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1월 28일 강림절 제1주 (2021년-48호)

제목 : 그 때가 오면

본문 : 예레미야 33:14-16, 데살로니가전서 3:9-13, 시편 25:1-10, 누가복음 21:25-36

【예레미야 33:14-16】
« 나 주의 말이다. 보아라, 내가 이스라엘 가문과 유다 가문에 약속한 그 복된 약속을 이루어 줄 그 날이 오고 있다. 그 때 그 시각이 되면, 한 의로운 가지를 다윗에게서 돋아나게 할 것이니, 그가 세상에 공평과 정의를 실현할 것이다. 그 때가 오면, 유다가 구원을 받을 것이며, 예루살렘이 안전한 거처가 될 것이다. 사람들이 예루살렘을 ‘주님은 우리의 구원이시다’ 하는 이름으로 부를 것이다.

【데살로니가전서 3:9-13】
우리가 우리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 때문에 누리는 모든 기쁨을 두고, 여러분을 생각해서, 하나님께 어떠한 감사를 드려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여러분의 얼굴을 볼 수 있기를, 또 여러분의 믿음에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줄 수 있기를 밤낮으로 간절히 빌고 있습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께서 우리의 길을 친히 열어 주셔서, 우리를 여러분에게로 가게 해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또, 우리가 여러분을 사랑하는 것과 같이, 주님께서 여러분끼리 서로 나누는 사랑과 모든 사람에게 베푸는 여러분의 사랑을 풍성하게 하고, 넘치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굳세게 하셔서, 우리 주 예수께서 자기의 모든 성도들과 함께 오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 잡힐 데가 없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인사말

주안에서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 모두에게 주님의 평화를 빕니다. 대강절 첫 주일 예배를 기쁨으로 맞이하고자 합니다. 주일을 맞아 주님 앞에 나온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서로를 축복하는 인사를 나누시기를 바랍니다. 서로에게 따뜻하게 인사하십시오.

올해가 이제 딱 한 달 남았습니다. 어떤 분은 ‘아직 한 달이나 남았어!’ 하고 조금은 긍정적인 반응을 하시는 분도 계시겠지만, 저는 ‘올해도 한 달 밖에 안 남았구나’ 라고 말하는 축에 속합니다. 아마도 저는 그리 ‘낙관적인 사람은 아닌가 보다’하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상이 소란스럽습니다. 소란이 점점 커져만 갑니다. 아프리카에서 발견된 새로운 코로나 바이러스 변이(오미크론) 소식 들으셨는지요? 이로 인해 좌절감이라고 할까요, 아니면 무력감이라고 할까요, 뭐라고 정확하게 말할 수 없는 감정이 커져만 가는 것 같습니다. 이런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을 당하면, 이것이 신의 징벌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코로나는 하나님의 징벌이 아니라 인간이 자초한 결과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너무나 많은 풍요와 안락함의 결과입니다. 너무나 많은 에너지를 자연을 회복 불가능하게 파괴하면서까지 사용한 인간의 욕심의 결과입니다.
이것은 제 이야기가 아닙니다. 과학자들의 결론입니다. 우리 인간은 우리 능력을 과대평가하면 안됩니다. 그 결과가 이렇습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주님이 필요합니다.

교회력으로 보면 오늘이 새해의 시작입니다. 교회의 시간표를 보면 그 첫 시간을 ‘기다리는 시간’으로 정해서 지킵니다. 그렇다면 다시 한 번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를, 무엇을 기다립니까? 우리는 주님이 우리에게, 또 세상에 오시기를 기다립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없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초겨울 강림절의 시작은 우리에게 살아온 날을 돌아보라고 합니다. 새로운 희망을 가지고 들떠있는 사람이건, 좌절감과 낭패감에 힘들어하는 사람이건 간에 과연 우리가 가야 할 곳으로 잘 가고 있는지, 아니면 길을 잃고, 길을 잃은 줄도 모르고 사는 것은 아닌지 강림절은 우리에게 돌아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오늘 강림절 첫 주일을 맞으면서 마음과 생각을 환기시키는 마음으로 성경 퀴즈 하나로 시작해 보려고 합니다. 한번 대답해 보시기 바랍니다. 마태복음으로 시작해서 요한계시록까지 27권의 책이 신약성경입니다. 이 중에서 가장 먼저 기록된 책은 무엇일까요? 복음서가 제일 앞에 있으니 복음서가 가장 먼저 쓰여졌을까요? 가장 먼저 쓰인 책은 복음서들이 아니라 바울의 편지들입니다. 그중에서도 50년에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쓴 편지인 데살로니가전서가 신약성경의 가장 먼저 쓰인 책입니다. 거의 정확하게 년도를 밝힐 수 있는 글이 데살로니가전서입니다. 가장 먼저 쓰여졌다는 의미가 무엇이 있을까요? 무엇보다도 초기 교회 교인들의 신앙의 모습, 생활상을 가장 생생하게 보여준다는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로 가 보겠습니다. 우선 오늘날의 데살로니가(현재 테살로니키) 도시는 제 기억으로는 아테네 보다는 훨씬 현대적인 외양을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데살로니가는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그리스에서 아테네 다음으로 큰 도시입니다. 데살로니가는 유럽에서 소아시아로 넘어가는 길목에 있는 도시이기 때문에 당시 로마 황제들이 전략적으로 중요하게 여긴 도시였습니다.
바울은 주로 이런 요충지로 판단되는 도시에 교회를 세웠습니다. 빌립보교회, 고린도교회, 데살로니가교회 등이 다 그렇습니다. 바울은 교회를 세우고 그 자리에 계속 머물러 있지 않았습니다. 다른 곳에도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생각도 있었고, 또 박해를 받아서 어쩔 수 없이 떠나기도 했습니다.

사도행전 17장에 보면 데살로니가에서도 바울 일행은 박해를 받았습니다. 유대인들이 데살로니가 시장에게 바울 일행을 고발했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세상을 소란하게 한 그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로마 황제의 명령을 거역하고, 예수를 왕이라고 주장한다.”(행 17:6-7)는 것이었습니다. 바울 일행은 야반도주하듯이 데살로니가를 빠져나와 베뢰아로 갔다가 다시 아덴, 그리고 고린도로 내려왔습니다. 이때가 기원후 50년 어간입니다.

-바울의 심정, 바울의 당부

이 시간 우리가 고린도에 머물던 바울의 심정으로 가보면 좋겠습니다. 데살로니가에서 베뢰아, 그리고 아테네를 거쳐서 고린도까지 내려왔습니다. 몸은 피신을 했기에 안심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정말 안심했을까요?
아니요. 염려가 있습니다. 두고 온 데살로니가 교회 교인들이 염려되었기 때문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염려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데살로니가를 다시 가보려고 애썼습니다. 살전 2:18절에 보면, 그런데 바울은 두 번이나 데살로니가 교회에 가고 싶었지만 ‘사탄’이 이를 막았다고 했습니다. 사탄이 막았다는 것은 경제적인 어려움이나 몸이 아프거나 다른 지역을 급하게 가야 할 상황이었을지 모릅니다. 가장 결정적인 것은 글라우디오 황제의 칙령으로 보입니다. ‘글라우디오 황제’는 모든 유대인들을 로마에서 추방하는 칙령을 49년에 발표했습니다. 이것은 당시 기독교에도 위기 상황입니다. 당시 교회에는 이방인만이 아니라 유대인들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직접 움직이기 힘들었던 바울은 대신 디모데를 보냈습니다(살전 3:1-2). 바울을 대신해서 데살로니가 교회에 갔던 디모데가 좋은 소식을 갖고 돌아왔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어려움 가운데서도 흔들리지 않고 바울이 가르쳐준 복음 가운데서 신앙생활을 건전하게 잘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이런 기쁜 마음으로 지금 바울은 편지를 씁니다. 그 기쁨을 살전 3:9절에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 때문에 누리는 모든 기쁨을 두고, 여러분을 생각해서, 하나님께 어떠한 감사를 드려야 하겠습니까?’

그러나 마냥 기뻐만 할 수는 없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믿음이 더 깊어져야 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세워진지 채 몇 년이 되지 않은 어린 교회였기 때문에 작은 어려움으로 넘어질 수도 있었습니다. 당시에 교회에 들어와서 믿음을 흔드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습니다.(살전 3:5). 바울은 이제 편지로마나 데살로니가 신자들을 격려하고 싶었습니다. 살전 3:13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굳세게 하셔서, 우리 주 예수께서 자기의 모든 성도들과 함께 오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 잡힐 데가 없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바울의 마음에 공감이 되십니까? 어린 자식에게 젖을 떼고 노심초사하는 어머니의 심정 같습니다.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닐 것입니다. 신앙적으로 오랫동안 단련이 된 사람들에게도 어려운 일인데, 신생교회에 불과한 데살로니가교회 신자들에게는 거리가 먼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거룩하고 흠이 없다는 것은 일단 높은 수준의 삶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이런 당부는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요즘 시대 사람들 마인드 같으면 아마도 어린 아이를 다루듯이 어르고 달래기에 바빴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어린 아이 같은 데살로니가 교회 교우들에게, 그토록 그립고 보고 싶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어르고 달래는 어린아이를 다루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신적이고 영적인 높은 수준의 삶을 요구합니다.

-이제는 어른답게

이 말씀을 가지고 오늘 우리 교회와 우리 자신을 비춰볼 필요가 있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우리는 신앙 생활한 지 꽤 오래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교회도 파리 땅에 세워진 지 30년이 넘었습니다. 여러분의 개인적인 신앙의 경력도, 교회의 나이도 꽤 시간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오랜 신앙생활의 경력만큼이나 튼튼하고 든든한 신앙을 가지고 계십니까?
혹시 늘 부족하다고만 여기고 어린아이처럼 취급 받기를 원하십니까? 아기일 때는 이유식을 먹는 것이 당연합니다. 딱딱하고 거친 음식을 먹으면 안되겠지요. 하지만 다 성장한 사람이 계속 자신을 어린아이로만 알고 이유식을 먹기를 계속한다면 그것 역시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상을 살아가시면서 어린아이 취급당하면 자존심 상해하실 겁니다. 초등학교조차도 고학년이 저학년 취급당하면 자존심 상해합니다. 사회생활 경력도 초년생 취급당하면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실제로 그에 합당한 취급을 받지 못하면 자존심이 상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신앙의 영역으로 오면 우리의 신앙도, 신앙의 크기도, 신앙의 품도 늘 아직은 부족하다고만 여깁니다. 5년 전, 10년 전, 20년 전, 30년 전 먹던 어린 아이 음식인 이유식을 여전히 먹으려고 합니다. 자존심 상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자존심 상해하지 않습니다. 다 큰 어른이 이유식을 계속 먹습니다. 우리 신앙의 영역으로 오면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는 바울이 말한 대로 정신적이고 영적인 높은 수준의 삶을 받아들일 만큼 성장했습니다. 딱딱하고 거친 음식을 먹어서 소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늘 누군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어린아이가 아니라 스스로 일어서고 스스로 밥도 먹고, 스스로 할 일을 하는 어른의 신앙을 갖출 때가 왔다는 의미입니다.

-고난의 시기가 오다

참 인간적으로는 안타까운 일이고 힘든 일이긴 합니다만 인간은 고난을 통과하면, 어려움을 겪고 나면 무척이나 성장합니다. 유행가 가사처럼, ‘아픈 만큼 성숙’해지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인생에서 어떤 순간을 맞는다는 것은 어쩌면 준비가 다 되어서 상황을 맞는 것이 아니라 상황을 맞다보니 그 어려움을 견디고 상황을 타개해 나가면서 자신이 성장하는 것이지요. 인간사의 묘미이기도 합니다. 교회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실제 교회도 그랬습니다.

바울과 교회의 상황은 점점 어떤 분위기를 느껴가고 있습니다. 교회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교회를 둘러싼 주변 분위기가 좋지 않습니다. 로마 황제들로부터 교회에 대한 박해의 기운이 점점 일어나는 것을 느낍니다. 이것이 초대 교회의 전반적인 분위기라면 분위기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읽은 구약의 예레미야의 상황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레미야는 세상적인 시선으로만 보면 참 시대를 잘못 타고난 사람입니다. 예레미야는 남 유다에서 활동했던 사람입니다. 예레미야가 살던 시기는 북쪽의 거대한 국가인 앗수르가 여전히 강대한 힘을 발휘하던 시대입니다. 이 앗수르의 뒤를 이어 신흥 강국인 바벨론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남쪽에서는 여전히 강한 이집트 나라가 호시탐탐 유다를 노리는 시대입니다. 강대국 사이에 놓여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신세가 예레미야와 유대 나라입니다. 저는 예레미야를 읽을 때마다 마치 자동 반사처럼 ‘윤동주 시인’이 떠오릅니다. 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만 강대국들 틈바구니 속에서 고통당하는 백성의 이미지가 강합니다.
미국의 유명한 구약학자 ‘존 브라이트’ <하나님의 나라>라는 책에 보니까 예언자 예레미야의 성정(性情)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불같은 열정, 부드러운 감정, 깊은 영혼의 고뇌, 단순하면서도 명료한 도덕적 용기”를 지닌 사람. 바로 예레미야를 묘사하는 말입니다.
윤동주 시인이 식민지 백성의 아픔을 시대의 고통과 함께 노래하며 살아낸 것처럼, 예레미야 선지자는 남들이 갖지 못한 시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신앙의 시선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당시 유다왕들은 여러 가지 대응책들을 내놓았습니다. 남쪽의 이집트에 붙어서 북방의 앗수르와 바빌론의 세력을 막아볼까, 아니면 그 반대로 해볼까, 갖가지 외교적 대책을 내놓았습니다.
위험한 줄타기 같은 외교술에 유다왕들이 골몰하고 있을 때, 예레미야는 하나님과의 약속을 저버린 백성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예배가 파괴되어 버렸음을 보았습니다. 제사장들은 부패했다고 지적했습니다. 성전에 와서 예배하는 백성들의 하나님께 대한 완고하고 완악한 마음들을 지적했습니다. 이것은 예레미야의 눈으로 볼 때, 어떤 정치적인 태도보다도, 어떤 외교술보다도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어떤 나라에 빌붙는 것이 살아남는 방법이냐로 모두가 고민할 때 하나님과의 관계의 어그러짐을 고통스러워 한 이가 바로 예레미야입니다.
이런 말을 전하는 예레미야에게 돌아오는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 어떤 때는 암살의 위험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는 곳에서 추방되었습니다. 실제로 예레미야는 이집트로 쫓겨나다시피 하여 그곳에서 생을 마감합니다.

우리는 고통스러워합니까? 하나님과 관계가 어그러졌음을 놓고 마음 아파합니까? 내 삶에 하나님은 없고 하나님과의 관계는 없고, 고집불통의 나 자신만 들어앉아 있지는 않으신지요? 내 느낌, 내 감정, 내 이득, 내 것. 이것만이 전부인 삶을 이제는 돌아볼 시간입니다.

-그 날, 그 때가 오면

예레미야는 자기 민족의 역사를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관점에서 보았습니다. 이게 예레미야의 고유한 영적 시각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운명을 단순히 행복과 불행이라는 현상으로만 봅니다. 자신이 볼 때 좋은 일이 많으면 행복하다고 말하고, 거꾸로 나쁜 일이 많으면 불행하다고 말합니다. 끊임없이 좋은 일을 이루기 위해서 애를 쓰면서 결국 한평생 롤러코스트를 타듯이 일희일비합니다. 지금 바벨론에 의해서 나라가 망하고 포로로 잡혀간 유대인들은 밑바닥에 떨어진 자신들의 운명을 한탄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달랐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이 어떻게 성취되는가 하는 점에 집중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조국 유다가 망하는 운명도 받아들일 수 있었고, 바벨론 포로라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새로운 희망을 볼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우리의 삶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성립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벌어지는 단순한 일도, 어려운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모든 걸 하나님 탓으로, 팔자소관으로 돌리는 숙명주의가 옳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뜻 안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예레미야는 반복적으로 ‘그 날, 그 때’를 말합니다.

예레미야는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차원에서 세상을 볼 수 있었을까요? 그는 점쟁이가 아닙니다. 기도하다가 갑작스럽게 하늘로부터 이상한 소리를 듣는 게 아닙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신앙의 모습은 매 순간을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는 ‘그 날’로 받아들일 수 있으신가요? 실제로 그렇게 살아가고 있으신가요? 아니면 ‘그 날’이 여러분의 삶에 너무나 거리가 먼 이야기인가요? 주님을 삶으로 모셔 들이는 날이 오늘 우리에게 ‘그 날’이 될 줄로 믿습니다. 그날이 멀지 않습니다. 주님을 환대할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