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2월 19일 강림절 제4주 (2021년-51호)

제목 : 당신의 말씀대로 나에게 이루어지기를

본문 : 미가 5:2-5a, 히브리서 10:5-10, 누가복음 1:46b-55, 누가복음 1:39-45

【미가 5:2-5a】
« 그러나 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의 여러 족속 가운데서 작은 족속이지만,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다. 그의 기원은 아득한 옛날, 태초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해산하는 여인이 아이를 낳을 때까지, 당신의 백성을 원수들에게 그대로 맡겨 두실 것이다. 그 뒤에 그의 동포, 사로잡혀 가 있던 남은 백성이, 이스라엘 자손에게로 돌아올 것이다. 그가 주님께서 주신 능력을 가지고, 그의 하나님이신 주님의 이름이 지닌 그 위엄을 의지하고 서서 그의 떼를 먹일 것이다. 그러면 그의 위대함이 땅 끝까지 이를 것이므로, 그들은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들에게 ‘평화’를 가져다 줄 것이다.

【히브리서 10:5-10】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실 때에, 하나님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주님은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나에게 입히실 몸을 마련하셨습니다. 주님은 번제와 속죄제를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말하였습니다. ‘보십시오, 하나님! 나를 두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나는 주님의 뜻을 행하러 왔습니다.' » 위에서 그리스도께서 « 주님은 제사와 예물과 번제와 속죄제를 원하지도 기뻐하지도 않으셨습니다 »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것들은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들입니다. 그 다음에 말씀하시기를 « 보십시오, 나는 주님의 뜻을 행하러 왔습니다 »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두 번째 것을 세우시려고, 첫 번째 것을 폐하셨습니다.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써 우리는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누가복음 1:39-45】
그 무렵에, 마리아가 일어나, 서둘러 유대 산골에 있는 한 동네로 가서, 사가랴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문안하였다.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었을 때에, 아이가 그의 뱃속에서 뛰놀았다. 엘리사벳이 성령으로 충만해서, 큰 소리로 외쳐 말하였다. « 그대는 여자들 가운데서 복을 받았고, 그대의 태중의 아이도 복을 받았습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내게 오시다니, 이것이 어찌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그대의 인사말이 내 귀에 들어왔을 때에, 내 태중의 아이가 기뻐서 뛰놀았습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질 줄 믿은 여자는 행복합니다. »

-인사

주안에서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 모두에게 주님의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서로 인사 나누겠습니다. 여러분 환영합니다. 정말 반갑습니다.

여러분과 함께 강림절 제4주일을 맞이하게 된 것을 큰 기쁨으로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이제 다음 주일이면 우리는 한 해의 마지막 주일로 성탄을 맞이합니다. 성탄은 먹고 마시는 세상의 축제이기 이전에 그리스도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오시는 날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 가운데, 사람들 사이에 사는 존재인지라 세상 일, 사람 관계의 일도 필요하지만 주님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오심을 준비하는 일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번 한 주간이 그런 날들이 되면 참으로 좋겠습니다.

-하나님의 방식

오늘 강림절 4주일을 맞이하면서 오늘 이렇게 말씀 나눔을 시작해 보고자 합니다. 성탄절이 다가오면 우리가 주목하는 인물들이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 동방에서 온 박사들, 들판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과 천사들, 그러나 빼놓을 수 없는 인물 한 사람이 있다면 아마도 예수님의 어머니이신 ‘마리아’일 것입니다. 마리아는 우리 개신교인들에게 좀 소홀히 다루어진다는 생각이 듭니다. 카톨릭 교회가 강조하는 마리아 교리 때문인지 우리 개신교회들은 마리아 이야기를 잘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우리가 아주 소중하게 기억해야 할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마리아는 우리의 신앙의 모범이 되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편견을 내려놓고 말씀이 전하는 바를 보아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 마리아를 신앙의 모범이라고 말하는지를 이야기 하려면, 먼저 해야 할 하나의 질문이 있습니다. 이 질문은 좀 거친 질문이기는 합니다만 매우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여러분도 아마도 한번쯤은 의문을 품어보셨을 법한 생각입니다. “하나님은 혼자서 오시면 되지, 혹은 혼자서 하시면 되지 왜 꼭 마리아를 통해서 오셔야 하는가?” 하는 의문입니다. 이와 비슷하지만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면서 세상 사람들에게 직접 다 하시면 되지, 그럼 모두가 행복하고 평안할텐데… 왜 그렇게 하시지 않지? 왜 사람을 필요로 하시는가?” 라는 질문하고도 비슷합니다.

이 두 질문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일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사람을 사랑하시고, 사람을 구하시는 일을 하신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지요. 하나님이 사람을 사랑하시는 일도, 사람을 구원하시는 일도 하나님 혼자서 하시지 않으시는 것을 우리가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배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일을 하실 때 혼자하시지 않고 꼭 사람을 부르십니다. 하나님이 필요로 하시는 것이 있어요. 사람의 손, 사람의 마음을 필요로 하시고, 사람의 의지도 필요로 하시고, 때론 사람의 어려움도 요구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시는 독특한 방법입니다. 사람과 함께 일 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발견할 수 있습니다.

-창조와 구원

그렇다면 우리가 살펴봅시다. 하나님이 하신 일 가운데 최고의 일이 무엇일까요? 아마도 두 가지가 아닐까요? 그 중 하나는 세상을 만드신 일, 창조 사역입니다. 다른 하나는 인간을 구원하시는 일, 구원 사역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중요한 두 가지 일을 하실 때 사람을 필요로 하십니다.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사람이 개입되어 있나요? 맞습니다. 창세기 2장 19절의 표현에 보면, 하나님이 짐승과 공중의 새를 만드신 후에, 어떻게 하시냐 하면 하나님 만드신 사람, 아담에게로 이끌고 오십니다. 그리고 뭐를 하셨을까요? 사람이 동물 하나하나의 이름을 어떻게 짓는지를 보셨습니다. 참 흥미로운 장면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불러다 놓고 이름을 어떻게 짓는지를 지켜보셨다는 이야기입니다. 마치 하나님의 창조 행위에 인간도 한 손 보태도록 해주신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독특한 방식입니다.

인간을 구원하시는 방식을 한 번 볼까요? 오늘 누가복음 1장의 말씀입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나타났습니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고지합니다. “성령이 그대에게 임하시고, 더없이 높으신 분의 능력이 그대를 감싸줄 것”(눅 1:35)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무슨 말일까요? 예고입니다. 마리아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예고합니다. 자식을 낳을 것이라는 이 소식은 누군가에게는 더없는 기쁨의 소식이지만 과연 마리아에게도 그랬을까요?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두려운 말입니다. 삶 전체를 뒤흔드는 두려운 말입니다. 왜 그렇지요? 마리아라고 해서 한 인간으로서 평온한 일상을 갈구하는 마음이 없었을까요? 결혼을 통해서 얻는 행복의 꿈이 없었을까요? 하지만 마리아는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입니다.

“보십시오. 나는 주의 여종입니다. 천사님의 말씀대로 나에게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눅 1:38)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시는 데, 사람의 몸이 필요합니다. 엉뚱한 상상이지만 만약에 천사의 말에 대해 마리아가 “저는 아닙니다.”하고 거절했다면 어떤 결과가 벌어졌을까요? 당연합니다. 하나님은 다른 사람을 사용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이 두려운 현실을 받아들입니다. “나는 주님의 여종입니다. 당신의 말씀대로 나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마리아가 신앙의 모범인 것은 그가 아멘으로 응답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정 주님이 오시기를 기다리는 사람이라면, 우리의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시는 주님의 뜻에 ‘아멘’ 해야 합니다. 주님을 기다린다는 것은 삶으로 ‘아멘’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의 기억들을 돌이켜 보십시오. 어쩌면 우리는 아멘으로 대답한 지가 꽤나 오래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아멘’이 사라진 시대를 우리가 사는 건가요? 아니면 내 삶에 아멘이 사라진 건가요?

-가장 중요한 것은 순종

하나님은 창조와 구원 사역이라는 가장 거대한 일에 사람의 마음과 손을 요구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요구하실 때 인간은 하나님을 거절하기도 합니다. 일시적으로 거절할 수도 있고, 영원히 거절하는 수도 있을 것입니다. 주님을 거절하는 여러 방법이 있습니다. ‘방탕함’이 있습니다. 주님의 뜻에 완전히 반대로 가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방탕’은 적극적 거절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소극적 거절은 무엇일까요? ‘무관심’입니다. 무관심도 거절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아멘하고,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는 사람은 아름답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법은 무엇일까요? 저는 ‘순종’이라는 단어를 여러분 앞에 꺼내놓고 싶습니다. 오늘날 이 시대를 살아가다보면 왠지 모르게 ‘순종’이라는 단어는 낡고 오래되서 폐기되어버린 단어처럼 느껴집니다. 더 이상 순종이 미덕도 아니고, 올바른 행동 양식도 아닌 옛날 사람들에게나 필요한 말처럼 여겨지는 시대를 살아갑니다. 왠지 순종하면 남에게 지는 것만 같고, 피해를 입을 것만 같은 세상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읽은 누가복음에서 마리아가 취한 일은 다른 것이 아니지요. 천사를 통해 전해오는 하나님의 뜻에 마음을 다하여 ‘아멘’하는 것이지요. 자신에게 닥칠 두려운 일들도 내려놓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마리아의 순종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그러고 보면 신앙인이란 순종하는 사람이라고 바꾸어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순종의 사람 안드레

지난 주간에 누군가 제게 보내준 글을 읽다가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여러분에게 질문해 볼께요. 여러분, 예수님이 활동하실 때 예수님과 가장 가까워 보이는 제자 3명의 이름을 대보십시오. 누구지요? 아마도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가장 먼저 떠오를 겁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이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라는 표현이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야고보와 요한’은 형제 사이입니다. 그럼 베드로도 형제 제자인데, 베드로의 형제는 누구지요? ‘안드레’입니다. 근데 안드레는 베드로만큼 성경에 자주 등장하지 않습니다. 안드레 입장에서는 조금 섭섭할수도 있지 않을까요? 저도 언젠가 한번 쯤 궁금증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안드레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성경에 묘사된 ‘사람 안드레’는 이렇습니다. 마태 4:18 이하에 보면 안드레가 예수님을 처음 만나는 장면이 나오는데, 예수님이 안드레에게 던진 말씀이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로 삼겠다.”입니다. 사람을 낚는 사람으로 부름을 받은 것이지요. 그래서 그런지 복음서에 나오는 ‘안드레’는 사람을 데리고 예수님께 데려오는 역할을 참 많이 합니다. 요한복음 보면, 자신의 형 베드로를 처음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소개시키는 이, 안드레입니다. 또 오병이어 사건 아시지요?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누가 가지고 있었지요? 어린 아이입니다. 요한 6:8-9에 보면 이 어린 아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온 제자를 안드레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또 요한 12장에 보면 그리스 사람 몇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 했는데 빌립을 통해 이 말을 듣고서는 그 사람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온 사람도 안드레입니다. 참 흥미롭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순종!’이라는 입장에서 본다면 안드레는 ‘참으로 순종’의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을 낚는 어부’로 삼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일생을 순종한 셈이니까요. 성경에 묘사된 안드레는 자신의 제자 사역의 대부분을 사람을 예수님께 데리고 오는 역할을 합니다. 참으로 우직하고도 순수하게 사람들을 예수님께 소개하고, 예수님께 데리고 옵니다.

-순종의 사람 프란체스코

또 다른 순종의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 이후 2000년이 지났습니다. 많은 역사가들이 평가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혹시 여러분, 역사상 예수님과 가장 많이 닮은 사람으로 평가받는 사람이 누군지 아십니까? 많은 사람들이 첫 손에 꼽는 분은 ‘프란체스코 성자’라고 말합니다. 이 분은 12-13세기에 오늘날 이탈리아 땅에 살았던 사람입니다. 아주 유명한 포목상 아들, 부잣집 아들입니다. 아버지의 돈으로 방탕한 생활을 합니다. 그렇게 젊은 날을 보냅니다. 어느 날 고향 마을 외곽에 버려진 채로 있던 ‘성 다미앙 십자가 성당’을 지나다가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프란체스코, 너는 허물어져가는 이 예배당을 다시 세워라.”
그 후 그는 예배당을 고치는 비용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마침 아버지가 부자이니 아버지의 재산을 이용해서 예배당을 고치는 비용을 충당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깨달았습니다. 나타나신 예수님이 다시 세우라는 교회는 외양의 교회, 겉모양의 교회가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사라져버린 교회를 다시 세우라는 말씀임을 깨달았습니다. 그 후 아버지의 재산 상속을 모두 내던지고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삶을 삽니다. 스스로 자신을 가리켜 “나는 가난과 결혼했다.” 그로부터 영향을 받은 많은 이들이 그를 따랐습니다. 곧 재력과 권력으로 부자가 되어버린 교회를 다시 세운 셈입니다. 프란체스코 역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한 사람임에 분명합니다.

-우리의 순종

“나는 주님의 종입니다. 당신의 말씀대로 나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놀라운 고백이요 응답입니다. 그런데 마리아의 이러한 결단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누가복음 1장 46절부터 나오는 ‘마리아의 찬가’를 통해 그의 마음을 들어야 합니다. 그 노래를 보면 마리아는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아이가 아닙니다. “내 마음이 내 구주 하나님을 좋아함은, 그가 이 여종의 비천함을 보살펴 주셨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세상이 얼마나 불공정한 곳인지를 너무나 잘 압니다. 무시당하는 사람들의 아픔도 알고, 배고픈 사람들의 심정도 잘 압니다. 그럼에도 절망으로 좌절로 세상살이에 파묻혀 버리지 않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리기를 그렇게도 간절히 바랐기에 마리아는 하나님의 뜻에 ‘아멘’ 한 것입니다. 마리아는 새로운 세상을 낳기 위해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순종한 것입니다. 순종으로 주님을 잉태한 여인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 삶을 얼마나 주님 앞에 내놓고, 얼마나 주님께 묻고, 주님께 순종하는지 묻게 됩니다. 앞서 무관심도 거절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만 ‘무관심’은 아마도 우리가 주님을 대하는 모습이 담긴 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교우 여러분, 용기를 내십시오. 임마누엘의 하나님, 우리에게 기쁨을 안겨주시는 주님은 그의 몸이 되어 드리기로 작정한 이들을 통해서 이 땅에 오고 계십니다. 마리아의 비장한 용기를 기리고 기억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이제는 우리가 주님의 손과 발이 될 차례입니다. ‘아멘’의 삶을 추구하십시오. 주님의 은총으로 이 추운 계절 겨울에 우리 마음에 생명의 기운이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