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2월 26일 성탄주일 (2021년-52호)

제목 : 말씀이 육신이 되어

본문 : 이사야 52:7-10, 히브리서 1:1-4, 시편 98편, 요한복음 1:1-14

【이사야 52:7-10】
놀랍고도 반가워라! 희소식을 전하려고 산을 넘어 달려오는 저 발이여! 평화가 왔다고 외치며, 복된 희소식을 전하는구나. 구원이 이르렀다고 선포하면서, 시온을 보고 이르기를 « 너의 하나님께서 통치하신다 » 하는구나. 성을 지키는 파수꾼들의 소리를 들어 보아라. 그들이 소리를 높여서, 기뻐하며 외친다. 주님께서 시온으로 돌아오실 때에, 오시는 그 모습을 그들이 직접 눈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너희 예루살렘의 황폐한 곳들아, 함성을 터뜨려라. 함께 기뻐 외쳐라. 주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위로하셨고, 예루살렘을 속량하셨다. 주님께서 모든 이방 나라들이 보는 앞에서, 당신의 거룩하신 능력을 드러내시니, 땅 끝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우리 하나님의 구원을 볼 것이다.

【히브리서 1:1-4】
하나님께서 옛날에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여러 번에 걸쳐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으나, 이 마지막 날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아들을 만물의 상속자로 세우셨습니다. 그를 통하여 온 세상을 지으신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하나님의 본체대로의 모습이십니다. 그는 자기의 능력 있는 말씀으로 만물을 보존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는 죄를 깨끗하게 하시고서 높은 곳에 계신 존엄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그는 천사들보다 훨씬 더 높게 되셨으니, 천사들보다 더 빼어난 이름을 물려받으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1-14】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다. 그는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으니, 그가 없이 창조된 것은 하나도 없다. 창조된 것은 그에게서 생명을 얻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니, 어둠이 그 빛을 이기지 못하였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다. 그 이름은 요한이었다. 그 사람은 그 빛을 증언하러 왔으니, 자기를 통하여 모든 사람을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 사람은 빛이 아니었다. 그는 그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 참 빛이 있었다. 그 빛이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추고 있다. 그는 세상에 계셨다. 세상이 그로 말미암아 생겨났는데도, 세상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가 자기 땅에 오셨으나, 그의 백성은 그를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를 맞아들인 사람들, 곧 그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이들은 혈통에서나, 육정에서나, 사람의 뜻에서 나지 아니하고, 하나님에게서 났다. 그 말씀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주신, 외아들의 영광이었다. 그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

-인사

“기쁘다! 구주 오셨네!”
성탄을 축하하는 예배의 자리에 오신 여러분 모두에게 우리 주님의 평화가 있기를 바랍니다. 교우 여러분, 낮고 낮은 이 땅 위에 아기로 오신 우리 주님 예수님을 마음 깊이 받아들이는 거룩한 주일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오늘은 올해의 마지막 주일로 지킵니다. 한 해 동안의 수고와 격려의 인사를 나누기를 바랍니다. 서로 인사 나누겠습니다.

기쁜 성탄이기는 하지만 우리 주변은 다소 우울한 소식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현재 프랑스 내에 코로나-19 하루 확진자는 9만 명을 넘어섰습니다. 실제로 주변에서 확진자들의 소식이 들려오기도 합니다. 2021년 올해를 시작할 때를 떠올려 보면 많은 분들이 새해 소망을 말하던 기억이 납니다. 코로나가 끝나고 일상 회복의 소망. 이것이었지요? 하지만 우리는 지금 반복되는 같은 현실 앞에 와있습니다. 마치 저항할 수 없는 거대한 힘 앞에 무력하게 서 있는 것만 같습니다. 코로나 같은 패데믹은 아니지만 유다 백성이 바빌론에 포로 생활을 할 때의 무력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만 같고, 이렇게 지내도 괜찮은 것인지 혼란스럽기도 합니다. 하지만 유다백성에게 가장 큰 신앙적 각성, 깨달음의 시대가 바빌론 포로기 시절인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배울 수 있습니다.
훗날 이 시기가 어떻게 기억될지 아무도 모릅니다만 우리에게 그저 삶도 신앙도 무력했던 시기로 기억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성탄을 맞이한 여러분의 마음은 어떠신가요? 매년 성탄을 맞이합니다만 어린 시절의 성탄의 기억을 떠올려 보면, 온통 교회에서 보낸 기억으로 가득합니다. 교회에서 성탄을 맞이하는 시간들, 성탄을 준비하며 찬양을 준비하고, 연극을 하기도 하고, 다소 소란스럽기도 하고, 바쁘게 여겨졌던 시간을 보냈던 것 같습니다. 화려한 백화점의 장식과 선물과 파티가 아마도 오늘날 성탄절 전후의 트렌드인 것만 같아 조금은 속이 상합니다. 성탄의 주인공은 예수님인데, 예수님이 없는 성탄인 것만 같습니다. 아니, 예수님이 없는 성탄이 아니라 예수님만 쏙 빼놓은 성탄절인 것 같습니다. 여러분이 맞이한 성탄에는 예수님이 계신가요?

크리스마스는 그리스도를 뜻하는 ‘Christ’과 성찬을 뜻하는 ‘Mass’가 결합된 단어입니다. 곧 크리스마스는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생명의 빵으로 우리에게 오셨음을 기억하는 날이란 말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살리기 위한 양식으로 이 땅에 오셨다는 뜻이 크리스마스란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의 오심을 제대로 기념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먹고 마시고 즐기고, 친한 사람끼리 선물을 주고받으면 그만인가요?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불리는 우리가 다른 이들을 위한 무엇인가가 되어야 합니다. 남을 살리고, 남을 복되게 하고, 남을 살맛나게 하는 것, 이것이 성탄절을 기념하는 참된 의의입니다.

-마태가 전하는 예수 탄생

지난 주 월요일에 우리는 마가복음 묵상을 시작했습니다. 마가복음 묵상을 전달하면서 저는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 각각의 1장 1절의 말씀을 전달해 드렸습니다. 왜냐하면 각각 네 개의 복음서가 전하는 각 복음서의 목적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먼저 나누고 싶어서입니다. 복음서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사람들의 믿음의 이야기들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탄생부터 죽음과 부활에 이르기까지 이야기가 주된 이야기입니다.

오늘 성탄을 축하하는 말씀을 나누면서 복음서가 소개하는 예수님의 성탄 이야기를 살펴보고 싶습니다.

마태복음은 예수님을 뭐라고 소개할까요? 한 마디로 ‘임마누엘’ (마 1:23) 이라고 간단하면서도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신가? “임마누엘”이십니다. 임마누엘이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마태복음이 소개하는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이해가 되시지요?
우리뿐만 아니라 예수님 당시 사람들도 하나님이 없는 듯한 삶을 살았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세상을 살았다는 말입니다. 이 말이 이해가 되십니까? 예수가 없는 성탄을 보내는 오늘날의 세상을 보십시오. 그리고 그 세상을 사는 우리의 모습이 화려한 불빛과 조명 뒤에 허무하고 허망한 마음이 묻어납니다. 그렇다고 그 당시에 하나님을 예배하는 곳이 없었겠습니까? 있었지요. 오늘날 우리의 모습과 비교해 보아도 별반 다르지가 않습니다. 사람들의 이런 모습 가운데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마태복음은 이렇게 예수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누가가 전하는 예수 탄생

누가복음은 좀 더 구체적으로 당시 모습을 보여줍니다. 누가복음은 예수님이 오신 때를 가리켜 로마 황제인 ‘가이사 아우구스투스’가 통치하던 때였다고 말합니다. 로마 황제 ‘옥타비우스’(주전 63년-주후14년)는 오랜 세월 동안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치른 끝에 로마 제국을 안정된 기반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우리가 소위 ‘Pax Romana’, 즉 ‘로마의 평화’라고 부르는 시대는 이 때부터를 일컫는 말입니다. 그때까지 신들에게만 붙이는 호칭이 있었습니다. ‘아우구스투스’라는 이름입니다. 자신을 이렇게 신들의 호칭으로 부르도록 했습니다. 많은 정치 모사꾼들이 그를 ‘세상의 구주’라고 추켜세웠습니다.

그러나 지배당하는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그렇지가 않습니다. ‘로마의 평화’는 모든 이들을 위한 평화가 아니라, 로마의 황제와 귀족들을 위한 평화이지, 가난하고 수탈당하는 사람들을 위한 평화가 아님을 말입니다.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로마 문화 이면에서는 수탈과 억압을 당하던 민중들의 한 맺힌 사연이 있었습니다. 로마는 어떻게 했을까요? 로마는 군사력으로 그들의 불만을 잠재웠습니다. 사람들은 두려움 때문에 숨조차 크게 내쉴 수 없었습니다. 로마의 평화는 ‘무덤 같은 평화’였습니다.
이 때,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그 때, 즉 역사의 어둠이 가득할 때 세상에 오셨습니다. 주님이 태어나셨을 때 천사들은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에게 이런 소식을 전합니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해 준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서 너희에게 구주가 나셨으니, 그는 곧 그리스도 주님이시다.”(누가 2:10-11)

주님 나심의 소식은 일부의 사람들에게만 기쁜 소식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 »입니다. 이 때 천사들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구절입니다.

“가장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주께서 기뻐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로다.”(누가 2:14)

누가복음이 전하는 예수님 탄생이야기는 로마의 평화와 다른 평화를 대비적으로 말씀합니다. 즉, 그리스도가 가져오는 평화는 로마의 평화와 같이 무력에 바탕을 둔 무덤의 평화가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하심에서 시작된 진정한 평화인 것입니다. 주님은 평화 없는 세상에 평화의 왕으로 우리 곁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오실 때 세상은 또 다른 어둠이 짙게 드리워 있었습니다. 오늘 이 시대 우리에게 드리워진 어둠의 그림자는 새로운 모습으로 우리 앞에 와 있습니다. 그것은 패더믹으로 인한 혼란과 사람들의 무기력일수도 있겠습니다. 그리고 이 시간에도 끊임없이 벌어지는 갈등과 분열의 세상에 주님은 세상의 평화를 위해 오셨습니다.
여러분은 주님의 평화를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요한이 전하는 예수탄생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 1장에는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처럼 예수 탄생에 대한 이야기, 아기 예수 이야기는 나오지 않습니다. 어쩌면 어렵게만 여겨지는 ‘철학적 수사’같은 문구로 복음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소개하는 예수님은 한 마디로 ‘참 빛’이십니다.
여러분, 어둠이 짙은 시대가 아니면 빛이 가진 위대한 은유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요즘 시대 사람들은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불과 몇 십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한국 사회’는 군사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군인 독재자가 군림하던 시대였습니다. 독재자를 비판하는 말 한 마디에 끌려가서 고문을 당하거나 감옥에 갇힐 수도 있었던 시대였습니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시대지요. 이런 시대에 사람들에게 가장 갈급한 것은 무엇일까요? 당연히 ‘자유’입니다. 자신의 의견을 말할 수 있는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 것이겠습니까? 이 때 자유는 어둠을 비추는 빛일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을 빛이라고 비유한 것은 당시 세상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삶의 터전이 흔들리고, 한 사람의 생명이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소외될 때, 이 시대에 주님은 기쁨과 빛으로 오고 계십니다. 이 세상에서 이미 누릴 것을 다 누리고 사는 사람들, 다른 이들의 고통에는 아랑곳없이 홀로 만족하는 사람들은 그분을 맞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가 자기 땅에 오셨으나, 그의 백성은 그를 맞아들이지 않았다.” 요한복음 1:11의 말씀입니다. 이것은 예나지금이나 변함없는 현실입니다. 가장 연약한 자의 모습으로 오시는 주님을 영접하는 순간 우리 속에 있는 거친 것, 폭력적인 것은 스러지게 마련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힘없고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아기 예수님이 세상의 구원자라는 구원의 신비를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기쁜 마음으로 성탄을 축하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성탄을 새기다

우리는 예수 탄생을 진정으로 기뻐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그저 좋은 어린이 동화 같은 이야기로 받아들일 수만은 없습니다. 그리고 파티와 거리의 화려함만으로 치장하면 안됩니다. 예수님이 오셨다는 세상은 아픔과 고통이 가득한 곳입니다. 2000년 전의 모습만은 아님을 여러분도 잘 아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지금도 오신다고 우리가 고백하는 것은 이 세상의 아픔 한 가운데 오심을 우리가 신앙의 눈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오시는 곳은 분쟁과 갈등과 전쟁이 가득한 곳입니다. 이념과 종교의 분쟁 한 가운데 예수님은 오십니다. 세상살이, 사람 사이의 갈등으로 인해 피폐해진 우리 마음에 오십니다. 주님의 빛을, 주님의 평화를 받아들이십시오.

또한 성탄절은 주님이 오신 날이기도 하지만 우리들이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는 출발점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그리고 교회를 구성하는 우리가 마땅히 서야 할 자리를 재확인하는 날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새로워지기 위해서는 구유를 향해 달려가는 목자들과 같이 포대기에 싸인 생명을 소중하게 보듬어 안는 사람들이 늘어나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이 이 땅 위에 전하신 복음 이야기이고 탄생이야기입니다.

오래전 들었던 이야기 “피콜라의 크리스마스”를 마지막으로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옛날 어느 작은 마을에 ‘피콜라’라는 소녀가 살았습니다. 피콜라의 가정은 너무나 가난했습니다. 크리스마스 이브였습니다. 피콜라는 엄마에게 물었습니다. “엄마, 산타 할아버지가 오늘밤 우리집에 오실까요?” 엄마는 슬프게 고개를 저었습니다. “아마 못 오실 것 같구나. 내년에는 꼭 오실거야.”하고 핑계를 대고 넘어갔습니다. 하지만 피콜라는 작은 나무구두를 벗어 굴뚝 밑에 놓았습니다. 그날 밤, 눈 폭풍 속에 헤매다 날개가 부러진 작은 새 한 마리가 피콜라의 집 굴뚝으로 떨어졌습니다. 작은 새는 피콜라의 나무구두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이제 크리스마스날 아침, 구두 속에 아무 것도 넣지 못한 엄마는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피콜라는 아주 일찍 일어나서 굴뚝 밑으로 갔습니다. 구두 속에는 날개 부러진 작은 새가 있었습니다. « 엄마, 이것 봐요! » 피콜라는 엄마에게 뛰어갔습니다. “거봐요, 산타할아버지가 날 잊지 않으셨어요. 이렇게 예쁜 새를 선물로 주셨어요. 다쳤으니까 잘 돌봐 줄 거에요.”

날개 부러진 새 한 마리를 하늘의 선물로 받아들이는 피콜라의 마음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성탄의 기쁨은 자꾸만 내 자신에게로만 매몰되던 마음과 생각이 세상을 향해 열리고, 특히나 상처와 아픔을 겪는 이들을 위해 내미는 손에 있다는 신앙의 사실을 깨닫는데 있는 줄로 믿습니다.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