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주님께 감사합시다.
본문 : 요엘 2:21-27, 디모데전서 2:1-7, 시편 126편, 마태복음 6:25-33
【요엘 2:21-27】
땅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주님께서 큰 일을 하셨다. 들짐승들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이제 광야에 풀이 무성할 것이다. 나무마다 열매를 맺고,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도 저마다 열매를 맺을 것이다. 시온에 사는 사람들아, 주 너희의 하나님과 더불어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주님께서 너희를 변호하여 가을비를 내리셨다. 비를 흡족하게 내려주셨으니, 옛날처럼 가을비와 봄비를 내려 주셨다. 이제 타작 마당에는 곡식이 가득 쌓이고, 포도주와 올리브 기름을 짜는 틀마다 포도주와 기름이 넘칠 것이다. « 메뚜기와 누리가 썰어 먹고 황충과 풀무치가 삼켜 버린 그 여러 해의 손해를, 내가 너희에게 보상해 주겠다. 그 엄청난 메뚜기 군대를 너희에게 보내어 공격하게 한 것은 바로 나다. 이제 너희가 마음껏 먹고, 배부를 것이다. 너희에게 놀라운 일을 한 주 너희의 하나님의 이름을 너희가 찬양할 것이다. 나의 백성이 다시는 수치를 당하지 않을 것이다. 이스라엘아, 이제 너희는 알게 될 것이다. 내가 너희 가운데 있다는 것과, 내가 주 너희의 하나님이라는 것과, 나 말고는 다른 신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나의 백성이 다시는 수치를 당하지 않을 것이다. »
【디모데전서 2:1-7】
그러므로 나는 무엇보다도 먼저, 모든 사람을 위해서 하나님께 간구와 기도와 중보 기도와 감사 기도를 드리라고 그대에게 권합니다. 왕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도 기도하십시오. 그것은 우리가 경건하고 품위 있게, 조용하고 평화로운 생활을 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은 우리 구주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일이며, 기쁘게 받으실 만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얻고 진리를 알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이십니다. 그분은 모든 사람을 위해서 자기를 대속물로 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꼭 적절한 때에 그 증거를 주셨습니다. 나는 이것을 증언하도록 선포자와 사도로 임명을 받아 믿음과 진리로 이방 사람을 가르치는 교사가 되었습니다. 나는 지금 참말을 하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6:25-33】
«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또는 무엇을 마실까 걱정하지 말고, 몸을 감싸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아라.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지 아니하냐?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아라.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으나,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 그것들을 먹이신다. 너희는 새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가운데서 누가, 걱정을 해서, 자기 수명을 한 순간인들 늘일 수 있느냐? 어찌하여 너희는 옷 걱정을 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살펴보아라. 수고도 하지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온갖 영화로 차려 입은 솔로몬도 이 꽃 하나와 같이 잘 입지는 못하였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들어갈 들풀도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들을 입히시지 않겠느냐? 믿음이 적은 사람들아!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말아라. 이 모든 것은 모두 이방사람들이 구하는 것이요,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
-인사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참 좋으신 우리 주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과 참 평화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 무엇보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에 큰 위로를 얻으시기를 바랍니다. 옆에 계신 성도 분들과도 따뜻한 인사를 나누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매년 11월 셋째 주일을 ‘추수감사주일’이라는 이름으로 예배를 드립니다. 우리가 직접 땅에 곡식을 심고, 또 추수를 한다면 오늘의 감격이 더 클 텐데, 하지만 도시에서 허겁지겁 살고 있는 우리에게 이 날은 좀 멀게 느껴지기도 하는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 계절을 기억하십시오. 모든 것이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가는 계절입니다. 이 계절에 문득 발걸음을 멈추고, 살아온 날, 지나온 삶을 감사함으로 돌아보는 일은 꼭 필요한 일이기도 합니다.
-감사 앞에 서다
오늘 우리는 ‘감사’라는 주제 앞에 서고자 합니다. 여러분, ‘감사’라는 단어를 떠올려 보십시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아마도 이런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감사만큼 이렇게 흔하디흔한 말이 어디 있을까 싶을 정도로 흔한 말이 감사라는 말입니다. 또 일상 속에서 가장 자주 사용하는 단어가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사람은 못된 습성이 하나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내가 가진 것, 내가 누리는 것은 아주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산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반대로 가질 수 없는 것, 남이 가진 것에 모든 마음이 가있는 경우가 참 흔합니다. 그리고 괴로워합니다.
‘감사’라는 이 말 속에 다 담을 수 없는 삶의 경험들이 우리에게 참 많습니다. 한번 돌아보십시오. 여러분의 일생이 여러분이 원하는 대로 바라는 것을 다 성취했습니까? 때로는 실패하기도 했고, 판단을 잘못해서 큰 낭패를 보기도 했고, 감사할 일만 가득하던가요? 그저 감사라는 말로 다할 수 없는 일들이 솔직히 많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감사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 제가 언젠가 이렇게 말씀 드린 것 같은데, 신앙이란 ‘그럼에도 불구하고’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감사합니다. 우리가 지금 감사하는 것은, 우리가 주님 안에 있는 것과 같이, 주님이 우리 가운데 계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조금만 정직하게 우리 삶을 돌아보면 감사의 마음으로 살기보다는 누군가에 대한 원망, 억울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힐 때가 많았습니다. 그 까닭이 무엇일까요? “현실이 그렇다”라고 말하기 이전에 사실 우리 삶은 풍요롭습니다. 참 많은 것을 누리고 살아갑니다. 그런데도 불평과 원망에 사로잡히는 까닭은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마음 때문일 것입니다. 감사는 그렇기에 기억하고 돌아봄이 전제가 되겠습니다.
-추수감사절의 시작
추수감사절의 유래는 신앙의 자유를 찾아 떠난 유럽인들의 아메리카 대륙 정착 당시의 절기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미국인들의 절기, 정확히 말하면 아메리카라는 신대륙에 도착한 이들의 감사 예배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추수감사절은 영국에서 매사추세츠의 플리머스 식민지로 이주한 ‘필그림 파더스’의 첫 수확을 기념하는 행사이고 보편적으로 널리 행해지는 일반적인 절기입니다.
유럽을 떠난 순례자들이 메이플라워 호를 타고 플리머스(오늘날 미국 동부의 보스턴 근처입니다)에 도착한 1620년에서 1621년 초의 겨울은 유난히 추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얼어 죽었습니다. 그런데 천사가 나타난 것이죠. 이 천사는 누구냐 하면 그곳에 이미 정착하여 거주하고 있던 토착민, 인디언 부족 ‘왐파노아그’ 족입니다. 이들의 도움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이들의 도움으로 혹독한 겨울을 나고 이듬 해 봄에는 그 곳에서 얻을 수 있는 식량, 농사지을 땅, 어업 기술 등을 배웠습니다. 다행히 이듬해인 1621년 가을, 유난히 많은 수확을 걷게 되었습니다. 필그림 파더스는 ‘왐파노아그’ 족을 초대하여 함께 음식을 먹은 것이 추수감사절의 시작이라고 전해집니다.
하지만 여러분, 굳이 감사절의 기원을 따지자면 더 과거로 갑니다. 구약성경을 보시면 됩니다.
구약성경에 추수를 감사하는 이야기가 많이 등장합니다. 추수감사절기의 성서적 버전은 초막절(수코트)입니다. 그런데 유대 사람들에게는 추수감사절이 ‘대 속죄일’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날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하나님의 진노를 샀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기도로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추수감사절이 대 속죄일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유대사람들의 추수감사절은 대 속죄일인 ‘욤 키푸르’가 지난 후 닷새째 되는 날부터 시작되는 절기인데, 밭에서 난 곡식을 다 거두고 난 다음 그동안 보살펴주시고 채워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돌아보며 찬미하는 절기입니다.
그러니 초막절은 단순한 추수감사절기가 아닙니다. 추수감사절에 유대인들은 애굽 땅에서 선조들을 해방의 길로 이끄신 하나님의 은혜를 되새깁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그저 지난 한 해 동안 주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곡식에 대한 수확, 농사의 결과에 대해서만 주님의 은혜를 돌아보는 것이 아닙니다. 죄와 죽음의 길에서 구원하여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도록 해주신 그 큰 뜻을 되새기는 절기로 삼습니다. 추수를 하고 곡식을 거두는 일들을 통해서 자신들의 조상들이 겪어왔던 역사적인 고난과 시련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 끝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당연한 사실이지만 최고의 감사의 대상, 또 최후의 감사의 대상은 우리 하나님이시라고 믿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존재의 바탕’이십니다. 바울 사도도 같은 고백을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고 있습니다.”(car en lui nous avons la vie, le mouvement, et l’etre) (행 17:28b).
하나 더 기억하고 감사할 대상을 덧붙여야 합니다. 반드시 그래야 합니다. 미 대륙에 처음 정착했던 순례단이 처음 미국 동부해안에 도착했을 때가 11월, 겨울의 초입에 도달했습니다. 그 겨울을 아무 것도 없이 견뎌내야 했습니다. 앞서 천사가 나타났다고 제가 말씀 드렸듯이 그 곳 아메리카 인디언의 도움이 아니었으면 그들은 모두 죽었습니다. 실제로 반 이상이 죽었다고 하니까요. 감사의 대상은 그러니까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고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던 ‘왐파노아그’ 족 그 사람들입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어느 누군가의 도움으로 살아왔습니다. 부모, 가족, 친척, 이웃, 친구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의 손길로 지금까지 있는 것입니다. 그 분들의 손길이 하나라도 빠지면 나는 살아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당연한 듯 하지만 굉장히 놀라운 사실입니다. 우리가 입고 있는 옷의 옷감이 씨줄과 날줄로 촘촘하게 엮어지듯이 우리 각자의 삶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람들의 손길로 촘촘하게 얽혀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사실을 너무나 쉽게 잊고 삽니다.
-염려하지 말라
오늘 우리가 읽은 마태복음의 말씀을 기억해 보십시오. 말씀을 읽고 여러분이 느끼는 첫 마음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저는 뭔가 부끄러워지기도 하고, 뭔가 위로가 되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사람들의 최고의 관심사는 먹을 거리 걱정, 입을 거리 걱정이었나 봅니다. 2000년이 지났지만 우리의 걱정은 더욱 많아졌습니다. 그리고 더욱 심각해졌습니다. 그렇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가장 심각한 점이 무엇인지 묵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가장 심각한 것은 무엇일까요? “솔로몬의 영화도 들판에 핀 이름 없는 꽃보다 영화롭지 못하다”는 것, 이것을 “깨달을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해 가는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이것을 무엇이라고 부를까요? 성장을 멈춰버린 우리라고 부를까요? 묵상할 능력을 상실한 우리라고 부를까요? 여러분도 하나씩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오늘날 스스로 만족할 줄 알고 감사하는 능력을 상실한 이는 다름 아닌 우리 자신입니다.
오늘 이 시간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은 마음은 우리가 오늘 집으로 돌아가면 기도의 시간을 갖자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이 기도는 무엇인가 하면 우리가 내게 주신 복을 하나하나 꺼내보는 기도입니다. 이 복은 물질의 복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사람의 복입니다. 기도가 필요한 정도가 아니라 가장 절실한 시간입니다.
-회복하라
인생이 무겁다고 느끼고, 감사를 잊고 사는 것은 삶의 힘겨운 까닭도 있지만, 몇 가지 그릇된 마음의 습관 때문이 아닐까요?
그 중 하나가 이것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모든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마음을 내려놓읍시다. 우리는 익숙한 사람 혹은 물건들에 대해 고마워하지 않습니다.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부터 잠을 청하는 밤까지, 아니 잠이 든 후에도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 덕분에 살아갑니다. 일일이 거명하지 않더라도 생각해 보십시오. 평상시에는 잘 모르지만 비상 상황에는 그들의 존재가 크게 느껴집니다. 우리의 일상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직종의 사람들이 파업이라도 하면 당장 어쩔 줄 몰라 허둥댑니다. 세상의 어떤 것도 당연하지 않습니다. 당연하게 여기는 마음에는 감사가 없습니다. 당연하게 여기는 마음은 인간관계를 삭막하게 만듭니다.
또 계산하고 판단하는 마음을 알아챕시다. 어떤 분의 글에 보니 사람들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채권자 의식을 가지고 사는 이가 있고, 채무자 의식을 가지고 사는 이가 있습니다. 어느 쪽이 옳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지나친 채무자 의식은 스스로를 힘들게 하고 다른 이들을 불편하게 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은혜를 입은 자들의 채무 의식은 아름답습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을 ‘빚진 자’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는 은혜의 빚을 갚는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아무리 갚아도 갚을 길 없지만 그래도 빚을 갚으려는 마음으로 사는 것 자체가 천국의 삶입니다. 살아가면서 정말 대하기 힘든 사람들은 모든 것에 채권자 의식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모든 것을 내가 받아야 할 것, 내가 누려야 할 것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다가 자신이 조금이라도 손해를 봤다 싶으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 사람들입니다. 삶의 모든 순간을 자신의 이익과 연관해서, 계산해서 생각하는 마음이 내게 있을 것입니다. 이를 알아채는 사람이 되십시오.
마지막으로 잊지 않으려 노력해야 합니다. 살다보면 감당할 수 없는 웅덩이와 수렁에 빠지는 일이 다반사인 것이 인생입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의로운 오른 팔로 우리를 건지십니다. 때로는 누군가를 보내셔서 우리를 끌어내 반석 위에 세워주십니다.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하지만 그 고마움과 감격은 얼마 지나지 않아 퇴색되곤 합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잊어버려 우리 삶이 무겁습니다.
-맺음말
말씀을 이제 맺으려 합니다. 감사라는 주제로 말씀을 나누고 묵상했습니다. 오늘 이 시간 ‘감사’라는 주제가 해묵은 주제로 받아들여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감사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 안에서 그분의 사랑을 느끼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그 어느 것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내게 주어진 삶의 순간순간이 하나님의 은총을 나에게 날라다 주고 있음을 알아차리고, 모든 일에 감사할 줄 알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선하심을 찬미하게 됩니다.
신앙이란 새로운 눈을 갖게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감사라는 새로운 눈으로 세상과 사람을 볼 줄 알고, 또 그 능력을 키우고, 이로 인해 새 세상을 본 기쁨으로 마음이 풍성한 우리가 되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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