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우리 가운데 사시는 말씀
본문 : 예레미야 31:7-14, 에베소서 1:3-14, 시편 147:12-20, 요한복음 1:10-18
【에베소서 1:3-1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온갖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세상 창조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시고 사랑해 주셔서,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예정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은혜를 찬미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아들 안에서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따라 그의 피로 구속 곧 죄 용서를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지혜와 총명을 넘치게 주셔서, 그리스도 안에서 미리 세우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하나님의 신비한 뜻을 우리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때가 차면,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통일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상속자로 삼으셨습니다. 이것은 모든 것을 자기의 원하시는 뜻대로 행하시는 분의 계획에 따라 미리 정해진 일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 맨 먼저 소망을 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는 사람이 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의 말씀 곧 여러분을 구원하는 복음을 듣고서 그리스도를 믿었으므로, 약속하신 성령의 날인을 받았습니다. 이 성령은, 하나님의 소유인 우리가 완전히 구원받을 때까지 우리의 상속의 담보이시며,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십니다.
【요한복음 1:10-18】
그는 세상에 계셨다. 세상이 그로 말미암아 생겨났는데도, 세상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가 자기 땅에 오셨으나, 그의 백성은 그를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를 맞아들인 사람들, 곧 그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이들은 혈통에서나, 육정에서나, 사람의 뜻에서 나지 아니하고, 하나님에게서 났다. 그 말씀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주신, 외아들의 영광이었다. 그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요한은 그에 대하여 증언하여 외쳤다. « 이분이 내가 말씀드린 바로 그분입니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 나보다 앞서신 분이라고 말씀드린 것은, 이분을 두고 말한 것입니다. 그분은 사실 나보다 먼저 계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
우리는 모두 그의 충만함에서 선물을 받되, 은혜에 은혜를 더하여 받았다.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받았고,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겨났다. 일찍이, 하나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버지의 품속에 계신 외아들이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알려주셨다.
-인사
새 해 첫 주일, 첫 예배를 맞아 주님을 찬양하기 위해 주 앞에 오신 여러분 모두에게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서로에게 축복의 인사를 건네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모두 반갑습니다. 잘 오셨습니다. 2022년 임인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흔한 말이기는 하지만 새해의 첫 주일을 하나님께 드리는 일은 소중한 일입니다. 시간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지만 첫 시간을 거룩히 구별해서 이렇게 예배로 드리는 일은 참으로 설레는 일, 감격스러운 일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의 어려움을 여러분 잘 보고 계신지요? 코로나 확진자가 20만 명을 넘어서 30만 명에 육박한다는 소식입니다. 뭔가 두려운 마음과 함께 혼란스럽지요? 이 세상의 한 가운데를 건너는 여러분에게 세상이 캄캄한 어둠처럼 느껴진다면 빛이신 주님을 의지하는 일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떤 분에게 이 세상이 혼란스러운 곳으로 느껴진다면 삶의 지표가 되시는 주님이 가리키시는 방향으로 가시기 바랍니다. 새해 새 아침 주님의 말씀으로 삶을 채우시기를 바랍니다.
-번역의 어려움
여러분, 소설가 ‘조정래 선생’ 아시는지요? 조정래 작가의 <태백산맥>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이 소설에는 우리나라 일제시대부터 6.25전쟁 시대까지의 역사를 다룬 그야말로 대하소설입니다. 일본 제국주의의 한반도 수탈, 좌익, 우익의 이념적 갈등, 남북간의 전쟁, 그리고 분단까지 정말 어마어마하게 큰 역사적 사건, 우리 민족의 역사의 파고를 넘나들며 다루는 소설을 아주 흥미진진하게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이 소설을 읽던 시절의 기억 가운데 이런게 있습니다. 소설을 다 읽고 문득 사소한 걱정거리가 하나 마음속에 생겼습니다. 물론 아무도 관심 없는 저 혼자만의 생각이지만 이 소설을 외국어로 번역할 수 있을까?
저의 염려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외국어로 번역해서 이 소설을 출판한다면 소설 속에 등장하는 전라남도 사투리의 맛깔스런 표현을 담아낼 수 있을까? 이들의 감정과 이들의 느낌을 맛깔스런 언어적 표현을 외국어로 바꿀 수 있을까? 이 사람들의 마음을 절대로 못할 거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고민, 이 생각이 온전히 제 생각일까요? 아니요. 우리가 읽는 성경을 번역할 때도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LOGOS
제가 새해 첫 예배에 이런 다소 엉뚱한 얘기를 꺼낸 것은 오늘 복음서 말씀 요한복음 1장의 핵심 단어에 대한 말씀을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한국말로 된 성경을 읽습니다. 그런데 2000년 전 사용되던 고대 헬라어(코이네)로 쓰여진 신약성경 말씀을 우리말로, 우리만이 가진 언어적인 정서로 정확하게 번역할 수 있을까요? 대표적인 단어가 요한복음 1장 1절에 나오는 ‘말씀’이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요 1장에 반복해서 나옵니다만 1:1은 이렇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다.”
요한복음 1:1은 어떻게 보면 이해가 쉽지 않은 구절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어린 시절 이 말씀이 이해가 되지 않아서 혼란스러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교회에서 말씀은 일반적으로 이 성경을 의미하지요? 태초에 성경이 있었다? 이렇게 이해하시나요? 뭔가 이상하지요?
요한복음 1장의 ‘말씀’은 ‘로고스’라는 단어의 번역입니다. 로고스는 ‘말’이라는 뜻도 있지만 ‘가치, 이성, 기초, 원리’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을 다시 번역해 보면, 태초에 가치가 있었다. 태초에 이성이 있었다. 태초에 기초(원리)이 있었다. 이렇게 번역하면 더 이해하기가 어떠신가요?
우리의 신앙은 세상의 모든 것, 인간을 포함하여 동식물 뿐 아니라 우주 만물이 하나님의 손길을 거쳐 완성되었다고 믿습니다. 이것을 “창조신앙”이라고 하지요. 그런데 마구잡이로 생각나는대로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어떤 기초 원리를 토대로 해서 -그리스 사람들은 그것을 이성(로고스)라고 불렀습니다- 만드셨다는 말이 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신 원리가 있습니다. 그것이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로고스)가 육신을 입었습니다. 우리와 똑같이 말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표현 들어보셨지요? 말씀이 사람이 되셨는데 그분이 누구십니까? 예수님입니다.
그렇기에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는 말은 세상의 기초와 토대, 세상이 움직이는 원리가 무엇이냐 하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선언입니다.
요한복음의 첫 독자들은 누구였을까요? ‘로고스’라는 단어의 뜻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헬라사람들입니다. 요한복음의 독자들인 헬라사람들이 봤을 때 세상은 어떤 곳일까? 세상은 조화로운 곳입니다. 그래서 세상을 코스모스(질서)라고 생각했습니다.
매일 해가 뜨고 집니다. 하루는 매일 똑같이 스물 네 시간입니다. 달도 줄어들었다가 다시 커집니다. 봄이 오면 모든 생명체가 살아나고 겨울이 오면 다 죽습니다. 코스모스의 질서입니다. 그러면 이 질서를 움직이는 토대, 원리가 있을텐데 그것을 로고스라고 이해했다는 말입니다.로고스는 말씀, 곧 예수 그리스도시다. 이렇게 헬라적인 사고를 가진 독자에게 맞춰서 쓰여진 복음서 요한복음 1장의 ‘말씀’입니다. 이해가 되시는지요?
-세상의 원리 예수 그리스도
마태복음과 누가복음 1장에는 예수님 탄생이야기가 있습니다. 재미있고 흥미진진하지요? 그런데 왜 탄생 이야기가 있을까요? 그것은 예수님을 소개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 1장은 마태, 누가복음과는 다르게 뭔가를 설명해주고, 뭔가를 알려주려고 합니다. 그 핵심이 무엇이냐? 바로 이 세상의 원리, 이 세상의 기초가 있습니다. 그것은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다
그런데 세상이 이분을 알아보았을까요? 아니요.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세상이 그로 말미암아 생겨났는데도, 세상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가 자기 땅에 오셨으나, 그의 백성은 그를 맞아들이지 않았다.”(1:10-11)
말씀 잘 들으셨지요? 세상을 움직이는 원리이자 기초가 예수 그리스도이신데 세상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보지 못합니다. 왜 그럴까요? 왜 알아보지 못할까요?
우리의 눈이 가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귀가 막혀있기 때문입니다. 무엇인가가 시선을 가로막고, 귀에 들리는 소리를 가로채기 때문이지요.
여러분, 뭔가에 정신 팔려 본 기억 있으시죠? 주변에서 옆에 있는 사람이 뭐라고 얘기했는지 하나도 기억이 안날 정도로 뭔가에 홀린 듯한 경험 말입니다. 이런 상태가 되면 하나도 못 듣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이런 일은 실제로 벌어질까요? 당연합니다. 그것도 너무나 자주 벌어집니다.
-외부의 일과 말씀
그렇다면 우리 실제 삶에서 어떤 모습으로 이런 일이 벌어질까요? 우리는 종종 앞이 안보이는 것만 같이 캄캄한 현실을 경험합니다. 이것은 나의 내부에서 말고 외부에서 내 길을 가로막는 일들입니다. 세상일입니다. 여러분의 사업장과 학교에서 벌어지는 일입니다. 그리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벌어지는 일입니다. 정말로 앞길을 비춰줄 조명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정작 조명이 무엇인지 모르는 경우가 더 많지요. 조명이 없다고 누군가 빛을 달라고 말을 하지만 정작 자신의 손에 들린 ‘말씀’이라는 조명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주님,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편 119:89) 시편의 시인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이 시를 지은 이가 누구인지 알지는 못하지만 우리와 똑같은 경험을 가진 사람임에는 분명합니다. 길을 잃은 사람입니다. 적어도 길을 잃은 경험으로 고통을 겪어본 사람임에는 분명합니다. 여러분, 주변을 둘러보십시오. 길을 잃었다는 사람들의 아우성이 온 천하에 가득합니다. 아마 우리도 이 속에 속해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도록 하십시오. 주님의 말씀은 내가 갈 길을 몰라서 헤매고, 혼란스러워하고, 좌절하다가 쓰러질 때 내 발의 빛이 되어주십니다.
-내부의 일과 기도
또 한편으로는 외부에서가 아니라 내 내부에서 눈이 멀게 하고, 귀가 들리지 않게 만드는 일들도 있습니다. 세상일로 인해 마음이 졸아듭니다. 사람들과 관계로 인해 마음이 졸아듭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을 한번 잘 들여다보십시오. 한번 졸아든 마음은 점점 더 졸아듭니다. 한번 생채기가 난 마음은 돌이키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은 한번 방향을 잡으면 방향을 바꾸기가 무척이나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이 내가 살아갈 곳, 내가 걸어가서 도달하고 싶은 희망도 있고, 바램과 설렘으로 가득 찬 곳이 아니라 피하고 싶고 도망치고 싶은 곳이 되어 버립니다. 억지스러움이 가득한 곳으로 변합니다. 세상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아름다운 곳으로 보이지 않고, 내게 해를 끼치려고 나를 향해 달려드는 약육강식의 장으로 여겨집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방향을 바로잡을 필요가 있는 것이지요. 방향을 바로잡는 것은 내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것인데, 교회에서는 그것을 뭐라고 부를까요? 네, 기도라고 부릅니다.
“내가 눈이 멀어있구나, 내가 들어야 할 것을 듣지 못하고, 보아야할 것을 보지 못한 채로 혼란과 어둠의 길 한 가운데 서 있구나” 하고 자각이 필요합니다. 이 자각은 구체적으로 말하면, “아! 내가 기도가 필요하구나!”라고 깨닫는 것입니다. 기도의 자리로 가십시오. 세상의 혼란스러움으로 고통으로 내 영혼을 모두 태워버리고 온통 잿더미가 되기 전에 기도의 자리로 가십시오. 주님을 받아들이시는 겁니다.
오늘 복음서 말씀은 이를 가리켜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고뇌와 고통으로, 억지스러움과 괴로움으로 사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것입니다. 주님을 받아들임으로 말입니다.
-맺음 말씀
성도 여러분, 새해를 시작하면서 무슨 마음으로 시작하셨습니까? 새로운 계획을 세우셨습니까? 거창하고 웅장한 소망이 있으십니까? 세상의 기초, 세상을 움직이는 원리에 여러분의 삶을 맡기십시오. 묵은 것을 털어낸다는 것은 여러분이 볼 것을 못 보게 만드는 것과 들어야 할 것을 못 듣게 하는 것을 털어낸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 의지하겠다고 결단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께 기도하는 일을 소중히 삼아야 합니다.
2022년 우리의 표어는 “기도와 말씀으로 사는 우리”입니다. 우리의 길과 진리가 되시는 예수님과 함께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주님께 우리를 아뢰며 살아가는 한 해 2022년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