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월 8일 주현 후 제 1 주 (2023년-02호)

제목 :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본문 : 이사야 42:1-9, 사도행전 10:34-43, 시편 29편, 마태복음 3:13-17

【사도행전 10:34-43】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였다. « 나는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외모로 가리지 아니하시는 분이시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가 어느 민족에 속하여 있든지, 다 받아 주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씀을 보내셨는데,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평화를 전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만민의 주님이십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이 일은 요한의 세례 사역이 끝난 뒤에, 갈릴리에서 시작하여서, 온 유대 지방에서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부어 주셨습니다. 이 예수는 두루 다니시면서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억눌린 사람들을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에서 행하신 모든 일의 증인입니다. 사람들이 그를 나무에 달아 죽였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사흗날에 살리시고, 나타나 보이게 해주셨습니다. 그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미리 택하여 주신 증인인 우리에게 나타나게 하셨습니다. 그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뒤에, 우리는 그와 함께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였습니다. 이 예수께서 우리에게 명하시기를, 하나님께서 자기를 살아 있는 사람들과 죽은 사람들의 심판자로 정하신 것을 사람들에게 선포하고 증언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예수를 두고 모든 예언자가 증언하기를,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

-인사합시다.

주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암묵적으로 가르쳐 준 인사가 있습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께서 부활 이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인사하셨습니다. 십자가를 둘러싼 암투와 계략과 음모, 소란스러움을 모두 잠재우는 인사가 평화를 비는 일입니다.
서로에게 따뜻하고 친절한 인사를 전해 주십시오. 서로에게 평화를 빌어 주십시오. 여러분, 잘 오셨습니다.

새해를 맞이하고 벌써 한 주간이 지나갔습니다. 새해에 새롭게 세운 계획이나 목표를 잘 실행하고 계신지요? 여러분 마음속에 있는 일들, 그 소망을 주님께서 알아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바램과 소망을 알아주시니 얼마나 감사하고 좋습니까? 그런데 반드시 여러분 맘에 그리는 그 일들, 그것이 ‘주님 뜻에 합당한 일들’이기를 바랍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내 바램이나 소망과 주님이 내게서 바라시는 주님의 소망이 우리 자신의 삶에서 꼭 일치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 뜻과 내가 일치하면 참으로 좋겠지만 때로는 일치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어쩌면 꽤나 많을 수도 있겠지요. 그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럴 때 쓰는 말이 ‘신앙’입니다. 신앙은 주님의 뜻에 진지한 것입니다. 고민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놓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앙생활한다’고 합니다. 오늘 신앙생활의 중심인 예배라는 일을 하기 위해 우리가 모였습니다. 그리고 말씀의 시간을 맞았습니다. 목사의 말로 듣지 마시고 말씀 가운데서 주님의 소리를 발견하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대학원을 마치고 첫 목회지가 제주도 서귀포였습니다. 제주도에는 한라산이 있지요. 그 당시만 하더라도 한라산에 오르는 것은 그야말로 언감생심이었습니다. “내가 어떻게 감히 한라산에 올라?” 저의 체력도 의심스럽고, 산을 오르는 고통을 감당하기도 싫더라구요. 그래서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는데 어느 추운 겨울날 같은 지방에 있던 선배 목사님이 한라산에 가자고 하시더군요. 정말 가기 싫었지만, 선배 목사님이 가자고 하니 어쩔 수 없어서라도 가게 되었습니다. 하필이면 산에 가기로 한 날, 싸리눈이 흩날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정상에 오르려면 신발에 미끄럼 방지용-아이젠을 끼어야 했습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아이젠을 신발에 끼면 평상시 걸음보다 몇 배나 힘들어집니다. 예상했던 대로 산을 오르기 시작하자 고통이 시작되었습니다. 속으로 “왜 왔을까? 거절할 걸 괜히 왔다.” 등등 이런 생각을 하면서 산에 올랐습니다. 어느 순간 정말로 지치고 힘든 순간이 되었습니다. 그 때 선배 목사님이 배낭에서 따뜻한 물과 함께 오이를 꺼내 주셨습니다. 허기도 지고해서 받아서 입에 넣었는데 평소에 먹던 오이가 아니었습니다. 따뜻한 물 한잔도 평소에 벌컥벌컥 마시던 물 한잔이 아니었습니다. 맛도 다르고 기분도 달라졌습니다. 오이 조각 몇 개와 물 한 잔이었을 뿐인데, 왜 일까요? 힘들어서? 여러 말로 설명할 수 있지만 저는 이 자그마한 것이 제게 정말로 필요한 양식이 되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평소에는 잊고 지냅니다. 무엇을 양식으로 삼아 인생이라는 기나긴 여행을 떠났는지 잊고 삽니다. 하지만 정말로 어렵고 고통스런 시기가 오면 내가 내 영혼의 양식을 위해 무엇을 먹고 사는 지, 무엇을 내 삶의 길잡이로 삼는 지 그제서야 깨닫게 됩니다.

-신앙을 살피다

오늘 우리의 말씀 사도행전 10장의 말씀은 그런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미 오랜 시간 기독교 신앙 공동체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 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구분해서 분명히 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교회에 소속이 되어 있다는 일’과 ‘내가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일’은 엄연히 다른 것입니다. 교회에 속해 있지만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을 수도 있구요, 신앙은 있지만 교회는 속해있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물론 둘 다 이기도 하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한 번쯤은 우리 인생에서 이렇게도 중요한 “신앙의 순간”을 돌아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내가 내 인생에서 하나님이시라는 분을 진정으로 만났던 순간이라고 명명하면 좋을 듯합니다. 그 때의 감정을 떠올리시는 것도 좋겠고, 그 때의 감격도 좋겠습니다. 저는 우리의 각자의 그 순간들이 우리가 다시 태어나는 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 탄생의 임계점

우리가 이루는 교회도 그 탄생의 순간이 있습니다. 어떻게 말하면 질적인 전환점이 되는 순간입니다. 여러분, ‘임계점’이라는 말 아시지요? 액체 상태이던 물이 100도에 이르면 물은 질적으로 다른 기체가 됩니다. 이 전환의 지점이 임계점입니다. 오늘 말씀은 교회가 임계점을 맞이한 순간입니다.

이 지점에서 질문 하나 해보겠습니다. 교회는 언제 시작되었나요? 교회의 시작을 어느 때부터 라고 말해야 될까요? 너무 막연하지요. 예수님 때부터 아닐까? 이렇게 단순하게 생각할수도 있겠지만 예수님이 교회를 직접 세운 적은 없습니다. 사실 오늘날 우리가 교회라고 부르는 모임이 언제 정확하게 시작되었는지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없습니다.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교회의 특성이 드러나는 시점입니다. 교회의 특성이 잘 드러나는 장면이 바로 오늘 사도행전 말씀을 둘러싼 일들입니다.

오늘 우리가 봉독한 말씀을 한번 떠올려 보십시오. 오늘 말씀은 순전히 ‘베드로의 설교’입니다. 전부가 베드로가 감격에 차서 말씀을 전합니다. 격정적인 설교 말씀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이 말씀을 전하는 장소가 특별합니다. 로마군을 이끄는 백부장인 ‘고넬료’라는 사람의 집입니다.

-베드로와 고넬료의 만남

베드로가 이방인 로마 백부장의 집에 들어간다는 게 지금 우리 눈에는 이상하게 보이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당시로서는 정말 큰 사건입니다. 이 사건이 당시로서는 뜨거운 감자처럼 예민한 이슈였다는 말입니다. 그 배경을 간략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고넬료는 로마 군대의 백부장으로서 가이사랴에 주둔하고 있던 로마 수비대의 장교였습니다. 이방인이었지만 유대교로 개종한 그는 어느 날 오후에 환상 중에 천사를 봅니다. 천사는 그에게 말합니다. 욥바에 사람을 보내서 베드로라 하는 사람을 집으로 모셔 오라는 겁니다. 고넬료는 믿을만한 심부름꾼을 50km 떨어진 욥바에 보냅니다.
한편 욥바에 잠시 머물고 있던 베드로는 기도하다가 환상을 봅니다. 각종 짐승과 기어 다니는 것과 새들이 들어 있는 보자기가 하늘에서 내왔습니다. ‘잡아먹으라.’는 소리가 들립니다. 유대인으로서는 먹을 수 없는 짐승들이라서 베드로는 거절합니다. 다시 하나님이 깨끗하게 한 것을 더럽다고 하지 말라는 소리를 듣습니다. 이상하기도 하고, 기분이 썩 좋은 환상은 아니었습니다. 그 환상이 끝나는 순간에 멀리 가이사랴에서 고넬료가 보낸 심부름꾼들이 들이닥칩니다. 그 심부름꾼들과 함께 베드로는 길을 떠나 다음날 고넬료 집에 도착합니다. 고넬료는 베드로에게 그간 자기에게 일어난 이상한 현상을 설명한 뒤에 이렇게 말을 마칩니다.

“나는 곧 당신에게 사람을 보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와 주시니, 고맙습니다. 지금 우리는 주님께서 당신에게 지시하신 모든 말씀을 들으려고, 다같이 하나님 앞에 모여 있습니다.”

여기까지가 오늘 본문의 배경이 되는 사건입니다. 이방인이던 고넬료를 만난 일이 뭐가 그리 크고 대단한 일인가 생각하시겠지만 제자들로만 모이던 그룹이 이제 유대인의 그 한계를 넘습니다. 선교의 범위도, 선교의 대상도 유대인들끼리만 이었습니다. 하지만 유대 민족적인 한계를 넘자 이 순간은 교회가 탄생하는 순간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가 오늘 우리에게까지 영향을 미쳤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듣게 되었고, 그리스도인이 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베드로의 설교

이제 베드는 감격에 차서 설교합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요약해 보겠습니다.
베드로는 일단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않으신다.’는 말로 설교를 시작합니다. 이 말은 우리가 흔히 하는 외모 평가, ‘잘생겼다 혹은 못생겼다’의 의미가 아닙니다. 이제 더 이상 유대인이냐 이방인이냐, 율법을 지켰냐 아니냐 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중요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의 편협한 율법주의적 사고방식을 비판하는 이야기입니다. 율법주의는 분리주의적 사고방식입니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 배운 사람과 못 배운 사람, 유대인과 이방인을 분리합니다. 베드로 설교는 이런 율법적이고 분리적인 사고방식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극복되었다고 말합니다. 첫째 ‘율법을 넘어섬’입니다.

또 그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평화의 복음’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유대인과 율법을 지킨 사람들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 남자만이 아니라 여자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 백인만이 아니라 유색인까지, 지식인만이 아니라 지식이 없는 사람까지 모든 이들에게 해당된다는 뜻입니다. 요약하면 ‘둘째 만민을 위한 복음’입니다.

그리고 셋째, ‘구세주는 예수 그리스도시다’입니다. 베드로 설교는 그 다음 구절부터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가 누군지를 설명합니다. 그가 누군지를 알려면 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리고 하나 더 “우리는 이 일의 증인입니다.” 라는 선언의 말씀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교회는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교회는 이 일을 증언하는 공동체입니다. 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교회는 무엇을 하는 공동체인지 이해하실 것입니다.

베드로의 설교는 이렇게 마무리가 됩니다만 하나의 중요한 사건이 남았습니다. 오늘 베드로의 설교를 둘러싸고 있는 앞 사건이 고넬료와의 만남이라면 뒷 사건이 남아 있습니다. 그 사건은 한 마디로 이렇습니다. “베드로가 이런 말을 하고 있을 때에, 그 말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성령이 내리셨다.” 성령을 충만히 받은 무리가 교회입니다. 교회는 악령에 사로잡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히는 공동체입니다.

-알지 못하는 신앙을 넘어서

신약성경 사도행전에는 ‘바울의 선교 여행에 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세 번의 선교 여행 가운데 두 번째 선교 여행에 이르러 비로소 복음이 유럽 땅으로 넘어오게 됩니다. 그 때 바울에 의해 세워진 교회가 빌립보 교회, 데살로니가 교회, 베뢰아 교회, 고린도 교회입니다. 우리 귀에 익숙한 이름들이지요? 그런데 바울은 고린도 지역으로 내려가기 전에 전도하려고 들어갔던 도시 하나가 더 있습니다. 그 도시가 그리스의 수도인 아테네입니다. 그것도 홀로 들어갔습니다. 사도행전 17장에 보면 바울이 아테네에 들어가서 깜짝 놀란 장면이 나옵니다. 왜 놀랐을까요? 아테네 도시 전체가 온갖 신들을 조각해 놓은 신상으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보고 놀랐습니다. 아테네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신들을 섬겼던지 자기들이 빠뜨리고 만들지 못한 신상이 있을까봐 어떤 제단에는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이름을 새긴 곳도 보았습니다. 오늘날 유럽의 유명한 도시에는 ‘판테온(팡떼옹)’이 하나씩 있습니다. 이 ‘팡테옹’을 우리말로 하면 ‘만신전’입니다. 온갖 세상 잡신들을 다 섬기도록 마련된 제단인 셈입니다.
예전 한국 땅에 들어왔던 선교사들이 가장 곤혹스러웠던 점이 온갖 신들을 섬기는 한국 사람들의 신앙관 때문이었습니다. 나무 신, 부엌 신, 마당 신에다가 변소 신까지 있었습니다.

여러 신들이 노할까봐 그들을 위한 제단 까지 마련한 것이지요. 오늘 우리의 신앙이 이와 다르기를 설교자로서 간절히 바랍니다. 그 신이 누구인지도 모른 채, 벌받을까봐 믿는 신앙의 차원에서 이제는 우리가 성장해야 합니다. 우리가 믿는 분이 누구인지 궁금해야 합니다. 알고 싶어 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올 한해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말씀 맺기

이 말씀은 기독교 신앙의 가장 초보적인 말씀입니다. 하지만 이 가르침을 여러분께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사실을 주목하십시오. 믿는다는 것은 신뢰한다는 뜻입니다. 그분의 운명을 나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그 신앙의식이 세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와 함께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 생명으로 변화하고 참여하게 된다는 사실을 실제로 믿을 수 있다면 그는 자기 스스로를 옭아매는 세상적인 강요와 세상적인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죄로부터의 해방’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해방을 경험한 사람들은 생명을 얻은 사람입니다.

여전히 이런 설명이 실감 나지 않는 분들이 있을지 모릅니다.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일상을 해결하는 것만도 힘에 벅찰 지경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예수의 운명에 자신의 운명을 일치시킨다는 말은 거리가 먼 것으로 보일 겁니다.

그럼 언제쯤 우리는 기독교 신앙의 중심 속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요? 이런 삶의 모습에서는 기독교 신앙의 중심으로 들어갈 계기를 찾을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신앙적인 일이 우리의 생활에 있어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 삶을 성찰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일상과의 단절이 필요합니다. 그게 일주일에 한번 만나서 함께 참여하는 예배입니다. 그리고 번잡한 일상에서 벗어나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기도하고 성경 읽는 일은 하나님의 뜻을 묻는 일이지요. 내 인생이 마냥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 주님과 운명을 같이 하는 것이니 주님께 물어야지요. 그렇지 않고서는 신앙생활을 지속할 수가 없습니다.

새해를 맞으면서 세상일의 계획도 세우고 품어야겠지만, 우리가 새롭게 우리의 신앙을 점검하는 시간이 있기를 바랍니다. 새 한해 2023년 신앙으로 함께 성장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