까? 니느웨를 묘사하기로 ‘큰 성읍’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을 히브리어 원문으로 보면, “이르-게돌라 헬로힘”이라는 표현입니다. 번역하면 “하나님 앞에 큰 성읍”입니다. 그런데 이 표현은 이렇게도 번역된다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 큰 성읍”이기도 하지만 이 말은 “하나님에게는 큰 성읍”입니다. 뭔가 작은 의미의 차이가 있습니다. 또는 “하나님에 의해서 커진 성읍”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고 합니다. 또는 “하나님 때문에 큰 성읍이자 하나님을 위해서 큰 성읍”이라고도 번역될 수 있습니다. 니느웨는 이렇듯 여러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요나에게는 불편하기만 한 도성, 니느웨. 아무리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할지라도 마음속으로는 없어졌으면, 벌을 받아 마땅한 그런 도성, 원수들의 도성이지만, 요나에게는 그런 도성이지만 하나님은 니느웨에 대한 ‘다른 시선을 가지고 계시다.’ 우리가 이렇게 읽어야겠습니다. 니느웨는 멸망당할 곳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성읍입니다.
그렇게 보면, 오늘날의 니느웨는 수없이 많습니다. 한 사람이기도 하고, 집단이기도 하고, 때로는 도시일수도 있겠지요. 신앙생활을 오랫동안 해온 우리에게는 이런 기준이 더욱 분명합니다. 어쩌면 그냥 싫고, 불편하고, 별 볼일 없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앙관으로 볼 때 분명히 멸망당해도 싼 그런 존재들이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다릅니다. 하나님의 시선은 얼마든지 다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다릅니다.
하나님이 요나를 어디로 보내려고 하시나요? 요나에게는 아닐지언정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보시기에, 하나님을 위한 사람들에게 보내려고 하시는 것이라고 알아들어야 합니다.
-무슨 말을 할 것인가?
요나가 니느웨 백성들에게 외친 메시지가 무엇인지 다시 보십시오.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는 망한다.”입니다. 요나는 니느웨의 종말을 외쳤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그렇게 기세등등하고 잘 나갈 것 같은 도성이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그렇지 않다는 말입니다. 세상사의 주인은 사람이 아니라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교회의 사람들인 우리가 선포해야 할 말은 “그러면 망한다.”이어야 합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서지 않으면 망한다는 예언자들의 전통을 기억해야 합니다.
니느웨 큰 도성입니다. 사흘길이나 걸리는 넓은 도성입니다. 그러나 말씀에 보면, 요나는 하루 동안만 외쳤다고 되어 있습니다. 가벼이 보이지 않는 말씀입니다. 요나가 걸은 날은 고작 하루 뿐이고, 요나가 전한 말은 그냥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진다고만 외쳤습니다. 그리고 왜 니느웨가 무너지는지, 니느웨 도성의 죄악이 무엇인지도 낱낱이 세세하게 열거하여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온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고, 믿었습니다. 높은 사람으로부터 낮은 사람까지 누구도 이의제기를 하거나 이 말에 의심이 없습니다.
말씀을 가벼이 보아 넘기면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가버리는 말씀이지만, 이 일이 얼마나 엄청난 일인지 여러분 아십니까? 사람이 얼마나 변하기가 힘든 존재인지 사람과의 관계를 조금만 고민해보았어도 우리는 압니다. 사람이 얼마나 어려운 존재인지를 말입니다.
요나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직접 임했습니다. 그런데도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요나의 눈으로 볼 때, 정말 형편없는 니느웨 왕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직접 전해지지도 않았습니다. 백성들의 모습을 보고 니느웨 왕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자리에서 일어나 회개하였습니다. 베옷을 입고, 잿더미 위에 앉았습니다. 누가 하나님 앞에서 변화된 사람입니까? 참된 신앙, 정말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신앙은 신앙에 대해서 많이 아는 자나, 교리나 교회생활에 대해서 익숙한 자가 아니라 하나님 말씀 앞에서 변화된 사람인줄로 믿습니다.
-믿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말씀의 마지막입니다. 오늘 본문이 말하고 있는 진리가 무엇입니까? 요나가 제대로 전하지 않았는데도 온 니느웨 사람들이 변화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종인 요나의 편견, 민족의 오래된 습성이나 신앙의 태도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한국 교회 역사에도 보면, 순교자로 기록된 사람 가운데 ‘로버트 토마스’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1876년 강화도 조약으로 외국과 문물 거래가 시작되기 10년 전, 1866년에 미국상선 제너럴셔먼호가 교역을 요구하면서 평양 대동강을 따라 올라오다가 그만 모래톱에 좌초되었습니다. 평양 관군은 때를 놓치지 않고 이 배를 공격해서 배가 불에 타버렸습니다. 그 배에 항해사 겸 통역관으로 있던 이가 바로 ‘로버트 토마스’였습니다. 애초의 계획은 평양에 들어가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지만 배가 그만 불타서 없어지게 되자 배에 싣고 온 성경을 밖으로 던져주는 일로 그의 계획이 끝나버렸습니다. 성경을 전달했다는 이유로 이 사람은 순교를 당했습니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장로교회 언더우드 선교사, 감리교회 아펜젤러 선교사가 조선에 들어오기 19년 전에 복음을 들고 조선을 찾았던 사람입니다. 조선 땅에서 제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보지도 못한 채 죽었습니다. 성경을 배 밖으로 던지면서 “야소(耶蘇, 예수)”라고 외친 것이 복음 전파의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가 뿌린 성경을 품에 안고 돌아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 복음을 읽고서 회개하고 예수를 믿게 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우리 민족 교회사에 길이 남을 민족 대 회개 운동의 중심, 평양이 ‘동양의 예루살렘’이 된 것이, 시작점이 된 것이 이 사건이었습니다.
역사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뿌리는 것은 우리 손일지 모르지만, 그것을 자라게 하시고, 거두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요나가 니느웨로 가기 전에 하나님이 먼저 니느웨로 가셨다고 우리가 믿습니다. 요나의 태도가 불량하고, 전한 내용도 별거 없더라도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대단한 선교사도 아니고, 위대한 복음 전파자가 아니더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자가 얼마든지 될 수 있습니다. 불타는 배에서 바깥으로 ‘야소, 야소’하고 외치는 절박감도 필요합니다. 또한 그리스도가 충분히 배어있어서 저절로 그리스도의 향기를 내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사명이 우리 삶에 드러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새로이 붙드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