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나사렛 사람 예수
본문 : 이사야 63:7-9, 히브리서 2:10-18, 시편 148편, 마태복음 2:13-23
【이사야 63:7-9】
나는 주님께서 베풀어 주신 변함없는 사랑을 말하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여 주신 일로 주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베푸신 은혜, 그의 긍휼과 그의 풍성한 자비를 따라서 이스라엘 집에 베푸신 크신 은총을 내가 전하렵니다. 주님께서 이르시기를 “그들은 나의 백성이며, 그들은 나를 속이지 않는 자녀들이다” 하셨습니다. 그런 다음에 그들의 구원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고난을 받을 때에 주님께서도 친히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천사를 보내셔서 그들을 구하게 하시지 않고 주님께서 친히 그들을 구해 주셨습니다. 사랑과 긍휼로 그들을 구하여 주시고, 옛적 오랜 세월 동안 그들을 치켜들고 안아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2:13-23】
박사들이 돌아간 뒤에, 주님의 천사가 꿈에 요셉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 헤롯이 아기를 찾아서 죽이려고 하니, 일어나서,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라. 그리고 내가 너에게 말해 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 » 요셉이 일어나서, 밤 사이에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헤롯이 죽을 때까지 거기에 있었다. 이것은 주님께서 예언자를 시켜서 말씀하신 바, « 내가 이집트에서 내 아들을 불러냈다 »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는 것이었다. 헤롯은 박사들에게 속은 것을 알고, 몹시 노하였다. 그는 사람을 보내어, 그 박사들에게 알아 본 때를 기준으로, 베들레헴과 그 가까운 온 지역에 사는, 두 살짜리로부터 그 아래의 사내아이를 모조리 죽였다. 이리하여 예언자 예레미야를 시켜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 라마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울부짖으며, 크게 슬피 우는 소리다. 라헬이 자식들을 잃고 우는데, 자식들이 없어졌으므로, 위로를 받으려 하지 않았다. » 헤롯이 죽은 뒤에, 주님의 천사가 이집트에 있는 요셉에게 꿈에 나타나서 말하였다. « 일어나서,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거라. 그 아기의 목숨을 노리던 자들이 죽었다. » 요셉이 일어나서,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요셉은, 아켈라오가 그 아버지 헤롯을 이어서 유대 지방의 왕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 그 곳으로 가기를 두려워하였다. 그는 꿈에 지시를 받고, 갈릴리 지방으로 물러가서, 나사렛이라는 동네로 가서 살았다. 이리하여 예언자들을 시켜서 말씀하신 바, « 그는 나사렛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인사 나눕시다.
2023년 계묘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새해를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파리중앙교회 성도 여러분, 서로를 위한 새해 인사로 올 한해를 시작합시다. 인사 나누시기 바랍니다. 반갑습니다.
성도 여러분, 세상적인 이치는 자신이 가진 것을 자신의 권리로 이해합니다. 내게 주어진 모든 것이 마땅하고 당연합니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내게 주어진 모든 것을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 받아들입니다. 선물은 주는 이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내가 주는 이에게 권리나 특권을 요청할 수는 없습니다. 2023년 올 한 해를 선물로 받았으니 하나님께 좋은 것으로 응답하는 여러분 모두와 우리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시간
우리가 2023년 새해를 맞이했기에 시간이라는 것을 한 번쯤 떠올리게 됩니다. 우리는 평범하게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로 이어져있다고 생각합니다. 시간을 단위를 지어서 이해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St. Augustin 이란 초기 교회의 스승과도 같은 분은 우리에게 시간은 오직 ‘현재’ 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지나간 시간인 과거는 무엇이고, 오지 않은 시간인 미래는 무엇일까요? 과거는 ‘기억으로 존재하는 현재’라고 말하고, 미래는 ‘기대로 존재하는 현재’라고 말합니다. 현재는 “기억과 기대”를 품에 안은 시간입니다. 말이 어렵지만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은 지금을 영원처럼 살아야 한다는 말일 겁니다. 미래라고 생각하는 죽은 다음에 갖는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영원한 생명은 현재 지금입니다. 지금 여기서 영생을 살라는 말입니다.
하루하루 살기도 바빠서 급급한 처지라고 말하는 분도 있겠지만, 여러분, 하지만 우리를 포함한 현대인들의 가장 큰 슬픔은 ‘영원의 감각’을 잊고 산다는 것입니다. 새해 첫날, 첫 주일 아침 우리는 영원하신 분 앞에 와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온 우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 삶의 근본을 살피는 일입니다.
오늘 우리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그리움이야말로 믿음의 뿌리입니다. 보고 싶어 그리는 마음은 의도하지 않아도 저절로 일어나는 마음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을 그리워하는 이 마음이 있는지요?
-그래도 여기에 있다.
이 말씀의 시간이 지난 한 해를 돌아보시는 시간되기를 바랍니다. 그 기억 속에는 견디기가 참으로 어려운 것을 견뎌내고, 참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조차 받아들여야 했던 눈물, 고통의 시간들이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잃어버리게 된 사람이나 일들에 대한 아쉬움이 남습니다. 그렇지만 그래도 우리는 여기에 있습니다. 모든 것이 다 사라져도 우리가 여기 있는 한 희망은 있습니다. 바닥에서부터 다시 시작할 용기만 있다면 삶은 또 다른 기회를 우리에게 제공할 겁니다. 빛과 어둠, 희망과 절망, 기쁨과 슬픔이 찾아드는 것이 우리 인생의 풍경입니다. 뜻한 바대로 되었다고 우쭐거릴 것도 없고, 뜻이 좌절되었다고 낙심할 것도 없습니다. 날마다 일희일비 하며 사는 우리에게 전도서의 기자는 냉철한 지혜를 담아 이렇게 권고합니다.
“좋은 때에는 기뻐하고, 어려운 때에는 생각하여라. 하나님은 좋은 때도 있게 하시고, 나쁜 때도 있게 하신다. 그러기에 사람은 제 앞일을 알지 못한다.”(전7:14).
좋은 일이 있을 땐 맘껏 기뻐해도 괜찮습니다. 어려움이 다가오면 깊이 생각하십시오. 그 어려움은 우리를 더 깊은 차원으로 인도해 줄 것입니다.
-어떤 사람, 어떤 세상
삶은 참 애매하고 모호합니다. 그래도 어렴풋하게나마 우리는 인생을 아름다운 방향으로 바꿀 수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여러분, 자신에게 물어보십시오. 올 한해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그리고 세상이 어떻게 변했으면 좋을지 하고 말입니다.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렇지요? 그리고 좀 더 따뜻한 세상이 되고 싶다고 말할 것입니다. 이것을 거절할 사람은 없다고 확신합니다.
모든 생명은 온기가 있어야 싹트는 법입니다. 어린 시절 과학시간에 비이커에 흰 솜을 깔고 콩 두 세알 넣고 물로 촉촉이 적셨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햇볕이 잘 드는 창가에 놓아서 온기를 제공해 주었더니 며칠 지나지 않아 콩에서 새 잎이 돋아나는 것을 신기하게 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생명은 이런 것이지요. 우리 사람의 생명 역시 온기가 있어야 피어나고 만개합니다. 저는 이것을 하나님의 온기로 가득 찬 사람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으로 가득 찬 사람은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좀 더 나은 세상을 위해서 기도하고 애쓰는 사람일 것입니다. 이 역시 싫다고 거절할 사람은 없습니다.
-행복하라 주의 자녀여!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희망하고 꿈꿀까요? 사람은 누구나 행복하게 살기를 바랍니다. 나와 내 주변이 모두 건강하기를 바라고, 걱정거리도 덜하고, 모두 즐겁게 사는 겁니다. 저는 여러분들도 행복하게 살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우리에게 무엇이 있으면, 무엇이 채워지면 우리가 행복할까요? 우리가 일반적으로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삶의 조건이 갖춰진다고 해서 행복이 보장되나요?
내 행복에 하나님이 차지하시는 위치는 어디인가요? 하나님은 곁다리로 끼워드리나요? 두 가지 점에서 그렇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한 삶의 조건은 쉽게 허물어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본인이나 가족이 갑자기 큰 병에 걸리거나 경제적인 난관에 떨어질 수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행복한 삶의 조건은 시간이 지나면서 낡아진다는 사실입니다. 좋은 대학교에 들어가거나 남들이 모두 부러워하는 학교에 들어가거나 좋은 회사에 취업했다고 합시다. 시간이 흐르면 그런 것들은 새롭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이를 극복하려고 색다른 취미생활도 합니다. 그런 생활도 역시 시간이 지나면서 새로움이 사라집니다. 사람은 그 어떤 삶의 조건에서도 완전한 행복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사람은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자기 내부에 생명의 근원이 없다고 말합니다.
-이사야가 말하다.
성경은 사람이 행복하게 사는 바른길을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바로 여러분을 만드신 분이기 때문이지요. 우리 생명을 창조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사람들은 별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경험한 세상살이는 하나님과 관계없이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표면적으로만 보면 돈과 권력이 세상을 지배하는 듯이 보입니다.
성경이 배경이 된 시대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군사와 경제력이 압도적으로 우세했던 제국이 세상을 지배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활동하던 당시 유대인들의 운명을 지배하는 제국은 바벨론이었습니다. 기원전 587년에 예루살렘은 바벨론에 의해서 초토화되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졌고, 모든 것은 강탈당했습니다. 예루살렘 주민들은 학살당하거나 전쟁 노예로 사로잡혔습니다. 그들은 행복한 시절이 끝장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들을 돌봐주지 않은 하나님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상황은 절망적이었습니다.
그들 앞에 이사야 선지자가 나타났습니다. 그는 모두가 절망하고 있을 때, 신앙이 저 나락으로 떨어졌을 때 전혀 다른 메시지를 그들에게 전했습니다. 그 내용이 오늘 이사야 말씀입니다. 그는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합니다. 7절입니다.
“나는 주님께서 베풀어 주신 변함없는 사랑을 말하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여 주신 일로 주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베푸신 은혜, 그의 긍휼과 그의 풍성한 자비를 따라서 이스라엘 집에 베푸신 크신 은총을 내가 전하렵니다.”(7절)
-우리 구원을 말하다.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과 은총을 말하겠다는 이사야의 이 외침이 유다 백성들에게 감동적으로 들렸으면 참으로 좋으련만 어쩌면 뻔한 말로 들렸을 수도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들이 처한 상황은 매우 피곤합니다. 바벨론 포로 생활에 몸과 마음이 지쳤습니다. 언제 이런 궁핍한 생활이 끝날지도 모릅니다. 끝나 고국으로 돌아간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과 은총을 삶에서 발견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왜 이런 말씀을 전할까요? 뭔가 특별한 계시를 받았을까요? 아니면 남모르는 능력을 지니게 돼서 미래를 점치기라도 한 것일까요?
다른 사람들도 볼 수 있는 객관적인 증거를 이사야가 본 게 아닙니다. 그는 손에 잡히는 어떤 증거를 본 게 아니라 하나님을 느끼고 본 겁니다. 하나님이 누군지를 알고 있었기에 자신들이 처한 상황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을 말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 경험에 관한 가장 적절한 비유는 8절이 말하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은 나의 백성이며, 그들은 나를 속이지 않는 자녀들이다” 하셨습니다. 그런 다음에 그들의 구원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이사야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런 선언이자 확신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요? 그 으뜸은 경험입니다. 하나님 주시는 은총의 경험입니다. 개인의 역사 뿐 아니라 민족의 역사에도 어려운 일들을 많이 겪었지만, 그 모든 과정은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만한 교육의 장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40년 광야 생활을 통해서 확실하게 경험했습니다. 삶의 조건으로만 본다면 광야는 생존이 불확실한 장소였습니다.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하지만 광야 생활의 경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구원의 경험입니다. 단, 구원의 경험이 지금 발휘되고 있는지는 살펴볼 일입니다.
이 말씀을 지금 우리 삶으로 가져와 보십시오. 저는 믿는 바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 안에 있다는 것을 저는 확신합니다. 여기 계신 분, 한분도 빠짐없이 그렇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확신하지 못하는 영역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구원의 경험이 지금 이 순간의 경험인지 과거 속 추억인지, 아니면 망각 속에 있는 건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알 수 있는 사람은 여러분 자신 밖에 없습니다. 대답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확신에 찬 사람은 세상이 제시하는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삽니다. 적어도 그 마음 품고 있습니다. 그러려고 애를 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그렇습니다.
이사야는 지금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깊은 골짜기에서 평화를 내다보고 있습니다. 죽음의 공포가 가득한 깊은 곳에서 생명의 평화를 내다봅니다. 인간의 눈에 더 이상 희망이 없는 상황에서 오히려 하나님의 은총을 발견합니다. 이것이 말이 될까요? 혹시 망상이 아닌가요? 그것을 현실로 살아가는 태도가 바로 성경이 말하는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신앙입니다. 모든 이들에게 이런 신앙의 눈이 열리지는 않을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은총을 깊이로 경험하지 못하고 표피적인 것으로만 접근하기 때문입니다. 인생살이가 잘 풀리는 것에서만 하나님의 은총을 맛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나사렛 사람 예수
솔직히 말하자면 오늘 마태복음이 전하는 이야기는 굉장히 불편한 이야기일수도 있습니다. 예수님 오시는 그 때에 어린아이들이 죽고 세상의 폭압이 정점에 이르렀습니다. 헤롯왕은 예수 탄생 시 동방에서 온 박사들로부터 소식을 들었습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를 찾아왔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유대인의 왕인 자신이 이렇게 버젓이 이렇게 살아있는데, 새롭게 나신 왕을 경배하러 동방에서 박사들이 왔습니다. 그리고 새로 나신 왕을 찾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부모의 손에 이끌려 권력자의 눈을 피해 에집트로 피난을 가야 합니다. 숨어 살아야 합니다. 많은 어린아이들의 희생도 있습니다. 우리 사람들이 사는 세상의 일들입니다.
복음서가 예수님을 나사렛이라는 지명과 역사적인 사건들을 배경으로 해서 말씀하는 이유는 예수님이 우리와 조금도 차이가 없는 구체적인 인간으로 살았다는 사실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그렇기에 인간으로서의 삶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우리는 두 발을 땅에 딛고 삽니다. 세상을 사는 모든 피조물이 무엇을 먹고 마셔야 살 수 있습니다. 모든 게 흙에서 와서 다시 흙으로 돌아가지만 지금 우리가 인간으로서 살아있다는 사실이 소중합니다. 소중할 뿐만 아니라 거룩합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인간으로 사는 우리, 우리 인생, 우리의 생명을 거룩하다고 말합니다. 모든 인간의 삶이 인간답게 하는데 최선을 다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어떤 누구의 주장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다만 그 길을 우리가 찾는 중인지, 잊고 있는 것인지 그것은 다른 문제겠지요.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 그 안의 역사와 인간의 삶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에게는 참 인간다움은 당연한 일입니다. 마태복음은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마저 나사렛 동네에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의 삶을 살았다고 말합니다.
-말씀 맺습니다.
오늘 우리는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면서 계획을 세우고 목표를 설정하기도 합니다. 다 좋습니다.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오늘 이 시간을 통해 우리가 하나 점검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대단한 솜씨를 지닌 마술사나 인류 역사를 쥐락펴락하는 전쟁 영웅이나 대단한 지혜를 가진 위대한 학자가 아니라 나사렛이라는 촌 동네에서 우리와 비슷하게 살았던 사람 예수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셨던 그 나사렛 예수가 이제 우리와 항상 함께 한다고 약속했습니다. 우리의 평범한 삶과 그 일상에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와 같은 자영업자, 회사원, 학생, 전업주부로서의 인생에 비밀한 방식으로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의 생명 통치가 우리의 평범한 일상에서 발생했습니다. 이 놀라운 사실을 여러분은 실제 삶에서 어느 정도나 분명하게 누리고 있는지요? 이 말씀 한 해 동안 명심하고 살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