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본문 : 이사야 9:1-4, 고린도전서 1:10-18, 시편 27:1-9, 마태복음 4:12-23
【마태복음 4:17-23】
그 때부터 예수께서는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기 시작하셨다. 예수께서 갈릴리 바닷가를 걸어가시다가, 두 형제, 베드로라는 시몬과 그와 형제간인 안드레가 그물을 던지고 있는 것을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 나를 따라오너라. 나는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로 삼겠다. » 그들은 곧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갔다. 거기에서 조금 더 가시다가, 예수께서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보셨다. 그들은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배에서 그물을 깁고 있었다. 예수께서 그들을 부르셨다. 그들은 곧 배와 자기들의 아버지를 놓아두고, 예수를 따라갔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를 두루 다니시면서,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며,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며, 백성 가운데서 모든 질병과 아픔을 고쳐 주셨다.
-인사나누기
주안에서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모두 안녕하세요? 이곳에 오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반갑습니다. 주님께서 이 시간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의 예배를 받아주시리라 믿습니다. 서로에게 먼저 인사 나누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서로에게 친절하고 따뜻한 인사를 전해 주십시오.
오늘은 세상의 시간으로 ‘설날’입니다. 이 곳 프랑스 땅에 사는 우리에게 설날이 특별하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우리 성도들 간에라도 함께 나누고 즐겁게 지낼 수 있는 오늘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 왔으니 하나님의 마음과 어우러질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서
오늘 복음서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주님의 말씀을 새겨보려고 합니다. 오늘 주제이자 제목입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가 말씀을 앞에 놓고 앉았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말씀은 우리를 살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도 있지만 반대로 말씀은 뒷전인 시간일수도 있습니다. 말씀이 뒷전이 되면 우리 마음 속 말씀의 자리를 무엇인가가 대신 차지한 것이겠지요. 주 앞에 나왔지만 말씀을 듣고 말씀을 나누는 일을 뒤로 미뤄 버리는 이상하고 강력한 힘이 있을 수 있습니다.
톨스토이가 쓴 <안나 카레니나>라는 소설아시지요? 읽지는 않았어도 제목은 들어보셨지요? 이 소설은 첫 문장으로 아주 유명합니다. “모든 행복은 서로 비슷비슷하지만 각자의 불행은 모두 저마다 특별한 모양을 가지고 있다.” (Tous les bonheurs se ressemblent, mais chaque infortune a sa physionomie particuliere). 이 문장이 어찌 뭔가 맞는 말 같지 않습니까? 우리 사람들은 모두 각자가 자기만의 사연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불행감이든 행복감이든 모두 각자가 갖고 있는 사연이란 특별하다 여깁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와서도 각자 숨은 사연 되새김질 하느라 여념이 없을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내가 나로 가득 차있는 셈입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 위한 자리를 마련하려고 이 곳에 모인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자리가 필요합니다.
기쁜 사연 갖고 오신 분은 마음껏 기뻐하십시오. 아픈 사연 품고 계신 분도 주님께 내어놓고 위로 받는 시간되시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이 말씀의 시간으로 우리 모두가 삶의 용기를 얻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디스토피아 세상
여러분, ‘디스토피아’라는 말 혹시 아십니까? 조지 오웰이 쓴 <1984>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이 소설을 가리켜서 ‘디스토피아’ 소설이라고 말합니다. 디스토피아는 유토피아의 반대말 ‘안티 유토피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자유롭고 아름다운 이상향을 바라고 꿈꿉니다. 이것이 유토피아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바라는 이상과는 정반대의 미래가 펼쳐집니다. 이런 세상을 디스토피아 세상이라고 합니다. 통치자들은 자유로움을 말하지만 실제 삶은 눈에 보이지 않는 억압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세상은 이상적인 미래를 말하지만 사람들이 실제 이상을 실현할 수 없는 세상입니다. 어쩌면 요즘 젊은이들이 더욱 절절히 느끼는 감정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가을철 바닥에 떨어진 바싹 마른 나뭇잎 같습니다. 생명이 단절된 사람이지요.
이것을 신앙적으로 한번 말해 보자면 이렇습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사람들의 구원을 보장한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신앙이 그 안에 생명력을 갖지 못하면 신앙이 규율로 그치고 맙니다. 규율 말입니다. 지켜야할 것, 해야할 것, 하지 말아야할 것입니다. 이런 규율, 계명이란 참 생명으로 나아가기 위한 하나의 통로일 뿐인데, 신앙인들은 규율과 통제가 신앙이라고 오해합니다.
이런 디스토피아 상황은 소설 속 이야기가 아님을 여러분도 직감하실 겁니다. 불편하실 수도 있겠지만 몇 달 전 뉴스 하나를 가져와 보겠습니다. 경기도 평택에 있는 어느 빵공장에서 청년 노동자 한 사람이 ‘야간작업: 소스 배합기’에 끼어 숨지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일주일 전에도 똑같이 기계에 끼이는 사고가 이미 있었다고 하는데 회사는 대수롭지 않게 여겨 안전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것이 나중에 밝혀졌습니다. 감당하지 못할 만큼 비용이 많이 드는 일도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사람의 생명과 안전을 외면한 경제적 이익 추구는 비극의 씨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더욱더 참담한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그 억울한 피가 아직 마르기도 전에 회사 측은 그 기계를 흰색 천으로 가리고 다른 노동자들에게 작업을 계속하게 했다 합니다. 경제적 이익이 하나님 형상인 인간의 존엄을 압도할 때 세상은 ‘디스토피아’로 변해버립니다. 죽음을 당한 이 청년은 소박한 꿈이 하나 있었다고 합니다. 이 꿈은 돈을 좀 벌어 자그마한 자신의 가게를 내고 싶었었다고 합니다. 한 청년 노동자의 꿈은 그렇게 무너졌습니다.
창세기 아담의 아들 가인에게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동생 아벨의 모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말씀에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피가 땅에서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셨다”(창 4:10)는 말씀이 먼 옛날이야기로 들리지 않습니다.
-무정한 세상과 사람들
우리 생명은 생물학적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경제적인 이윤을 만들어내는 기계도 아닙니다. 우리 기독교 신앙인들은 이 세상 모든 생명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리 생명은 하나님께 속해 있다고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사람다워지는 것을 막는 것은 악마적인 것입니다.
디스토피아 세상 사람들의 특색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무정함’입니다. 세상에 흉악한 범죄가 벌어지고 나면 그 범인이 ‘싸이코패스’의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말들을 합니다. 그런데 전문가들이 말하기를 ‘싸이코패스’의 특징은 딱 하나입니다. ‘무정함’입니다. 감정이 사라진 사람입니다. 특히나 타자의 고통이 보이지 않습니다. 아파서 신음하는 사람에게 감정적인 동질감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기 주변 사람들이란 그저 내 욕망을 채우기 위해 이용할 도구나 대상으로만 보인다고 합니다. 타자가 처한 상황을 이해하는 인지적 공감도, 타자가 느끼는 감정이나 고통을 예민하게 알아차리고 함께 아파하는 정서적 공감도 작동하지 않는 사람.
무정한 마음이 공감의 자리를 대신 차지할 때 세상은 냉혹하게 변합니다. 타자에 대한 적대감이 일상이 될 때 우리는 세상에서 따뜻함을 느끼지 못합니다. 언제든지 돌아갈 수 있는 아버지의 품인 고향으로 인식하지 못합니다.
창세기 바벨탑 사건이 떠오릅니다. 언어가 흩어져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된 사건 이후에 사람들 사이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기억하십니까? “이후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 채 온 세상에 흩어졌다.” 창세기 말씀은 무척이나 원형적인 사건(뿌리 같은)입니다. 이들의 후손인 우리 사람들의 오늘날 모습입니다.
-예수 복음의 시작 사건
예수님 당시의 모습은 어땠을까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얼마든지 비춰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어부였던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4명을 부르셔서 제자로 삼으신 후 다음 단락에 보면 복음을 처음으로 선포하시는데, 백성들의 모든 질병과 모든 아픔을 고쳐주셨습니다. 백성들의 질병과 백성들의 아픔은 구체적으로 무엇이었을까요?
예수님 당시 사람들도 지금 우리와 같이 ‘디스토피아 세상’을 살았습니다. 정치적으로 불안했고, 경제적으로도 어려움이 끝없이 반복되었습니다. 지배층들인 사두개파 바리새파 사람들은 우월감에 사로잡혀 백성들을 무시했고, 가진 자는 없는 사람을 착취의 대상으로만 생각했습니다. 백성들의 일과는 하루 종일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하는 걱정에 사로잡혔습니다. 종교적으로도 당시 유대인들 그들이 중요하게 여긴 율법이 사람들의 삶을 오히려 위축시켰습니다. 세상에서 삶이 피폐해지는 악순환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육체적인 질병은 아닐지라도 사람들은 이런 상태에 놓이면 불안증, 조급함에 시달립니다. 그리고 육체에 병이라도 생겨서 남의 눈에 띄면 사람들은 측은히 여기는 마음, 보살피려는 마음 보다는 율법과 계율에 얽매여 나와 구분하려는 시도를 합니다. 신앙의 이름으로 말이지요. 예수님이 고쳐 주셨다는 말씀은 예수님이 만병통치약이라는 싸구려 말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사람의 근원을 살피시고 고치셨다는 말씀입니다. 근원을 도려내는 일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선언은 우리 근원을 뒤흔드는 일의 시작입니다. 한 번도 삶의 뿌리가 흔들려 본 경험이 없는 분들이 계신가요? 내 영혼을 뒤흔든 사건이 일생동안 없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잊어버렸거나 소홀히 다뤘을 뿐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이유는 이것입니다. 우리의 존재를 뒤흔드는 일입니다.
예수는 그들을 향해서 삶의 방향을 바꾸라고 선포했습니다. 회개를 촉구합니다.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곧 하나님이 여기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에 눈을 뜨라는 메시지입니다. 예수님의 이 메시지가 현실성 있게 다가왔을까요?
-고백교회의 탄생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는 일은 조건과 환경이 주어져야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도저히 할 수 없는 상황 가운데 하나님이 역사하심을 우리는 종종 깨닫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말씀드리면 좋을까요? 지난 주 <신과 악마 사이>라는 책 서문을 읽게 되었습니다. 틸리케 루터교 목사님의 책입니다. 이 책에서 <고백교회>라는 독일 교회 신앙의 그룹이 생기게 된 사건에 대해 소개하고 있습니다.
때는 2차 세계대전입니다. 히틀러가 독일을 지배했습니다. 사람들 사이엔 ‘히틀러가 주님이다’라는 소리까지 흘러나왔습니다. 겉으로는 아닐지 몰라도 독일교회 조차도 이 주장에 동조하는 경향을 띠었습니다. 히틀러는 이런 생각을 은연중에 퍼트리기 위해 유명한 목사 하나를 꼭두각시로 세우고 이에 동조하지 않는 목사들의 밥줄을 끊기 시작했습니다. 독일 교회는 ‘종교세’를 통해서 나라에게 목사들에게 생활비를 줍니다. 이것을 이용한 것이지요.
많은 신앙인들이 넘어갔습니다. 히틀러가 주님이라고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양심 있는 목회자들이 모여서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히틀러는 주님이 아니다.”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고백할 때라고, 우리의 신앙 고백이 필요한 순간이라고 선언합니다. 누가 우리의 주님인가를 명확히 고백하고 밝힐 때라는 신앙의 때가 이들에게 왔습니다. 이것이 “독일의 고백교회”의 탄생의 순간이라는 내용의 글을 읽었습니다.
이 글을 읽는 내내 제 맘속에 들어오는 생각은 구약의 말씀이었습니다. “바알이 우리 주님이다.”라는 외침이 당시 세상을 휩쓸었습니다. 그리고 “금송아지가 우리 주님이다.”라는 구호가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리고 이런 주장들이 오늘날도 우리 주변에 가득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돈이 우리의 주님이 아님을 고백해야 할 시간”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사람 모두가 그 길로 들어섰기 때문입니다. 돈 버는 일을 죄악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삶에 돈이 주인이 되지 않도록 우리에게 고백의 시간이 이르렀음을 상기 시키려는 것입니다.
-맺음말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늘나라는 죽은 뒤의 일이 아닙니다. 지금 당장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시작해야 하는 사건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에게 스스로 고백이 필요합니다. “내 주님이 누구신지, 무엇인지”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나를 따르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곧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갔”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여전한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이들이자 이 모든 일은 우리의 소명입니다.
사랑하는 파리중앙교회 성도 여러분, 준비가 되셨습니까? 되셨다면 축하합니다. 아직 안되셨다면 주님의 이름으로 격려의 말씀을 드립니다. 용기를 내십시오. 주님은 당신을 필요로 하십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삶의 기쁨이 우리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