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8월 6일 성령강림 후 제10주 (2023년-32호)

제목 : 눈 먼 제자, 눈 뜬 사람

본문 : 마태복음 20장 20-28절, 29-34절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가 아들들과 함께 예수께 다가와서 절하며, 무엇인가를 청하였다.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물으셨다. « 무엇을 원하십니까? » 여자가 대답하였다. « 나의 이 두 아들을 선생님의 나라에서, 하나는 선생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선생님의 왼쪽에 앉게 해주십시오. »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겠느냐? » 그들이 대답하였다. « 마실 수 있습니다. »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 정말로 너희는 나의 잔을 마실 것이다. 그러나 나의 오른쪽과 왼쪽에 앉히는 그 일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자리는 내 아버지께서 정해 놓으신 사람들에게 돌아갈 것이다. » 열 제자가 이 말을 듣고, 그 두 형제에게 분개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곁에 불러 놓고 말씀하셨다. « 너희가 아는 대로, 이방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을 마구 내리누르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끼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서 위대하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너희 가운데서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몸값으로 치러 주려고 왔다. »

그들이 여리고를 떠날 때에, 큰 무리가 예수를 따라왔다. 그런데 눈 먼 사람 둘이 길 가에 앉아 있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큰 소리로 외쳤다. «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 무리가 조용히 하라고 꾸짖었으나, 그들은 더욱 큰 소리로 외쳤다. «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 예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들을 불러서 말씀하셨다. « 너희 소원이 무엇이냐? » 그들이 예수께 말하였다. « 주님, 눈을 뜨는 것입니다. » 예수께서 가엽게 여기시고 그들의 눈에 손을 대시니, 그들은 곧 다시 보게 되었다. 그들은 예수를 따라갔다.

-인사합시다.

이렇게 귀한 날, 주 앞에 나온 성도 여러분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그리고 주님 이름으로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우리 모두 평화의 인사 나눕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참으로 아름답고 그 세상 속에 사는 하나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피조물인 우리는 이에 못지않게 아름다운 존재들임을 고백하는 귀한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실제로 그러해야 합니다. 

-병든 세상

그러나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아서, 그렇지 못한 것 같아 속상합니다. 여러분도 보셨는지 모르겠지만, 뉴스를 통해 전해지는 한국 사회의 모습이 참으로 비참하고 고통스럽습니다. 지난 달 말에 한 청년이 흉기를 휘둘러 또 다른 한 청년이 목숨을 잃은 참사가 있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다 죽이고 나도 죽고 싶었다.”는 말이 참 우리 모두를 고통스럽게 합니다. 

그런데 지난 목요일에 또 분당 서현동 어느 백화점에서 어떤 청년이 흉기를 휘둘러 많은 사람이 다쳤다는 뉴스를 들었습니다. 이 세상을 함께 살아가는 청년들이 자신은 희망이 없다고 여기고, 인생을 포기한 듯한 이런 모습을 보는 것이 가슴이 아픕니다. 이처럼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장면은 없을 것 같습니다. 희망을 모두 잃은 채 사람들을 죽이겠다고 나선 한 청년의 모습에서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는 이성복 시인의 말이 떠오릅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파하는 이도, 슬퍼하는 이도 없는 세상, 하나님의 나라 아닙니다.

이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무엇을 고백하고 기도해야 할지 난감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장년인 저는 내 자식이 안전하니 감사하다고 해야 할까요, 아니면 청년층에 대해 ‘젊은 것들이 정신 상태가 이렇게 나약해서야’ 말하면서 혀를 쯧쯧 차면 될까요, 아니면 어떻게 기도할까요?

우리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빛이자 소금이라 했는데, 교회가 젊은이들에게 용기를 주고, 교회가 삶의 희망을 잃은 이들 곁에 더 가까이 있었다면 하는 마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간절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할 때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바로 살 수 있습니다. 세상도, 사람도 바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따뜻한 위로의 말일 때도 있지만 때로는 엄격하게 우리를 꾸짖습니다. 그 꾸지람을 우리가 들어야지요.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잘못을 지적하기도 합니다. 잘못을 지적당하면 마음이 불쾌하고 불편합니다. 하지만 불편하더라도 그 불편함 앞에 서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야단이나 꾸지람, 그리고 잘못을 지적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에 새로운 눈을 뜨게 해줍니다.  

오늘 저는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마태가 전하는 복음서에서 오늘 나누고자 하는 말씀을 골랐습니다. 예수께서 보여주신 참사람의 길, 진짜 구원의 길이 여기에 있습니다. 늘 안타까운 것은 우리가 말씀에 목말라 하지도, 배고파하지도 않을까봐 염려스럽지요.

-본문의 위치

오늘 우리가 봉독한 복음서의 말씀은 두 단락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하나는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무엇인가를 요청한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눈 먼 두 소경’이야기입니다. 이 두 이야기는 따로 읽고 이해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이야기들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두 이야기를 한꺼번에 소개하려고 합니다. 이 두 이야기를 하나의 이야기로 이해해 보자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오늘 말씀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 말씀의 시작을 잘 보실 필요가 있습니다. 첫 단어가 무엇인지 말씀을 보십시오. 오늘 말씀의 첫 단어는 “그 때에”입니다. 언제라구요? “그 때”입니다. 그 때라고 말한 그 때는 어느 때일까요? 앞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보시면 알 수 있겠지요. 

오늘 본문 전에 있는 사건은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모아놓고 당신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신 사건입니다. 앞의 말씀에 보면,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이동 중이십니다. 예루살렘을 향해서 올라가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예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십자가 처형과 죽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이런 일이 있을 것이라고 제자들을 불러놓고 세 번씩이나 예고하셨습니다. 앞의 본문들이 계속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의 일이 오늘 말씀 본문입니다.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

자, 오늘 말씀을 보십시오. ‘세베대의 두 아들의 어머니’라는 여인이 나옵니다. 여기서 세베대의 두 아들은 ‘야고보와 요한’ 형제입니다. 예수님 제자들입니다. 신약 성경 전체를 보면 ‘누구의 어머니’라고 직접 등장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는 라는 표현은 몇 차례 나옵니다만 오늘 나오는 ‘세베대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어머니로서는 유일합니다. 

지금 예수님은 제자들 일행들과 함께 예루살렘을 향해 이동 중입니다. 그런데 야고보와 요한, 두 제자의 어머니가 예수님 곁으로 다가와서는 넌지시 말을 건넵니다. 

무슨 말을 하나요? 어떤 요구, 어떤 요청을 말합니다. 이렇습니다. “나의 두 아들을 선생님의 나라에서, 하나님은 오른 편에, 하나님은 왼편에 앉게 해주십시오.” 일종의 청탁입니다. 영광스런 자리에 앉혀달라는 노골적인 요구입니다. 두 아들을 높은 자리에 앉히고 싶은 어미의 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이해가 가십니까? 십분 이해하자면 엄마의 마음은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만 두 아들을 높은 자리에 앉히고 싶은 엄마의 마음으로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명료합니다.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이 행렬의 끝은 십자가입니다. 처참한 십자가 처형과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이해했다면 이 어미가 아들들을 예수님 옆에 앉히려고 할까요? 아닐 것입니다. 그렇게 못하지요. 이 세상의 어떤 어미가 자기 자식들을 십자가의 죽음으로 달려가는 이의 옆에 자리를 마련해 달라고 할까요? 이 말은 곧,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 이 여인은 예수님의 뜻도, 예수님의 말씀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내가 주는 잔을 마실 수 있겠느냐?”는 질문에 아무런 주저함도 없이, 아무런 난처함도 모른 채 “네, 마실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했겠지요. 

-다른 제자들은?

이 모습을 다른 제자들은 못 봤을까요? 당연히 봤습니다. 이 어미가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말씀을 읽다가 무척이나 궁금한 점이 생겼습니다. 24절에 보면 다른 “10명의 제자가 이 말을 듣고, 두 형제에게 분개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몹시 화가 났습니다. 왜 화가 났을까요? 이 어미가 예수께 하는 얘기를 어떻게 들었을까요? 그들 사이의 물리적 거리가 가까워서 들렸을까요? 좁은 엘리베이터에 여러 명이 타고 있으면 옆에 사람에게 작은 소리로 말해도 저절로 다 들립니다. 예수님과 예수님 일행이 너무나 가까이 붙어 있어서 제자들이 듣게 된 것일까요? 

아니면 이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열 제자가 들었다’, 이 말은 곧 예수님 옆에 다가간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의 의도를 다른 제자들이 알고 있었다는 말 아닐까요? 자신들도 실은 기회를 봐서 빨리 예수님 곁으로 가서 영광의 자리를 요청하려고 했었는데, 자신들은 차마 못하고 있었는데, 재빨리 이 어미가 요청하니 화가 난 것 아닐까요? 충분히 그럴 개연성이 있습니다. 실제로 공관복음은 예수님의 제자들의 무지와 어리석음에 대해서 끊임없이 지적하고 있습니다. 

-섬기는 자, 너희의 종

이런 난리와 소란과 시기심과 갈등 속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위대하게 되려는 자, 높은 자리에 오르려는 자, 으뜸이 되려는 자, 모두 “섬김의 종이 되어라”입니다. 다시 말하면 섬기는 자, 오늘날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곳에, 이곳에서 누군가의 손과 발이 되어 주는 자가 ‘하나님 나라에서 으뜸가는 이’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께 묻겠습니다. 이 말씀이 여러분에게 유효합니까? 아니면 무효합니까? 아멘하고 대답하실 수 있겠어요? 오늘날 이 세상에서 이 말씀 믿으면서 살아가실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섬기면서 사는 사람들을 ‘바보, 멍충이’라고 놀립니다. 누군가를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면 ‘인생에 손해를 봤다’고 땅을 치며 억울해합니다. 이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도 당연합니까?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 맞아요? 

-눈 먼 두 사람을 만나시다.

자, 다음으로 넘어갑니다. 예수님의 일행이 큰 무리를 이루어 이동 중에 있습니다. 여리고를 빠져나오고 있는 것을 보니, 예루살렘에 가까이 도달해 있습니다. 그런데 눈 먼 사람 둘이 예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불쌍히 여겨 달라”고 소리칩니다. 마침내 예수께서 그들을 부르십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너희 소원이 무엇이냐?” 눈 먼 그들이 하는 대답을 들어 보십시오. “주님, 눈을 뜨는 것입니다.” 이 두 사람의 소원은 눈을 뜨는 것입니다. 우리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소원은?

자, 우리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높은 자리에 앉는 것입니까? 좋습니다. 높은 자리 좋습니다. 또 우리의 소원은 위대한 사람이 되어 사람들의 우러름을 받는 것? 이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그리고 소소하게 돈도 좀 벌어야 하고요, 사람들에게 인정도 좀 받아야 합니다.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이런 것이 그렇게 나쁜 일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벌이는 일의 실상은 이렇습니다. 예수의 이름을 빌어 높은 자리를 노립니다. 예수님께 청하여서라도 남들 보다는 좀 잘나가야겠습니다. 남들 보다는 좀 높아져야겠습니다. 이런 세상 자랑이 우리 신앙의 간증이 되어 버렸습니다. 

자, 여러분, 우리 신앙생활에서 주님께 우리의 실생활의 필요를 말씀드리는 것은 나쁜 것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에도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 하십니다. 그러나 이것이, 예수님께 요청해서 남들 보다 높아지고, 세상에서 잘나가게 되고, 남들에게 우러름을 받는 것이 우리의 신앙의 전부여서는 결코 안됩니다. 이것이 신앙의 전부라고 교회가 가르쳐서도 안되고, 신앙의 완성치를 세상의 높은 자리로 등치하는 안됩니다.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는 주님의 말씀을 무색하게 만들면 안됩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 앞에 우리의 소원을 말씀 드려야 합니다. 우리의 소원은 이 두 사람처럼 “눈을 뜨는 것”이어야 합니다. 눈을 뜬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실상을 보지 못하고 사는 존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눈뜸의 시작입니다. ‘나’라는 ‘자아’의 벽에 둘러싸여서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그저 나의 욕망과 신앙을 혼동하는 나라는 존재의 어둠에서 눈을 뜨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깊이 받아들이십시오. 

‘세베대의 아들들’도 두 사람이고, 눈을 뜨는 것이 소원이라도 말하던 이 사람들도 두 사람입니다. 마태복음은 이 두 에피소드를 연달아 놓고서는 은근히 우리에게 비교해서 가르칩니다. 예수님 옆에서, 예수님을 따르던 이 두 제자와, 눈 먼 채로 인생을 살아온 이 두 사람 중 누가 진정 눈을 뜬 사람인가? 하고 우리에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맺는 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많은 사람을 위해 자기 목숨을 몸값으로 치러 주려고” 오셨다는 주님의 말씀이 가벼이 여겨지는 세상을 눈여겨보십시오. 두 눈을 부릅뜨십시오. 세상은 예수님의 이 말씀이 왠지 우습다고, 그리고 하찮다고 말합니다. 그리고서는 이렇게 가르쳐 줍니다. 지구가 끓어오르던 말든, 다른 사람이야 어찌되든 나만 잘 살면 그만이라고 말합니다. 그렇기에 돈 때문에 벌벌 떨며 삽니다. 미래 세대의 자산을 모두 불태워서라도 지금 나의 풍요를 누리려고 합니다. 유대인들의 설화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말세의 때가 되면 “혼이 없는 사람이 태어난다”는데 지금이 그런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돈이나 명예나 권세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사랑을 알면 우리는 사랑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지금보다 큰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눈을 뜬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불교 스님들에게 불교 신앙의 목적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성불이라고 말합니다. 부처를 이루겠다는 것이지요. 기독교 신앙을 가진 이들은 너무 작아진 것 아닌가요? 예수 믿어 마음 편하고, 넉넉하게 살고, 성공하고, 죽어 천국 가면 되는 것인가요?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위해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 자꾸 서야하고, 주님으로 인해 눈을 떠야 합니다. 십자가의 사랑과 그 사랑의 신비를 잃어버린 기독교 신앙은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아무 것도 아닌 짓을 하는 우리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신앙이 허튼 일이 되지 않도록 우리의 어두워진 눈을 뜹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